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주막(店)과 온돌방의 등장시기 (흥미로운 사료) 한국의 사라진 건축

흔히 13세기 고려말부터 사찰쪽에서는 전면온돌이 (민가는 17세기) 퍼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조선전기까지는 그래도 '마루방'이 '온돌방'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최근들어 관련된 발굴도 되고 있지요.

하지만 과연 어느 시점을 경계로 정확히 온돌이 모든 건축구조의 핵심 난방으로 자리 잡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청성잡기]에 이런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점(店 여관)과 온돌의 폐해

옛날에 여행자는 원(院)에서 묵었다. 원에는 각각 주관하는 자가 있었지만 그저 땔감과 물이나 갖추고 있을 뿐이어서 양식이나 그릇, 솥 등을 모두 짊어지고 갔으므로 여행자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김자점(金自點)이 처음으로 떠도는 거지들을 모아 점(店)을 설치하니, 여행자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점의 이익이 너무 많아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상인들의 이문이 모두 점으로 들어가니, 점이 백성의 큰 폐해가 되고 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때 도성의 사산(四山)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上)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며,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가 보니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하였다. 나도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이 난 자가 없었으니 억지로 습관 들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를 전국에 시행하면 처음에는 비록 약간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니, 백성들이 틀림없이 기꺼이 따를 것이다. 다만 점의 경우에는 대체할 방법이 없다.

대체로 역신(逆臣, 반역하는 신하)이 만든 법들이 현재 많이 시행되고 있으니, 점과 온돌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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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의 정확한 등장시기

이 글이 실린 [청성잡기] 자체는 성대중(成大中, 1732~1812년)의 저작이므로 후기의 것입니다. 하지만, 글의 주인공인 김자점(金自點, 1588~1651년)은 정확히 임진왜란 (1592년, 당시 만4세) 직후를 주 활동시기로 살아간 인물이지요.

여기 보면 우선 고려때까지 주요 여관기능을 한 '원'이 임란이후 '주막 (= 점)'으로 변환되었다는 설의 기원을 명확히 김자점이 만들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사실 일부 초라한 원에 대한 설명만을 쓴 것으로 대규모의 시설을 제대로 갖춘 원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충청도 신혜원(新惠院)의 경우에는 안채, 바깥채 및 주방과 마방 등이 있었으며, 누각과 정자도 건립되어 있었지요. 또한 안채는 온돌방, 부엌, 대청, 광으로 구성되었으며, 바깥채는 대청에 식당 겸 술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주막'은 임진왜란 직후에 등장했으며 그 전에는 술집을 주점, 주루, 주가 등의 형태로 불렀음을 아래 글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일부 발췌하자면:

그런데, 주막 (酒幕)이라는 말은 현대한국에서 전근대 한국술집의 고유명사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조선중기이후에만 일부 등장합니다. 고용후(高用厚, 1577~1652년)의 [청사집], 이민환(李民寏, 1573~1649년)의 [자암집], 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 의 [동주집], 오시수(吳始壽, 1632~1681)의 [수촌집]등에 나오지요. 

하지만 조선전기까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필자가 찾아보지 못한 기록이 있을 수 있어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최초의 등장은 18세기초인 1703년의 숙종후기부터입니다. 번역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위에 찾아본 가장 오래된 '주막'단어 등장부분들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자암집(紫巖集)- 이민환 (李民寏,1573-1649년)
大路里數。一一打量立標。而每三十里。募民以居。如今酒幕之規。

청사집(晴沙集) 고용후(高用厚, 1577~1652년)
南下時遇施伯於葛川酒幕下馬敍別

東州集(동주집)-  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
聞慶酒幕。奉寄月沙先生。

위의 세 기록만이 17세기 초중반 것이고, 나머지 문헌들은 대부분 17세기후반에서 18세기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습니다. [후재집], [갑봉유고], [오재집], [송와집], [학산유고], [존재집], [낙하생집], (김종직이 아닌 김유의) [점재집]등이 그런 문헌들입니다. 대신 1570년대이전의 조선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까지도 '주막'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재 건축학계에서 통용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이후 주막이라는 형태의 술집이 대중화되었다는 이야기와 어느정도 일치하는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점' (주막) 개념을 만들었다는 김자점(金自點, 1588~1651년)의 생몰년대 역시 저 '주막'단어가 최초로 나오는 [자암집], [청사집], [동주집]의 세 문헌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간 주막은 '임란'이후 등장한 숙박시설이라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김자점'이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나오고 있어,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 '주막의 등장'에 대한 이야기도 자체도 흥미로운데 이 짧은 기록에는 더욱더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바로 '온돌방'의 정확한 등장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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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까지의 마루방

우리는 한옥하면 온돌방을 떠올리지만, 주지하시다시피 고대-중세한국의 '한옥(한국집)'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 12세기 기록인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온돌'을 난방으로 쓰는 것은 하층민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고구려의 난방을 적어 둔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舊唐書 열전 제149권]
고구려
살림집을 반드시 산곡(山谷)에 짓는데 대부분 이엉을 이어 지붕을 만든다. 다만 부처님을 모신 절이나 신묘 (神廟)·왕궁·관부(官府)건물에는 기와를 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의 습속으로 (가난한 집은) 겨울에는 모두 장갱(長橙)을 설치하고 불을 지펴 따뜻하게 지낸다. 
其俗貧窶者多,冬月皆作長坑,下燃熅火以取暖。

일종의 구들형식이 나오죠. 아래는 실제 출토된 고구려 용호동 1호분 철제 부뚜막 시설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아직 춥지 않은 시대였던 남쪽의 신라는 난방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마치 일본의 전통난방같지요. 

[唐書 동이열전 제145권]
신라
겨울에는 방안에 화덕을 설치하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 
冬則作竈堂中, 夏以食置冰上.

이 기록은 [신당서]의 ‘동이전' 중 '신라’편입니다. '화덕'을 설치하고 지냈다는 해석으로 주로 쓰입니다만, 정확히는 (간이식) '부엌시설'을 설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竈 즉 부엌입니다 (우리가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라 할 때 쓰는 그 '부엌 조'자입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얼음'을 음식밑에 깐다는 기록은 이 묘사가 귀족층의 저택에 대한 것임을 추정케 합니다. 

'겨울에는' 부엌장치 (즉 화덕이나 난로의 간이시설)'을 堂中 (집안, 혹은 마루 한가운데) 설치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건 적어도 신라대에는 부엌이라는 곳이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것처럼) 방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합니다. 즉, 연기를 피우던 이 시설이 방과는 별개로 독립되어 있게 설치되어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한해 간이시설을 (음식도 해먹고) 방 한가운데에 설치, 난방효과도 일시적으로 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온돌방의 설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 글이 실린 [신당서]는 940~945년에 편찬된 [구당서]를 보충 1140년대~60년대에 걸쳐 편찬된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화덕'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당조의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원전이 현전하지 않는 신라의 고대문헌인 [수이전(殊異傳)]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은 신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나라의 당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여기 '난방' 모습이 나옵니다.

정원 9년 (793년)에 신도징(申屠澄)은 황관으로 있다가 한주십방현위로 발탁되었다. 임지로 가는 도중에 진부현(眞符縣) 동쪽 10리 가량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길 옆에 초가집이 있고, 그 안에 불이 피워져 있어 그 안에 불이 피워져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 밑으로 다가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불가에 둘러 앉았는데, 그 처녀의 나이는 14-15세쯤 되어 보였다. 중략. "손님께서는 심한 한설을 만났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쪼이시지요."

수이전은 신라때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이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려초기 박인량(朴寅亮, 1024년 ~ 1096년)이 편찬했다는 설등이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고대신라'의 이야기들이라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수이전에 실렸지만, 원전은 송나라 이방(925~996년)이 편찬한 문헌인 [태평광기] 권 49이며, 이야기의 배경은 8세기말 '당나라'입니다. 구당서(945년)과 약 100년차의 기록이지만, 이 모습을 통해 '구당서에 실린 신라의 여염집 난방'시설인 '화덕'이 이런 식으로 방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럼 이 일화가 일어난 '진부현'은 어디쯤 있었을까요? "진부현(眞符縣)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다."라고 되어 있는데, 저 한자로 찾으면 찾기가 힘듭니다. 현재는 똑같은 의미의 "真符县"이라고 당조의 행정구역을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진부현'은 진주 (眞州(真州))에 속해 있었습니다. 진부현은 당나라  749년에 설치된 곳으로 명조 1265년까지 지속된 행정구역입니다. 이 곳은 중국측 설명으로는 현재의 사천성 (쓰촨성) 그 중에서도 四川茂縣 (사천무현)의 서북부에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在今四川茂縣西北). 정보는 "唐置。其地本名眞符。章仇兼瓊以其地險阻。又當西山要路。奏置眞符營。後改置昭德郡。又改爲眞州。治眞符縣。後入於番。在今四川茂縣西北。".

'사천무현'은 현재 지도로는 아래표기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이 곳에서 '서북부'에 있던 곳이 '진부현', 이 진부현에서 동쪽으로 약 10리에 저 태평광기의 초가집이 있었던 것이지요. 얼추 추정해 보면 다음의 위치 (노란색) 정도로 비정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위치상으로는 신라와 많이 떨어진 곳이지만, 날씨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위도상으로는 거의 비근한 곳입니다. 참고로 연평균기온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요소가 위도와 지형입니다 (그 다음이 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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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잠자리에 대해서는 '가옥'은 아니고 사찰 기록이지만 이런 단서도 있지요.

이목은 항상 사찰 옆 작은 연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중략. 자기 본분을 모른다며 천제가 처벌하려 하니 이목이 법사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법사가 이목을 침상 밑에 숨기자, 이윽고 천사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사실 삼국유사에 실려있기는 하지만 역시 원전은 [수이전]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법사는 '보양법사(寶壤法師)'를 뜻하는데 그는 900년대의 인물입니다.  '床'이라는 글자는 '평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침대' 혹은 '높은 마루'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문맥으로 파악해 볼수 있는데, '이목'이라는 사람 하나를 숨기는 장소라면 나무평상보다는 침상의 뜻에 가깝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 말이지요.
또한 유명한 신라 건축규제 규칙인 '옥사조'에서도 진골은 상(床)을 대모나 침향목으로 꾸미지 못하며 (不飾玳瑁香), 육두품은 대모나 자단, 침향, 그리고 회양목을 상(床) 장식으로 쓰지 못했다(不得飾玳瑁紫檀香黃楊)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상'을 탁자로 생각할 것인가 '침상'으로 생각할 것인가는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미 일부 논문 (양장석, 왕경인의 주거공간 : 삼국사기 옥사 조(條)와 왕경(王京) 유적의 관계를 중심으로)은 이 '상'자를 문맥상 침대류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동의하는 것이 이 '옥사조'는 건축에 관련된 조항을 이야기하므로 책상이나 평상같은 일상 생활잡기라기보다는 규모나 그 성격이 건축구조와 더 관련된 침상류로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고려시대 저택 그림처럼 침상과 마루위에 두툼한 돗자리를 깐 형태가 되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경우 아래 그림 (센트륨님 그림)처럼 역시 침상과 돗자리 그리고 화로를 설치한 형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삼국유사 권제3탑상과 제4에서 8세기초 (709년) 판방(널쪽으로 지은 마루방)이란 지칭이 나오는 것을 볼 때, 통일신라대에도 마루방 형태가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입니다.

삼국유사
신라 선덕여왕대(709년)의 일이다. ...백월산 동쪽에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마을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달달박박이었다. 중략. 박박스님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잣집 8자 방을 짓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고 하고, 부득스님은 동쪽 고개의 첩첩한 바위 아래 물이 있는 곳에 역시 방장(方丈)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하여 향전에는 부득은 산 북쪽의 유리동(瑠璃洞)에 살았는데 지금의 판방이고, 박박은 산 남쪽의 법정동(法精洞) 뇌방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상반된다. 지금 살펴보면 향전이 잘못되었다.각자의 암자에 살았다.
朴朴師占北嶺師子嵓作板屋八尺房而居故云板房

보통 정형한옥, 즉 마루와 온돌이 결합되는 시기를 13세기, 혹은 최근의 일부 발굴로 인해 12세기까지 당겨보는 설도 있습니다 (필자가 발견한 고려의 삼도부에 나오는 구절을 포함).

하지만, 이는 건물의 일부가 온돌과 마루로 연결되었다는 것이지, 13세기 대부분의 방이 조선후기처럼 온돌방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필자가 몇년간 천착해 온 주제인 '침루'라든가 '누방'의 기록도 역으로 이 온돌방의 Dominance 시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전에 다룬 바처럼 17세기까지도 '이층집 (루)'는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이는 보통 별관이나 별장으로 살림집의 살림방의 성격은 아닙니다. 

극히 최근의 몇몇 연구와 필자 개인의 그간의 졸견으로는 결국 16세기말, 즉 임진왜란 전까지는 온돌방을 부분적으로 (노인전용 등등) 쓰면서 고려시대 건축과 조선전기의 건축이 혼합되어 마루방과 누방 (2층 침실)등이 혼재해 오다가, 임란 이후를 계기로 현재의 온돌방위주의 1층 살림집이 보편화되는 경향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조선전기 이층침실, 침루 글에서 살폈던 것 처럼 '침루'역시 임진왜란 직전까지 흔치 않게 등장합니다. 우선 조선전기 문신인 노수신(盧守愼, 1515∼1590년)의 시문집에 등장하는 16세기중반의 침루기록입니다.
穌齋先生文集卷之四
夢覺泣書十一月 
雙親分席寢樓中。一稚隨身臥檻東。辛酉中冬廿夜夢。記來非吉亦非凶。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년)가 쓴 [오산설림초고]에는 당대 침루기록에 대한 더 명확한 묘사가 나오고 있지요. 문헌은 16세기중반이지만 사실 이 기록의 배경은 차천로의 전대인 15세기 후반, 조선전기 성종(成宗, 1457~1495년)대의 일입니다. 

見寢室傍有高樓。살펴보니 침실방이 높은 누(루)에 있었다.
高樓連寢室。고루(높은 루)에 침실이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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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방위주의 한옥의 등장시기

하지만, 역시 후기한옥이라고 해도 정확히 온돌이 확 퍼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라고 하는 글은 본 적이 없고 다만, 남아 있는 조선전후기의 집들과 유구등을 문헌비교를 통해 부분적으로 임란후로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발견한 이 글에는 그 시기가 버젓하게 적혀 있지요. 바로 '김자점'이 '온돌'을 놀랍게도 '정책적'으로 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이 부분을 볼까요.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때 도성의 사산(四山)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上)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우선 온돌이 퍼지게 된 것은 김자점(1588~1651년)이 유행시켰기 때문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부분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방'이어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았다 (그리고 일부 방만 노인/병자용으로 온돌방)". 

어디서 본 기록이네요.

바로 예전 글 (조선전기 집터발굴과 이상한 모양의 마루의 의미)에서 다룬 [한경지략]에 나오는 구절과 쌍동이처럼 닮은 내용입니다. 

[한경지략]은 정조 (1752~1800년)때 한양의 모습을 적어둔 것으로 저자는 유득공 (발해고의 저자)의 아들로 추정되는 수헌거사(樹軒居士)라는 자입니다. 아래 내용의 주인공인 홍이상은 1549~1615년의 인물인데, 그가 이 저택에 살던 당대에 이미 그의 13대선조부터 내려오는 집이라고 하니, 기록대로라면 무릇 줄잡아 30년씩만 잡아도 당대에 이미 거의 400년정도가 된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1세기에서 최소 12세기초반의 집임을 알 수 있죠.

한경지략(漢京識略), 부(附) 동명(洞名)
車洞 有洪慕堂履祥世居之宅 奉祀孫入居 凡爲十三世 而內屋四十間 甚宏傑 古之屋製 皆房少而廳多 蓋古之老人 始居溫? 少年輩?宿處于廳事 故如此耳

차동(車洞)에는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1549~1615)이 여러 대 거주한 집이 있는데 봉사손(奉祀孫)이 들어가 사는 지 무릇 13세(世)이다. 내옥(內屋)이 40칸인데 매우 굉걸하다. 옛날의 가옥 제도는 모두 방이 적고 마루[청(廳)]가 많다. 대개 옛날에는 노인이 되어야 비로소 온돌에 거처했다. 젊은이는 마루방에서 많이 잤다. 그러므로 이같이 생겼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16세기 이전의 조선전기 가옥에서는 '마루방'이 많고 온돌은 아주 드문 구조였음을 이 두 사료의 기록은 교차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익(李瀷, 1681(숙종 7) ~ 1763년)의 [성호사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
침어판청(寢於板廳)- 마루판자에 거처함

일찍이 여러 기로(耆老)들의 말을 듣건대, “백 년 전에 있던 공경대부의 큰 주택을 손꼽아 보면 그 가운데 온돌은 1~2간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노인과 병든 자가 거처하기 위한 곳이요, 나머지는 모두 판자 위에서 거처했으니, 마루방 가운데에 병풍을 두르고 두터운 요를 깔아 여러 자녀가 거처하는 방을 삼았으며, 온돌에도 또한 마통신(馬通薪)을 때어 연기만 나게 할 뿐이었으니, 《소학》에 이른바, ‘청당(廳堂) 사이 휘황(幃幌)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지금은 백성의 형편이 옛날보다 곱절이나 가난한데 사치는 10배가 늘었으니,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 기록을 '당대의 실록'으로 뒷받침해주는 공식기록도 발견했습니다. 다음의 실록기록을 보시지요.

중종실록 12권, 
중종 5년 11월 26일 1510년 명 정덕(正德) 5년 부친의 미친 병으로 인해 쇠사슬을 채워 방에 가둔 종실 이견손의 처리를 의논

"견손이 과연 겨울철에 그의 아비를, 마루방[板子房]에 둔 채 따뜻하게 옷을 입히지도 않고 발에 사슬을 채워서 매어 놓아 마음대로 앉고 눕지도 못하게 한 것은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그의 죄악이 매우 큽니다.

領議政金壽童議: "堅孫果於冬月, 置其父于板房, 不衣以溫暖, 至於鎖足拘繫, 使不得任意坐臥, 人子所不忍, 罪惡甚大。

여기 보면, 견손이라는 자가 '겨울철'에 노인인 아버지를 '마루방(板房)'에 방치해두고 두꺼운 옷도 없이 방치해 두었다는 죄목을 이야기합니다. 시대는 1510년으로 임란 80년전인 중종대. 즉, 위의 [청성잡기], [한경지략], 그리고 [성호사설]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하는 시대입니다. 여기 보면 문맥이 명확히 같습니다. 즉 '노인은 겨울에는 마땅히 온돌방'에 모셔야 하는데 보통 쓰는 '마루방'에 방치했다는 맥락이지요. 이 기록은 젊은이는 마루방, 노인은 온돌방이라는 위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사극에 나오는 선조의 침실

살림집 뿐이 아니라 (당연히) 궁궐도 상황은 같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63년의 2월 기록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명종 18년 계해(1563,가정 42)
2월5일 (갑인)
정원과 약방 도제조 심통원 등이 어실의 화재에 관하여 여쭈다

제조 원혼(元混),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좌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4일 밤에 어실(御室)에 화변(火變)이 있었는데 【어실은 온돌로 침상 아래에 으레 화기(火器)를 넣어서 따스하게 한다. 그 때 반드시 먼저 네모반듯한 벽돌을 침상 아래에 벌여놓은 다음 화기를 넣어야 하는데도 내관(內官)이 4일에 벽돌을 벌여놓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을 넣고는 다시 살펴보지 아니하여 불꽃이 세어져 화기를 뚫고 침상의 판자에 닿아 불이 붙었다. 밤 이경에 이르러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으나 겨우 끌 수 있었는데, 만약 밤이 깊어서 끄지 못했다면 불은 크게 일어났을 것이다. 상이 내관 여언장(呂彦章)ㆍ김종(金宗)ㆍ김세호(金世灝)를 의금부(義禁府)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상체(上體)를 놀라게 하였을 것이 염려되어 문안드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 밤 화변이 중하지는 않았으나 전일 화재를 겪었으므로【지난 계축년에 대내(大內)에 불이 났었다.】 약간 놀라기는 하였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였다.

 御室溫堗, 床下例入火器, 以取溫氣必先以方塼布床下, 然後入置火器, 而內官於初四日, 不布方, 盛火入置, 不復看審, 火盛徹器, 床板穿燒。 夜至二更, 焰烟熾發, 僅得撲滅。 若夜深, 未及撲滅, 則火將大起矣。

'온돌'이라는 단어는 나오지만, 이 시스템은 임금의 침상(침대)아래 화기(즉 화로)를 넣어서 열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부엌에서 구들을 통해 방전체를 덥히는 전면온돌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침상'에서 잤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역으로 흔히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조선후기의 왕들처럼 방에 금침을 깔고 자는게 아니죠. '침대'에서 자는데, 나무로 되어 있고, 그 나무판아래 벽돌을 좌악 깔고, 아래 화로를 넣어서 침대를 덥히는 것입니다. 또한 '화로'를 아래 공간에 넣을 만큼 침상의 높이가 있었음도 알 수 있지요.

이 기록은 또한 '床' (상)이라는 글자가 '침상'으로 자주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위의 신라시대 [옥사조]의 床이 침상일 가능성을 높여 줍니다. 따라서 최소 이런 장면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아래는 태조 이성계의 침실 묘사)
드라마 정도전 중 태조 침실

이 뿐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저 '김자점'의 기록의 시대인 '인조대'에 이런 실록 기록이 나옵니다.

인조 2년 갑자(1624,천계 4)
3월5일 (기미)
남한 산성의 축조와 군량 및 기인의 가포 등에 대해 논의하다 중:

先朝內人輩, 皆言: ‘士夫家婢僕, 尙處溫堗, 以內人而處板房可乎?’ 自此關內多溫堗。 若代以板房, 則可省冗費。
“신이 전에 듣건대, 선조(先朝)의 나인(內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 집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板房)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하므로 이로부터 대궐 안에 온돌이 많아졌다 하니, 마루방으로 바꾸면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보면 1624년, 즉 인조 2년의 기록인데, 흥미롭게도 선조, 즉 광해군대에 궁궐의 나인들 즉 궁녀들의 방을 사대부 종들의 방처럼 '온돌방'으로 꾸미자고 해서, 마루방을 온돌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그 전에는 궁궐 나인들도 모두 마루방에 살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기록은 온돌을 비용상, '다시' 마루방으로 바꾸자는 건의입니다. 따라서, 인조대의 이 기록은 김자점의 건의기록과 반대지만, 그 '비용'을 고려해서 마루방-온돌방이 그때 그때 교체될 만큼 인조대가 한옥의 난방에서 Transitional period 과도기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자점(金自點)의 생몰년대는 1588~1651년.
인조(仁祖, 1595~1649년)의 재위 기간은 1623년 ~ 1649년입니다. 김자점은 이미 광해군대에 궁궐에서 업무를 보던 자로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정 6품직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가 인조를 만났을 기간은 재위기간 내내가 됩니다.

사실 김자점이 [청성잡기]의 솔잎제거비용으로 온돌설치라는 이런 건의를 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그가 인조대에 '호조좌랑'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호조는 국가재정기획부에 해당하는 부서로 솔입제거 비용이라는 경제적 주제가 가장 잘 맞는 곳입니다.

=====
마무리 

오늘 발견한 [청성잡기]의 김자점의 기록에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그간 우리가 '온돌'이 발달사적인 측면에서 아주 자연스레 북부에서 남부로 날씨가 추워지면서 퍼져나간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반해, 이 기록은 임란 직후의 왕인 인조(仁祖, 1595~1649년)때 갑자기 한양을 둘러싼 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서 산불이 나자, 이걸 없애기 위해 한양 주요 집들에 온돌을 설치해서 마른 솔잎더미를 없애는 방안으로 김자점의 건의하에 인조가 시행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시행한 것인데 하고보니 마침 추워진 한반도 날씨에 들어맞아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요.

사실 그 동안 사료를 검토해 오면서 느낀 점이 아무리 임진왜란이라는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비극이 있었다해도, 전기와 후기의 건축양식의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조금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 한구석에 있었는데, 만일 이 기록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면 행정과 기후변화, 전란의 요소가 혼합되어 급격한 '한옥 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물론 오늘의 자료는 야담집의 성격이 강한 [청성잡기]의 내용이므로 김자점의 시행건의에 대한 더 자세한 공식문헌기록을 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천착해 온 주제중 두 가지 한국의 주점문화중 '주막', 한국의 건축문화중 '온돌방'의 대강의 전파시기 (임란전후)를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같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를 끄는 기록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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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antalinus 2016/09/15 21:30 #

    온돌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재미있네요. 노골적으로 바꿔서 말하면 "뜨끈한 방바닥에 배깔고 지내는 이 나약하고 게으른 놈들"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 그니저나 추운 것에선 온돌이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심지어북미쪽에서도 floor- heating이 유행인 것을 보면 말이지요....
  • 역사관심 2016/09/16 02:43 #

    성대중 선생의 경우 워낙 일본통이셨던지라 당시 발전하던 에도시대의 문물을 보면서 뭔가 벤치마킹하려는 느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추울때 뜨끈한 아랫목에서 발이 살살 녹던 느낌... 되게 오래된 기억이네요;
  • 명탐정 호성 2016/09/15 22:53 #

    저럴수가
  • 역사관심 2016/09/16 02:43 #

    시대별 한옥에 대한 연구와 이용이 좀 더 활발하면 좋겠군요.
  • 알베르트 2016/09/15 22:56 #

    아하...
  • 역사관심 2016/09/16 02:43 #

    ^^
  • 빵꾼 2016/09/16 09:32 #

    온돌은 옥저에서 시작해 고려때 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군요. 조선후기에 민둥산문제로 골치아팠다고 하던데 고려나 조선전기에는 관련 기록이 없을까요?
  • 역사관심 2016/09/18 00:17 #

    옥저는 이미 기원전에 쪽구들을 만들었고, 이게 고구려로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지요. 비롯한 중국 동북부지역에서도 '캉'이라는 구들시스템등이 있었고, 고려대에는 확실히 하층민을 중심으로 온돌이 퍼졌던 것은 맞습니다 (마루와 온돌이 결합되는 시기는 아직 논쟁중입니다만). 말씀대로 산림문제와 온돌기록은 맞물리는 만큼, '인조대'기록을 중심으로 한번 찾아보면 재미있는 주제가 될것 같습니다. 좋은 주제 고맙습니다. 즐거운 연휴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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