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검계의 선배, 살인계(殺人契) (2) 역사전통마

17세기 검계의 선배, 살인계(殺人契)-  그리고 15세기 조폭 김일동파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후속글이 꽤 늦어졌네요.

앞선 글에서 이어....이렇게 15세기말 전국을 뒤집어 놓은 조폭일당인 김일동파가 사라진 이후, 1500년대 즉 16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집단이 등장합니다. 바로 '살인계'라는 살벌한 이름의 집단입니다. 

우선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더 과거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집단의 발생의 기원을 한번 살피는 것도 좋은 포인트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때껏 다룬 범죄집단은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검계' (17세기후반~18세기), '살인계' (17세기초), '김일동파'(15세기말)등. 

하지만, 이 집단들을 묶어주는 일반명사가 있으니, 바로 이 영화제목입니다.


즉, '군도'는 도적떼 (떼도적)이란 말로 저 민란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삼국시대로 뻗어 있습니다.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혹은 남겨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15세기 김일동파 이전의 이러한 집단들은 '이름'이 따로 붙지 않았거나 혹은 조직화되지 않은 초기형태의 도적집단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9세기 기록에도 이미 흥미로운 집단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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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 群盜 (그리고 9세기 붉은바지단)

허목(許穆, 1595~1682년 )이 1667년 지은 [동사(東事)]중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기언 제33권 외편
동사(東事) 신라세가 하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전주(全州)에 웅거하고, 스스로 후백제(後百濟)로 일컬었다. 중략. 15세에 견훤이라고 자칭하고 방수(防守)를 따라 비장(裨將)이 되었다. 신라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마침내 군도(群盜)를 따라 군현을 겁탈하여 5,000명의 무리를 얻고, 무진주(武珍州)를 차지한 다음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인데 '군도'를 따라 5천의 수하를 거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럼 이 기록은 후대기록인 [동사]에서 첨부했을 뿐일까요? 사실 [삼국사기]에는 더 흥미로운 도적집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眞聖王(진성왕) 10년 (897)
도적들이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賊起國西南)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남들과 구별하였기 때문에 (赤其袴以自異)
사람들은 그들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人謂之赤袴賊).
도적들이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屠害州縣至京西部牟梁里)
인가를 위협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劫掠人家而去).

신라 제51대 진성왕 10년이면 897년 마지막 재위해입니다. 이 때 기록에 이 군도가 '붉은 바지로 통일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에 '赤袴賊' (적고적)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삼국시대에도 (당연하지만) 도적떼는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런 '통일된 복장'이 있는 집단도 있었지요. 군도 기록은 이외에도 많습니다만, 일단 고려시대로 넘어갑니다. 

12세기 고려중후기,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이런 생생한 군도의 약탈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이상국전집
 고율시(古律詩)
팔월 오일에 군도(도적 떼)가 점점 치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도가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 / 群盜如蝟毛
산 민중이 비린 피를 뿌리누나 / 生民灑腥血
군수는 한갓 융의만 입고서 / 郡守徒戎衣
적을 바라보곤 기가 먼저 꺾이네 / 望敵氣先奪

주: 당시 관군도 어찌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벌의 독도 아직 소탕하지 못했는데 / 尙未掃蜂毒
하물며 호랑이 굴을 더듬을 수 있으랴 / 況堪探虎穴
슬프다 이런 때에 훌륭한 사람 없으니 / 嗟哉時無人
누가 대신하여 와서 쇠를 씹을꼬 / 誰繼來嚼鐵

적의 팔은 원숭이보다 빨라 / 賊臂捷於猿
활쏘기를 별이 반짝이듯 하고 / 放箭若星瞥
적의 정강이는 사슴보다 빨라 / 賊脛迅於鹿
산 넘기를 번갯불 사라지듯 하는구려 / 越山如電滅

사졸들이 추격하여도 미치지 못하여 / 士卒追不及
머리를 모아 부질없이 입만 벌리고 탄식하네 / 聚首空呀咄
어쩌다가 그 칼날에 부닥치면 / 幸能觸其鋒
열에 칠팔은 죽는구려 / 物故十七八

활과 칼로 무장한 집단임을 알 수 있고 산넘기를 귀신같이 하는 신출귀몰한 집단입니다. 역시 관군은 전투로 붙어도 깨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지요.

부녀자가 죽은 남편을 곡하며 / 婦女哭夫婿
머리에 삼베 두르고 마른 뼈를 조상하네 / 髽首吊枯骨
황량한 촌락에 일찍 문 닫으니 / 荒村早關門
대낮에도 길가는 나그네 전연 없구나 / 白日行旅絕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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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12-13세기에도 끊이지 않던 군도는 15세기 들어 '김일동파'라는 조직화된 조폭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김일동의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1489년에서 약 20년전, 이 당시에도 여러 지역에서 여전히 군도기록이 등장하죠.

성종 7년 병신(1476,성화 12)
4월28일 (신축)
충청ㆍ경기 일대의 도둑에 대한 체포를 명하고, 와주인 권총에게는 주의를 주다

포도장(捕盜將) 이양생(李陽生)이 충주(忠州)로부터 와서 복명(復命)하기를, “충주(忠州)ㆍ음죽(陰竹)ㆍ죽산(竹山)의 경계인 수리산(愁里山)과 여주(驪州)의 강금산(剛金山) 등지는 도둑의 무리들이 둔취(屯聚)하는 것이 매우 많은데, 신 등이 형세가 약하고 또 갑주(甲胄)와 창[鋒]도 없어서 당해낼 수가 없으므로, 다만 10인만을 체포하여 충주와 여주의 두 고을[州]에다가 나누어 가두었습니다. 신 등이 저 곳에 있으면서 도둑이 민가(民家)를 불지르고 들어가 활을 쏘아 몇 사람을 상하게 하였다는 것을 듣고, 원주(原州)와 지평(砥平)의 사이를 지나면서 보니,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신도 거의 도둑에게 찔리는 바가 되었으나 임득창(任得昌)에게 의지하여 겨우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 도둑은 모두 권총(權聰)의 종[奴]입니다.” 하였다. 중략.  

이양생(李陽生)이 떼도둑[群盜]이 함부로 날뛰는 상황을 역력히 진술하고 (歷陳群盜橫熾之狀), 이어서 아뢰기를, “강금산(剛金山)은 곧 권총(權聰)의 친묘(親墓)가 있는 곳으로서, 권총의 종[奴]이 그 곁에 사는 자가 무려 수백 명인데, 산에 의지하여 장막[幕]을 치고는 경작(耕作)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으면서 낮에는 사냥하고 밤에는 떼도둑이 되어, 한 번 수색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문득 산중(山中)으로 숨어버립니다. 지금 함부로 날뛰는 도둑은 모두가 이 무리들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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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사냥꾼, 밤에는 군도(晝獵夜寇)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사냥꾼 무리가 도적이 되었을 가능성도 엿보이는 기록입니다. 즉, 그냥 농사꾼들이 만든 집단이 아니라 폭력을 쓸 줄 아는 무리였다고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양생'같은 인물에게 맡길 정도로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양생은 호랑이 잡는 것을 심심찮게 할 정도의 무공을 자랑하던 대장이었지요. [용재총화]의 기록입니다.

계성군(雞城君) 이양생(李陽生)은 본래 서자로 미천한 사람이다. 중략.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그가 호랑이를 잡는 것은 풍부(馮婦)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사람의 안색을 보고서 도적을 분변하여 10에 1이라도 실수가 없었으니 소옹(邵雍)이라도 이만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매양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잡을 일이 있으면 조정에서는 이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참고로 이 15세기에는 이미 채포군(採捕軍)이라는 전국 700여명의 매사냥꾼이 등록되어 있었으니 전문 사냥집단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군도'라는 것은 어떤 특정집단이 아니라, 도적떼를 가리키는 (조폭처럼) 일반명사에 가까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의 기록에도 계속해서 쓰이는 표현이지요. 다음은 황경원(黃景源, 1709~ 1787년)의 [강한집]에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강한집 제1권 시(詩)
시골집 8수〔田廬 八首〕

어느 날 앞 숲에 불빛 번쩍이더니 / 前林有火光
군도가 산 울타리에 들어왔네 / 羣盜入山籬
어머니께선 놀라 밤중에 걸으시어 / 母兮驚夜步
나를 업고 험한 산마루에 오르셨지 / 負余上嶺巇

빈 골짝에 사람 자취 사라지자 / 空谷無人跡
이윽고 위기를 면하였네 / 於焉免憂危
매번 부모님이 그리워질 때면 / 每懷父母心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 安得不涕洟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년)가 쓴 [자치통감강목]에 군도에 대한 이런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자치통감강목
사람이 미천하고 모인 사람도 적으면 ‘도(盜), 모인 사람이 많으면 ’군도(群盜)’,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가는 것을 ‘반(叛)’

즉 '특히 수가 많은 떼도적'을 군도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혼란스러울 때 등장했던 군도는 15세기에 들어 김일동파같은 조직적인 집단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7세기말인 1684년 유명한 검계가 등장하기 약 반 세기 전, 또다른 무시무시한 이름의 조폭단체가 등장하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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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대말 살인계 殺人契


이긍익(李肯翊, 1736~1806년)의 [연려실기술]의 인조대 야사를 담은 '인조조 고사본말'에는 이런 흥미로운 기록이 등장합니다.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송광유(宋光裕)가 무고하여 옥사를 일으키다

허의에 대한 기괴하고 헛된 소문과, 철원(鐵原)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은 예전에 도성 내에도 떠돌고 있었으나 알아보니 그런 흔적은 없었고, 남원(南原)의 살인계(殺人契)는 비록 사류(士類)는 관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는 그 지방의 나쁜 풍습입니다. 이 몇 가지가 합하여 한 옥사를 이루었으므로 그 계획이 교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이미 오랜 두기문(杜起文)을 대장이라 일컫고, 몸이 상(喪) 중에 있는 우전(禹甸)을 가리켜 활쏘기 계(契)를 한다고 하였으니 허위인 증거가 한 가지뿐이 아닙니다. 

여기에 반란에 대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士類' 즉 선비무리가 끼지 않은 (이 말은 '정치적'인 집단이 아니란 뜻입니다) 순수악인집단인 '남원'의 '살인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저 남원출신 '송광유'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 1628년의 기록이므로 이 때 남원에는 이미 '살인계'라는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여기 나오는 살인계가 마음대로 가져다 쓴 이름인 두기문(杜起文, 1571년~?)은 만경출신의 무장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 전쟁에서 모두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기문의 생몰년대 중 사망년이 확실치 않은데 적어도 1628년이전에 (즉, 57세) 죽었음을 알려주고 있지요. 살인계라는 집단은 남원에 특화되어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이 송광유 사건을 다룬 인조실록 6년의 기록에서도 보이는데, 이미 당시 규모가 수백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12월18일(갑진)
진인의 출현에 대한 변란의 조처

남원 사람 송광유(宋匡裕)가 언문으로 상변(上變)하기를,
“전 좌랑 윤운구(尹雲衢)가 신과 친한데, 하루는 신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고 하여 진인(眞人)이 이미 나왔다. 한 술서(術書)에 「하늘이 사람을 내렸으니 그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우(雨)’ 자는 내릴 강(降) 자의 의미이다.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렸는데 사람의 얼굴 모습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대개 의논하는 계책을 들어 보니 ‘임게ㆍ임타(林㙐)ㆍ임위(林㙔) 등은 광주(光州)와 화순(和順)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이상온(李尙溫)ㆍ국사효(鞠事孝)ㆍ김행(金行) 형제 등은 담양(潭陽)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이유(李游)는 남원(南原)에서 살인계(殺人契)인 당룡(倘龍)ㆍ부용남(夫龍男) 등 수백 인과 변을 일으킬 것이고, 유인창(柳仁昌)ㆍ유선창(柳善昌)은 고부(古阜)와 부안(扶安)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송흥길(宋興吉)ㆍ송영걸(宋英傑)ㆍ송방지(宋方知)ㆍ소신생(蘇信生) 등은 여산(礪山)에서 변을 일으킬 것이고, 우전(禹甸)ㆍ두기문(杜起文)ㆍ이의룡(李義龍)ㆍ유지호(柳之豪) 등은 전주에서 변을 일으킬 것인데, 우전은 부윤(府尹)이 되고, 두기문은 병사가 되며, 이의룡은 지성(城)을 지키고, 허의는 그 아들과 함께 중이 거느리는 승군 4천~5천 명을 거느리고 두류산(頭流山)을 거쳐 진주(晋州)를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는다. 운구ㆍ두추 등은 경중(京中)과 경기를 주관하여 일시에 반역하되, 만약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하삼도를 지키면서 일본에 구원병을 청한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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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언급한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비단 '야사'가 아닌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18세기의 이긍익이 참고한 문헌이 바로 살인계 출현당시의 인물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의 당대문헌인 [지천집]에서 부분을 따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래 원문의 첫줄과 마지막 문단을 붙여놓은 것이 위의 기록이고, 밑줄친 중간 부분은 빠졌습니다 (현재 아직 번역본이 없는 상태입니다).

지천집(遲川集)
遲川先生集卷之八 原文图片 
疏箚
代延平府院君箚
南原殺人契。雖不下涉於士類。而乃是本土惡風實有之事。以此數者。合成一獄。其計巧且慘矣。

然王者之獄。貴在原情定罪。則結約赴難之議。雖似浮妄。而其心則不過憂時之過而忠義之激耳。亦不過上恃朝廷。不自覺其爲兇人翻案之地耳。以此而陷於逆名。則天下之冤。孰有甚於此者乎。許懿之事。好怪之人。輾轉敷衍。以資笑謔。非智者之所宜道。鐵原之賊。本爲荒說。而南原之殺人契。無賴惡少私相剽劫之類。匡裕乃欲引此以成士林之獄。豈非不似之甚乎。

至於其死已久之杜起文稱以大將。身在草土之禹甸指爲射契。其他種種虛誕之狀。不一而足。若此等獄。雖在曩時。猶不可成。況此淸明之世乎。臣之所尤痛者。匡裕之祖祀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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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인 1629년, 남원 부사인 송상인이 이 살인계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전체를 공격한것도 아니고 고작 10여인을 죽였죠. 흥미로운 것은 이 10인을 잡은 수단이 정약용이 훨씬 후대인 1818년 저작 [목민심서]를 통해 (국민들이 서로 의심한다고) 비판한 항통(缿筩)법, 즉 투서함(投書函)을 통해 국민이 고발하는 수법으로 잡았다는 점인데, 이 시기까지는 항통법이 효과적이었음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살인계가 아닙니다. 그들은 복수로 송부사의 선조의 무덤을 파헤쳐 버립니다. 당시 봉분훼손이란 건 지금의 감각보다 훨씬 심각한 충격을 주는 패륜짓이었습니다.

인조 7년 기사(1629,숭정 2)
9월6일(정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면서 국정에 대해 논하다

윤지경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호남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건대 살인계(殺人契)가 조직되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송상인(宋象仁)이 적도들을 다스리려 하다가 선조의 봉분이 모욕당하는 변고를 빚었다고 하니, 상께서 방백에게 하유하시어 추적해 체포한 뒤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위한이 아뢰기를, 송상인이 고을에 부임한 뒤 항통(缿筩)법을 써서 10여 인을 잡아 죽이자 도당이 이 소문을 듣고 뿔뿔이 달아나면서 상인의 선조 묘를 파헤쳤다고 합니다. 토속이 이토록까지 패악스럽게 되었으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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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해 (1629년) [속잡록]의 기록에는 당룡(倘), 부용남(夫男)에 보스격인 양용부(梁夫)라는 이름도 등장합니다. 필자는 이 이름들에서 좀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 바로 모두 '룡(龍)'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연일수도 있겠지만 중간보스급은 이런 이름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속잡록 3(續雜錄三)
기사년 숭정 2년, 인조 7년(1629년)

○ 무고(誣告)한 송광유(宋匡裕)를 반좌율(反坐律)로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고 무고에 의하여 잡혀왔던 여러 사람이 모두 풀려 나왔다. 다만 윤운구(尹雲衢)ㆍ유인창(柳仁昌)ㆍ민안(閔安) 등 세 사람은 초사(招辭)가 명백하지 못하여 곤장에 맞아 운명하였다. 남원(南原)의 살인계(殺人契)의 두목 양용부(梁龍夫)도 역시 풀려서 석방되었으나, 남원부에서 의금부에 비밀리 통첩하여 도로 잡아서 가두었다가 죽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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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목들이 잡히고 처형까지 당했으나, 이듬해인 1630년에도 살인계는 계속 활개쳤고, 곳곳에서 회원들이 잡힙니다. 3월에는 구례에서 민가를 약탈하려다 20명이상이 체포됩니다.

인조 8년 경오(1630,숭정 3)
3월23일(계묘)
전라 병사 정응성이 살인계에 대해 치계하다

전라 병사 정응성(鄭應聖)이 치계하였다.
남원(南原)은 풍속이 모질고 사나운데, 평소 살인계(殺人契)란 것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달에 구례현(求禮縣)의 민가에 도적떼가 갑자기 들이닥쳐 살인하였는데, 본부가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20여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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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뒤 포상기록을 보면 정확히는 25명이었으며 박정이란 부사관직의 무인이 체포했음이 나옵니다.

인조 8년 경오(1630,숭정 3)
4월10일(기미)
전라 감사 송상인이 남원지방의 살인계에 관해 치계하다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치계하기를,
남원(南原)의 적(賊)이 지금 더욱 세력이 강해져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환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부근의 고을 가운데 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부사 박정(朴炡)이 중군(中軍) 김급(金級)을 천총(千摠) 김상견(金尙堅)으로 하여금 씩씩하고 날랜 자 70여 명을 이끌게 하여 신의 군관 박세중(朴世重)과 함께 일시에 떠나 보내 25명을 붙잡았는데, 죄의 경중을 조사하고 심문하여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효시(梟示)하는 일이 본래 아무 때나 쓰는 법이 아닌만큼 신이 여쭈어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본부에 취임하였을 때부터 적도들이 수령을 죽이고 죄를 탈취하려고 모의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현재 죄수가 옥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측량하기 어려운 화가 발생한다면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별도로 처단하여 징계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복계하기를,
남원의 적들이 살인계(殺人契)를 만들었는데 그 무리가 날로 불어나 인명을 해쳐왔습니다. 지금 두목이 처형되었습니다만 그 도당도 별로 경중의 차이가 없으니, 모두 끝까지 문초한 뒤 처단하게 하소서. 그리고 부사 박정은 계략을 꾸며 무려 25명이나 덮쳐 잡았으니 공로가 작지 않고, 중군 김급, 천총 김상견, 전 첨사 박세중 등도 병사를 이끌고 뒤쫓아 붙잡았으니 또한 매우 가상합니다. 모두 예(例)에 비추어 논상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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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해 5월의 기록을 보면 이 '살인계'가 후배집단인 '검계'에 못지 않은 흉포성 혹은 단결력을 지닌 이들임을 잘 보여줍니다.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3)
5월 5일(갑신) 맑음
좌목
전라 감사의 서목에서 살인계의 도적 잔당들을 고문할 때 날뛰다가 죽은 자가 40여 명이 이른다는 일을 보고하였다
전라 감사의 서목은 “살인계(殺人契)의 도적 잔당들을 고문할 때에 제멋대로 날뛰다가 죽은 자가 40여 명에 이르니, 신이 실로 조사하기가 어렵습니다.”라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 박정현 집안의 일기에 의거함 -
○ 全羅監司書目, 殺人契賊餘黨拷問之際, 自放殯斃者, 至於四十餘名, 臣實難問事。入啓。-朴鼎賢家日記

自放殯斃者 스스로 빈소를 만든 자 (즉, 자결한 자)
至於四十餘名 40여명에 이른다.

아마도 1629년에서 1630년 사이에 25명 외에 더 잡아들인 회원들이 있었을 텐데, 이 중 40명이상이 자결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이 정말 조사하기가 어렵습니다'라는 문장을 보면 '고문'이 심해서 죽은게 아니라, 스스로 불지 않기 위해 자결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참고로 이 기록은 '박정현 일기'에 의거해서 실록에 옮겼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인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의곡(義谷) 박정현(朴鼎賢·1562∼1637년)이 승정원에서 일하면서 기록한 일기를 말합니다. 이 문헌은 바로 올해 5월 (2016.5)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바 있습니다.

어쨌든, 남원지역에서 수면으로 대거 떠오른 살인계는 3년만에 그 두목급들이 잡히고 계원들이 속속 잡혀들어가면서 그 세력을 잃습니다. 그럼 살인계는 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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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부활

시리즈 글을 읽은 분은 아시다시피 이 뒤를 이어 17세기에 등장한 것이 창포검을 소지한 것으로 유명한 '검계'입니다. 살인계에서 약 50년이 흐른 1680년대에 등장하죠. 검계가 활개를 친 시대는 주로 1600년대 말~18세기경입니다. 간단하게 다시 소개하자면 처음 검계가 등장했을 때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난민(亂民)을 잡아 다스리다

갑자년(1684, 숙종 10)에 왜국의 국서가 온 뒤로부터 시국에 대한 시끄러운 소문이 날로 심하여 피난하는 사람의 가마와 짐이 동대문으로 나가는 것이 서로 잇달았다. 무뢰한 무리들이 서로 모여 계(契)를 만드니, 혹은 살략계(殺掠契)라 하고, 혹은 홍동계(鬨動契)라 이르고, 혹은 검계(劍契)라 하였다. 혹은 밤에 남산에 올라 태평소를 불어서 군사를 모으는 것같이 하고, 혹은 중흥동(重興洞)에 모여 진법을 연습하는 것같이도 하며, 혹은 피란하는 사람의 재물을 추격하여 탈취하기도 하여 간혹 인명을 살해하는 일까지 있었다.

청파(靑坡) 근처에 또 살주계(殺主契)가 있었는데, 목내선의 종도 또한 들어 있어 목내선이 즉시 잡아 죽였다. 좌우 포도청에서 7, 8명을 체포하여 그 계의 책자를 얻었는데, 그 약조에, ‘양반을 살육할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물을 약탈할 것’ 등이 있었고, 또 그 무리들이 모두 창포검(菖蒲劒)을 차고 있었다.

우대장(右大將) 신여철(申汝哲)은 관대히 용서하는 경우가 많았고, 좌대장(左大將) 이연하(李仁夏)는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적당들이 남대문 및 대간의 집에 방문을 걸기를“우리를 만약 모두 죽이지 못하면 종말에는 너희들 배에다 칼을 꽂고 말 것이다.” 하였다. 광주(廣州)에 한 과부의 서얼 사촌이 있었는데, 검계(劍契)의 일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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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이후 문헌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은 단연 검계입니다. 그럼 살인계는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위세를 떨친 이 단어는 1630년 소탕된 후, 약 90년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번에는 지역을 옮겨서 말이지요. 다음은 실록에는 없는 [승정원일기] 1725년조 기록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11월 23일(정사)

이병상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어사로서 영남(嶺南)에 왕래하였는데 영남의 향전(鄕戰)은 실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양산(梁山)이 특히 심한데 폐단을 일으키고 서로 해를 입히기까지 하면서 살인계(殺人契), 충화계(衝火契), 착졸계(捉倅契)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번 일도 분명 향전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실제로 복수한 것은 아닙니다. 법대로 처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여기 나오는 향전(鄕戰)이란 것은 고을끼리의 집단싸움이나 전투를 말합니다. 그런데 경상남도 양산에서 이 향전이 심한데 그 중 '살인계'라는 집단을 만들어 다른 지역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양산시와 남원시는 사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닙니다.
살인계를 다른 이름으로 충화계, 착졸계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는데 뜻은 이렇게 살벌하죠.
衝火契 찌를 충, 불 화,
捉倅 잡을 착, 사람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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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그 이름도 살벌한 살인계는 이렇게 1725년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검토한 바로는) 문헌에서 사라집니다. 이후에는 살인계를 마치 바톤터치하듯 튀어나온 '검계'가 19세기까지도 그 이름을 전하게 됩니다.

이런 검계가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비밀독립조직이었던 20세기초 검계단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예전에 살핀 바 있었지요.

단체명이 전하는 집단만 골라 시대별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赤袴賊 적고적 (9세기말)
金一同 김일동파 (15세기말~16세기초)
殺人契 살인계 (17세기초)
劍契 검계 (17세기말~18세기)
劍黨 검당 (19세기말, 1895년)
劒契黨 검계당 (1905년 기사)
劍契團 검계단 (1910년 기사)

이 20세기 검계단 글의 마무리와 오늘 살인계는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흥미로운 소재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의 마무리를 대신 차용해서 하겠습니다. 

"검계단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조선시대 악인집단이던 '검계'가 20세기 비밀조직으로 이어진다는 소재는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어 보이는군요."


덧글

  • 2016/12/01 10:1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2/01 10: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Scarlett 2016/12/01 12:53 #

    늘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6/12/02 00:39 #

    항상 관심가져주시니 제가 감사하죠 =)
  • 아빠늑대 2016/12/01 20:30 #

    그러고 보면 참 상상력을 자극할 집단들인데 어째 영화나 기타 등등으로 잘 안나오네요~
  • 역사관심 2016/12/02 00:41 #

    군도가 나왔고 중박은 쳤으니 앞으로 분명 검계는 나올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선 (동이) 이미 한번 나왔지만, 주인공격이 아니었으니 다시 한번 나올 듯 합니다.^^
  • 2017/03/21 03:1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3/21 05: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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