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16)- 서총대 (그리고 추정해보는 조선전기 경회루 3층 높이)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1500년대 초반, 연산군이 지은 건축물중 가장 장대했던 것이 바로 '서총대'입니다.

이 곳은 무관의 활 쏘는 것을 점검하던 대(臺)인데 현재의 창덕궁 춘당대 동편에 건설되었던 대건축물로, '서총대'라는 명칭은 전대인 성종(成宗)때 후원에서 한 줄기에 아홉 가지나 되는 파〔葱〕가 났는데 이것을 서총(瑞葱)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이 서총이 나던 후원에 연산군 11년(1505)에 와서 누대를 건설했기에 '서총대'라고 한 것이죠. (건축학적으로는 아쉽지만) 중종반정이후 고작 3년만인 1507년 이 거대한 누대는 철거됩니다.

건축물이 사라진 이후 명종 15년(1560) 무렵에 이르러 유생의 제술 시험 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선조 16년(1583)에 무신의 활쏘기 시험과 문신의 제술 시험장으로 쓰이면서, 이후 서총대는 문무신의 시사(試士) 또는 열무(閱武) 행사를 하는 곳으로 그 성격이 굳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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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대의 규모- 너비

건축물을 그린 그림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철거되고 57년후인 1564년 유명한 윤두서가 이 곳에서 명종이 연회를 연 그림을 그린 것이 [서총대 친림연회도]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시 간접적으로 장대했던 서총대의 규모(너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서총대 친림연회도 (1564년)

연산군이 이 서총대를 건설할 때, 그 규모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당시 건축업자들에게 준 월급의 양입니다.

연산군 11년 을축(1505,홍치 18)
9월8일 (기축)
서총대의 석장ㆍ야장ㆍ거장들에게 월봉을 주게 하다

전교하기를,
서총대(瑞葱臺)의 석장(石匠)ㆍ야장(冶匠)ㆍ거장(車匠)들에게 월봉(月俸)을 주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제용감(濟用監)의 면포(緜布)ㆍ정포(正布) 각 2백 50필을 대내에 들이라.” 하였다.

(엄밀히 15세기는 모르겠지만) 대강 면포 1필이 보통 쌀 4-5말정도였고, 한 말이 보통 8킬로그램이니 (한가마니가 약 80킬로) 250필이면 거의 8,000킬로그램, 약 100 가마니가 됩니다 (이것도 4말로 계산했을 때고, 5말이면 10,000킬로그램으로 크게 늘어납니다). 그런데 더 어마한 것은 면포와 정포를 합한 것이 아니라, '각 250필', 즉 이 수치의 약 두 배가 되는 겁니다.

연산군 11년 을축(1505,홍치 18)
12월19일 (기사)
11-12-19[04] 서총대와 인양전에 쓸 채화석을 미리 준비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서총대(瑞葱臺)와 인양전(仁陽殿)에 쓸 채화석(彩花席) 2천 장을 미리 준비하라.” 하였다.

채화석은 '여러 색의 꽃으로 수를 놓아 꾸민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 말하는데, 무려 2천장을 준비하게 합니다.

화문석의 크기는 보통 5자×7자, 6자×9자, 7자×10자 크기로 만들어지는데 세종대 이후 1자는 31.22cm가량됩니다. 중간크기인 6x9자의 크기로 친다면 187cm x 281cm= 5.25 평방미터 정도가 나옵니다. 글에서 서총대와 인양전에 쓸 2천장의 화문석이라고 하는데, 인양전은 현재의 함인당자리에 있던 (임란때 역시 불탄) 작은 전각이었습니다. 따라서, 2천장중 훨씬 많은 숫자의 돗자리가 역시 서총대로 배당되었을 것입니다. 많이 줄여서 1,500 장 정도로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 이 1,500장의 화문석을 펼쳤을때 자리가 남지않게 꽉 붙여서 펼쳐도 7,875 평방미터라는 무지막지한 숫자가 나옵니다. 약 8천 평방미터라고 봤을때, 현대 건축물을 정확히 비교하자면 (높이가 아닌 면적만), 아래 중국의 건축물이 8천 평방미터짜리입니다. 중국 사파이어 박물관이라는 건축물입니다. 엄밀한 계산도 아니고, 그냥 '느낌'만 대강 전해드리고자 계산한 것입니다만, 면적에서 최소 이 정도 건축이 된다는 것은, 위의 1564년 그림과도 일치하는 느낌입니다.

중국 사파이어 박물관

이 규모의 건축물을 감독하던 '감독'들은 몇 명이었을까요? 한 명은 당연히 아닐테고, 최소 10명 아니면 스무명? 다음의 기록을 보면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가 나옵니다.

연산군 11년 을축(1505,홍치 18)
12월30일 (경진)
11-12-30[04] 서총대 쌓는 일을 감독하는 1백 명을 모두 가부장이라 일컫게 하다

전교하기를, 
서총대(瑞葱臺) 쌓는 일을 감독하는 1백 명을 모두 가부장(假部長)이라고 일컬으라.” 하였다. 생원(生員)ㆍ진사(進士)로 오래도록 뜻을 펴지 못하던 자들이 다투어 그 소임을 맡아 군인을 침탈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혹하였으니, 선비 풍습의 퇴폐된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즉, 서총대를 공사하는 감독직을 '가부장'(즉 임시부장)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감독인의 숫자만 무려 100명. 당시 공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숫자입니다. 이 기록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전라도에서 끌고 온 군인의 숫자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8월1일 (무신)
12-08-01전라도의 서총대 쌓을 군인이 오지 않으니 장성 현감 이중식을 문초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전라도의 서총대(瑞葱臺) 쌓을 군인 9백 60명 중 7백 80명이 오지 않았으니, 인솔하여 온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중식(李仲植)을 문초하라.”하였다.

전라도에서만 1,000명의 군인을 노역에 징발합니다. 이 숫자는 전체 역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전체는 만 명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뒤에 기록이 실제로 나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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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대의 높이

이렇게 건설한 서총대의 높이는 어느정도였을까요? 다음의 기록에 중요한 단서가 나옵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1월21일 (신축)
12-01-21 인양전ㆍ서총대의 공사를 마친 후 성을 쌓고 큰 나무를 심어 가리우게 하다

전교하기를,
“인양전(仁陽殿)ㆍ서총대(瑞葱臺)의 공사를 마친 후에는 동ㆍ서로 성을 쌓을 것이지만, 아직 그 성터에 큰 나무를 죽 심어서 성안을 가리게 하라.” 하였다.

그때에 명하여 인양전을 짓고, 또 후원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欄干)을 만들었는데, 1천 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라 하고, 그 앞에는 큰 못을 팠는데, 차송한 인원 1백 명이 감독하였으며,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 호야(呼邪)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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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앞에서 100명의 가부장을 만들어 감독을 시켰다고 했는데, 1명당 관리한 인부의 숫자가 대강 보입니다. 역군이 수만명. 따라서, 1명이 최소 100여명이상의 인부를 거느린 것으로 보이는군요. 또한 '용을 새긴 돌로 난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당시에 이 건축물의 화려함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이 기록은 포스팅 글 후반에 나올 당대의 경회루 (조선전기의 경회루)에 새겨져 있던 명물, 용무늬의 돌기둥들을 연상케 하지요. 

중요한 기록은 저 부분. '1천명이 앉고, 높이는 10길이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일단 높이는 10길이면, 아무리 대강 표현했다 하더라도, 아주 고층의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길 (1장)은 보통 아무리 작게 잡아도 3.03미터정도입니다. 따라서, 표현대로라면 30미터 이상의 건축물입니다. 여기서 '1천명이 앉을 만 하다'라는 부분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연산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서총대의 10장 높이로 쌓고, 그 앞에는 거꾸로 30미터를 파들어가는 운하급 연못을 만들게 합니다 (사진 아래 원문기록). 이를 위해 서총대와 똑같은 100명의 가부장(감독)을 더 선임합니다. 이 서총대앞을 파려 했던 거대한 호수는 현재 경희궁내에 있는 춘당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로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입니다. 아마도 서총대 호수는 이보다 더 거대한 규모였겠지요.
춘당지 (서총대지 앞 위치)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2월3일 (계축)
12-02-03[01] 서총대 앞 연못을 파는데 감독관을 두어 독촉하다

전교하기를,
서총대(瑞葱臺) 앞 못을 파는데 깊이가 10길이 되게 하여 큰 배[船]라도 운행할 수 있게 하라. 가부장(假部將) 1백 원을 더 두고, 또 채석장을 열 군데로 하여 수리 도감원(修理都監員) 중에 심지가 근검하고 제집 일 같이 봉공할 자 4인을 골라서 좌우로 나눠 공사를 감독하게 하라. 그리고 역소(役所)의 군인이 궐내를 출입할 때에 여러 가지 물건을 훔쳐가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의금부 가랑(假郞) 30원을 두어 나장(羅將)을 많이 거느리고 순행하면서 검찰하게 하라.”

하였는데, 매양 거둥이 있을 때면 내관이 곤장을 휘두르면서 몰아냈으므로, 일할 겨를이 없어 마침내 두어 자 깊이도 파지 못하였다.
그때에 감역관이 부역하는 민정(民丁)을 감독하는데, 혹 일을 빠졌다든지 혹 일을 하여도 과정에 달[准]하지 않았다든지 하면, 문득 징벌이 매우 가혹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그 재산을 다 말리고는 떨어진 바지에서 헌솜까지 빼내서 면포를 짜 변상하였지만, 무명이 너무 누추하여 쓸 수 없었으므로 민간으로 유산(流散)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뒷사람이 그 베 이름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으며, 장에서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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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마무시한 공사는 당연히 노역하는 백성들에게 지독한 일이 됩니다. 혹독한 공사때문에 당시 노역을 했던 백성들이 먹고 살 궁리로 입고 있던 바지에서 솜을 빼서 면포를 짜서 (당시 면포는 화폐기능) 이용했는데, 하도 누추해서 이렇게 시중에 돌아다는 저급면포를 '서총대'라고 이름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문헌에도 전해진 유명한 것으로 당대 문집인 [謏聞瑣錄(소문쇄록)]에도 등장합니다.

소문쇄록
을축년 봄에 서총대(瑞葱臺)를 쌓았다.

성종(成宗)때 후원(後苑)에 한 줄기에 아홉 가지나 되는 파[葱]가 났는데 이것을 서총(瑞葱)이라 하고 돌을 쌓아 재배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를 쌓아 음란한 놀이하는 장소를 만들고 그 명칭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대를 쌓을 적에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군사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고역(雇役)을 하였으며,베[布]를 공출함이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여서 옷 속에 든 솜까지 꺼내어 베를 짰으니, 그 빛깔이 거무죽죽하게 절었고 자수[尺數]도 짧았다. 이로 인하여 지금도 품질이 나쁜 무명베를 서총대포(瑞葱臺布)라 한다.

하지만, 이 서총대는 그가 같은 시기 완공한 또 하나의 대역사인 '탕춘대' (시리즈글링크) 와 함께 결국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대역사들은 여타 폭군들의 쫓겨남의 이유와 같이 연산군의 퇴위를 부추긴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되지요. 1506년, 공사가 완료되자마자 그는 쫓겨나지만, 완성된 서총대를 묘사한 객관적인 실록기록이 실립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9월2일 (기묘)
12-09-02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것은 서총대(瑞葱臺)라 하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도 높이와 걸맞았다. 그 아래 큰 못을 파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또 임진강 가 툭 내민 석벽 위에 별관을 지어 유행(遊幸)하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굽이진 원(院)과 빙 두른 방(房)이 강물을 내려다 보아 극히 사치스럽고 교묘하다.

굵은 체가 서총대, 뒤에 나오는 기록이 청기와로 시내를 가로지른 '탕춘대'입니다. 여기 보면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와 높이가 걸맞았다는 기록이 나오지요. 원문을 볼까요.

在昌德宮後苑曰瑞葱臺, 高數十丈, 廣袤稱是。 鑿大池其下, 經年工未訖就。

高數十丈 (서총대의) 높이가 수십장에 달하고
廣袤稱是 그 넓이와 길이가 이와 걸맞았다.

즉, 너비뿐 아니라 높이 역시 어마어마한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총대가 최소 열 길(10장), 즉 30미터 이상의 높이였음은 다음의 기록에서 또 다시 확인됩니다. 반정이후 중종대의 기록입니다.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9월2일 (무인)

연산의 죄상에 대한 사신의 논찬
창경궁(昌慶宮) 후원에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되는 누대를 쌓고, 이름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그 위에는 1천여 인을 앉힐 만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그 곁에 정자를 지었다. 또 창경궁 후원에서 경복궁ㆍ경회루까지 임시 건물 3천여 간을 이어 짓고, 망원정 아래의 조수(潮水)를 끌어들여 창의(彰義)의 수각(水閣) 아래까지 파서 통하게 하려고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수도(水道)의 깊이ㆍ너비ㆍ고저(高低)를 측량하게 하고, 거기에 동원될 역부(役夫)의 수를 헤아려보니 50여만 명이나 되었는데 다음해에 역사를 시작하려다가 미처 성취하지 못하였다. 수리 도감(修理都監)ㆍ축성(築城) 도감을 두고 삼공(三公)으로 도제조(都提調)를 삼았으며, 그 나머지 부제조(副提調) 및 낭관(郞官)ㆍ감역관(監役官)이 2백여 원(員)이나 되었는데, 이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맡긴 결과 백성을 몹시 가혹하게 침탈하였다. 중략.

여기서도 100여척이라는 숫자가 나오지요. 1장(1길)이 바로 10척입니다. 따라서 10장이지요. 앞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아무리 열길이니 100척이니 하는 숫자가 관용구로 쓰인다 하더라도, 이 기록들은 당시 서총대의 높이가 10장이상임을 어느정도 확인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본 기록에서는 이외에도 연산군대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사계획이 등장하는데, 창경궁에서 경복궁까지 건물 3000칸을 이어서 붙이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전체 동원될 역부는 무려 5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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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대 기록으로 살펴보는 전기 경회루 높이

아무튼, 이런 웅장한 서총대의 기록은 현재 짧은 역사의 기록으로만 전할 뿐, 아직 제대로 그 터조차 발굴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총대 기록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는) 하나 있습니다.

현재보다 한층이 높은 3층설이 존재하는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경회루에 대해서는 그간 몇번 다룬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기의 경회루와 서총대사이에 미묘한 접점이 보입니다.
1581년 임란이전의 기성입직사주도 중


바로 연산군 자신이 '서총대'를 '경회루'와 똑같이 지으라고 한 것이지요.

연산 58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5월 7일(신묘) 7번째기사
후원의 신대를 경회루와 같게 지으라 전교하다
○傳曰: "築後苑新臺, 如慶會樓。"
전교하기를, “후원(後苑)의 신대(新臺)를 경회루(慶會樓)와 같게 지으라.” 하였다. 

이 명령이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앞서 나온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연산군 실록 1506년 중
"그때에 명하여 인양전을 짓고, 또 후원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欄干)을 만들었는데, 1천 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라 하고, 그 앞에는 큰 못을 팠는데, 차송한 인원 1백 명이 감독하였으며,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 …"

여기 보면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는 분들은 주지하시다시피 조선 전기의 경회루는 '용을 아로새긴 기둥들'로 유명했습니다.

성종 50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12월 17일(무술)
정괄이 차자를 올려 경회루 돌기둥에 새긴 무늬가 지나치게 화려함을 지적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정괄(鄭佸)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지금 들으니, 경회루(慶會樓) 돌기둥에 그리어 새긴 구름과 용과 화초들의 형상이 사치하고 화려함이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새기지 말게 하여 검소한 덕을 밝게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장차 물어보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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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기록을 대조해보면 당시 서총대를 만들면서 존재하던 전기의 경회루를 규모와 미장부분에서 크게 참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때, 서총대의 최소 10길(10장)의 높이에 전기의 경회루가 미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연산군의 건축 성향상 현재의 경회루높이의 건축을 모델로 10길의 서총대를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현재의 경회루는 기단부제외 21.8미터, 기단부 포함 약 24미터가 됩니다. 따라서 서총대의 30미터기록은 현 경회루의 높이보다 약 5미터이상이 올라갑니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시 한번 '경회루 3층설'이 맞다는 것이지요. 한 층이 더 생길 경우 약 5미터이상 증가는 자연스럽게 들어맞습니다. 

서총대 기록으로 당시 존재했던 경회루의 규모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을 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구름 위에 솟은 것같다던' 당시 서총대를 읊은 당대 신흠(申欽, 1566-1628)의 시 한수를 나눕니다.

상촌선생집 
시(詩)○오언율시(五言律詩) 1백 23수
난리 뒤에 서총대의 옛터에 오르다[亂後登瑞蔥臺故址]

그 옛날 태평하던 시대에 / 伊昔昇平日
별궁(別宮)을 이곳에 세웠더니 / 離宮此處開
맑은 못은 거울은 본 듯하였고 / 瑤池臨鏡面
화려한 대사는 구름 위에 솟았는데 / 綺榭出雲隈

연회 열고 임금 신하 함께 모여서 / 湛露君臣會
풍악 아뢰며 축수의 잔 올렸었지 / 釣天慶壽盃
마음아파라 그 모습 다시 볼 수 없어 / 傷心不復見
우거진 잡초 속에 멍하니 섰네 / 怊悵立蒿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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