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와 황룡사는 '붉은 단청과 기둥'을 중심으로.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바로 얼마전 지적한 '적응주의'와는 조금 다르지만, '현재의 안경'으로 '과거를 들여다 보는' 우는 정통 역사학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자의 큰 관심사인 건축쪽에서도 강하게 이런 오류가 발생하곤 하지요.


이런 비판은 사실 알게 모르게 한국문화의 각 분야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흔하게 나오는 비판입니다. 다만 '연구'와 '이론적 체계'가 안 잡힌 아마추어의 '댓글식 비판'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즉,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학계나 나아가 현장에서 반응하는 경우 (즉 소통)은 매우 드뭅니다.

이러한 비판중 관련동호회나 기사댓글에 심심찮게 (즉 꽤 대중적으로) 보이는 비판이 바로 '한국고대건축의 재건 혹은 복원'시 발생하는 조선시대식 색감의 단청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현재 복원논의가 치열한 신라 황룡사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반가운 관련연구소식을 필자가 초고로 작성해 둔 글과 합쳐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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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건축 프로젝트들의 색감문제

가장 최근 재건된 한국고대건축 두 개가 있습니다. 바로 백제재현단지에 재현된 건축물들과 경주의 신라 월정교입니다. 사실 재현단지의 건축은 하앙을 재건건축중 최초로 도입하는 등, 꽤 적극적인 기법을 사용해서 흥미로운 프로젝트였습니다. 문제는 건축의 외장을 담당하는 '색감'과 건축에 비해 너무 허술한 내부장식과 실내아이템 (침상, 의자등)때문이었죠.

이 중 월정교를 포함한 고대건축뿐 아니라 고려시대건축의 복원시에도 항시 문제가 되는 것이 '단청'문제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어떤 문화재를 직접 마주쳤을 시 가장 인식적으로 와닿는 것은 '모양'을 제외하면 '색'입니다. 색이 바뀜에 따라 그 건축의 인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대표단청방식을 '녹색과 적색'의 조화 즉, 상록하단(上綠下丹)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적색과 녹색의 단청을 새로 재건하는 고대-중세건축물에도 그대로 적용해버리니, 사실 '하앙'같은 부분적인 건축아이템에 관심있는 전문지식을 갖춘 분들이 아닌 경우 그다지 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는 불만이 종종 표출되곤 합니다.

하지만, '상록하단'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기법이라 해서 근거없이 배제할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 부분에서 전문가들이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간 연구가 생각보다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백제재현단지나 월정교의 단청이 이런 식으로 칠해진 것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상록하단이 고대건축에도 적용되어 온 것은 사실 고려시대이전의 건축의 색감을 단순히 몰라서가 아니라, 이 기법이 당시에도 많이 쓰였다는 기존의 연구에 근거한 것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하지만, 필자는 항상 이 부분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불화나 (불화는 불교회화이니 건축에 반영해선 안된다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 종교화건 자국의 로컬문화는 생각보다 자세히 들어갑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당대 크게 영향을 주고받은 중국, 일본건축과 너무나 동떨어진 색감의 단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의구심을 해결해 준 이은희 박사의 논문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의 上綠下丹 단청기법 수용](2016)이 바로 얼마 전 발표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을 부분부분 발췌해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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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하단(上綠下丹) 기법은 건물에 단청을 할 때 햇빛을 많이 받는 기둥에는 붉은색을 칠하여 힘과 능력을 강조하고, 처마 등의 그늘진 곳에는 녹청색으로 명도를 높여서 전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한국 단청의 특징중 하나로 꼽힌다. 조선시대 단청은 기둥이나 동자주 등의 수직부재는 붉은색 계열의 석간주(石間朱)로 칠하고 창방이나 도리 및 보 등의 횡부재와 서까래, 부연과 같은 지붕가구는 녹색계열의 뇌록(磊綠)으로 칠한 다음 문양을 그려 넣었다. 

한국 단청연구사에서 上綠下丹의 인식은 조선시대 건축뿐 아니라 이전 시기까지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최근 복원된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시대 건물의 단청에도 上綠下丹기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동아시아 목조건축 문화권에 적용된 건축 채색 경향은 上綠下丹과는 달리 대부분 건물 전체를 붉은색으로 칠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복원된 고대건축 중에서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에 해당하는 건물로 북한 정릉사 보광전과 백제역사재현단지, 경주 동궁과 월지 및 월정교 등이 있다. 1993년 복원된 북한 정릉사 보광전은 전체적으로 적갈색과 적청색을 바탕색으로 하였다. 고구려시대 단청을 나타내기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을 응용하였다. 고구려시대 단청을 재현한 건물로 진천 보탑사 목탑을 들 수 있는데, 보탑사 목탑 역시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을 사용하였으나 바탕 색조는 上綠下丹의 기법이 적용되었다.

백제문화단지 중 사비궁과 능사는 백제시대 건축을 재현하고 단청을 한 건물이다. 건물의 성격에 따라 문양을 달리하였지만 바탕 색조는 上綠下丹기법이 적용되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뒤편의 건물 또한 동일한 색조사용을 나타내고 있다. 경주 지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복원 건축물은 대부분 上綠下丹이 적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 동궁과 월지에서 복원된 제1호 건물·제3호 건물·제5호 건물이 있고, 최근에 복원된 월정교 누교가 있다. 이들 건물의 단청은 모두 上綠下丹기법이 적용되었다. 이상의 고대건축 복원사례를 살펴보면, 북한 정릉사 보광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단청에 上綠下丹기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정교 (최근 복원- 역시 상록하단 단청)

이에 비해 예전에도 소개한 바와 같이 북한의 고구려재건 건축물인 정릉사의 대웅전 단청은 위의 논문처럼 적갈색 위주입니다. 벌써 분위기가 조선시대와 많이 다르지요.

평양 정릉사 (고구려단청 재현)

여기까지는 현재까지 한국 고대-중세건축의 복원의 단청 행태를 그대로 소개한 것이고, 이제부터가 본문입니다. 우선 그렇다면 대체 '왜' 우리 건축계는 그동안 이 상록하단 단청만을 고집해 온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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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綠下丹인식의 확산

단청과 관련된 가장 이른 자료는 1955년 국립박물관총서의 일부로 발간된 미술·고고학 용어집: 건축편이다. 책의 저자는 김재원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저자는 임천 (1908∼1965)으로 알려져 있다.6) 이후 1960년 국립박물관에서 간행된 미술자료 제2호에 실린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 는 임천이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 및 단청모사 작업을 하면서 조사내용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우선 현대 한국에서 단청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서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천이란 분의 '1955년 미술 고고학 용어집'입니다.

한석성(1923∼2003)은 1953년 만봉 스님을 통해 임천을 소개받아 부석사 무량수전, 창경궁 홍화문 등 문화재보수 일을 함께하였다. 1970년부터 10년간 문화재관리국 (현 문화재청) 단청기술강습회 강사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1982년 장기인과 함께 한국건축대계 Ⅲ: 단청을 저술했다. 上綠下丹이라는 용어는 한국건축대계 Ⅲ: 단청에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고 이러한 인식의 확산은 아마도 단청기술강습회를 통한 교육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발간되는 단청과 관련된 단행본 및 보고서에서는 한국 단청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上綠下丹을 언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조사된 고려시대 건물 대부분이 上綠下丹기법을 사용한 단청이었고, 비교 대상으로 삼을 만한 고려불화는 일본 곳곳에 산재해 있어 일반인이 관람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또한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분벽화를 연구대상으로 삼기 어려웠을 것이며 동시기 중국과 일본 건물의 비교연구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해체보수를 통해 창건 당시로 추정되는 부재의 발견이나 발굴보고서 및 해체수리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이전의 단청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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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한석성이라는 분이 부석사와 창경궁등을 보수하는데 1970년~80년 사이 즉 70년대 내내 단청기술 강사로 후학을 양성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1982년 [한국건축대계: 단청편]이라는 텍스트북을 펴냅니다. 이 70년대에 바로 '상록하단'이 한국의 거의 모든 건축에 스며드는 대표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논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남아 있던 고려건축이 이미 조선시대의 덧칠과 개보수를 통해 상록하단식의 단청을 지니고 있었고, 당시 여건상 (온라인부재, 일본과의 협력부재등) 일본에 산재해 있던 고려불화에 나오는 고려건축에 대해서는 거의 조사할 여건도 못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시대는 박정희 시대, 북한의 연구결과나 북한에 남아있는 고구려-고려 건축에 대한 조사는 언감생심이었지요 (참고로 주지하시다시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 고려의 수도는 개성입니다. 건축 문화재나 벽화 역시 대부분 북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중국은 당시 중공시절로 아예 적성국가였고, 일본 역시 지금보다 훨씬 경색된 관계로 경제협력을 제외한 문화계나 역사계의 협력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던 시절입니다. 

바로 이 시기, '매우 한정된' 고작 2-3 채의 고려건축에 남아있는 덧칠되어 있던 상록하단 양식과 또한 고작 한두점에 불과한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녹색단청(? 이 부분도 오해임이 논문 후반에 나옵니다)을 가지고 +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영향을 주었을 조선후기식 관념 (즉,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화재 건축물이 조선후기 것들임을 감안하면)과 Bias를 가지고 고려대이전의 건축 단청을 판단, 이를 후학양성에도 적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단청'이라는 용어의 변천입니다. 고려대에는 '단청'이 '벽화'를 뜻하는 것에 가까웠고, 이제껏 필자가 흔히 궁금해하던 단어인 '금벽'이라는 용어가 현재의 단청을 묘사한 것이라는 정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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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용어사용의 변화

上綠下丹을 한국 단청의 주요한 특징으로 보고, 고대건축까지 上綠下丹으로 인식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는 데 있다.  (주: 필자가 항시 강조하고 있는 한국문화계, 한국학계의 매우 큰 문제점입니다. 여기서 '현재'는 조선후기식 문화관념을 뜻한다 해도 무방합니다)

丹靑이 가지고 있는 붉고 푸르다는 뜻은 上綠下丹이라는 용어와 만났을 때 석간주와 뇌록이 어울려 한 그루의 소나무를 떠올리게 하고,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조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고려시대 문헌에 사용되는 단청이라는 용어는 현재의 단청이 가지고 있는 ‘목조건축에 채색하여 장식한 것’이라는 뜻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 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丹靑’이라는 용어는 주로 벽화나 그림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卷第二老巫篇: 丹靑滿壁盡神像
(온 벽에다 붉고 푸른 신상을 그리고)
卷第三草堂三詠: 墻壁煥丹靑
(담과 벽에는 단청이 환하고)
卷第十溫上人所蓄獨畫鷺鷥圖: 何人畫手得神授丹靑妙意
(그린 그림 또한 이백의 마음과 방불하구나)
卷第十題浦-小村: 須倩丹靑畫筆描
(화가 시켜 그려야만 묘사할 수 있겠네)
卷第十二徐學錄見和: 不用丹靑寫珠翠
(단청으로 여인까지 묘사하지는 마소)
赫上人凌波亭記: 丹靑不能似其眞也
(단청이 실물과 같을 수 없으니)

해석상 분명 여기서의 단청은 '그림' 즉, 벽화에 가깝습니다. 필자가 고려문헌에서 항상 궁금하던 '금벽'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금빛과 푸른빛이라는 이 단어의 조합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그다지 발견되지 않습니다.

고려시대 문헌에서 목조건축에 채색하여 장식하는 용어로 ‘金碧’이 사용되었다.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금벽이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제130권 열전, 제43 김준: 樑棟楹桷必以紋木異材雖遠
必致金碧相輝壯麗無比(이상 고려사)
(紋木등 기이한 재목으로 대들보, 서까래, 추녀를 만들 고 비록 먼 지방에 있어도 반드시 운반해 썼다. 그리하여 金碧이 相輝하고 화려한 품이 비길 바 드물었다.)

논문에서는 이외에도 7가지 이상의 비슷한 용례를 들고 있습니다. 즉 고려대에 우리가 현재 이야기하는 '단청'은 '금벽'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문헌 기록에서 ‘丹靑’이라는 용어가 목조건축물에 칠해지는 장식용어로 사용되는 시기는 조선시대 이후의 일이다. 즉, ‘丹靑’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주로 ‘繪畵’나 ‘壁畵’ 혹은 ‘안료’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단청 용어의 변화는 단청이 시대에 따라 변화됨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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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단청 색감

여기까지 '상록하단'이 한국 건축문화재의 복원과 재건에 어떤 시대의 건축이건 하나의 스탠더드가 된 경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런 주장을 하는데 최소한의 유구를 통한 증거는 있었어야 겠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진파리 4호분 벽화입니다. 상록하단의 고대사용을 주장하는 당시 학자들이 들었던 것인데, 본 논고에서는 이 부분 역시 명쾌하게 논파해버리고 있습니다.

4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 중 <표 1>의 건축도를 보면, 기둥과 기둥상부의 공포 및 대공은 모두 적색 계열의 안료로 바탕이 칠해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上綠下丹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근거로 제시된 고분은 6세기 중엽에 조성한 진파리 4호분이다. 벽화는 사신·해·달·신선이 그려진 묘실과 연꽃·인동·별자리를 비롯한 장식무늬가 그려진 천정, 수목과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인 연못이 있는 연도로 구성되었다.진파리4호분 벽화에 나타난 녹색은 수목과 괴석을 그린 것으로 바탕색의 변화가 아닌 문양의 변화로 보인다.
위의 그림이 문제의 상록하단의 근거로 들어온 고구려 진파리 4호분 벽화입니다. 논문은 이 부분은 벽화전체를 볼때 '단청'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나무등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 이론이 맞는 것이, 비슷한 시기의 진파리 1호분에 매우 비슷한 '나무'묘사가 있습니다. 완벽히 소나무를 그린 것으로 역시 같은 계열의 녹색입니다. 
진파리 1호분 소나무

하지만 이 외에는 고구려벽화나 고려불화의 모든 건물은 대부분 녹색이 아닌 '적색'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70년대 당시에도) 이러한 몇 안되는 사례로 조선후기식 상록하단을 통시적인 단청 스탠더드로 후학양성을 한 것을 보면 일종의 문화적 엄숙주의랄까 편견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사례로 보입니다.

용강대총의 명확한 단청묘사- 적색계열

계속 가 보겠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4〜5세기 건축도에 그려진 단청문양은 붉은색 바탕에 먹색으로 당초문을 그려 넣은 것이 다수를 이루었으나, 점차 화려한 문양과 색상을 사용하게 되었다. 6〜7세기 진파리4호분이나 오회분 4호묘의 경우 청색과 녹색 및 황색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시대 목조건축에 영조법식의 五彩遍裝과 같은 단청기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건축도를 통해본 결과, 고구려시대의 단청은 上綠下丹기법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논문의 그림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고구려벽화속 건축의 기둥, 공포의 단청들은 적색입니다. 다음은 '고려시대'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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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건축들, 13세기까지의 고려건축물

<표 2>의 고려불화에 표현된 단청을 보면, 13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대부분 건물 전체를 붉은색 계열로 上綠下丹의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西福寺에 소장된 관경변상서품 은 기둥은 붉게 칠하고 도리와 공포부재 등은 녹색 계열로 칠하였다. 즉, 14세기 고려불화에서 上綠下丹의 기법이 적용된 건축도가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불화인 일본 知恩院소장 관경십육관변상도 의 건축도에도 붉은 기둥의 상부에 녹색으로 칠하여 강한 색 대비를 보이고 있다.

고려불화에서 표현된 건축도를 통해 上綠下丹의 사용을 살펴보면, 13세기까지 건물 모두를 붉은색으로 칠하다가 14세기에 上綠下丹기법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면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고려불화에 묘사된 건물들의 단청변화를 보면 13세기까지는 건물을 기둥, 공포할 것없이 '붉은 색'계열로 칠하다가, 14세기 즉 고려말기-조선초기에 와서야 상록하단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죠. 아래는 논고에 나오는 고려불화의 건축물들로 거의 전부가 붉은 색입니다.
그런데 이 불화들을 단순히 종교화라고 폄하하던 시각이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들은 변상도의 많은 건축들이 실제 당시 존재하던 고려건축의 특성을 반영 (즉 로컬라이징화된)한 작품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발견이 2005년 있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필자도 거의 단청부분에 있어서 이런 적색계통이 '주'를 이루었다는 쪽으로 확신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지요. 다음은 그 극적발견에 대한 부분입니다.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진 봉정사 극락전은 1972∼1975년의 수리공사와 2005년 수리공사를 통해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재와 문양12)이 발견되었다. <그림 7> 좌측의 첨차는 1970년대 수리에서 발견된 첨차이고, 우측은 2005년 닫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부재 일부가 노출된 것이다. 그곳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독특한 모습의 단청이 칠해져 있었다. 주로 첨차의 마구리와 몸체에 칠이 남아 있었는데, 마구리는 독특한 문양에 거의 붉은색이 주류를 이루는 화려한 색상이 나타났다. 만약 이 부분이 고려시대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채색 부분이라면, 고려 때 봉정사 극락전의 실내는 요즘의 단청과 전혀 다른 온통 붉은색 위주의 채색으로 가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봉정사 극락전 내부

아무튼 이 한국 최고(最古)의 건축물을 보수하다가 우연히 그동안 가려져서 안보이던 단청을 찾아낸 것인데... 다음의 모습입니다. 위가 봉정사 극락전에서 발견된 적색단청이고, 아래는 이와 매우 유사한 같은 첨자에 붉은 바탕에 녹색식물을 그려 넣은 중국의 閣院寺 大殿 (遼代(公元 916~1125년 창건추정))의 단청입니다. 즉, 그림 8과 비슷한 색조의 단청을 봉정사 극락전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고려시대 단청을 두 건물로만 해석하기 어렵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붉은색으로 칠해지던 단청의 바탕색은 점차 다양한 변화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 봉정사 극락전과 수덕사 대웅전으로 대별되는 두 가지 양식(上下朱漆과 上綠下丹)은 한동안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점차 上綠下丹을 사용한 단청이 우세해지고, 이후 조선시대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14〜15세기 고려불화 건축도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앞서 고려시대 13세기까지는 적색계통의 붉은 단청이었다가 14세기 들어 갑자기 상록하단 계열이 성한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럼 '애시당초',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건축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주지하시지만 14세기 원간섭기는 여러 여타 문화와 마찬가지로 건축계 역시 원나라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습니다. 이에 대한 논문은 이미 꽤 많습니다. 그럼 건물의 구조만 들여오느냐, 아니죠. 장식역시 들어왔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 역시 13세기 들어 상록하단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元시대는 宋·金시대의 건축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외래적인 건축수법과 요소들이 증가하였고 구조 재료등의 기술과 건축장식 등에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元시대에 발전된 이와 같은 건축기법들은 明·靑시대 건축발전에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上綠下丹기법의 정형화이다. 물론 11세기부터 부분적으로 상부에 녹색 사용이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上綠下丹의 기법은 13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건물에 적용되었다.

복건 지역의 원대묘 묘실과 산서 영락궁의 건축 채색을 보면 이전 시대의 채색법과는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녹색 계열의 사용이 정형화된 이유로 元代의 시대적인 배경을 들 수 있다.
흥미롭게도 당시 '아라비아 문화권'의 영향이 녹색계열에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입니다.

元代는 아라비아 이슬람교가 들어와 중국에서 극히 성행했던 시기였다. 이슬람 교단이 사용하던 기하문과 식물문은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다. 새롭게 유입된 기하문과 식물 문양은 기존의 문양과 결합하여 새로운 건축장식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다른 이유로는 宋代의 부분적인 계승을 들 수 있다. 영조법식에서 ‘碾玉装’ 및 ‘青绿叠晕棱间装’의 기법은 청록색을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 기법이 元代로 계승되었다는 관점이다. 다양한 색을 사용하는 唐·宋시대의 ‘五彩偏裝’은 琉璃瓦의 사용으로 인해 점차 소실되고, 유리와의 사용이 확대되자 점차 오채의 화려함과 맞지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청자기와 (청기와)'가 등장하면서 채색의 조화상 차분한 계열인 녹색으로 점차 바뀌었다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元代의 변화는 이후의 明·靑건축과 함께 고려말과 조선 초의 건축 채색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려불화에서 上綠下丹기법이 등장한 14세기의 일본西福寺에 소장된 관경변상서품 의 건축도 제작 시기는 元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미치던 무렵이었고, 지붕이 푸른색으로 칠해진 것으로 보아 청자기와를 올린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2세기 의종은 민가 50채를 헐어 大平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기에 이름난 꽃이나 기이한 물건을 진열했다. 정자 남쪽에는 연못을 파서 觀瀾亭을 짓고 그 북쪽에는 養貽亭을 지었는데 청자로 기와를 이었다. 지금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가운데는 이 시기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청자 기와편이 있어서 당시 조성된 건물이 갖던 아름다움과 세련된 건축기술의 일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청자기와 역시 琉璃瓦와 같이 햇빛을 받으면 영롱한 빛을 발산하여 이전의 건축 채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자, 점차 차분한 느낌을 주는 청록색의 채색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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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 자료의 재분석과 수리보고서 및 발굴조사보고서의 분석, 동시기 동아시아 건축 색채의 비교를 통해 본 연구에서 上綠下丹기법은 고려시대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上綠下丹기법이 적용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건축도와 동시대의 敦煌莫高窟 벽화를 비교해 보면, 건축 양상은 다르지만 건축의 바탕색은 붉은색을 主色으로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건축 색채의 주색은 붉은색이며, 이러한 경향은 백제와 신라 역시 동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건축과 관련이 깊은 法隆寺 (법륭사) 金堂 또한 붉은색을 主色으로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목부재 색채 사용은 붉은색을 主色으로 하였다.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연목에서 朱漆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당시의 채색 경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고려불화를 통해 고려시대의 건축 색채 사용을 간접적으로 살펴보면, 대부분의 건축도는 붉은색을 主色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4세기 불화에 上綠下丹이 사용된 건축도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15세기 이후 조선시대 불화로 보이는 건축도는 대부분 上綠下丹기법이 적용되었다.

중국의 경우 營造法式에서 청색과 녹색의 사용이 두드러지는 채화가 기록되었다. 南宋(1127〜1279)에 이르면 吕洞宾过岳阳楼图에 上綠下丹기법을 적용한 건축도가 보이고, 이후 元代건축 채화에서 上綠下丹기법은 이미 정형화되었다. 한국은 14세기 무렵 고려불화에 上綠下丹기법이 등장 하고 수덕사 대웅전 창건 당시의 단청에 上綠下丹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전 시기 건축에서 上綠下丹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남아 있는 자료에 근거한 上綠下丹기법의 적용 시기는 14세기로 볼 수 있다.

현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단청부분은 이렇게 고려시대 500년의 단청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단청색조는 외광(外光)을 강하게 받는 부재, 즉 기둥과 같은 곳에는 붉은 색을 칠하고 외광을 받지 않는 그늘진 곳, 즉 추녀나 천장부분에는 녹청색으로 칠하여 장식의 명도(明度)를 높여 이른바 상록하단(上綠下丹)의 원칙을 지켰다.

이제는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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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복원에 참고할 봉정사의 자산들

앞서 몇번 나온 봉정사(鳳停寺)는 신라 시대인 672년 신라 문무왕 12년 세워진 사찰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이 있으며, 이 건축물들은 최소 1200년대 즉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 중세건축의 보고죠.

그런데, 최근 봉정사 극락전은 사실 일부에서는 혹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물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 주장은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 라는 글자가 발견되면서인데, 즉 '1435년 8월 초일에 씀, 신라대 500여년에 이르러 을묘년 중 법당을 중창하다' 로, 건물의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 정도 앞선 것으로 단순하게 계산해도 최초 건립시기가 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내포한 문장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황룡사 시대가 되지요. 이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썰'중 하나일 뿐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확실한 중수시기를 중심으로 1200년대로 파악하고 있지요.

아무튼 이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을 포함한 여러 건축물은 따라서 중세의 사찰 '실내장식'을 묘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인 '황룡사'를 재건할 때는 이 건축물들의 내부를 꼼꼼히 살피고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룡사는 흔히 '신라의 아이콘'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11세기 고려건축이라 해도 무방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고려 연복사 5층목탑을 오른 기록들- 황룡사 목탑의 실마리] 등을 통해 밝혔지요.

"황룡사 9층목탑이 원래 건설된 시기는 7세기인 645년입니다. 하지만, 고려대인 10세기 (945년)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인 1021년에 완성했고, 그 후 1035년과 1095년에 보수공사 3년(1012)에 고려전기 별궁중 하나였던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고려건축'으로 보아도 될 만큼 중건과 재건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건축으로 추정되는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의 실내장식은 분명 직접적인 1차사료가 됩니다.
봉정사 대웅전 현판 부분 (저 정밀한 문양이 보이시죠) 

봉정사 대웅전의 공포와 처마

대웅전 내의 실내장식 및 색감 역시 많은 참조가 가능할 듯 합니다. 

대웅전 내관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대웅전 불단을 받치고 있는 '용기둥'입니다. 아래가 봉정사 대웅전의 불전인데 좌우로 간주(間柱)가 보이지요.
의외로 이 간주(기둥)의 그림에 대한 연구는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 그려져 있는 상승하는 역동적인 용그림은 어쩐지 그 색감과 형태가 조선후기라기보다는 고대-중세의 미학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항상 볼 때마다 강하게 듭니다.
봉정사 대웅전 용기둥

이런 기둥양식도 참고해서 황룡사 재건시 한번 시도해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소개한 이은희 박사의 논고에 나오는 이 봉정사 극락전의 '붉은 단청' 발견경위를 직접 소개한 김동욱 선생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2005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해체 수리가 있었는데, 이 때 실내 닫집을 밖으로 옮기는 일이 있었다. 닫집을 치우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부재 일부가 노출되었는데, 그곳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독특한 모습의 단청이 칠해져 있었다. 주로 첨차의 마구리와 몸체에 칠이 남아있었는데 마구리는 독특한 형상의 문양에 거의 붉은 색이 주류를 이루는 화려한 색상이 나타났다. 만약 이 부분이 고려시대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채색부분이라면, 고려 때 복정사 극락전의 실내는 요즘의 단청과 전혀 다른 온통 붉은 색 위주의 채색으로 가득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수덕사 대웅전은 1938년에 해체 수리를 하면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단청의 일부가 대들보 양 끝에서 확인되었는데, 웅혼한 자태의 용이 그려진 모습이었다. 또 실내벽면에는 커다란 꽃이 만개한 모습의 채색벽화도 나타났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단청은 조선후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런 부분의 조사와 연구가 부족해서 무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김동욱 (2015)저서-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여기 보면 2005년 단청발견 당시, 필자도 아직 찾지 못한 (그림도 못 본) '웅혼한 자태의 고려시대 용'이 그려져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런 식의 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 자료를 찾는대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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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애국가는 위험해도, 황룡사 복원시 수종은 소나무가 아닌 참나무 (뉴스단상)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라는 글에서 필자는 황룡사 프로젝트가 재건시 나무수종과 단청의 고대식 적용만 확실하게 해도 현대의 조선후기식 건축에서 느끼지 못하는 이질적이면서도 또 다른 한국건축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황룡사나 미륵사를 '재건'한다는 의미는 숭례문을 그대로 다시 복원하는 일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최대한 남아있는 사료와 연구결과를 충실히 반영, 그 시대를 한번 '되살려'보면서 또 하나의 '창작'을 해내는 작업입니다. 

연구결과가 쌓이고 있는 이상, 고대건축이 사라진 한국에서 현재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조선후기식 단청을 입은 팔작지붕의 건물을 다시 재건된 황룡사에서 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붕이 우진각이어야 하는 이유도 예전에 소개했습니다. 불령사전탑연구)

연구성과가 없다면 모를까, 이러한 부분부분의 연구가 실질적인 반영이 되는 '시스템의 성립'이 절실하고 급해 보입니다. 이런 연구성과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면서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또한 Credibility가 쌓이면서 기대가 증폭되는 선순환효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밀실 프로젝트'에 가까운 형태의 고대건축 프로젝트로는 국민의 동의도 학계의 동의도 얻기 어렵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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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황남대총에서 나온 칠기에 칠해진 朱漆(주칠)의 붉은 색깔입니다. 황룡사는 이런 색감으로 살려보면 어떨까 싶군요.
만약 색감을 구현한다면 이러한 식이 될 것입니다. 그림은 센트룸님이 그래픽으로 재현한 안압지(동궁) 중전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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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6/12/09 11:14 #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오늘날 일본 사원 같은 곳에 가면 보이는 화려한 붉은 기둥이 천년전 백제 고려 모습일 수 도 있다는 것 이군요
    저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역사관심 2016/12/12 11:30 #

    분명 타당한 결과라면 현장에서 바로바로 적용될 수 있는 시스템이 좀 마련되면 좋겠네요.
  • 레이오트 2016/12/09 11:48 #

    일본의 단청을 보니 예전에 숭례문인가 아무튼 단청 관련해서 몇몇 사람들이 단청 복원에 일제 도료 썼다고 개거품(오타 아님) 쳐물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 역사관심 2016/12/12 11:31 #

    사실 그런건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닌데...-_-;;
  • 레이오트 2016/12/12 12:31 #

    단청에 쓰이는 도료가 사치품으로 거래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무의미한데 말이죠 =ㅅ=;;;;;;
  • 역사관심 2016/12/13 15:00 #

    동감입니다. 사실 이런 것도 동아시아 특유의 '원조'집착의 쓸데없는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 Chronophobia 2016/12/10 05:41 #

    백제문화단지의 경우엔 문양은 벽화등지에서 문양은 잘 따왔더라구요.(월정교의 경우엔 문양조차 막장...) 근데 색감이 역시 문제인듯 하네요. 안압지등지에서 청색 염료가 발굴된걸로 보아 아예 청색이 사용되지 않았다는건 사실이 아니나 청색이 바탕색이 되었다 역시 사실이 아닌걸로 생각이 되네요. 당조에 상록하단 유구가 발견되긴 하나 이게 아직 대중화되기 전으로 보이니깐요.
  • 역사관심 2016/12/12 11:31 #

    같은 생각입니다. 일부건축에서 쓰인 것을 삼국~고려 1000년 전반으로 규정하니 문제겠지요...
  • M i d s e n 2017/09/04 19:00 #

    눈 딱감고 붉은색으로 한번 칠해보면 될 것을 ㅉㅉ.. 이런게 바로 도재식 교육의 무서움이죠..
    그리고 아무래도 연구비니 뭐니 해가며 타먹을래면 어떻게든 일감을 만들어내야되는 이유도 있겠죠. 백제역사재현단지도 시공자들이 주문안 도안과 예산 계획의 배로 초과되는 양을 임의로 그려넣어서 문제가 됐었다는군요
  • 역사관심 2017/09/06 02:25 #

    '임의로'...... 혹시 자료 있으시면 좀 나눠주시면 공론화 해보겠습니다. 갑자기 열이 받는군요.
  • M i d s e n 2017/09/13 21:53 #

    http://blog.daum.net/seoljg/13784397

    여기 나오는 얘기입니다. 여태 공론화되지는 않았나봐요. 뭐 이런 일은 허다하니까요 ㅋ
  • 역사관심 2017/09/15 03:05 #

    얼마전에 이런 책까지 나왔는데, 대체 뭣들하고 있는지 참 암담합니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17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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