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건축 (21)- 한옥이란 무엇인가? 시대별 고찰이 필요한 시점 한국의 사라진 건축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이란 조선후기식 건축이 다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체험하기 힘든 그 전시대의 다른 형태의 건축이 많았을까요?

오랜만에 고려-조선시대의 2층건축에 대해 장문의 포스팅입니다. 그간 이 시대의  침루라든가, 누방(루방)이라든가 또는 술집의 '주루'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2층건축구조중 일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2층방기록에 대한 추가 발견, 그런 방과 방을 연결해주던 2층 복도격인 독특한 이 시기의 건축형식인 '낭루'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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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2층루 누방 기록

우선 살펴본 많은 기록들외에 필자가 찾아낸 임진왜란 직전까지 나오는 세 가지 '방이 있는 루'에 대한 기록입니다. 첫 번째로 세종대인 1431년의 실록기록을 보시지요.

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6월2일 (갑오)
13-06-02[07]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전례를 들어 공평하고 신중한 옥사 판결을 명하다

又有臨江 王三郞瞰江樓居, 其妻凭欄食菓, 偶核墮舟中少年之巾, 少年擧首, 意婦人挑之, 及暮, 行入其家, 闃無人聲, 隨復登舟, 覺濕其履, 置竈焙乾。

또 임강(臨江)에 왕삼랑(王三郞)이란 사람은 강이 내려다 보이는 다락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내가 난간에 기대어 서서 과실을 먹다가 씨가 공교롭게도 배에 있던 소년의 수건에 떨어졌다. 소년이 쳐다보고 부인이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날이 저물자 그 집에 들어갔더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으므로 곧 다시 배에 올랐는데, 그 신이 젖은 것을 깨닫고 부뚜막에다 놓고 불에 쬐어 말렸다. 그날 밤에 왕삼랑이 돌아와 보니 아내는 죽어 있고, 피가 흘러 땅에 흥건하였다. 아침에 이웃 사람들이 모여서 핏자국이 배 안에까지 이른 것을 보고, 드디어 소년을 잡아 고을에 넘겼다. 소년은 다시 변명하지도 못하고 거짓 자복하게 되었으나, 다만 부인의 신과 죽인 칼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중략.

이 기록은 당시에 있었던 아녀자 살인사건을 다룬 것으로 그 일부입니다. 왕삼랑이란 사람이 임강 (압록강 부근 아니면 경기도 장단지역)에 살았는데 왕씨가 살았던 곳이 '루(다락)'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난간에 서서 과실을 먹다가 강쪽으로 떨어뜨려서 배를 타고 지나던 소년이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 착각 밤에 부인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아내는 시체로 다음날 발견). 사건은 각설하고,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

王三郞瞰江樓居
왕상람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루'에 살았다.

즉, 아내와 그가 살던 곳이 (그냥 잠시 경치를 감상하러 들르는 게 아니라) '루(樓)'인 것입니다. 이런 주거용 누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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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새로운 기록은 1545년 인종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 6월 27일 무오 8번째사 
1545년 명 가정(嘉靖)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영의정 윤인경 등이 들어가 상의 환후를 살피다

仁鏡等隨任而入, 上在樓下房, 房不爽快, 炎氣薰然。

윤인경 등이 윤임을 따라서 들어가니, 상이 다락 아래 방에 있는데 방은 상쾌하지 않고 더운 기운이 훈훈하였다. 상이 백립(百笠)·백포(白袍) 차림으로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 기록을 보면 '상', 즉 '인종'이 樓下房 (누하방, 즉 다락아래방)에 있는데 방이 덥고,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즉, 2층건물의 1층부분에 방이 있는 구조가 됩니다. 특히 이 기록은 '인종'임금의 기록이므로 당시 경복궁등 궁궐내의 침루이 기록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이런 구조의 건축에 대한 기록은 임란 후인 17세기중반에도 등장합니다. 다음은 유명한 농암 김창협(金昌協, 1651-1708년)의 문집기록입니다.

농암집

이에 여러모로 고심하고 일을 진행한 결과 마침내 눈앞에 우뚝한 정자가 이루어졌다. 푸른 산줄기를 늘어세워 병풍을 만들었으니 따로 울타리를 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본디 있던 흰 바위를 그대로 두어 뜰로 삼았으니 굳이 섬돌을 놓을 것이 없었다. 방은 겨우 서책을 보관하고 손님을 영접할 만한 정도의 크기이나 다락집은 달을 맞이하고 바람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하다. 

처마 끝에 잇닿은 꿈틀꿈틀 용 모습의 노송 줄기는 저절로 해를 가려 주는 일산을 이루었고, 섬돌을 훑고 구불구불 감돌아 흐르는 맑은 여울물은 술잔을 띄워 마시는 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랜 세월 초동목수가 짓밟고 다니던 장소가 오늘에는 대자리를 깔아 놓고서 잠을 자고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언덕을 따라가며 복사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어 혹시 신선이 사는 곳인가 의아스럽고, 못을 파 연과 순채를 심어 강호의 흥취까지 자아낸다.

僅容於藏書延客。以備乎納月招風。
즉, 정자를 만들었는데 작은 방은 서책을 보관하고 손님을 영접할 만하고, 그 위의 다락은 관람용으로 좋다라는 뜻으로 이런 구조는 1층은 방이 있고 2층이 정자형으로 트인 건축일 가능성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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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끼리 이어지던 조선초기까지의 한옥: 공중복도, 낭루(廊樓)

이제 오늘의 주제입니다. 홍대용이 지은 [담헌서]라는 책의 1765년 북경기행기인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편에 중국의 조선기략서인 [동국기략]의 대강의 내용을 그가 받아적은 부분이 나옵니다. 조선기략서, 즉 중국측에서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파악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이 동국기략에 대한 정보는 필자가 접근할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로는 한계가 있어 대강 내용으로 유추해보았는데, 차천로를 비롯한 조선중기의 문신들의 이름으로 보아 16세기중반정도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국기략에 대한 서지정보는 추후 보강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동국기략에 현재의 우리가 아는 '한옥' (즉, 안채, 별채, 사랑채등이 독립된 공간으로 나오는)과 전혀 다른 느낌의 한옥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동국기략 한옥모습

15일 편지를 다음과 같이 보냈다.
“제가 일전 서산(西山)의 걸음 때문에 아문을 만나보고 수일 동안 외출할 수 없어 우울했습니다. 어제 보내주신 책은 삼가 받았습니다. 두 형의 후의를 갚을 것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저들의 행기(行期)가 21일이나 24일에 있을 듯한데 그 약정(略定)을 들으니 일변 기쁘고, 일변 슬픕니다. 장차 어떻게 날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 공연히 기다릴까 염려되어 삼가 이에 알려 드립니다. 이만 그칩니다. 동국(東國)의 대략을 이에 기록하여 올리오니, 여행 중이라 참고할 서적이 없어 말이 많이 초초하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국기략(東國記略)은 이러하다.

“조선은 남북이 4천여 리이고 동서는 천여 리이다. 중략. 전라의 동을 경상도라 하니 동남은 바다에 근접하고 그 북은 충청도이고 그 동북은 강원도이다. 이는 한 나라의 구획의 대개이다. 중략. .....집의 제도는 경성 밖은 대개 초가(草家)가 열에 팔구이고, 침실은 모두 온돌이고 사방이 벽이니 모두 창호(牕戶)를 달아 중국의 ‘캉’ 제도와 같지 않고, 실외에는 목판으로 청사를 만든다. 무릇 집은 모두 구비가 꺾이어 구불구불하므로 비록 백여 칸이라도 거의 서로 연결된다."

이 기록을 보면 "집이 침실은 모두 온돌이지만, 실외는 목판으로 만들고 집이 모두 구석마다 꺾이어 구불구불 이어져서 설사 백여칸의 대저택이라도 서로 다 연결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고려후기의 문집인 이제현(李齊賢, 1287~ 1367년)의 [동문선]을 보면 이런 구체적인 건축기록이 나옵니다.

동문선 제69
기(記)
중수 개국률사 기(重修開國律寺記)
이제현(李齊賢)

여러 사람들이 듣고서 그 뜻을 깨달아 팔을 걷고 따라 나서서 종파 문중의 여러 절에 통첩을 보내어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 들여서 땅의 높고 낮은 것을 평평히 하고, 풀뿌리ㆍ나뭇가지를 잘라 내어 재목을 만들고, 칸 수를 정하여 기둥을 세워 둘러 짓고 흙을 바르고 단청하였다. 

높은 전각을 윗쪽에 짓고 긴 행랑을 양 옆으로 지었으며, 두 행랑 끝에 다락을 짓고 마루를 놓으며 두 다락 사이에 행랑을 짓고 문을 내었다. 그 서쪽에는 학도들의 집과 스승의 방이다. 

부엌과 곳간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데, 간략하고도 주밀하며 검소하고도 견고하니, 기왕의 일을 참작하여 오래 가게 하려고 규모와 제도를 증감하여 알맞게 한 것이었다. 지리(至理) 계해년(충숙왕 10년)에 시작하여 태정(泰定) 을축년까지 3년간에 완성하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어 낙성하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衆聞而喩其意。扼腕從臾。牒宗門諸刹。科徵役徒。夷窊崇。剔菑翳。繩墨曲直。筵几寬狹。棟而桶之。堊而雘之。峙峻殿于上方。引脩廡于兩傍。樓兩廡之端而軒焉。廊兩樓之間而門焉。其西則學徒之舍。監師之堂。曰廚曰庫。各有攸位。約而周。儉而固。酌旣往。計可久。增損而適宜者也。自至理癸亥。迄泰定乙丑。三秋而畢功。作慶會以落厥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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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개국률사라는 사찰을 짓는데, 높은 전각을 짓고 긴 행랑 (즉 복도를 말합니다)을 전각옆으로 짓고, 복도의 끝에 루(樓) 즉 2층구조물을 만들고, 그 두 루사이를 다시 행랑(복도)로 연결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문화컨텐츠사이트에서 제공한 이 고려시대 '통랑' (행랑의 일종)이 가장 비근한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고려시대 침루와 행랑 (문화컨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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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이어집니다. 다음은 조선전기 안동지역 양반 주택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권두인(權斗寅, 1643∼1719년)의 [하당선생문집]기록입니다.

하당선생문집(荷塘先生文集) 권4, 
기(記) 종가신창기(宗家新創記)

우리 구종가(舊宗家)는 선조(先祖) 충재선성(沖齋先生)의 창건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160여년이 흘렀다.…처음에는 규모가 소박하고 소략했으며 칸수와 도리[간가(間架)]도 많지 않았다. 우리 고조부와 증조부 때에 증축하여 마침내 전체 60여 칸의 큰 집을 이루었다.

그 제도는 ‘일(日)’자 모양으로 양변(兩邊)을 연(聯)하여 누(樓)로 하고 행랑(行廊)을 직교시켰으며 정침(正寢)이 가운데 있었다. 좌우가 높고 중정(中庭)이 협소한 까닭에 어둡고 으슥하여 밝고 시원하지 않았다. 세월이 오랠수록 날로 퇴락하여 비워놓고 들어가 살지 않은 지 여러 해 되었다.…마침내 터를 새로 잡아 옛 터의 동쪽에 터를 닦았다.…반년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마쳤다. 무릇 정당(正堂)이 6칸인데 좌우의 방루(旁樓) 각 5칸을 끼고 있다. 가운데를 뜰로 하고 아래를 행랑으로 했으니 무릇 9칸이다. 또 조금 아래 떨어져서 바깥 행랑 13칸을 지었다. 모두 38간이다.(중략). 옛집은 오직 대청 사랑(斜廊)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철거함을 면치 못하였다.

惟我舊宗家 創自先祖沖齋先生 ?今百六十餘年(중략)厥初規模朴略 間架亦不多 越我高祖曾祖世增之 遂爲一大家合六十餘間 其制爲日字樣 聯兩邊爲樓 直跨行廊 正寢居中 左右高 中庭隘 以故幽?不明爽 歷歲寢遠 日就頹? 曠不入處者累年(중략)遂卜宅 就舊基東邊開拓之地(중략)不半年而功告訖 凡爲正堂六間 挾以左右旁樓各五間 中爲庭 下爲行廊 凡九間 又稍下離而爲外行廊 凡十三間 合三十八間(중략)舊屋則只存大廳斜廊 其餘未免撤去 實出於不得已也

이 집은 저자인 권두인선생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증조부때 증축을 한, 즉 증조부대보다 더 오래된 약 160여년 이상이 된 건축물입니다. 그가 태어난 해가 1643년이니 최소 1500년대초는 되는 고건물이지요. 따라서, 1592년의 임란전의 한옥저택입니다.

여기 보면 집은 일(日)자 모양으로 양쪽에 루를 만들고, 역시 루사이를 행랑으로 직접 연결시키고 정침(즉 평소 잠자는 침실, 안방)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의 한옥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요. 그리고 좌우가 높고 중정 (즉 정원)이 사방건물의 가운데 있어 좁고 어둡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집을 만드는 데 역시 '방루旁樓' 즉 왕래하는 루가 각 5칸이나 되고 행랑으로 연결합니다.

이런 모습이 조금이나마 소규모건축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말 살림집인 '맹씨행단'입니다. 절약의 아이콘 최영(崔瑩, 1316~ 1388년) 장군이 살았다는 집 답게 아주 소박한 건축이지만 14세기 고려후기-조선초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지요.

맹씨행단 고택

이 고택을 보면 날 일자는 아니지만, 건축물이 정면4칸, 측면3칸의 ‘공(工)’자형 평면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소규모라 가운데 정원은 없고 모두 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집의 양측이 솟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소개한 글과 달리 역시 작은 규모라 솟은 쪽에 중층부분 즉, '루'는 없습니다. 그리고 통랑등 길게 연결하는 복도도 없지요. 

이런 식입니다.
따라서, 하남선생 문집에 나오는 조선초기의 60여칸의 집이나, 고려후기의 개국률사의 행랑건축은 이보다 훨씬 웅장하고 복잡한 구조를 보여주었을 것으로 유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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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까지 존재하던 낭루(廊樓)

최근까지도 이러한 고려후기-조선초기의 '루'와 이를 잇는 '행랑' (통랑)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올해 (2016) 이종성의 [노은리 고택의 건축 시기와 가구(架構)의 원형 고찰]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잠깐 소개해 볼까요.

동논고 중 부분발췌:

<Fig.4>에서 보듯 보수 전의 사진에는 지금은 다락이 없는 좌측 익랑과 행랑의 상부에 다락 문틀의 모습이 분명하다. 따라서 익랑과 행랑 상부 전체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기록에서는 익랑이나 행랑에 중층공간을 많이 배치한 것이 조선전기 상류주택의 한 특징이었음이 확인된다.

6) 세종 때 부녀자가 ‘낭루(廊樓)’에서 얼굴을 내밀고 구경하는 것을 비난한 사례도 이에 해당한다.7) 이 기사에서 비판의 대상은 ‘대소부녀’ 즉, 대소 양반가 의 부녀이므로 ‘낭루’ 역시 양반 주택에 배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위 관직을 역임한 유희춘(1513 ∼1577)의 서울 집도 이러한 구조였다. 비가 오자 부인 은 ‘낭루(廊樓)’에 올라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였다. 8)(35-6).
1998년 보수 직전 (현재는 모두 사라진 2층부분)

또한 서울에 거주했던 상층 양반 오희문(1539∼1613) 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해 진 죽전동 친가의 모습을 기록 하면서 주택의 배치를 ‘북·동·서 누칸, 몸채, 부사랑[北 東西樓間身梗付斜廊]’이라고 표현하였다.9) 표현이 간략 하여 구체적인 공간배치를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낭루가 몸채[身梗]를 둘러싸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전기 한성의 상류 건축에서 층루가 보편적인 요소였으며, 특히 익랑이나 행랑 등의 낭무(廊 廡)를 중층으로 지은 집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 필자도 몇번 포스팅으로 인용한 바가 있습니다. 임란당시 집에서 도망가면서 '서루, 동루'에 있던 문짝을 뜯어가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었죠.

그럼 잠깐 '세종실록'의 기록에 나온다는 낭루에서 엿보는 장면과 고관 부인의 '낭루에서의 배웅'장면 원문을 보시죠.

세종실록, 권52, 
세종13년 6월 25일 (1431년)
신개 등이 중외의 명산과 신소에 부녀들의 내왕을 엄금할 것을 상소하다

중략. 산붕(山棚)이나 나례(儺禮) 등 성대한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대소(大小) 부녀자들이 길가에 장막을 치거나 행랑의 다락〔樓〕 위에 올라가 빤히 얼굴을 내밀고 마음대로 구경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으니, 이는 부도(婦道)에 크게 어그러지는 일입니다. 엄중히 금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 또한 위의 예(例)에 따라 논죄하소서.
“又有山棚儺禮凡諸盛觀之事 大小婦女或張幕路傍 或於行廊樓上 靦面縱觀

或於行廊樓上 靦面縱觀
어찌 행랑의 루위에서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어 방종스레 보는가.

즉 '행랑의 루'위에서 나례등의 국가행사를 부녀자들이 빤히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1431년의 기록.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보는 한옥은 더 다양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은 자유니) 생각을 하게 하는 또 한점의 기록은 임란 직전인 (정확히 19년전) 1573년의 이 기록입니다.

眉巖先生集卷之七
眉巖日記 권 3, 癸酉(1573년) 3월 27일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己巳
○日昳歸舍。見兵曹望定。以希春爲禫祭時御前獅子衛將。來九日宣仁門罷漏時。開門。諸將受牌。軍士聚會。自太平館至議政府禮曹習儀。當具弓箭筒介大刀云。“日昳歸舍 冒微雨著笠帽 是 日之出也 夫人詣廊樓上觀之”; 朝鮮史編修會 編, 중략.

冒微雨著笠帽 비가 조금 와 삿갓 (립)을 착용했다.
夫人詣廊樓上觀之 부인이 낭루에 올라 보며 배웅했다.

이 기록은 조선전기 문신인 유희춘(1513 ∼1577년)의 일기인 [미암선생문집]의 '일기'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정확히 1573년의 기록인데, 이 당시는 1567년 이후 그가 부제학, 대사간등을 역임하던 최고위 관리였던 시절이지요. 따라서 이 집은 한양의 고위관리 저택이었다 보면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를 배웅하는 부인이 그날따라 비가 오자 바로 ‘낭루(廊樓)’라는 구조물에 올라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겁니다.

이처럼 임란전까지만 해도 '낭루'와 '통랑'으로 구불구불 연결된 형태의 건축이 많았던 겁니다. 그 증거를 하나 더 보여드리면 이 그림들입니다.

첫 그림은 1550년대 그려진 '연지계회도'입니다. 정면의 작은 '루'를 제외하면 명확한 중층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행랑으로 집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가 얼마나 잊혀졌는지, 잡지에 실린 비슷한 구조의 조선전기식 가옥을 설명하면서 이런 부연설명이 붙어있을 정도죠 (아래 글귀를 보시길). '파격적'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우리는 이런 구조를 모르고 지내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 그림을 보면 건물이 가운데 정원을 중심으로 모두 행랑과 부분적인 행루들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도 아녀자들이 서있는 건물들은 2층구조를 보여주고 있죠. 자기키보다 높은 2층에 창문이 보입니다.

다음 그림의 앞쪽 건물의 2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층행랑으로 보입니다.
다시 논문으로 돌아가 보지요. 다음은 노은리 고택의 평면도입니다.

입면은 중층으로 구조된 칸이 매우 많았다. 판단을 유보한 두 칸의 공간을 제외하면, 고택의 본래 칸수는 총 25칸이다. 이 중 하단부에 자리한 익랑과 행랑 13칸의 상부에 모두 다락을 설치하였다. 이렇듯 많은 평면에 다락을 배치한 사례는 조선후기 주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전기 양반 주택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특히, 안동의 임청각은 노은리 고택과 유사하게 익랑과 행랑을 중층으로 구조하여 전체 평면에서 중층 공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이처럼 중층 공간을 많이 배치한 것은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조선전기 주택의 건축 양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궁궐을 포함한 상류 주택에 온돌이 급속히 확산된 것이 확인된다. 그 전에는 방바닥에 풀로 짠 자리를 두텁게 깔고 벽에 병풍 과 휘장을 둘렀으며, 화로로 난방을 하였다.18) 따라서 조선전기 양반 주택에서는 온돌을 설치한 공간이 없거나 조선후기에 비해 매우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에도 노은리 고택에서 구들을 시설할 수 있는 공간은 대청 좌우의 6칸에 불과하다. 이 중 C칸과 F칸은 화기가 충분히 미치지 못하므로, 겨울철 난방이 가능한 공간은 4칸에 불과하다. 이렇듯 전체 칸 중 온돌을 설치 할 수 있는 공간이 적은 것 역시 노은리 고택이 조선전기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중략. 따라서 ‘엄찬 고택’으로 문화재 지정된 노은리 고택은 곧 ‘성삼문의 구택’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1668년에 감사 민유중이 수리 했고, 1672년부터 1676년까지 성삼문의 위패를 봉안했으 며, 1706년부터 1871년까지 성승을 제향하는 별묘로 사용되었고, 이후 조대비의 조카로 알려진 ‘조 진사’가 살 았던집이 현재 노은리에 있는 고택이라고 볼수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전기 건축인 노은리 고택의 건축 하한은 성삼문이 사형당한 1456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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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선생은 연구결과 현재와 다른 노은리 고택의 15세기 모습을 추정도로 복원합니다. 다음의 설계도입니다.

보시다시피 루와 건물사이가 모두 공중에 떠있는 통랑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 노은리 고택의 모습을 살펴보지요. 현재도 중층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보입니다.

현재 안채대청

밑 서익랑 다락위 (2층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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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의 현전하는 조선전기 고택들

노은리 고택이나 맹씨행단외에 조선전기 사택의 흔적을 보여주는 몇 채의 건축이 아직 현전합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짧게 사진으로 분위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천권씨 초간종택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醴泉權氏 草澗宗宅 別堂)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초간 권문해(1534∼1591년) 선생의 할아버지 권오상 선생이 지었다고 전하는 별당 건물입니다. 즉, 별당이므로 작은 규모의 건축이지만, 16세기초의 인물인 권문해선생의 조부가 지었다고 전하니 사실이라면 최소 15세기의 고건물입니다.

우선 별당에서 안사랑채로 들어가는 통로를 보면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2층구조가 보이지요.
 별당대청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
별당을 앞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2층공간이 확실히 보이지요.
서지재사

다음은 김성일(1538∼1593년)의 재사로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재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김성일의 비석에 적힌 연도가 인조 12년(1634)으로 기록되어 있는 건축으로 17세기말의 건축으로 추정되는 건축물인 서지재사입니다. ㅁ자형 집으로 앞면은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조선전기 건축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을 주는 중후기 건물로 볼수 있겠습니다.

임청각

다음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인 임청각으로, 그중 앞행랑채가 중층구조로 통랑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상루, 희이재사, 가창재사, 송석재사, 남흥재사 금계재사 등이 꽤 많은 수의 고택의 부속건축물들이 아직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남흥재사로 이 건물은 고려말의 문신 남휘주(1326∼1372년)과 남민생(1348∼1407년) 부자의 묘를 보호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1500년대에 남흥사 법당 건물을 개조하여 지었다고 전하고 있어 임진왜란 전의 건축으로 추정중이죠. 앞면 5칸, 옆면 5칸 규모에 ㅁ자형 건물입니다.
남흥재사

아래는 송석재사로 임진왜란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安東守城)에서 공을 세운, 대박 김철 (1569~1616년)의 묘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재실로, 16세기말~17세기 초의 건축으로 추정중입니다. 조선 중기에 세운 이 건물은 제사를 지내는 방인 정침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을 두었고 앞쪽으로는 5칸의 루가 설치되어 또다시 ㅁ자형 구조를 보여주지요. 다만 이미 온돌이 보편화되었던 시기의 건물이므로 온돌방이 많습니다.
송석재사 

이런 식의 고택의 2층구조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박동량(朴東亮, 1569~ 1635년)이 지은 [기재잡기]의 한 구절이 있지요.

기재잡기

공은 곧 칼을 빼어 들고 벽 위의 네 모퉁이를 살피면서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밤중이 되자 방 위의 루(다락)에서 여인을 부르더니 큰 밧줄을 내렸다. 공은 몸을 날려 벽을 차고 급히 그 여인을 업고 벽의 구멍으로 나와 몇 겹의 담을 뛰어 넘느라고 소매를 끊고 달려 나왔다.

公卽拔劍。按壁上四隅。不寐而坐。
夜半自房上樓。呼女下大繩。公奮身蹙其壁。
急負女自壁穴而出。超數墻。絶裾而走。

즉, 사방이 이어진 네 집의 가장자리를 계속 순찰하다가, 밤이 되자 방위에 설치된 2층다락에서 큰 밧줄로 끌어내리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위의 사진에 보이는 창문등에서 내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곳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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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식의 건축은 앞서 말씀드렸듯 조선전기 '궁궐'에도 많았습니다. 예전에 세종대 기록을 살핀 바도 있지요.


“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섯 발자국마다 樓(루)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중략".

특히 전기 경복궁의 많은 기록에 '침루'와 '루'기록이 나오고 있어, 많은 연구가 필요한데, 위의 소규모 별당채가 저런 식이었다면 궁궐의 루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경회루같은 형식의 정자형 루가 아닙니다)는 훨씬 복잡하고 흥미로운 건축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1525년의 중종대 기록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중종 20년 을유(1525,가정 4)
3월9일 (무진)
수행자들을 풍양궁에서 공궤하도록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거가(車駕)를 수행한 종재(宗宰)ㆍ종2품(從二品) 이상, 병조ㆍ도총부ㆍ별운검(別雲劍)ㆍ대간ㆍ홍문관ㆍ승정원ㆍ주서(注書)ㆍ한림을 대주정(大晝停) 때 인견(引見)하고 공궤(供饋)하겠는데, 다만 누상(樓上) 【풍양궁루(豊壤宮樓)이다.】이 좁으므로 종1품 이상은 누상에 앉고 정2품 이하는 누하(樓下)에 앉도록 하라.”

○傳曰: "隨駕宗、宰從二品以上, 兵曹, 都摠府, 別雲劍、臺諫、弘文館、承政院、注書、翰林, 當於大晝停, 引見供饋矣。 但樓上 【卽豊壤宮樓。】 隘狹, 從一品以上坐樓, 而二品以下坐樓下可也。"

풍양궁은 바로 세종대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이궁입니다. 아직 그 위치조차 비정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조선전기 궁궐로 태종이 말년에 이 궁궐에 머무셨죠. 

아무튼, 이 풍양궁에 '豊壤宮樓' 풍양궁루, 즉 루가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중종이 종1품이상의 고위관직자는 풍양궁루 윗쪽에 앉히고, 이하는 루하에 앉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풍양궁 역시 '행랑'으로 둘러쌓여 있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 다음 기록입니다.

중종 20년 을유(1525,가정 4)
3월5일 (갑자)
풍양궁을 수리하지 말고 장막만 치게 하다

정원이 풍양궁(豊壤宮)의 창문을 바르고 장랑(長廊)의 담장을 수리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수리할 즈음에 끼치는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수리하지 않아도 야외(野外)에 좌차(坐次)하는 것보다는 더 좋지 않겠는가? 수리하느라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전설사(典設司)로 하여금 장막만 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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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저택모습은 어땠을까?

이것이 조선전기의 관직자들의 저택모습중 최소 일부를 차지하던 현재는 생소한 형태의 중층부분이 많은 '한옥'입니다. 그럼 조선전기보다 더 이전인 '고려시대'의 저택들은 어땠을까요? 

고려 역시 무려 500년을 지속한 시대이므로 일괄적으로 어떻다라고 할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신집권기나 신돈의 저택규모등의 일부 대저택은 그 모습이 흥미롭지요. 한국의 사라진 건축 (10)- 곳곳의 검은 방, 괴승신돈의 루

그런데 이런 고려의 '대저택'이나 '궁궐'의 경우, 위의 조선고택보다 그 높이가 굉장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우선 12세기중반 1157년, 무신정권당시 세도가이던 '정함'이란 인물의 저택묘사부분입니다.

정축 11년(1157), 송 소흥27년ㆍ금 정륭 2년
12월에 정함의 집을 경명궁(慶明宮)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정함의 집은 대궐동남방 30보(步) 거리에 있었는데, 크고 작은 행랑의 칸수가 무려 2백여 칸에 달하였으며, 누각이 우뚝하고 장식이 찬란하여 참람하게도 궁전과 견줄 만하였다. 음양가들이 모두 말하기를, 개[犬]가 머리를 들고 주인을 짖는 형상이니, 왕이 임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十二月,詔以鄭諴私第,爲慶明宮,諴第,在闕東南三十許步,大小廊廡,凡二百餘間,樓閣崢嶸,金磨交輝,僭擬宮禁,陰陽家,皆以爲犬擧頭吠主之勢,不宜臨御,不從。○以崔諴,爲政堂文學,金永夫,知樞密院事。

참고로 이 정함의 대저택에도 높은 '루'가 있었습니다. 崢嶸 (쟁영)이라는 말은 산의 형세(形勢)가 가파르고 한껏 높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관용적으로 쓰입니다.

樓閣崢嶸 누각이 가파르게 높다 (가파를 쟁, 가파를/높은 영).

이로부터 약 60여년 후인 [고려도경] (1123년)에는 이런 기록이 보입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부고(府庫)

봉선고(奉先庫)는 광화문(廣化門)동쪽과 순천관(順天館)의 관도(官道) 북쪽에 있다. 앞문이 2칸인데 조금 동쪽으로 문을 냈고 왼쪽에 집 하나가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높아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오른쪽에 누각(樓閣) 하나가 있는데 동쪽면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고 오직 그 기둥에 방시(榜示)하기를 ‘저수 방화(貯水防火)’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안에 저장한 것은 바로 선왕(先王)을 받드는 제기(祭器)와 생뢰(牲牢 제수)요, 또한 국기(國忌 왕이나 왕후 등의 국장 및 제삿날)에는 재료(齋料)를 여기에서 지급하여 모든 절[寺]에 풀어 준다.

府庫

奉先庫。在廣化門之東。去順天館官道之北。前門二間。稍東開門。左有一堂。其制極高。出於墻外。右有一樓。東面。不施窻牖。唯於其柱。榜云。貯水防火。蓋其中所藏。乃奉先王祭器牲牢。及國忌給齋料於此。以施諸寺焉。

左有一堂 좌측에 집이 하나 있는데,
其制極高 그 제도(만듬새)가 지극히 높다.

송나라는 누각이 즐비하던 국가입니다. 송출신의 사신인 서긍이 이렇게 표현할 정도면 그 누각의 높이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기록이 이 부분.

右有一樓。東面。不施窻牖。
오른쪽에 누각(樓閣) 하나가 있는데 동쪽면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고 오직 그 기둥에 방시(榜示)하기를 ‘저수 방화(貯水防火)’라고 하였다. 

2층 누각이 있는데, 동쪽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다고 되어 있어, 나머지 벽에는 창문이 있고 또한 벽체가 있는 '누'임이 다시 드러납니다. 또한 이 유명한 기록 (1277년 충렬왕) 역시 당시 고려저택의 가루(2층누)의 높이를 보여줍니다.

고려사
충렬왕 3년, 1277년 정축년
가을 7월
○元木匠提領盧仁秀使張舜龍告公主曰
갑오일. 공주가 행차할 때 사람들이 위에서 내려다볼까 우려해 길가 집들의 누각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같은 해 기록에 이런 부분도 나오지요. 

1277년 7월 미상(음)

○元木匠提領盧仁秀使張舜龍告公主曰, “宮室之修旣罷, 盍歸我乎.” 公主大怒, 詰宰樞曰, “我只罷役徒耳, 奈何亦遣工匠乎.” 宰樞曰, “罷役是日官之言, 臣等何知.” 公主益怒曰, “豈蔑視我耶, 必懲一宰樞, 以警其餘.” 宰樞難其對, 李槢曰, “嚮者, 臣等以王疾篤請罷役修省, 幸而見聽. 工匠妄意役罷辭去耳. 今召而復作, 何晩之有.” 公主意解. 旣而日官又面請, 勿構三層閣. 公主不聽, 發諸道役夫, 督之愈急.

같은 해 기록에 관후서(觀候署)에서 충렬왕에게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지금 들으니, 조성도감(造成都監)이 상국의 규모를 따라 층루(層樓)와 고옥(高屋)을 지으려 한다 하니, 장차 (풍수지리의 악영향으로) 뜻밖의 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때 관후서에서 이야기하는 근거가 태조이래 풍수의 영향으로 높은 산이 많은 고려에 높은 건축은 양기가 너무 강해지는 것이라 막아왔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관후서의 논리를 이야기하기 위한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 이미 전대인 무신정권시대에 고층건축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눈여겨 볼 단어가 있습니다.

○觀候署言,按道詵密記,稀山爲高樓,多山爲平屋,我國,多山,若作高屋,必招衰損,故,太祖以來,非惟宮闕不高,至於民家,悉皆禁之,今聞造成都監,用上國規模,欲作層樓高屋,恐將有不測之災,王,納其言

바로 '층루'와 '고옥'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고옥'(높은 집)이라는 것은 송대에는 보통 3층씩 되는 고층건물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이 13세기에 3층짜리 건물을 지으려다가 제재를 당하는 기록이 나오지요.

무엇보다 무신정권대의 '대저택'기록중 그 '높이'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고려서 1268년조에 나옵니다.

고려사
고려 원종 9년, 무진년(戊辰年), 1268년

○김준(金俊)을 목베고 그 일족을 죽였다. 중략. 두 사람은 다투어 거두어 들이기만을 일삼았는데, 백성들에게 볍씨 한 말을 주고 으레 쌀 한 섬을 거두었다. 그의 여러 아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다투어 무뢰배들을 모아서 권세를 믿고 방자하게 날뛰면서 남의 전토를 침탈(侵奪)하니, 원망하는 소리가 매우 많았다. 김준이 일찍이 왕을 자기집에 맞아들이려고 하여, 이웃집을 철거시키고 그 거처를 넓혔는데, 깊은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도 밤낮으로 역사를 재촉하여, 집 높이가 몇 길[數丈]이 되고 뜰 넓이가 1백 보(步)나 되었다. 그 아내가 그래도 부족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대장부의 눈깔이 또한 이다지도 작다는 말인가?” 하였다. 그녀는 택주(宅主)로 봉해지자, 언제나 들어가 궁주(宮主)를 알현할 때에 아래에서 절하지 않고 올라가서 절하였다.

확대하면 이 부분.
즉 고려후기 무신시대의 무인 김준(金俊, ? ~ 1268년)의 저택의 높이를 보여주는 부분으로 '몇 길' (수 장)이나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1장은 보통 3미터이상. '수 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최소 3장정도라고 생각하면 무려 9미터가 됩니다. 2장으로 해도 6미터 이상이지요. 따라서 당시 김준의 저택에도 '중층건물'이 많았으리라 생각되며, 당시 고려 세력가들의 대저택에 있던 중층의 건물 높이와 규모는 위에서 소개한 '낭루'를 가진 조선전기 고택들에 비견될 것이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최소한 예전에 '신돈'의 누각느낌을 주는 이러한 정도의 건축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고려말까지도 이런 흐름은 세력가의 저택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다음은 [고려사]의 권준열전에 나오는 구절로 당시 왕인 충숙왕(忠肅王, 1294~1339(재위 1313~1330년, 복위 1332~1339년)이 본인의 궐내건축보다 화려하다고 감탄하는 부분입니다.

고려사 열전 -권준 중.

그 중 한 사람을 붙들었는데 그는 권준의 집안 사람이었다. 그러나 순군(巡軍)에서는 권씨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이 일을 추궁하지 못하였다.  한 번은 충숙왕이 권준의 저택에 처소를 옮겼는데 가옥의 건축미를 두루 돌아보고 나서 탄식하기를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데!”라고 하였다. 

같은 부분을 [고려사절요]에선 이렇게 묘사합니다.

○ 왕이 길창군(吉昌君) 권준(權準)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름다운 집들을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궁전은 내가 거처할 곳이 아니다." 하였다. 이후로 여러 번 사제(私第)로 옮기었다. 
○移御于吉昌君權準第,周觀屋宇之美,嘆曰,非寡躬所當居也,自是屢移私第。

권준(權準,1280∼1352년)은 무신정권직후의 세력가였는데 그 저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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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과연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살던 '한옥'이라는 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조선후기식으로 지어진 민속촌의 기와집만을 고정관념을 가지고 '한옥'의 전부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복'도 시대별로 전혀 다릅니다. '한옥' 역시 그 형태를 정형화시켜선 곤란하겠지요. 고려시대 선조가 살던 집도 한옥이고, 조선전기 한옥도 한옥입니다. 시대별 한옥을 충실히 구현해서 우리가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늘의 주제인 통루/낭루는 아니지만, 1452년의 단종 1년에는 여러 방이 있는 루 기록까지 등장, 당시 한옥저택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살피게 합니다 (예전 조선전기 목욕실에 대한 필자의 포스팅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단종 4권,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11월 16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문의현(文義縣) 사람 김미(金湄)는 아비가 죽고 어미와 같이 살면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합집(合執)하고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집 1구(區)를 짓는데 1백 9간(間)으로 하고, 그 창고에는 미증영만(彌增盈滿)·익억 만첨(益億萬添)의 8자(字)로써 현판을 나누어 달고, 이를 진고(珍庫)라 부르며, 집 가운데에 높은 누각(樓閣)을 세워 진루(珍樓)라 부르고 그 양쪽에 깊숙한 방을 만들어 비첩(婢妾)과 기녀(妓女)들을 나누어 두고 정욕(情慾)을 자행(恣行)합니다. 아내 장씨(張氏)와 딸들은 욕실(浴室)을 따로 두고 있습니다.  중략.

憲府據忠淸道觀察使呈啓曰: “文義縣人金湄, 父歿, 與母同居, 合執田地、奴婢, 不分與同産, 造家一區, 一百九間。 其庫廩以 ‘彌增盈滿益億萬添’ 八字分額, 稱珍庫, 中置高樓, 稱珍樓。 兩旁作幽房, 分置婢妾、妓女, 恣行情慾。 妻張氏及女子, 別置浴室, 女子及季弟濬,

즉, 문의현 (현재 충청도 청주구역내)에 있는 김미란 자가 집을 109칸으로 짓고 (이미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99칸제도가 지켜지지 않고 있죠), 집안에 진루(珍樓)라는 높은 누각(高樓, 그냥 누각이 아니라 고루라고 되어 있습니다)을 세우고 그 누각에 깊숙한 방을 두개이상 만들고, 여자들을 부리고 정욕의 대상으로 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루안에 있는 것인지 다른 건물에 따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안에 '아내와 딸의 전용욕실'을 설치해 두고 있습니다. 문맥해석상 다른 여자들과 다른 욕실을 쓴다는 문맥같아서 저러한 비첩과 기녀들용 욕실이 또 따로 있었음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요즘 필자가 천착중인 조선중기 이전의 '루'에 대한 개념을 다시 살피게 하는데, 집안내에 방이 여러개 있는 루와 욕실이 있는 건축은 현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중탕이 아니지만, 저택내에 여성전용 욕실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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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가장 아래 동영상에 보이는 몇년전 문화컨텐트사이트에서 3D로 구현한 이 고려시대 귀족저택의 모습은 오늘 소개한 조선전기의 '낭루'과 내부에서 켜켜히 연결되면서 정침이 침대방으로 꾸며져 있고, 침루가 연결된 흥미로운 구조입니다.
저택의 침실에서 통루로 연결되는 부분

실제로 이러한 저택을 재건해서 한옥마을의 또다른 고려시대 모습으로 체험하게 해준다면, 그야말로 색다른 또다른 구조의 우리 전통건축의 묘미를 맛보게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나 외국인들까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시민들도 정말 새로운 시대를 맛보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통루의 계단은 권이번(權以番, 1678∼1763년)이 지은 2층건축인 영풍루에서 기단이 높은 사랑채로 통하는 이런 행랑의 구조를 참조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려시대 저택구조의 상상복원도입니다. 한번 이런 새로운 미학을 느껴보시길.



마지막으로 이런 건축으로 경주나 개성에서 '전통여관'을 만든다면 정말 좋은 소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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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 I T V S 2016/09/03 11:42 #

    한옥..!? 일본과 중국과 다른 거요!
    ....
    ...
    ..
    .
    음... 그게... 또 이러면 이렇게 더듬하게 되더라고요...ㅠㅠ
  • 역사관심 2016/09/03 12:14 #

    시대별로 나누어 고찰해보고 알려지고 재건해서 이용해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 M i d s e n 2016/09/03 11:58 #

    오류가 있는게 양진당은 단층으로 개조된게 아니고 중층 다락 건물 앞으로 가로로 긴 행랑채가 있던 것이 허물어져서 다시 행랑을 재건한거에요.
  • 역사관심 2016/09/03 12:13 #

    아, 그렇군요. 일단 양진당 부분은 제외했습니다. 추후 따로 다뤄보면 좋을 것 같군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 M i d s e n 2016/09/03 12:00 #

    개인적으로는 조선후기 풍의 한옥 말고도 조선초기 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 등의 한옥이 현대 건축물하고 융화되기도 쉬울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6/09/04 01:39 #

    동감합니다. 아무래도 공간구성이 '여백'을 두는 후기식보다 활용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특히 도심내 한옥을 짓는다면 촘촘히 이어지고, 2층으로 만드는 식도 제대로 만들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걸 전혀 활용하지 않고, 2층으로 한옥을 지으면 '현대한옥'이라는 근본도 없는 이름을 붙이니..)
  • 레이오트 2016/09/03 17:07 #

    조선후기 한옥만이 진정한 한옥이라면서 강요하다 못해 스테레오 타입화를 하면서 온고지신을 부르짖는 꼴을 보면 그저 암울하죠 ㅠㅅㅠ
  • 역사관심 2016/09/04 01:40 #

    그게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무한반복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http://www.instiz.net/pt/3058754
  • 라비안로즈 2016/09/03 21:52 #

    적어주신 정보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릴때 생각이 중국이나 일본은 몇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왜 우리나란 단층만 있었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나라도 존재 했었네요..
  • 역사관심 2016/09/04 01:44 #

    레이오트님의 댓글에 단 저런 링크의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 졸견으로는 '한국학의 조선후기 집중화 현상'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의복, 음식, 건축의 대부분이 17세기이후로 몰려 있으니, 그것외에는 무슨 Outlier취급을 당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이지요.

    극히 최근들어 이런 부분들에 대한 연구들이 조금씩 나와주고 있어 뒤늦지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교육의 결과가 이런 기사입니다.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12/12/12/0302000000AKR20121212097600055.HTML

    "고려시대에도 2층 한옥 기록이 있고 궁궐 문루가 대부분 2층이었으며, 근현대에 들어선 뒤에는 2층 한옥들이 도시화에 맞춰 지어졌다.

    하지만 한옥 특성상 2층 난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부분 업무용 건물이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1층을 상가로 사용하기 위해 2층 한옥이 등장했지만 광복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관광객이 몰리면서 상업시설이 급증하고 한옥의 전통성을 훼손하는 2층 한옥까지 등장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 라비안로즈 2016/09/04 06:46 #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쓴글인거죠.. 기사는.. 역사관심님의 포스팅을 잘 읽어서 우리 아이들에겐 잘 알려줘야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6/09/05 03:59 #

    감사합니다. 정말 우리 다음세대는 좀 더 다양하고 통시적인 한국미를 느끼며 자랄 수 있으면 좋겠네요.
  • 천하귀남 2016/09/04 09:17 #

    한옥의 다양한 형태를 연구하여 자료를 쌓는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 볼수있습니다.
    문제는 ... 현대의 온돌 중독이겠지요.
    국내의 아파트 보급사를 보면 초기에 온돌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전면 온돌로 바뀌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한국에서 좌식생활과 결부한 온돌난방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없습니다.

    이 부분은 생활이 입식이었던 고려와 좌식으로 변해가는 조선시대 건축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현대 기술상 다층한옥에 온돌을 넣고 난방을 하는것이 일도 아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상당기간 혼란이 올것은 어쩔수 없지 않나 합니다.
  • 역사관심 2016/09/05 04:01 #

    동감입니다. 이런저런 시도끝에 전통건축쪽도 더 발전하리라는 것도 공감이구요. 개인적으로 온돌의 유무외에도 특히 저렇게 통랑을 살려서 안에서 이어지는 구조의 전통건축은 도시한옥이나, 전통여관쪽에서 아주 매력적일 것 같습니다.
  • M i d s e n 2017/09/11 21:57 #

    제사 지내기 위한 집이 여말선초풍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조선중후기의 소빙기와 유교탈레반 심화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사람 사는 집은 전면온돌로 바뀌고 마루, 다락은 점차 줄고 온돌이 따뜻하니 외풍을 막기위한 ㅁ자 구조도 오히려 통풍에 방해가 되고 남녀 주거의 구별도 불분명하다보니까요
  • 역사관심 2017/09/12 13:12 #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씀같습니다. 살림집이 아닌 저런 건축이 오히려 고식을 간직하게 쉬웠겠지요. 한번 들여다 볼 주제네요. 고맙습니다.
  • 소심한 늑대개 2017/09/30 23:53 #

    일본같은 경우에도 에도시대 병풍을 보면.. 2.3층되는건 상가나 누각들이고
    실제 거주하는 집들은 대개 천장이 높은 단층집이 많죠. 귀족들 집도 죄다 단층이더라구요.
  • 역사관심 2017/10/01 01:49 #

    맞습니다. 사실 에도시대에 워낙 상권이 발달해서 주택가와 상권이 붙어있어서 복층이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보지요. 우리가 일본의 2층 주거건축으로 착각하는 마치야 역시 원래 15세기중기에 발하고 16세기에 자리잡은 무인저택인 쇼인즈쿠리의 영향을 받아서 에도시대의 대부분은 단층이었지요. 그러다가 근세가 되서야 도시에 맞춘 2층으로 발전한 거구요. 그 영향으로 일반 민가도 2층으로 짓는 것이 가능하게 된것도 근세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식: http://bit.ly/2xJCxJW
    그리고 말씀대로 귀족저택은 주거공간이 아닌 다른 용도로 2층을 사용 (글 중간에도 에도중기에 2층은 드물다고 나오죠): http://www.city.chichibu.lg.jp.k.qg.hp.transer.com/6700.html

    우리 통신사들이야 당연히 큰 대로 중심으로 움직이고 본 걸 적은것이고 그러다보니 상업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오사카나 교토의 대로주변 상가들을 보고 2층이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 베라 2017/10/22 22:58 #

    포스팅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희 친가가 임청각같은 모습으로 생겨서 전형적인 한옥모양이 아니라는 게 신기했거든요. 그 한옥은 100년 정도 밖에 안 된 건물이긴 하지만 글을 읽다보니 없던 걸 새롭게 지으신 건 아닌가봐요.
  • 역사관심 2017/10/24 03:15 #

    아~ 신기하고도 반가운 말씀이네요. 임청각식의 조선말기 건축이라니 정말 보고 싶어집니다 ^^ 소개 감사드려요 베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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