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건축 (23)- 단속사의 높은 불전을 보고 쓴 기록 (조선전기 불전 높이기록) 한국의 사라진 건축

우리 고대/중세건축의 경우 특정건축물에 대한 높이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황룡사 9층목탑과 고려사에 나오는 김준의 저택 (높이가 수 장)등을 제외하고는 드뭅니다. 물론 본 블로그에서 다룬 연복사 5층전각, 흥천사 5층전각 사리각, 만복사 5층전각등을 오르거나 비유로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은 있습니다만 (또한 고려도경의 고려 '가루' 기록등), 어떤 정확한 '척'이라든가 '자'의 치수로 기록해 둔 것은 황룡사 목탑을 제외하면 드물지요. 

이는 조선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흥천사 사리각등을 제외하고는 높이에 대한 기록은 귀합니다. 그런데 조선전기인 15세기중반 불전에 관한 '높이'사료중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꽤 의미있어 보이는 기록 하나를 찾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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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동문선 
녹(錄)
속 두류록(續頭流錄)
김일손(金馹孫)

시내 하나를 건너 한 마장쯤 나가니 감나무가 겹으로 둘러 있고, 온 산의 나무는 모두 밤나무뿐이요, 장경(藏經)의 판각(板閣)이 높다랗게 담장 안에 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수림(樹林) 속에 절이 있는데, 편액(扁額)에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 씌였고, 비(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완안(完顔 금국(金國))ㆍ대정(大定)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 이른다. 강 문경공(姜文景公)의 조부 통정공(通亭公)이 젊어서 여기에와 글을 읽으면서 손수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름이 된 것이라, 그 자손이 대대로 봉식(封植)한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시내 하나를 건너니 묵은 덤불 속에 비가 있는데, 바로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憲貞)의 소작인, 중 신행(神行)의 명으로 당(唐) 나라 원화(元和) 8년에 세운 것이다. 돌의 질이 추악하고, 그 높이도 대감사(大鑑師)에 비해 두어 자나 부족하며, 문자도 읽을 수가 없다. 

북쪽 담장 안에 정사(精舍)가 있으니 주지승의 침실이다. 많은 산다수(山茶樹)가 정사를 둘러 있다. 정사의 동편에 허술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한다. 당의 아래 새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극히 높아서 그 밑에다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수 있다. 사승(寺僧)이 이것으로써 편안히 천불(千佛)의 상을 직성(織成)하려는 것이다. 사옥(寺屋)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칸이요, 동쪽 행랑에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오백 구의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그 형상이 달라서 기이한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주지가 거처하는 침실로 돌아와 전의 고사(故事)를 뒤져보니, 세 폭을 연결한 백저지(白楮紙)가 있는데, 정하게 다듬어져 지금의 자문지(諮文紙)와 같다. 그 한 폭에는 국왕(國王) 왕해(王楷)란 서명(署名)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요, 또 한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다. 이는 정조(正朝)에 대감사에게 보낸 문안장(問安狀)이다. 또 한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써있는데, 한 군데 황통대덕(皇統大德)이라 하였다. 대덕은 몽고(蒙古) 성종(成宗)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상고하면 맞지 않으니 알 수 없고, 황통(皇統)은 금국(金國) 태종(太宗)의 연호다. .... 또 좀 먹다 남은 푸른 김에 쓴 글씨가 있는데, 글 자체가 왕우군(王右軍)과 유사하여 형세가 날아가는 기러기와 같다. 도저히 날개에 붙을 수가 없으니 기묘하기도 하다. 또 노란 비단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가 있는데, 그 자획(字畫)은 푸른 비단에 쓴 글씨만 못하고 모두 단간(斷簡)이어서 그 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또 육부(六部)가 합서(合書) 한 통이 있어 지금의 고신(告身)과 같은데, 역시 그 절반이 없어졌다. 그러나 또한 옛것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다. 


원문중 발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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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찰 단속사

이 기록은 신라후기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초기의 문집내용을 담은 [속 동문선]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일종의 기행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문인들과 명사들의 글이 담긴 전집성격의 저작입니다. 위의 기록은 조선전기 김일손(金馹孫, 1464 ~ 1498년)이라는 사람의 글로 '두류산', 즉 현재의 지리산을 탐방한 글이 됩니다. 참고로 김일손은 무오사화의 희생자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이 김일손이 지리산을 기행하고 쓴 '속두류록'중 발췌한 부분인데 여기 신라시대의 사찰로 보이는 고찰(당시에도 고찰)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단속사(斷俗寺)입니다. 단속사는 최소 763년에 지어진 고찰로 김일손이 이 사찰을 들른 시점에서 이미 700년이 지난 고찰입니다. 이 단속사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라최고의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보존되어 있었기도 합니다.

남아있었다면 여러모로 고대-중세 산중사찰의 면모를 전해줬을 단속사는 역시 조선후기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1999년 발굴은 되었지만 민가가 들어선 사역은 아직도 미지의 구역입니다.
단속사지

하지만 김일손 선생이 여행했던 15세기 중엽에는 오래되어 허물어지는 건물도 있었지만 신라시대-고려시대의 건축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단서중 하나가 이 두 부분.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즉, 고불전 (옛불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완박'하다는 표현은 번역자의 해석으로 정확하게는 다음의 한자입니다.



礱 갈 롱 (갈다 찧다) 斵 깎을 착 

즉, 옛불전이 깎여있다라는 뜻으로 고건축물이 세월에 깎여나간 모습이 됩니다. 또한, 승려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벽화라는 부분에서 조선시대보다는 최소 고려시대의 벽화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로 "행랑을 따라 긴 건물(장옥)아래로 나가니 '루'가 있는데 제작이 아주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다"라는 부분입니다. 예전에도 몇번 다루었지만 사찰에 행랑이 있던 구조는 역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더 유행했던 양식입니다. 또한 누각이 대들보/기둥이 매우 오래되어 삭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조선전기에도 이미 '고건축'이 많았던 사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왕인 인종(仁宗, 1109~1146년)의 서명이 담긴 백저지(白楮紙)가 침실에 있는 등 당시로써도 수백년된 문서가 존재하던 사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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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기보다 높은 건축물 

그런데 이 기록의 후반부에 흥미로운 건축물 기록이 하나 나옵니다. 다음입니다.

북쪽 담장 안에 정사(精舍)가 있으니 주지승의 침실이다. 많은 산다수(山茶樹)가 정사를 둘러 있다. 정사의 동편에 허술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한다당의 아래 새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극히 높아서 그 밑에다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수 있다. 사승(寺僧)이 이것으로써 편안히 천불(千佛)의 상을 직성(織成)하려는 것이다. 사옥(寺屋)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칸이요, 동쪽 행랑에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오백 구의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그 형상이 달라서 기이한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즉, 주지스님의 침실(精舍) 동쪽에 치원당이라는 허술한 집이 하나 있고, 그 밑쪽 지역에 새로 집을 하나 지었는데 그 집이 극히 높다는 것입니다. 원문을 볼까요.

極高 극히 높다라는 표현이 나올정도로 높은 건물인데,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오장기'를 그 건물 아래에 가히 세울 수 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럼 '오장기(五丈旗)'가 무엇일까요? 사실 오장기는 어떤 깃발의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높이를 강조해서 쓰는 표현이라 생각되는데, 이 표현으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옵니다. 사기에서 진시황의 아방궁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오장기가 등장하지요. 다음입니다.

아방궁은 동서가 500보, 남북으로 50장(丈, 어른 남자의 키)의 크기에, 위로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아래로는 오장기(五丈旗, 다섯 장 높이의 깃대로 약 15m 높이를 뜻함)를 세울 수 있을 정도다.

번역처럼 '오장기'는 오장 五丈, 즉 3*5= 15미터정도의 높은 깃대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중국측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원문에 오장기라는 표현과 함께 아방궁의 추정도를 그려둔 것입니다.
오장기를 가히 세울만 했다라는 표현이 정확히 15미터정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정도의 표현을 쓸만큼 높은 고층건축을 1470~80년대 당대에 단속사에 세웠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건축물의 용도는 천불전이 아닐까 추정되는데, 그 단서는 다음에 나옵니다.

사승(寺僧)이 이것으로써 편안히 천불(千佛)의 상을 직성(織成)하려는 것이다. 사옥(寺屋)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것이 수백 칸이요, 동쪽 행랑에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그 오백 구의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그 형상이 달라서 기이한 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중국 오대십국(907년~960년) 천불벽화

즉, 이미 고찰이 쇠한 건물이 많아 1,000개의 소불상을 안치할 장소가 없어 이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것이죠. 안치할 곳이 없어 동쪽 행랑에다가 석불 500구를 임시로 넣어두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500구가 각각 형상이 모두 달라서 기이하기 그지없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새로 만드는 천불상은 보통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형상이 같죠. 하지만, 옛날 고찰에서는 천불상의 얼굴이 각각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 근거로 요즘 계속 발굴되고 있는 백제 오합사(상주사)의 삼천불전지의 불상들의 얼굴이 모두 제각각인 것도 들 수 있겠습니다. 위의 중국 고대천불벽화도 각각 생김새가 다릅니다.

단속사지의 경우 1999년의 발굴외에는 후속발굴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좀 더 확장해서 조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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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지 9.5에서 10미터남짓한 높이로 보이지요. 그럼 이것이 임류각의 원래 규모일까요? 임류각의 원래 높이 보통 우리 건축의 경우 매우 일부의 경우를 (예로 단속사의 기록) 제외하면 정확한 높이를 기록으로 남긴 예가 드뭅니다. 그런데 임류각의 경우 백제건축의 규모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정보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삼국사기 ... more

덧글

  • 신병훈련행성알바리움 2017/01/31 16:12 #

    귀족의 나라이자 불교의 나라 고려때가 마지막 화려함
    과 웅장함의 극치였죠 말기의 극성때문에 그렇지,
    조선의 합리중시로 규모가 줄어든것도 있지만 이또한
    정도전이라는 성리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민중의 국가
    라는 이상에 불타던 위대한 사상가가 발벗고 나서
    백성이 주리지 않는 나라로 가고자 함이었으니 뭐라
    함부로 정의내리기가 참 힘드네요 저때당시에 이미
    삭아버린 상태였다는 것에대한 아쉬움도 더해지는
    군요 상상도조차 함부로 그리지 못할것인데요 그리
    큰 규모라면요. 원체 큰 건물이 남은게 있어야지 ㅠㅠ
  • 역사관심 2017/02/01 06:22 #

    조선전기건축도 화려하고 장대한 미학을 갖춘 건축물들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알면 알수록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무엇보다 화려미, 장대미등에 대한 미학을 일체 포기한채, 소박하고 아담한 전통건축'만'이 한국전통건축인양 포장하는 행태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흔히 그러한 건축에 대해서는 왕권의 약화와 애민정신등의 형이상학적 수식어가 붙곤 하지요). 앞으로는 건축에 대한 미학은 그자체로 바라보는 movement가 좀 일어나면 합니다.
  • 청순한 펭귄알 2017/01/31 20:20 #

    저 아방궁 추정도가 사료를 바탕으로 제작된건가요, 아니면 그저 개인의 상상인가요?
  • 역사관심 2017/02/01 06:25 #

    중국언론측 자료인지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상상화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아방궁은 아직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요.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5873&code=117 (그럼에도 중국은 이런 건축물을 짓습니다).
  • 신병훈련행성알바리움 2017/02/01 13:58 #

    모바일이라 링크가 안들어가지네요 ㅠㅠ
  • 청순한 펭귄알 2017/02/01 16:18 #

    그래도 저런 피라미드형 기와양식은 굉장히 생소하네요. 저런 비슷한게 있기는 했던걸까요.
  • 역사관심 2017/02/02 04:17 #

    신병훈련행성알바리움님> 죄송합니다; 링크를 모바일에서 가능하게 하는 법은 잘 모르겠네요; 귀찮으시더라도 피씨로 한번 봐주시길 바랍니다.

    청순한 펭귄알님> 저도 아방궁의 양식까지는 문외한인지라, 답변드리기가 힘들군요. 죄송;
  • M i d s e n 2017/09/11 18:51 #

    저 시대에 저런 건물 터는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토대로 상상해 그린 그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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