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사 9층목탑 모형과 황룡사 목탑의 비율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얼마전 소개한 [황룡사 9층목탑 재건의 큰 단서- 불일사 9층목탑 모형]의 북한 개성에서 발굴된 불일사출토 9층 모형탑이 아마도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만들었을 가능성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 금동 9층목탑 모형과 황룡사 9층목탑의 비율을 남아있는 문헌사료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 이 기록을 직접 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만, 널리 퍼뜨리고자 황룡사의 상징인 '9층목탑'의 전모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관련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 기록은 '금석문'으로 황룡사찰주본기라는 자료입니다. 

이 문헌은 872년(경문왕12년)의 당대의 기록으로 황룡사 9층목탑의 심초석 사리공안에서 발견된 사리내함에 새겨진 1차사료입니다. 1974년의 황수영선생 논문에 의하면 이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신뢰도를 높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4년 3월조의 “황룡사탑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자장(慈藏)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라는 기록과 일치하는 찰주의 건립과 완공 연대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쳤다 라고 되어 있죠 3, 4월이란 1개월 차이뿐.).

더욱 주목할 기록은 탑의 형태입니다. 이는 재건시 꼭 참조할 자료로, 완공된 탑의 높이가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에 찰주기(刹柱記)를 인용한 부분에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라고 하였으니, 척과 보의 단위만 다르게 적었을 뿐, 거의 정확하게 높이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황수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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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龍寺 刹柱本記
侍讀이자 右軍大監이며 省公을 겸한 臣 朴居勿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박거물(朴居勿)이 872년 11월 25일 박거물(朴居勿)이 「신라황룡사찰주본기」를 지음.

皇龍寺 九層塔은 善德大王 때에 세운 것이다. 전에 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殺生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호를 慈藏이라 하였다. 

선덕대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唐나라 貞觀 12년 우리나라 仁平 5년 무술년에 우리나라 사신 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왕 12년 계묘년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終南山의 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이에 (왕은) 伊干 龍樹를 監君으로 하여 大匠인 백제의 阿非 등과 小匠 이백여 인을 데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 선덕왕 14년 을묘년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 …… 에 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치었다. (탑의) 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이다. 과연 三韓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君臣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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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마지막 부분의 높이자체보다도 탑의 비례에 관한 정보입니다. 보면 9층목탑의 철반(鐵盤, 쇠 쟁반)이상부분이 7보고 (즉 철주), 그 이하가 30보 3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재위 661~681년)때 중국 제도를 본떠서 1보의 길이를 표준 척도의 6척으로 고치고, 그 제도를 견포(絹布)의 길이를 재는 데에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기록이 쓰여진 800년대에도 아마도 이 척도비율이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황룡사 9층목탑의 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7보: 42척
30보: 180척
3자: 3척

따라서, 그 비율이 42: 183척. 즉, 목탑의 전장중 23%가 철주가 됩니다. 

만약, 불일사 9층목탑 금동모형이 황룡사 목탑을 본땄다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얼추 비슷한 비율이 되어야 할 겁니다. 불일사 9층목탑모형의 철주부분과 전체의 길이 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체: 25 센티미터
철주: 7센티미터
철주장식제외: 6센티미터

만약 아래사진의 맨 위 철주의 구슬장식까지 포함할 경우 (7센티) 전체의 28%, 이를 제외할 경우(6센티) 24%가 됩니다.


지금처럼 치밀하게 1: N 비율로 정확히 만들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이 척도비례는 황룡사찰주본기의 기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비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불일사 9층목탑 모형에 더 많은 연구와 관심이 쏟아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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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아래는 [황룡사찰주본기]의 나머지 부분입니다.
(탑을 세운지) 백 구십여 년을 지나 文聖王代에 이르니 (탑을 세운 지가) 오래 되어 (탑이) 동북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라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여 고쳐 세우고자 여러 재목을 모은 지 30여 년이 되었으나 아직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의 왕이 즉위한 지 11년인 咸通 연간 신묘년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왕의 친동생인 上宰相 이간 金魏弘이 책임자가 되고 寺主인 惠興을 聞僧이자 脩監典으로 삼아 그들과 …… 大統이자 政法和尙인 大德 賢亮과 대통이자 정법화상인 대덕 普緣 그리고 康州輔인 중아간 金堅其 등 승려와 관인들이 그 해 8월 12일 처음으로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안에 다시『無垢淨經』에 의거하여 작은 석탑 99개에 각각의 석탑마다 사리 하나씩을 넣고, 다라니 네 가지와 경전 1권을 책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여 철반의 위에 넣었다. 이듬해 7월에 9층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承旨에게 임진년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 그 물건은 불가사의한데 다만 날짜와 사유를 적은 것이 없었다. 25일에 본래대로 해두고 다시 사리 백 개와 법사리 두 가지를 봉안하였다. (왕이) 사유를 적고 창건한 근원과 고쳐 세운 연고를 간단히 기록하게 하여, 만겁이 지나도록 후세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咸通 13년 임진년 11월 25일 적음.
      崇文臺 郞인 春宮 中事省의 臣 姚克一이 왕명을 받들어 씀.

成典
   監脩成塔事 守兵部令 平章事 이간 신 김위홍
   上堂 전兵部大監 아간 신 김이신
      창부경 일길간 신 김단서
   赤位 대나마 신 신김현웅
   靑位 나마 신 신김평긍, 나마 신 김종유, 나마 신 김흠선, 대사 신 김신행
   黃位 대사 신 김긍회, 대사 신 김훈행, 대사 신 김심권, 대사 신 김공립
道監典
   前國統 승 혜흥
   前大統 겸 政法和尙 대덕 현량
   전대통 겸 정법화상 대덕 보연
   대통 승 담유
   정법화상 승 신해
   普門寺上座 승 은전
   皇龍寺上座 승 윤여, 승 영범, 승 양숭, 승 연훈, 승 흔방, 승 온
         융
      維那 승 훈필, 승 함해, 승 입종, 승 수림
俗監典
   浿江鎭都護 중아간 신 김견기
   執事侍郞 아간 신 김팔원
   內省卿 사간 신 김함희
   臨關郡太守 사간 신 김욱영
   松岳郡태수 대나마 신 김일
黃龍寺大維那 승 향(), 승 (), 승 원강
黃龍寺都維那 승 ()
感恩寺都維那 승 방령, 승 연숭
   維那  승 달마, 승 (), 승 현의, 승 양수, 승 교일, 승 진숭,
       승 우종, 승 효청, 승 윤교, 승 (), 승 숭혜, 승 선유,
       승 (), 승 (), 승 총혜, 승 춘()

   안쪽 제1면 새긴이 승 聰慧
   안쪽 제2면 새긴이 신 連全
   안쪽 제3면 새긴이 助博士 신 連全
   ()舍利 신 忠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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