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목탑 재건의 큰 단서- 불일사 9층목탑 모형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요즘 황룡사 재건에 대한 토론이 활발합니다. 사실 사료가 부족한 만큼 여러가지 남아있는 단서를 총취합해서 종합적으로 치밀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써야합니다. 그런 면에서 필자 역시 한계내에서 최선을 다해 여러가지 정보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바로 아래 사진의 불령사 부조등 포스팅 말미에 관련글 링크).

불령사 전탑- 대규모 건축부조 (통일신라 추정)


오늘은 십여년 전 꽤 시끌했던 또 다른 단서(특히 황룡사 9층목탑과 관련된)에 대한 소개를 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2004년 불교신문인 법보신문과 2005년 연합뉴스에 황룡사 9층목탑과 관련된 북한의 한 박물관 도록의 사진이 소개됩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대중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개성에 위치한 고려박물관의 유물도록에 소개된 한 점의 '금동탑'모형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이름은 '불일사 9층 금동탑'. 우선 당시 기사를 발췌해서 종합, 소개해 봅니다.

2004-2005 뉴스기사중:
개성 불일사 5층석탑 출토 금동9층탑 공개

북한 개성 불일사 5층 석탑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생각되는 금동 9층탑이 공개됐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소장 황평우)는 1991년 북한에서 발간한 고려박물관 영문판 유물 도록에 실린 이 금동탑을 8일 공개했다. 

일종의 모형탑인 이 금동탑은 전형적인 목탑 양식을 하고 있고, 전체 높이 37cm에 기단부 길이 13.8cm이다. 사진에 의하면 금동탑은 옥신과 옥개석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기단 4면에 걸쳐 모두 8개 문을 만들어 놓고 있다. 각 층에는 창문을 냈고 처마에는 기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금동탑에 대해 국내 불교미술사 전공자들은 처음 대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단국대 박경식 교수는 “불일사 관련 정보라고 해 봐야 일제시대에 개성 출신인 우현 고유섭 선생이 언급해 놓은 사찰 전반에 관한 간략한 언급 정도이며, 이곳에서 금동탑이 출토됐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이 금동 9층탑은 평면 4각에 9층이며, 무엇보다 그 양식이 목탑이라는 점에서 몽골 침략 때 불타버린 경주 황룡사 9층 석탑의 원형을 추정케 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이번 불일사 금동 9층탑과 매우 흡사하게 정교한 목탑 양식을 구현한 고려시대 유물로는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통해 공개한 9층 청동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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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최초의 공개자인 황평우 선생의 글입니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문제의 불일사 9층목탑 금동모형입니다.

10세기추정 불일사 9층목탑 모형 (클릭하면 확대)


1991년 북한에서 발간한 고려박물관(영문판-사진자료실 참조) 유물도록에서 황룡사목탑 복원의 실마리라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료가 발견됐다 (위 사진 1). 이 사실이 남한에 알려진 건 최근이다. 북한에 남아있는 고려 초기 대표적 유물인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목탑 양식을 한 금동 9층탑이 발견된 것이다. 이 금동탑은 전체 높이가 37cm, 기단 부분의 길이는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돼 있는 단아한 모양으로, 기단 4면에 걸쳐 8개 문을 달았고, 각 층마다 창문을 냈으며, 처마마다 기와를 아름답게 조각한 거의 완벽한 형태의 목탑 양식 금동탑이다. 특히 계단과 문과 창문의 정교함은 실제 목탑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표현이 사실적이다.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황룡사목탑을 재현하기 위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 북면에 새겨진 9층목탑 형식의 마애탑과 호암박물관에 소장된 5층 금동대탑 정도가 거의 유일한 자료일 정도다. 

경주 남산의 한 골짜기 탑곡에는 높이가 9m, 둘레가 30m에 이르는 부처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명랑이라는 신라의 고승이 삼국 통일 후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불상과 황룡사 9층탑을 이 바위에 새겨 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탑골 마애탑은 황룡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새겨진 자료이며 황룡사 9층목탑의 원형이라는 이야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호암박물관의 금동대탑은 9층이 아닌 5층이라는 점과 고려중기 양식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자료로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이번에 발견된) 금동 9층탑은 신라에서 고려로 나라가 넘어간 직후의 고려초기 작품이라는 점과 백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호오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등 양식상에 있어서도 황룡사목탑의 동시대 작품들과 유사성이 많다.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가 고려 4대 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광종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부인 낙랑공주와 남매 간으로 한 어머니 원당을 세우는 과정에 사위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개연성이 많다. 또 경순왕이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까지 황룡사목탑이 웅장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동 9층탑의 모델이 됐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물론 하앙법으로 대표되는 단청기법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진 못했을것이다).

1991년판 고려박물관 도록에 따르면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금동9층탑 함께 비단 금니 사경과 발원문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종이도 (아래사진) 함께 수록했다. 이 탑지도 입수하여 국역을 해보면 경순왕과 불일사와 황룡사탑과의 관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불일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금동9층탑에 관한 내용은 이와 같이 일부 관심자들에 의해 그 사실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한국 학계는 자료수집의 한계에 부딪혔다. 2001년부터 일부 언론과 2004년 11월 한 인터넷 블로그에 사진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실제 북한에서 발간된 도록을 입수하기는 처음이다. 아니 도록은 입수했는지 모르지만 5층탑 내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과 황룡사탑과의 연관관계를 규명하는 하는 연구는 미진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은 불일사5층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을 황룡사9층 목탑의 축소형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국내에서 발견된 유물 중 9층탑에 관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황룡사9층탑의 복원과 우리나라 목탑건축사 연구에 진일보한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바이며, 남한 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은 자료를 공개하여 남북한 모두 뜻 깊은 문화재 공동 연구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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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사, 중흥사 9층목탑,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 

우선 개성의 불일사는 고려 초기 4대 광종대, 951년 건립된 사찰입니다. 원래는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이란 곳에 있었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 '판문군'은 2002년 이후 개성시와 '개풍군'으로 바뀐 곳입니다. 그리고 당시 '선적리'는 '장풍군'으로 편입됩니다. 아래 지도의 붉은 부분인데, 고려수도였던 개성과는 엎어지면 닿는 위치입니다.
이 곳에 있던 불일사에는 5층석탑이 있었는데 이것을 1960년에 개성시로 옮깁니다. 이를 위해 석탑을 해체했을 때, 탑신에서 금동9층탑, 금동5층탑, 금동3층탑, 작은 돌탑 등 20여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이 나오게 되는데, 그 중 실물 모델과 다름없는 세 구의 고려의 목탑 세 점이 출토된 것입니다. 
불일사 출토 금동 3-5-9층 목탑 모형 (고려박물관 영문도록중)
 
위의 황평우씨의 글에서 보이다시피, 이 자료가 만약 진짜라면 황룡사 재건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반해 (이번에 발견된) 금동 9층탑은 신라에서 고려로 나라가 넘어간 직후의 고려초기 작품이라는 점과 백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호오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등 양식상에 있어서도 황룡사목탑의 동시대 작품들과 유사성이 많다.

한번 양식을 비교해 볼까요.
호류사 목탑

확실히 두 탑 모두 차분한 곡선을 보여줍니다. 
불일사 목탑모형 처마부분 (클릭하면 확대)

확실히 날아갈듯한 조선양식의 처마인 법주사 팔상전(5층목탑)과는 다르죠.

또한 필자가 예전에 소개한 754-55년 작품인 국보 196호 통일신라시대의 [대방광불화엄경]에 나오는 사찰전각의 풍탁과 비교해도 흥미롭게 비슷합니다. 이중구조로 아래쪽 달린 장식이 더 동그랗긴 하지만 기본형태가 같습니다. 통일신라의 풍탁은 종모양이 주이던 삼국때보다 더 다양해집니다.
불일사 (951년) 9층목탑 모형 중 풍탁

대방광불화엄경 (745년) 사찰 풍탁 (동그라미)

황평우씨의 글중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이 구절입니다.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가 고려 4대 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광종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부인 낙랑공주와 남매 간으로 한 어머니 원당(불일사)을 세우는 과정에 사위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개연성이 많다. 또 경순왕이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까지 황룡사목탑이 웅장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동 9층탑의 모델이 됐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광종은 역대 고려왕중에서도 열렬한 불교신자였습니다. 10세기중엽 대봉은사등  여러 왕실사찰들을 건립했는데 개경 동쪽에는 불일사(佛日寺)를 창건해서 어머니인 순명신성왕후를 기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누이동생인 낙랑공주(온달부인과는 동명이인)가 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882 또는 897~ 978년)의 부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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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이 직접 목격했을 900년대의 세 거대목탑 후보들

그런데, 예전 연복사 5층목탑글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황룡사 9층목탑이 원래 건설된 시기는 7세기인 645년입니다만, 이 건물은 단순히 신라대의 건축이 아니라, 반 이상은 '고려초건축'을 상징하는 건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소개한 고려 4대왕 광종(光宗, 925~ 975년)이 정확히 21세가 되던 945년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1012년이 되어서야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인 1021년에 완성했고, 그 후 1035년과 1095년에 보수공사 3년(1012)에 고려전기 별궁중 하나였던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고려건축'으로 보아도 될 만큼 중건과 재건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광종의 즉위 (949년 4월 13일 ~ 975년 7월 4일), 4년전까지만 해도 (즉 그가 청년일때) 고려 영토에서 가장 웅장한 탑은 역시 '황룡사 9층목탑'이었습니다. 비슷한 규모로 추정하는 실상사 9층목탑은 1127년정도로 건립년도를 생각하고, 연복사 목탑의 경우 정확한 추정연대는 없습니다만, 연복사의 최초기록이 1037년이고 5층이므로 일단 제외할 수 있습니다. 역시 웅장했던 만복사 5층전각 역시 11세기의 건축으로 추정합니다. 광종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죠.

이렇게 되면 당대 고층 9층목탑은 세 개정도만 남습니다. 언제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지 모르는 미륵사 9층목탑과 바로 황룡사 9층목탑, 그리고 다크호스인 개경 중흥사 9층목탑입니다. 그러나 황룡사의 경우, 이미 미륵사를 지은 백제장인의 영향아래 건립되므로 두 탑은 그 모델이 비슷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불일사 9층 목탑 금동모형 (하층 확대)- 클릭확대

기단부 역시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의 재현 추정모형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뿐 아니라, 1층의 칸수가 7칸으로 일치하지요.

중흥사 목탑의 경우 대한민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복사 5층탑과 더불어 굉장히 장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역시 9층목탑입니다. 왜냐하면 이 탑의 건립자체가 바로 태조 왕건이 신라가 수도인 경주에 황룡사9층탑을 건립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 서경(평양)에 같은 9층으로 지은 목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규모나 디자인에서 황룡사 탑을 근거로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요. 

참고로 중흥사 9층목탑은 1010년(현종 1) 11월에 거란군에 의하여 전소되었으며, 1051년(문종 5)에 중수하였으나 3월에 공사를 중단합니다. 1110년(예종 5) 5월과 1130년(인종 8) 9월에는 9층탑에 벼락이 떨어진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규모도 장대했으리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단독으로 다뤄 볼 만한 탑입니다). 현재는 중흥사자체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 기록입니다.

고려사절요 
광종 대성대왕(光宗大成大王)
신해 2년(951), 후주 태조 광순(廣順) 원년ㆍ요 목종(穆宗) 응력 원년

○ 대봉은사(大奉恩寺)를 도성 남쪽에 세워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또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세워 선비(先妣) 유씨(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서경 중흥사(重興寺) 구층목탑에 불이 났다 (○冬十月,西京重興寺九層塔,灾。)

각설하고, 종합해볼 때 광종대에 '실제로 현존하던' 9층목탑은 모두 황룡사 9층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 여기서, 광종의 마음을 한번 추측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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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마음 속

불일사가 건립된 연대는 951년. 말씀드렸다시피 당시에 현존하던 가장 웅장한 불탑은 아마도 미륵사 9층목탑, 중흥사 9층목탑, 그리고 불일사 창건 6년전인 945년까지 굳건히 버티던 황룡사 9층목탑이었을 겁니다. 

광종이 '불일사'를 지은 이유는 설명드렸다시피 어머니인 모후 순명신성왕후를 기리기 위한 불심과 효심에서였습니다. 보통 탑신에 장신구같은 것을 봉안할 때는 역시 그 인물과 관계되거나 불심을 대표하는 것을 넣기 마련입니다. 그럼 당시 존재하던 목탑중 어떤 모형을 제작해서 넣을까요? 당연히 현존하고 있던 가장 웅장하고 불심을 대표할만한 탑을 모형으로 제작하지 않을까요.

이 경우, 945년까지 존재하던 경주의 황룡사 9층목탑, 그리고 위의 기록처럼 불일사가 세워지던 10월에 마침 불이 나버린 역시 황룡사 9층탑을 따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서경의 중흥사 9층목탑이 가장 강력한 후보들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륵사 목탑은 정확한 연대미상이므로 일단 제외하겠습니다).

황평우 선생은 2005년 자신의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도록은 입수했는지 모르지만 5층탑 내에서 발견된 금동9층탑과 황룡사탑과의 연관관계를 규명하는 하는 연구는 미진했다 할 수 있다...국내에서 발견된 유물 중 9층탑에 관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통해 황룡사9층탑의 복원과 우리나라 목탑건축사 연구에 진일보한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바이며, 남한 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은 자료를 공개하여 남북한 모두 뜻 깊은 문화재 공동 연구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이 '불일사 9층목탑 모형'은 황룡사 9층목탑 재건 프로젝트의 핵심 사료로 들어갈 당위성이 충분하고도 남는 귀한 사료입니다. 무려 11년이 지난 현재,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역사건축학계에서 단 한 점의 논문도 책도 뉴스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연 현재 양측으로 나뉘어 찬성, 반대의 극단적 주장만 펴고 있는 전문가나 대중들이 이러한 사료들을 제대로 연구하면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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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우리가 보통 황룡사 목탑을 직접 오른 기록으로 대표적으로 드는 12세기 인물인 김극기 선생과 12-13세기 고려중기 승려인 혜심(慧諶, 1178~ 1234년)의 아래의 두 시는 11세기 연복사 목탑과 함께 재건립된 황룡사 목탑을 오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듯 '통일신라시대의 목탑'을 오른 것이 아닙니다. 즉, 그대로 복원된 목조건축이 아닌 이미 60년이 지나 재건된 (고려대 건축 양식이 많이 첨가되거나 아예 달라졌을) 건축물이었던 것이지요. 정확한 원형복원이 아니면 절대 안된다라는 일부사람들에게 묻기 위해 '재건'되는 문화재의 가치에 대해서도 언젠가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황룡사 목탑을 올라

層梯繞欲飛空
萬水千山一望通
俯視東都何限戶
蜂窠蟻穴轉溟

층계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수많은 하천과 산들이 한눈에 보이네.
굽어보니 옛 도읍지의 수많은 집들이
벌집과 개미집 같이 아득하게 보이네.

一層看了一層看
步步登高望漸寬
地面坦然平似削
殘民破戶平堪觀

한 층 다 둘러보고, 또 한 층을 보면서
걸음걸음 올라서 점점 더 멀리 바라보니
지면은 깎은 듯이 평평하게만 보이는데
가난한 백성들의 부서진 집을 차마 볼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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