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위의 다락방, 그리고 낭무밑의 사람들 (15세기 조선전기 누방과 행랑 기록추가) 한국의 사라진 건축

얼마전 조선전기까지의 한옥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정형한옥과는 또 다른 미학이 있음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중층낭루와 누방(다락방)을 중심으로 소개한 바 있지요. 특히 이종성의 [노은리 고택의 건축 시기와 가구(架構)의 원형 고찰]이라는 올해 (2016) 소개된 논문도 함께 소개했는데, 이 중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Fig.4>에서 보듯 보수 전의 사진에는 지금은 다락이 없는 좌측 익랑과 행랑의 상부에 다락 문틀의 모습이 분명하다. 따라서 익랑과 행랑 상부 전체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기록에서는 익랑이나 행랑에 중층공간을 많이 배치한 것이 조선전기 상류주택의 한 특징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서울에 거주했던 상층 양반 오희문(1539∼1613) 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해 진 죽전동 친가의 모습을 기록 하면서 주택의 배치를 ‘북·동·서 누칸, 몸채, 부사랑[北 東西樓間身梗付斜廊]’이라고 표현하였다.9) 표현이 간략 하여 구체적인 공간배치를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낭루가 몸채[身梗]를 둘러싸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전기 한성의 상류 건축에서 층루가 보편적인 요소였으며, 특히 익랑이나 행랑 등의 낭무(廊廡)를 중층으로 지은 집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오늘은 이러한 기록중 특히 조선전기 한옥의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는  '다락방'(2층방)부분과 '행랑'의 높이부분을 보충해주며 확인시켜주는 사료를 몇 점 발굴,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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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위의 다락방, 그리고 낭무밑의 시체

조선중기 문신이었던 이기(李墍, 1522~1600년)의 저서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합니다.

송와잡설(松窩雜說)
○ 상공 신용개(申用漑)는 젊어서부터 의기가 구구하지 않고 큰 절조가 있었다. 그의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咸吉道) 감사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변란에 대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뛰어 들어가서 있었다. 적졸(賊卒)이 감사를 찾지 못하고 가려는 참이었는데, 소리(小吏)가 그가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서,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신용개(申用漑, 1463~ 1519년)는 저자인 이 기보다도 한 시대전인 15세기후반의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신면(申㴐, 申沔, 1438~ 1467년)이 자신의 집에서 이시애의 변고때 죽음을 당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때 숨어있던 장소가 '신면 자신의 저택중 '대청'위에 있던 다락'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投入於廳上曲樓之隙。凶卒等之不得將去

廳上曲樓之隙 즉, 마루(대청)위에 있는 '굽은 다락(曲樓)'의 사이에.

임의로 '작은 다락'이라고 의역했지만, 원문을 보면 작은이 아니라 '굽은 곡'자를 썼습니다. 굽은 곡자는 다른 뜻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구석자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묵한 2층다락 위의 구석에 숨었다로 해석하면 좋을 듯 합니다. 

주지하듯 보통 한옥에서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있는 큰 마루를 대청이라고 합니다 (혹은 대청마루). 요즘 우리가 보는 한옥의 대청은 보통 이렇습니다. 사진은 조선후기 낙안읍성의 내아건물의 대청마루입니다.
이 대청에는 어떤 2층방도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민속촌의 양반집 대청마루도 이렇게 재현합니다.
물론 새로 짓는 한옥도 대부분 이런 모습이지요.
그럼 저 신면(申㴐)이 15세기 중엽 죽음을 당한 저택 대청마루 바로위의 '다락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현재로썬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조선전기에 세워진 예천 권씨 종가별당의 사랑채 대청을 보면 어떤 느낌은 받을 수 있는데, 이 저택은 임란전 인물인 권문해(1534∼1591년)의 할아버지가 지은 저택이므로 아마도 최소 15세기중엽의 건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신면 시대와 일치하죠. 다음은 종가별당의 사랑채 대청입니다.
사랑채는 작은 부분이므로 규모는 작은 대청이지만 들보가 꽤 높습니다. 어쩌면 저런 공간에 작은 방을 마련하고 뒤쪽에 보이는 계단구조를 설치했을지 모릅니다. 방의 규모는 아마도 아래 보이는 권씨 종가별당의 다락방들정도였을 것 같군요.

분명 중층부분이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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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와잡설]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저택기록이 나옵니다. 바로 조선전기의 유명인물 '신숙주'의 저택입니다. 그런데 이 신숙주의 저택은 처음 소개한 '신면저택의 다락방'과 연계되는 같은 건물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면은 바로 신숙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지요 (*네비아찌님 정보).

○ 고령(高靈 고령은 고을 이름으로 봉호(封號)) 신숙주(申叔舟)의 부인 윤씨는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다. 숙주는 영묘(英廟 세종) 때에 8학사(學士)에 참여하였고, 성삼문(成三問)과는 더욱 친하였다.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 때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발각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섬삼문 등과 서로 친교가 두터운 것이 형제보다도 더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것이라 생각되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自決)하려던 참이었소. 당신이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

신숙주(申叔舟, 1417~ 1475년) 역시 신면이나 권문해의 조부와 같은 시대의 인물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1453년 수양대군의 반정때 자신의 저택에 돌아오자, 중문이 열려 있는데 부인이 사라져서 여러 곳으로 찾아다닙니다. 벌써 이 부분이 흥미로운 것으로 사실 현재의 정형한옥구조라면 그다지 부인이 있는 곳을 찾기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채와 사랑채 정도만 뒤져보면 금방 발견되었겠지요.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아' 다닙니다. 벌써 행랑등으로 건물들이 연결된 느낌을 주고 있지요. 그리고 그냥 설렁설렁 찾은 것이 아니라 '公歷探 공이 온 힘을 들여서 찾아' 다닌 것입니다. 그래도 안 보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부인을 어디서 찾느냐, 바로 '다락에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叔舟還家。中門洞開而夫人不在。公歷探房廡。見夫人獨上抹樓。手持數尺之布。坐於樑下。

公歷探房廡   공이 방이며 행랑/복도 (廡- 복도, 행랑, 곁채)를 온 힘을 다해 찾으니
見夫人獨上抹樓  부인이 홀로 말루(抹樓)위에 있는 것이 보였다.
坐於樑下 들보 아래 앉아 있었다.

여기 나오는 '말루'라는 것은 보통 '마루'의 원형으로 추정하는 단어입니다. 즉, '대청마루위 들보아래' 앉아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럼, 이 기록이 과연 현재 우리가 보는 한옥의 대청마루위에 앉아있는 모습일까요? 그렇게 유추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앞 구절에서 신숙주가 방이며 행랑이며 온 집을 다 찾아다니는데 떡하니 열려 있던 대청마루에 그녀가 앉아있었다면 못찾을 리가 없지요 (아마 가장 쉽게 찾을 장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上抹樓' 는 '말루위 장소', 즉 대청마루의 다락구조를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추정이 더 힘을 받는 것은 바로 다음 구절 '坐於樑下' 들보아래 홀로 앉아있다 라는 부분때문입니다. 현재의 대청마루구조라면 절대로 '대들보 바로 밑에 앉아'있다고 표현하지 않을 겁니다. 즉, 대청마루위의 다락방, 바로 대들보와 가까운 그 곳에 부인이 숨어 있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신숙주와는 정치적 대립관계인 당대인물 성삼문의 외손고택으로 알려진 엄창고택의 창고를 보면 어느정도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엄찬고택은 더 후대인 1670년대 건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삼문 엄찬고택의 광채

이렇게 찾기 힘든 구조의 다락들이 있던 조선전기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또 한 점 전합니다.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연암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사흘 동안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때렸더니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림에 온통 빠져서 영욕(榮辱)을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의 [연암집]에는 조선중기의 화가 이징(李澄, 1581~ ?)이 어린시절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징의 작품

그가 어린 시절 즉 1580년대 (임진왜란 직전)에 다락에 올라가서 그림연습을 하는데 그 집사람들이 어린 이징이 사라진 줄 알고 무려 3일이나 식구들이 찾아나섰지만 찾지 못합니다. 3일후 찾아낸 곳이 바로 '다락 위'. 만약 이 장소가 현재의 한옥개념의 사방이 뚫린 이런 정자형 루라면 있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되겠지요.
李澄幼登樓而習畵。이징이 어린 시절 루(다락)에 올라 그림을 공부하는데 
家失其所在。집에서는 그 있는 곳을 몰랐다.
三日乃得。3일이 지나 비로소 찾았다. 

즉, 이 기록은 중층의 전기한옥의 복잡한 구조를 유추케 하는 중요한 정보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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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가 죽어있던 자리

여기서 다시 이종성선생의 최신논문중 소개한 부분으로 돌아가봅시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전기 한성의 상류 건축에서 층루가 보편적인 요소였으며, 특히 익랑이나 행랑 등의 낭무(廊廡)를 중층으로 지은 집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익랑, 행랑등 이러한 낭무(廊廡)가 '중층'으로 된 저택이 많았다는 추정입니다. 참고로 '낭(廊)은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거나 감싸고 있는 좁고 긴 건물을 말하고 (행랑, 회랑, 익랑, 천랑등), 무(廡)는 당 좌우에 부속된 건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층이라는 것은 결국 어느정도의 높이가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임하필기]에는 이런 부분이 등장합니다.

임하필기

춘명일사(春明逸史)
함흥(咸興)의 신사(神祠)

이희갑(李羲甲)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그의 두 딸이 임지에 따라갔다. 나이가 모두 6, 7세였는데, 어느 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주 앉은 채로 낭무(廊廡) 아래에 죽어 있었다. 이로부터 갑자기 도깨비가 감영 안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낮이고 밤이고를 가리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그곳에다가 신사(神祠)를 짓고서 감영에 들어오는 모든 물산(物産)들은 반드시 먼저 신사에 바쳤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계(警戒)가 있었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일을 폐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씨(李氏)들은 서로 이 감영에 부임하지 말도록 경계를 한다고 한다.
이희갑(李羲甲1764~ 1847년)은 조선후기의 문인입니다. 하지만, 그가 임했던 함경도의 이 저택이 고택일 가능성이 있지요. 이 저택에서 그의 6살, 7살배기 어린 두 딸이 죽었는데 서로 마주 앉은 채로 '낭무아래'에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낭무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낭무 '아래'에 마주 앉은 채로 죽어있었다는 이 그림은 인식적으로 이러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저 주출입구라고 화살표가 씌여 있는 종류의 공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요.


이러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남아있는 고택이 있습니다. 바로 경주향단입니다. 경주향단은 향교같은 게 아니라 엄연한 사택으로 유명한 양동마을에 있는 고택입니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년)이 1540년대에 자신의 노모를 위해 지어줬다는 이 집은 당시에는 99칸에 달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는 56칸만 남아있습니다.

현재도 매우 복잡한 구조인데 다음의 3D 영상을 보시면 약 절반이 사라진 지금도 현재의 한옥과는 완연히 다른 미학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택에 조선전기식 행랑 혹은 낭무의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작은 흔적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의 사진입니다.
경주향단고택 중 안채부엌부분

이 고택의 안채의 부엌은 특이하게도 2층구조입니다. 아래층은 뚫려 있지만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채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워 일반주택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제식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현재는 제사등을 모시고 남은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제식청은 부엌창고지만, 건물과 건물을 중층익랑으로 잇는 모습에 비근합니다. 아마도 조선전기의 고택들의 낭무는 벽체가 있는 모습으로 이런 식으로 지어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세종대의 기록에도 이러한 구조의 건축구조가 발견됩니다. 다음은 권채(權採, 1399∼1438년)가 광선헌이라는 건축물을 지은 기록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慶尙道)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

남관(南館) 권채(權採) 광선헌(廣善軒)의 기문에, “경상도는 영남의 큰 도인데 선산은 경계 위에 있어 실로 한 도의 큰 길거리[道]이다. 황화를 받든 수레와 일산의 사신이 연락부절하여, 가끔 같은 날 함께 와서 머물게 되어 늘 손님이 묵을 방이 모자라니, 손님 대접할 방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더욱 많아야 할 것이다. 전에 별관이 있었으나 좁고 누추하고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낡았으나, 군수된 사람들이 머뭇거리어 수리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한탄했었다. 무신년에 부사 이길배(李吉培) 공이 비로소 정사에 임하자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림에 과감하였으므로 1년이 못 되어 온갖 폐단이 한꺼번에 새로워졌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한 마을 노인들, 전 부사인 김치(金峙) 공과 전 현감 신희충(申希忠) 군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문서를 부(府)와 감사에게 올려 폐사(廢寺)의 재목과 기와로 새로 짓기를 청원하였고, 감사 홍여방(洪汝方) 공이 임금께 아뢰어 그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남아도는 재물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하지도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도 않고서, 기유년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경술년 2월에 준공하였는데, 지어놓은 건물이나 방들이 크고 넓고 짜임새가 있다. 그 동헌(東軒) 마루에 다락을 지었는데 시원스럽게 높고 맑게 터졌으며, 회랑(回廊)으로 연결하고 높은 담으로 둘렀다. 안으로 부엌과 바깥으로 외양간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의 감사 심도원(沈道源) 공이 돈과 물자를 넉넉히 대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였으므로 단청까지도 모두 다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버드나무 제방과 대숲, 국화 화단과 연못까지 좌우에 마련되어 그윽한 흥취를 한껏 돋구었으니 손님을 즐겁게 할 좋은 장소가 되었다. 중략.
즉, 대청에 다락(루)을 짓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둘렀다는 기록으로 이 역시 조선전기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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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아마도 같은 시기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 선생이 선대의 신주를 모셨다는 다락 역시 위에 나오는 다락구조의 장소를 말하는 것이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여헌선생속집 
문목(問目)에 답함
김겸가(金謙可) 휴(烋) 에게 답함 3절

배 나주(裵羅州)의 장자(長子)인 처사(處士)가 먼저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차자(次子)인 판관(判官)의 둘째 아들 유장(幼章)을 양자(養子)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선대(先代)와 처사의 신주(神主)를 판관의 집 다락 위에 봉안(奉安)하였는데, 판관의 상(喪)이 이미 3년을 지났으므로 이제 다락 위에 함께 봉안하려 하오나 미안할 듯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신주를 우선 한 당(堂)에 임시로 봉안하여 사우(祠宇)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간이 모자란 도시에서 주목받는 요즘의 현대식 도시형한옥의 경우 '중층'과 '이어지는 공간'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현재 대세인 조선후기형 한옥에는 없는 요소들입니다. 가운데 연정이 필요하고 긴 처마와 공간이 많이 필요한 현재 정형한옥의 경우, 이러한 특성때문에 도시형 한옥과의 상충으로 인해 도시형 한옥을 근본이 없는 한옥이라든가, 너무 급진적이라든가 하는 비판을 생산하는 많은 경우를 만들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이러한 흥미로운 여러 조선전기의 건축구조가 또다른 형태의 한옥으로 부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중층이 강조되고 버리는 공간을 최소화한 내부복도식 건축이 이어지는 고려시대 저택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선전기의 건축물이 도시형 한옥으로 더 어울린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런 복잡한 내부구조는 한국인들에게도 어린 시절 머문다면 그 구조로 인해 재미있는 추억을 듬뿍 가져다 줄 수 있고, 또한 외국인들에게도 '여백의 미'와 맞닿은 현재의 여유로운 한옥과는 또다른 여러 흥미요소를 갖춘 건축으로 다가설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구조의 '전통 여관'이 만들어진다면 아주 다채로운 공간을 생성하겠지요.

여러 형태의 시대별 한복이 부활하고 있듯, 하루 빨리 이 시대의 건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서 시대별 한옥의 재부활을 알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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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6/11/19 12:43 #

    오늘 글 평소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추천 버튼이 있다면 눌러드릴텐데 아쉽네요
    주인장님의 노력에 힘입어 사극 등에서 만든 고건축에 대한 왜곡된 제한적 이미지가 풀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6/11/20 01:13 #

    감사합니다. 고정관념이란게 무서운 놈이긴 하지만 또 한번 풀리면 눈 녹듯 한순간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는지라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가 극히 최근의 것들인지라 이제 시작이니까요.
  • 네비아찌 2016/11/19 12:59 #

    예로 드신 두 사람, 신면이 바로 신숙주의 아들입니다.
  • 역사관심 2016/11/20 01:13 #

    오 그렇군요! 그럼 저 두 에피소드가 어쩌면 연결되는 같은 저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랐던 정보인데 더욱 흥미롭게 전개되는군요. 감사드립니다.
  • 진냥 2016/11/19 18:22 #

    낭무 밑을 나무 밑의 오타인줄로만/식은땀
  • 역사관심 2016/11/20 01:14 #

    뭔가 벛꽃나무 밑에는....이런 느낌을 기대하셨는지도 ㅎㅎ.
  • 밥과술 2016/11/21 17:55 #

    재미있는 글 잘보고 갑니다.

    특히 귀한 사진자료들 너무 좋네요. 어릴적 생각도 많이 나고...
  • 역사관심 2016/11/21 18:52 #

    감사합니다. 추억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봅니다 ^^
  • 속좁은 바다표범 2018/09/18 01:42 #

    역사관심님 제가 경주 향단에 좋은 추억이 있는데 네이버검색창에 경주향단으로 검색하면 이글이 첫번째로 올라옵니다. 글 내용은 상관없는데 경주향단으로 검색했을때 첫번째 올라오는 글의 제목에 시체라는 단어가 들어가 경주향단의 이미지를 망칩니다. 향단은 낭무랑 관련있을지는 몰라도 시체랑은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글 제목 좀 바뀌주세요. 경주향단으로 검색할때 향단이 시체가 연관됬다는 선입견을 줍니다.
  • 역사관심 2018/09/18 07:08 #

    바다표범님> 좋은 추억이 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어린 댓글 감사드립니다. 충분히 이해하며 제목을 수정했습니다. ^^
  • 터프한 동장군 2018/09/20 14:55 #

    향단 검색하니 나오는데 향단에 대한 글은 아니군요. 안채마당에서 보이는 ㅁ자 하늘과 안채의 마루에서 보는 경관은 한옥의 매력에 빠지게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제는 후손분들이 살고계셔서 숙박을 해야만 볼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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