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 정유년 당시의 생생한 잔인함, 맏딸의 죽음 (고대일록 중) 역사

우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큰 대전을 보통 관념적으로 파악해버리기 쉽습니다. 2차대전, 한국전쟁(6.25전쟁)등 현대의 대전의 경우 사진이라든가 생존자들의 증언 다큐라든가 무언가 생생한 기록이 많기 때문에 그 피해상황이나 당시 급박함이 피부로 와닿는 것에 비해, 전근대의 대전들의 경우 기록이나 시각정보의 부재로 뭉뚱그려서 큰 전투 (한산도대첩등)를 중심으로 즉, 몇몇 전쟁의 주요 인사들의 활약상으로 그 큰 사건전체를 대강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요.

특히 피해자들의 경우, 그저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천 명이 죽었다, 만명이 수장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이 1,000명이니  2,000명이지 이 숫자는 세월호 아니 9.11 테러보다도 훨씬 많은 인명이 한꺼번에 죽은 겁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숫자지요.

임진왜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간 [실록]과 그야말로 주요 장수였던 충무공의 [난중일기]로 이 큰 전쟁을 이해해 온 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당시 의병장이던 함양(咸陽) 출신의 정경운(鄭慶雲, 1556년 ~ 1610년)이 쓴 빼곡한 일기 [고대일록]이 1986년 발견된 것은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지방의 평범한 유학자의 눈과 귀로 듣고 보고 겪은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어 앞선 기록들과 분명한 차별점이 있지요. 불과 몇년전인 2009년에야 완역이 끝났을 정도로 새로운 사료입니다.

오늘은 수많은 피해상황중 주인공 정경운의 딸이 왜군에게 살육당한 지금으로부터 420년전의 정유년, 1597년의 여름으로 가보겠습니다.

1597년 정유년

○ 8월 18일 병자(丙子)

크고 작은 피난민 무리들이 산 위에 모였는데,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점심때쯤 흰옷 입고 삿갓 쓴 자가 산허리에 불을 질렀는데, 왜적으로 의심하여 활과 화살을 엄밀하게 준비시켰으나, 문득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의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왜적 십여 명이 다른 길로 숨어들어 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돌입하니, 사람들이 모두 산골짜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다가 잃은 재보(財寶)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저녁 늦게 다시 모여 가속(家屬)들의 행방을 물으니, 큰딸, 막내딸 및 노비 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소재(所在)를 알 수 없었다. 마음과 넋이 다 빠져 울고 또 울었다. 노 참봉(盧參奉)과 손을 잡고 소리 내어 울다가, 그날 밤에 가운데 고개를 지나 백운산 바깥 기슭에 투숙하였다. ○ 적이 남원을 함락시켰고, 총병(摠兵) 양원(楊元)은 도망갔다.

그러니까 흰옷을 입고 삿갓을 쓴 스파이가 마을을 염탐한 후, 마을사람들이 경계를 풀던 저녁무렵 갑자기 일본군이 쳐들어 옵니다. 이때 큰 딸과 막내딸 그리고 노비 세명이 사라집니다. 정경운은 '넋이 나가서 울고 또 웁니다'. 그날 남원이 함락됩니다.

○ 8월 19일 정축(丁丑)

흉적들이 사방으로 나가 분탕질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또 백운산을 수색하고 산골짜기에 잠복하니, 이놈들이 두려워 내 딸을 샅샅이 찾지 못했다. 비통하기 짝이 없다.

백운산은 함양과 장수를 가로지르는 높은 산을 뜻합니다. 지금도 이런 모습의 이런 산간을 왜적이 드글거리는 다음날 뒤지기는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함양 백운산

○ 8월 20일 무인(戊寅)

홀로 백운산 계곡으로 딸을 찾아 나섰다. 계곡을 건너가면서 딸을 소리쳐 부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여 막내딸의 소식을 들었다. 단아(端兒)는 우비(禹婢)에 의탁해서 살았는데, 해가 저문 뒤에 서로 만나 손을 잡고 통곡했다. 노(奴) 잉문복(芿聞卜)과 잃어버린 말이 돌아왔고, 난춘(蘭春)도 역시 왔다. 

○ 노 참봉(盧參奉)ㆍ노경승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날 최장(崔丈) 계형(季亨)이 왜놈에게 죽으니, 너무나 슬프다.

딸 둘이 실종된 지 이틀째. 정경운 선생은 부성으로 이 위험한 산간을 '홀로' 딸들을 찾아 나섭니다. 일본군이 들을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소리높여 불러가며 찾습니다. 이 날 사라진 막내딸 '단아'를 저녁무렵 찾아냅니다. 단아는 '우비'(禹婢)에게 의탁해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나오는데, 우비란 '우씨성의 여자종'을 뜻합니다. 또한 노비 셋중 잉문복과 난춘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맏딸은 여전히 생사불명. 그리고 이 날, 친하게 지내던 (바로 한달전 같이 천렵으로 회를 먹던) 최계형(崔季亨)이 역시 일본군에게 살해당합니다.
잠시 정경운 선생이 딸을 찾아나선 경로를 살펴 보자면, 지도 아래쪽에 백운산의 북쪽 혹은 서북쪽으로 찾아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월 22일 '장안산'으로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20일과 22일 사이에 집념으로 선생은 마침내 딸을 찾아냅니다...
○ 8월 21일 기묘(己卯)

조카가 산에서 정아(貞兒)의 시신(屍身)을 찾았다. 목이 반 이상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갖고 있던 패도와 손이 모두 평소와 같았다. 아, 내 딸이 어찌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들이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패도를 주면서, ‘만약 불행하게도 네가 왜적을 만나면 적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큰 도적이 지금 왔으니, 제가 반드시 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그 엄마에게 매번 하였는데, 졸지에 흉적을 만나서는 우뚝 서서 겁 없이 적노(賊奴)를 욕하고 꾸짖으며 목숨을 버려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곧도다! 내 딸이여,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아! 네가 삶을 버리고 의를 택했으니, 참으로 장하다. 

하지만 나는 딸 하나도 능히 구하지 못해, 흉한 칼끝에서 너를 죽게 했다. 손을 붙들고 피난하여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자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구나. 죽은 후에 황천에서 손잡고 다시 만날 때, 나는 진실로 너만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너를 위로할까! 네가 높게 세운 절개는 내 그 뜻을 글로서 분명히 전할 것이다. 의복을 모두 잃어버려 시신을 염하는 도구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한다. ○ 이날 밤 큰 비가 왔다.

맏딸 '정아'는 안타깝게도 실종후 3일째인 21일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것도 목이 반이상 잘려나간 처참한 모습으로... 유학자의 시대이니만큼 일본군에게 잡혔을 경우 차라리 자결을 하라는 것은 딸을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딸이 죽은 모습으로는 자결을 한 것인지, 일본군에게 반항하다가 목이 반이 잘린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정경운은 전자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통곡하고 또 통곡하며' 계곡을 나옵니다. 그때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도 안됩니다.

○ 8월 22일 경진(庚辰)

장안산(長安山) 기슭으로 들어갔다. ○ 도적놈들이 산골짜기 안팎을 수색하여 거의 다 살육했다.

22일 위의 지도처럼 왼쪽의 장안산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이 와중에 아마도 산골짜기마다 조선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화로워보이지만 조선전체의 이런 산골마다 이름도 없이 죽어가고 썩어간 시체가 즐비했을 겁니다 (무덤은 커녕).
장수 장안산 산등성이

○ 8월 30일 무자(戊子)

나는 집에 돌아와서 난리에 불타고 남은 것을 둘러보았는데, 마을 전체가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다 타 버렸다. 흉적의 혹심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수색을 나서고 10일만에 함양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을은 완전히 전소되버렸고, 뭐 하나 남은 것이 없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우리에게 그저 네글자로 남아있지만, 지금도 이런 계곡에서 이름없는 우리 선조들의 뼈 한 조각이 언제나 어디서나 나올 수 있는 잔인하고 잔인한 전쟁이었습니다.

그저 기록만으로 몇천이 몰살당했다라고 담담히 기술한 이면에 한 가족 가족의 말로 할수 없는 슬픔이 7년간 쌓이고 쌓였을 것입니다.
백운산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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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참고로 이 8월 20일의 기록은 또 다른 의병장인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도 교차기록으로 확인됩니다. "씨도 남기지 않고 살륙한" 수 천명중 조경운 선생의 맏딸 '정아'도 있었겠지요.

1597년 
8월 20일 
청정의 군대는 운보으로부터 장수로 향하여 남원의 동천(東川)을 지나 번암(番岩)․철천(鐵川)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此山)에 가 대수색을 벌였다. 근읍의 사람들은 이 산이 군읍과 거리가 약간 멀고, 또 적병이 서울로 향하는 직로가 아니라 하여 피해 들어간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씨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적병은 장수(長水)와 진안(鎭安)을 지나 그대로 전주로 향하여 갔는데, 거치는 촌락과 산골짝에서 분창하고 살략(殺掠)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전주로 이르러 양정포(良正浦)에 주둔하고, 행장등의 군대와 같이 시장을 열고 남원에서 얻은 중국 물건을 뽐내 보였다. 적의 괴수들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에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조선이 이때까지 부지(扶持)해 온 것은 수로(水路)로 서로 통하여 호서․호남 양호의 힘이 서로(西路)에 미친 소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대를 수륙으로 나누어서 응원하는 길을 막음만 같음이 없다.”하고, 즉일로 군사를 나누어 청정 등은 경기로 직행하고, 수가(秀家)와 행장(行長)등은 회군하여 도로 내려가고, 의홍(義弘) 등의 적은 나누어 우로(右路)로 내려가 열읍(列邑)에 주둔했다. 

22일 
적병 16명이 몰래 은신암의 산막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살해하므로 내가 그들을 격파하고 양(梁)․이(李) 등과 같이 월락동(月落洞)으로 넘어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30일 
수가와 행장 등의 군대가 임시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原川) 원평(元坪)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지금도 후손들이 보관중인 이 조경남의 [난중잡록] 역시 생생함을 더해주는 자료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1971년판 완역본이 일반에게 DB등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아 아쉽습니다.

덧글

  • Scarlett 2017/02/13 11:58 #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고 있다가 자결 운운하는 부분에서 아...참....저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를 느꼈습니다;; 여성으로서 있어서는 안되었던 악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딸을 잃은 슬픔이야 거짓은 아니었겠지만..
  • 역사관심 2017/02/16 01:28 #

    당연한 말씀입니다. 없었어야 할 악습이죠. 또한 말씀대로 저 시대는 완전히 다른 시대였으니... 유럽도 마녀니 뭐니하면서 무려 최소 6만이라는 여성을 산채로 태우던 시대였죠;;
  • 피바다 대구 2017/02/13 14:50 #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난리가 나면 산으로 피했죠.
    외적이 들어와 보면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는 기록도 본 거 같습니다.
    빨치산도 산으로 들어갔고 제주 인민들도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유재란 때도 그렇지만 산도 주민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거 같군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 때는 골로 간다는 말이 곧 죽으러 간다는 말을 뜻했습니다.
  • 역사관심 2017/02/14 06:18 #

    골로 간다는 말이 골짜기에 가서 죽는다는 말이라는 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산으로 가서 살 가능성이 벌판보다는 그래도 훨씬 높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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