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주의와 전통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원래 이유들 역사전통마

[다윈 & 페일리] (장대익 저)에는 이런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와 집단유전자학자인 르원틴은 1979년에 [산마르코의 스팬드럴과 팡글로스적인 패러다임](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 이라는 매우 유명한 논문에서 당시 진화생물학자들이 자연선택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시험 가능한 가설을 세우지도 않은 채 이런저런 기능 때문에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는 식의 '단지 그럴듯한 이야기'에 만족하고 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마치 [캉디드](1979)에 나오는 낙천적인 선생 팡글로스가 "우리의 코는 안경을 받치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당시의 진화생물학이 입증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적응형질들을 터무니없이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논문제목에 등장하는 스팬드럴(spandrel)은 대체로 역삼각형 모양인데 돔(Dome)을 지탱하는 둥근 아치들 사이에서 형성된 구부러진 곳이다.

바로 이 벽화가 그려진 역삼각형 부분 (산 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의 돔밑에 있는 스팬드럴은 네 명의 기독교 사도를 그린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굴드와 르원턴은 적응주의자들 (Adaptionist)들이 만약 이 스팬드럴을 본다면 기독교적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구조물로 간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스팬드럴은 아치 위에 있는 돔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산물일 뿐인데 말이다. 중략. 건축물의 스팬드럴은 생물학적으로는 적응이 아닌 부산물(by product)이다. 

일본 도쿄의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복잡하다. 한번은 도쿄에 출장을 갔다가 너무 긴 거리를 걸어야했다. 그래서 나중에 일본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도쿄 지하철은 환승거리가 왜 그렇게 길대? 다리 아파 죽겠던데."
"응, 그거...... 도쿄시민의 건강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어. 여기서 별로 뚱뚱한 사람 못 봤지? 다 건강을 위해 오래 걷도록 만든 덕이야."
"에이, 농담하지 마. 그럴리가 있겠어?"
"그래, 사실은 지하철 노선마다 회사가 전부 다르거든. 그래서 이해관계가 다르다보니 전체 조율이 안된 상태에서 노선수가 지금처럼 늘어나서 생긴 문제지. 하지만 그 덕에 우리 다리는 튼튼하고 날씬해졌지. 하하."

아마 굴드와 르원틴이 일본에 오래 살았다면 적응주의(adaptionism)을 비판하기 위해 도쿄 지하철의 예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환승거리가 길도록 설계된 도쿄 지하철의 구조는 시민의 건강을 위한 놀라운 설계(적응)처럼 보이나, 사실은 노선회사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해야한다. 이것이 적응과 부산물의 차이다. 
=====

적응주의, 그리고 그리스의 백색신전, 조선 백자의 미학, 그리고 나무못 예찬

여기 나오는 '적응주의'는 보통 반적응주의와 함께 다윈의 진화론 및 진화생물학에서 다루는 두가지 이론중 하나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결과론'에 가까운 것으로 '결과'가 '원인'을 호도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정보다 결과에 중점을 두는 결과론과는 엄밀히는 다른 것으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모든 결과를 다른 원인은 배제한 채 적응의 결과로만 파악하는 편협한 관점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 '적응주의'는 비단 생물학과 유전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문학 (역사, 철학, 문화)에서도 똑같이 아니, 더욱 더 심한 경향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지요. 다음은 작년에 어떤 온라인방송에 들었던 대화를 옮긴 것입니다. 

A- 앞서서 말씀하신, "서양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중에 사실은 그게 아니다" 라고 하셨는데. 예를 하나 들어주시자면?

B- 파르테논 신전의 흰색을 독일의 어떤 학자가 그리스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백색이 아름답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는데, 사실 파르테논 신전은 색채가 다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빠졌던 겁니다. 그런데 이 변질된 모습을 보고 그리스의 옛날 모습과 계몽주의 시대를 이어보려는 그리스를 유럽의 시원으로 만드는 이론이 있었습니다. 바로 빙켈만이라는 학자가 말한 것입니다.

이 대화내용은 사실입니다. 유명한 백인우월주의 미술사가였던 독일인 빙켈만 (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 1768년))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의 내용으로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빙켈만은 그리스 조각상을 통해 인체미의 이상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 조각을 하얗게 ‘표백’했다.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과학조사부에서는 2007년 조각상에 강력한 LED 조명을 비춘 후 특수 시스템을 통해 남아 있는 색을 감지해내는 방법을 통해 파르테논 신전과 에레크테이온 신전에 다채로운 색상이 쓰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영국박물관에서 컴퓨터로 복원한 그래픽을 보면 파르테논 신전의 메토프와 프리즈는 이집트에서 수입한 이집션블루를 비롯해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스 문명은 ‘하얀’ 문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18세기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과 기념물, 조각이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스와 로마의 건물이나 기념비, 조각들이 밝게 채색되어 있었고, 때로는 부자연스런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사실은 19세기 중반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밝혀지게 되었다. 

그럼 빙켈만은 그리스 조각이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고전 지식에 정통했던 그는 플라톤에 나오는 그리스 조각에 대한 묘사를 통해 대리석에 채색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과 눈썹에 화장을 하는 정도 이상의 채색은 상상하지 않았다.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미학이론 체계 안에서 그리스 조각은 ‘하얗게 빛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 예술 가운데 유독 조각만을 편애했다. 

그의 신고전주의 미학은 미를 판단하는 요소로서 색으로부터 이탈하고, 색채를 버림으로써 흰색을 선호했다. 색채 보다 형태, 명암 보다 윤곽을 중시하는 그의 미학 이론에 따르면, 채색은 미의 본질을 구현한 형태를 인식하는데 방해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 조각의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표면은 현란한 색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형태에만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아름다움의 본질로 이끈다고 보았다. 

-민족문화연구원 기사 중- http://bit.ly/2drRnxG
=====

우리는 조선시대 미학의 정수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백자를 빼놓지 않습니다. 물론 백자는 아름답고, 동아시아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전한 독특한 미학을 가진 문화재입니다. 하지만, 그 '정신성'같은 형이상학적인 담론이라든가 어떠한 변화도 용납치 않는 엄숙주의를 비판하고자 합니다. 

그림이 없고 색채가 없는 조선 백자는 과연 조선선비의 소박함과 담백미를 표현하고자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일까요? [연려실기술]의 관직전고(官職典故)에는 이런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 해마다 사옹원 관원을 광주(廣州)에 보내어, 좌우 두 패로 나누고, 봄에서 가을까지 자기(磁器) 만드는 것을 감독하여 어부(御府)에 실어 들였는데, 그 공로를 기록하여 등급이 우수한 자에게는 물품을 하사하였다. 세종조에는 어기(御器)를 오로지 백자기(白磁器)만 사용하였는데,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채색 자기를 섞어 사용하였다. 회회청(回回靑)을 중국에서 구해다가 두루미와 잔에 그림을 그렸더니, 중국 물건과 다름이 없었으나 회회청이 귀하여서 중국에서 구하여도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중국에서는 비록 궁벽한 마을 초가집 가게에서라도 모두 그림 그린 그릇을 사용하는데, 어찌 모두 회회청으로써 그린 것이겠는가. 응당 다른 물품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중국에 물어보니, 모두 이것은 ‘토청(土靑)’이라고 하나, 이른바 토청이란 것 역시 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그림 그린 자기가 매우 적었다. -용재총화

회회청은 페르시아의 산화코발트 안료로 청화백자를 만드는 파란 안료입니다.
이런 것이 청화백자입니다.


그러니까, 세조대에 이르러 채색자기가 발전했는데 회회청을 명에서 얻어다가 사용합니다. 이 안료가 비싸서 구하기 힘들자, 채색은 커녕 그림을 그린 자기도 만들기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는 이 비싼 회청으로 그린 그림자기가 왕궁뿐 아니라 시골의 일반그릇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그럴수있느냐고 명나라측에 물어보니 비싼 회청대신 '토청'이라는 싼 안료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 토청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림자기'는 점점 매우 적어지고 결국 쇠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청자냐 백자냐'의 이야기가 아니라 채색백자, 그리고 그림백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흔히 여기 나오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듣다시피 조선시대에는 초창기부터 성리학적 이상을 위해 담백하고 깨끗한 백자를 추구했다는 (근거가 부족한) 형이상학적인 담론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우리는 우리의 선박이나 건축물에 쓰던 나무못에 대해 흔히 찬사를 보내곤 합니다. 즉, 이런 내용입니다 (글 출처는 잊었지만 전통선박에 대한 저서중)

사실 이 내용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제 소개한 이 글에 '세종조'기록에 바로 저 부식의 정도와 조선배의 우수성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정보를 '취합적'으로 선택한 것이지요 (이런 선박관련 정보외에 다른 나무못에 대한 용도도 아시다시피 대부분 찬사일변의 태도가 보통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 조상들은 항상 나무못을 쇠못보다 우수한 물건으로 보고 있었을까요? 다음을 보시지요.

바로 그제 소개한 글 (성종대, 1473년)의 40여년전 기록, 세종실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5월 19일
또 강남(江南)ㆍ유구(琉球)ㆍ남만(南蠻)ㆍ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배는 모두 쇠못을 써서 꾸민 데다가, 또 많은 날을 들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견실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빨라서 비록 여러 달을 떠 있어도 진실로 물이 새는 일이 없고, 비록 큰 바람을 만나도 허물어지거나 상하지 않아서 2, 30년은 갈 수 있사온데, 우리 나라 병선은 나무 못을 써서 꾸민데다가, 또 만들기를 짧은 시간에 급히 하여 견고하지 못하고 빠르지도 못하며, 8, 9년이 못가서 허물어지고 상하게 되므로, 따라서 상하는 대로 보수하기에 소용되는 소나무 재목도 이어가지 어렵사오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청하건대, 이제부터 여러 나라의 배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급하게 만들지 말고, 쇠못으로 꾸며서 단단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빠르게 하고, 그 위의 구조도 여러 나라의 배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밖은 낮게 하여, 물이 빗가로 흘러 내려가게 하여 배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배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옵소서.

보시다시피 류쿠국(유구국), 일본국등의 배는 쇠못을 써서 우수한데 우리는 나무못을 써서 여러 폐단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래처럼 중국배와의 비교도 나옵니다.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병조에서 중국 배의 제도에 따라 병선을 제조할 것을 건의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각 포(浦)의 병선은 모두가 마르지 아니한 송판(松板)으로 만들고 또 나무못을 썼기 때문에, 만일 풍랑을 만나면 이어 붙인 곳이 어그러지고 풀리기 쉬우며, 또 틈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새고 젖어서 빨리 썩게 되어 7, 8년을 견디지 못하고, 또 개조하기 때문에 연변의 소나무가 거의 다 없어져 장차 이어가지 어려울 형편입니다. 중국 배도 역시 소나무로 만들었으나, 2, 30년을 지날 수 있사오니, 청컨대 중국 배의 제도에 따라서 쇠못을 써서 꾸미고 판(板) 위에는 회(灰)를 바르며, 다시 괴목판(槐木板)을 써서 겹으로 만들어 시험하되, 만약 괴목을 구하기 어려우면 각 포(浦)에 명하여 노나무[櫨]ㆍ전나무[檜]ㆍ느릅나무[楡]ㆍ가래나무[楸] 등을 베어다가 바다에 담가 단단하고 질긴가, 부드럽고 연한가를 시험하여 사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한 18세기 정조대의 기록인 [일성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일성록
정조11년 정미(1787,건륭 52)
5월2일(무진)

또 아뢰기를, “유사 당상(有司堂上) 서유린(徐有隣)이 아뢴 내용에, ‘호남 전선(戰船)의 나무못은 기한이 너무 짧아 새 못을 만들기 위해 잇달아 나무를 베어 내고 있습니다. 전 좌수사(左水使) 강오성(姜五成)의 장청(狀請)에, 「영남의 제도를 준용(遵用)하여 쇠못으로 대신하니, 옛날에는 36개월이 되면 개삭(改槊)하던 것이 지금은 84개월이 되면 개삭하니, 통틀어 계산하면 4년 사이에 1만여 그루를 얻은 것입니다. 먼저 좌수영(左水營) 소속에 시행하였는데, 행한 지 몇 년 만에 여러 일을 처리한 것이 이미 두서가 있습니다.」 하였으니, 또 호남의 오른쪽 연해 지역으로 하여금 이 전례를 본받아 쓰게 하고 이어 기호(畿湖)에 두루 행한다면 송정(松政)에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하여, 그대로 따랐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나무못이란 존재에 대해 이런 저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 그때 시대의 흐름 (선박의 시대별 필요성)에 따라 나무못과 쇠못의 효용성을 바꾸어가면서 이용해 온 것입니다. 실은 나무못을 폄하할것도 없지만, 칭송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

그리고 한옥을 비롯한 건축문화

이는 '건축문화'에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한옥의 미학'을 이야기할때 흔히 우리는 소박미, 자연미, 절제미, 담백미, 여백의 미등을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형이상학적인 수사들입니다). 아래는 [한국문화자원의 이해]중 3장인 '한옥의 미학'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또한 한옥에는 불필요한 장식이 없는 절제의 미학이 있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치장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실용적 또는 상징적 기능을 가진 구성요소들의 합리적 구성이다. 이러한 한옥의 미학은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성리학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외양의 꾸밈을 싫어하고 내용과 실질을 숭상하는 것은 성리학 이전부터 존재해온 유가미학(儒家美學)의 오랜 전통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조선후기 한옥들의 특징중 하나인 무장식성을 '절제미'로 칭하며, 한옥의 대표적 미학이 이것이고, 또한 (역시나) 정신성에 연결, 성리학적인 가치관에 걸맞으며 이러한 가치관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 '성리학 이전' 즉 조선중기 이전부터 우리의 오랜 전통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이 쓴 [임하필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임하필기 순일편(旬一編)
사가(私家)의 단청(丹靑)
임진왜란 전에는 개인 집에도 모두 단청을 칠하였다. 그래서 고가(故家)의 천정 판자 위로 보면 단청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또 기둥을 자르고 대들보를 더 올린 흔적이 있는데, 왜병이 말을 먹인 곳이라고 전한다. 서적에도 종종 말발굽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왜놈들이 마구간 대신 말을 세워 두는 곳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2015년 3월에 나온 한국학논집의 [임진왜란 전후 영남지방 건축의 전개]라는 논문을 보면 이 영남지방의 임진왜란 전후 건축술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서원의 사당 건축은 대공 위치에서 촉주와 운공이 소로와 결구된 형식에서 판대공으로 (임진왜란 전후) 간략화되는 현상이 확인된다. 서원의 강당 역시 동일한 간략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택건축에서 별당형 사랑채는 임난 이전에는 추녀를 사용하지 않은 형식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한쪽에만 추녀를 사용하는 형식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시대가 더 지나면 이런 모습은 사라지게 되고 추녀를 사용하는 형식이 우세하게 된다. 중략.

또 임난 직후 사찰 불전과 향교 대성전은 서로 다른 용도에도 불구하고 5량의 기본 구조, 다포 공포 형식, 간략한 맞배지붕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공통점을 통해 전란 직후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공이 단순화되는 경향을 추정할 수 있다.
=====

두 번의 大戰을 겪고 전해내려오던 삼국시대, 고려대의 건축유산을 포함한 온 국토가 폐허로 돌변한 뒤, 열악한 경제상황과 성리학이 교조화되던 17세기이후의 건축은 분명 시공면에서 절제에 힘쓰고 소박함을 강조한 건축구조나 양식이 발견되곤 합니다 (물론 이조차 건축물의 부분으로 들어가면 다른 양상이 나옵니다만).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주류전통건축만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시대를 소급해 올라가며 통시적인 일반론을 대담하게 내놓는 일은 필자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온돌이 '한옥의 정의'이며 '찬양할 대상'으로만 격상시키는 최근의 한옥담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필자는 온돌은 소빙하기에 접어든 고려말기 이후 한반도 건축의 적응의 결과일뿐,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 온돌 역시 그 유행의 시작이 부산물적일 수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몇 안되는 소규모 고려시대, 조선전기 건축물이나 조선후기식 한옥을 비롯한 건축물의 특징을 '미화'시켜서 하나의 일종의 '엄숙주의'로 포장 (여기에는 흔히 실체가 희미한 형이상학적 수사와 이론이 붙곤 합니다), 이것이 마치 한국의 통시적 미학을 지배하는 하나의 단일한 잣대인양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에 언급한 '적응주의의 교조화'에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일과 다름없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적응주의'나 진배없는 맞추기 미학으로 현재의 한국문화를 포장하는 것은 비단 그 '원인'이 틀려서 오류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적응주의는 현재 적어도 한국학의 여러 분야에서 하나의 '엄숙주의'를 강요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주 강력한 색깔과 모양을 가진 '색안경'을 쓰고 자료를 들여다보고 문화재와 유구를 들여다 보는 우를 범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틀에 맞지 않는 것은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한다거나, 혹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거나하는 경우를 만들어 냅니다.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문화적 적응주의'역시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내부동력중 하나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적응주의를 지양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문화의 여러 양태를 평가하거나 관찰할 때 이러한 색안경을 벗어두고 볼 수 있느냐없느냐의 여부는 한국학의 여러분야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 문화의 통시적인 여러 시대적 모습을 다양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살려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대중적으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고려 신장도(神將圖)

물론 적응이 아닌 역사적 문화적 부산물이라 해도 그것이 특정문화집단내에서 그후 발전되어 왔고 특유의 미학을 창조해왔다면 그것은 마땅한 평가와 자산으로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를 넘어서 그 발생원인을 대담하게 상상으로 포장해 이 양태들을 하나의 현재 사회의 문화적 스탠더드/잣대로 격상시켜 이데올로기화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종종 이런 작업은 '원인'을 포장하고 신격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는 우리 문화를 객관적으로 보는 힘은 물론, 시대별 풍부한 모습을 살려내는데 생각보다 심각한 벽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적응주의'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분야까지도 그 파급력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국가간의 정체성 문제에서도 '결과'가 '원인'을 호도하거나 뒤바꿔버리는 일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좋은 예가 한국, 일본,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입니다. 짧게 단상을 피력한 바는 있지만, 언젠가 따로 다루어 보지요). 이 역시 현재의 안경을 벗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학구적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간접적이나마 역사밸리에도 올릴 수 있는 글같아 일단 올립니다)

핑백

  • 까마구둥지 : 만월대와 황룡사는 '붉은 단청과 기둥'을 중심으로. 2016-12-09 10:57:03 #

    ... 로 '과거를 들여다 보는' 우는 정통 역사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자의 큰 관심사인 건축쪽에서도 강하게 이런 오류가 발생하곤 하지요. 적응주의와 전통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원래 이유들 이런 비판은 사실 알게 모르게 한국문화의 각 분야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흔하게 나오는 비판입니다. 다만 '연구'와 '이론적 체 ... more

  • 까마구둥지 : 한국 도깨비는 뿔과 방망이가 없었을까? 2017-01-29 05:25:21 #

    ... 의 뿔 달린 야차/도깨비들뿔달린 18-19 세기 양각도깨비/야차 (해외유출문화재)조선후기 작자미상 해상명부도에 등장하는 양각도깨비적응주의와 전통에 대한 편견을 깨는 원래 이유들 ... more

  • 까마구둥지 : 고려불화의 세밀함 수준. 2017-02-12 07:38:30 #

    ... 있다고 보았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로 '순백의 미'를 강조한 빙켈만의 해석도 사실 요즘보면 갖다붙이기 식으로 틀린 부분이 많습니다- http://luckcrow.egloos.com/2599461). 즉, 고종이 '고려청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완성된 담론으로 이는 당시까지 Access point가 조선후기에 ... more

  • 까마구둥지 : 서서히 되찾는 통시적 균형- 고려시대의 화려미도 우리의 미학. 2018-03-25 11:59:49 #

    ... 든 것을 바라보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도 하고 있는 내부동력이 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담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적응주의와 전통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원래 이유들 ======교토 지은원 [오백나한도]중 그도 그럴 것이 언급한 선각자들의 전성기인 30-40년대에는 아직 고려불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 more

덧글

  • 핵무장 미군철수 2016/10/23 11:47 #

    흰옷이 떠오르는군요.
    흰색이 좋아서 염색을 안한 건지 염료가 비싸서서 염색을 못한 건지...
  • 역사관심 2016/10/24 06:00 #

    결코 알 수 없겠죠 (획기적인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비하할 것도, 추켜 세울 것도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남중생 2016/10/23 15:30 #

    스티븐 제이 굴드 씨는 고생물학 분야에선 어마어마한 권위자인데, 저렇게 신랄한 글도 쓴 걸 보니 아마 "유사생물학자"들 때문에 꽤나 속을 썩인게 아닌가 싶네요...
  • 역사관심 2016/12/06 08:44 #

    사실 굴드선생책은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이 정말 흥미로웠죠. 저 글을 쓰던 79년 당시는 팔팔한 나이였던지라 역시 신랄한 정도도 비례한 것 같습니다.ㅎㅎ
  • 레이오트 2016/10/23 21:13 #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전통'이라는 것들 중 대부분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일종의 '도시전설'인 경우가 많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스코틀랜드의 자유의 프리덤을 향한 열망을 상징하는 전통의상 킬트와 한국의 혼이라고 자랑하지 못해 죽을려는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잔뜩 넣은 음식이 있지요.
  • 역사관심 2016/10/24 06:08 #

    원래 전통이란 건 만들어지는 거라 그 과정을 애써 비판하거나 부인할 필요도 없다는 게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애초에 그런 물건을 그런식으로 비판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만, 문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단계부터는 '풍부한 전통의 양태들'이 아니라 '강압적 스탠더드들'로 변질되어 버리니까요.
  • 레이오트 2016/10/24 08:40 #

    제가 우려하는게 바로 그런 식으로 강요당하는 도그마입니다.
  • 역사관심 2016/10/24 08:47 #

    동감합니다. 그게 바로 도그마죠.
  • 2016/10/24 00:1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0/24 08: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