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불화 해석중- 고려 승려군(僧軍)추정 근거추가 역사

고려전투승의 기상을 보여주는 고려불화 한점, 圓上周尊者 (1235년)이라는 포스팅에서 아래의 개인소장 고려나한도가 아마도 재가화상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 본바 있습니다. 다음은 부분 발췌:

일본 이미데츠 박물관 (出光 博物館)소장 이었는데 최근 한국개인소장 (부산의 일암관(日巖館)의 주인장)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미데츠 박물관은 도쿄에 소재지를 두고 있으며, 조선-고려의 작품이 꽤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백나한중 14점이 현전하는 고려불화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그중 하나인 '원상주존자'를 그린 것인데, 고려불화나 변상도 (뿐 아니라 다른 이웃국들의 불화가 그러하듯) 이러한 그림에는 그 시기의 자국문화의 색감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1235~1236년 사이. 바로 여몽전쟁기, 그 중에서도 황룡사가 불타는 등 가장 그 피해가 극심한 3차침입의 시기 (1235~1239년)였습니다. 

그런 맥락으로 이 그림을 다시 살펴보면 승려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며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그럼 1123년의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전투승인 재가화상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 다시한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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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釋氏) 재가화상(在家和尙)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치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 

변경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으나 자못 강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거란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동이(東夷)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렸기 때문에 화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圓上周尊者 (1235년, 국내개인소장)

검은 깁으로 허리를 묶었다는 표현등 세부부분에서는 다르지만, 상의를 벗어제치고 수염과 머리를 바로 깎은 모습에 맹렬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쏘아보고 있는 근육질의 승려모습은 고려대의 승려모습을 그린 회화라는 점에서 당시 기록에 등장하는 전투승의 모습이나 기상을 '불화'형식을 빌어 표현했다고도 느껴지는 작풍입니다. 고려사에 나오듯 관선같이 '갑옷과 무기'를 든 전투승도 있었지만, 보병격인 승려집단은 이런 맹렬한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중략.

'불화'라는 테두리에만 가두어 두기에는 절대적인 회화부족에 시달리는 고려대의 경우, 수많은 고려불화들을 다시 살펴보고 응용할 가치와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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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우연히 약 10년전 방영된 역사스페셜중 이 그림을 다룬 부분에서 작품에 씌여진 글자를 해독한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음입니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짚어보았듯 고려의 승려군 맹장인 대부의 관선이라든가, 재가화상, 혹은 항마군의 탄생등은 대부분 1235년에 그려진 이 그림에서 100년전인 1130년대의 기록들입니다. 하지만,김윤휴같이 항마군의 후예들은 바로 이 시기 1230년대에도 버젓이 활약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1235년이 바로 봄부터 시작된 몽고군(원)의 고려 3차침입이 시작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3차침입시기는 앞선 전쟁과 달리 고려초토화작전에 들어간 거센 공격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가 강화도에 웅거하여 저항했고 부처의 힘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대장경'의 재조를 시작한 바로 그 시점이기도 합니다. 

고려사
1235년 윤7월 15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몽고병이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를 침략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안변도호부는 함경남도 영흥(永興)에 설치되었다가 11세기 초 함경남도 안변으로 옮겨진 행정구역입니다. 이곳은 현재는 '안변군'이 되어 있는데 다음의 지역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역이 예전에 살펴본 여진족이 많던 함북, 그리고 고분군이 발견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이 지역은 예전에 쓴 글중 [임하필기]에 나오는 여진족의 무덤이 있던 '북청'과 만기의 정체불명의 고분군이 있는 '부령'의 정확한 위치와 그다지 먼 지역이 아니지요. 사실 엄밀하게 말해 11세기당시 고려도경에 등장하는 호국전투승려집단인 '재가화상'이 20세기까지 존속하던 함경북도 두만강유역의 여진족들을 부르던 '재가승'과 = 관계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지, 머리를 깎고 염주를 두르던 당시 그쪽 여진족의 습속때문에 외모적으로 화상을 닮았다하여 재가승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아무튼 확실한 것은 저 [원상주존자]는 '호국불교'의 기운이 어느때보다도 투철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이 시기는 바로 동시대 승려인 김윤후(金允候, ?∼1240년)가 1231년 1차 몽고침입때 처인성에서 승려 100명가량과 천민집단등을 이끌고 처절한 전투끝에 적장 살리타이를 죽인 직후이기도 합니다. 1254년에는 홍지대사라는 승려가 또 다시 적장을 활로 쏴서 죽입니다. 이러한 수많은 기록들은 당시 고려승중 평소에 계속 무예를 연마한 집단이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한번 회화에 써 있는 글을 옮겨볼까요.

엎드려 생각컨데 이웃나라 군대를 속히 물리쳐
수도와 변방이 모두 편안하고 왕이 만수무강하기를 
북에 제사지내며 아울러 가내가 번창하기를 기원합니다.
대정(隊正) 김의인(金義仁) 

여기 나오는 대정 김의인은 고려의 무인입니다. 대정(隊正)이라는 것은 고려군의 하부단위 부대의 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중앙군인 2군(軍) 6위(衛)에 말단 지휘관 종9품관이며, 영(領)마다 40명씩 배치하고 25명으로 편성된 대(隊)라는 단위부대의 장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정이라는 책임자들이 종종 '승려군'을 이끌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기록을 볼까요? 고려사 1182년의 기록에는 전주 관노의 난이 나오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 안찰사가 보낸 군사가 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지 못한 채 이미 40여 일이나 되니 일품군(一品軍) 대정(隊正)이 승도(僧徒)와 함께 죽동 등 10여 인을 살해하여 겨우 난은 평정되었다."

원문은 다음:

고려사
세가20 명종 12년 (1182년)
공숙 등이 성에 들어가서 일품군(一品軍)의 대정(隊正)(사기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을 회유하여 적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려 했으나 계획이 성사되려 할 때 참소를 입어 파면되고, 낭중(郞中) 임용비(任龍臂)와 낭장 김신영(金臣穎)으로 대체되었다. 안찰사가 보낸 관군이 성을 공격한 지가 벌써 40여 일이나 되었으나 항복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품군의 대정이 승려들과 함께 죽동 등 10여 명을 죽이면서 반란이 평정되었다.

公淑等入城, 諭一品軍隊正【史失其名】, 謀去賊魁, 計畫垂成, 被讒見罷, 以郞中任龍臂⋅郞將金臣穎代之.
按察所遣兵攻城, 不下已四十餘日, 一品軍隊正與僧徒, 殺竹同等十餘人, 賊平. 

一品軍隊正, 謀去賊魁, 일품군(一品軍)의 대정(隊正)이 적의 괴수를 꾀어내려
一品軍隊正與僧徒, 일품군 대정이 승도들과 함께 평정하다

이 기록을 보면 일품군이라는 부대단위의 장격인 대정이 '승려군'과 함께 노비들의 난을 평정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정'이 승군들과 함께 움직인 기록이지요. 다음의 기록을 보면 이런 현장 전투부대장이나 다름없는 대정들은 이런 식으로 같은 부대원으로 승려군을 움직이기도 반대로 승려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후자의 기록.

고려사 
열전 이의방 중

이듬해에 귀법사(歸法寺)승려 백여 명이 도성의 북문으로 침범해 들어와 선유 승록(宣諭僧錄) 언선(彦宣)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의방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승려 수십 명을 쳐죽이자 나머지는 뿔뿔히 흩어져 도망갔으나 관군의 사상자도 많았다. 

이튿날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귀법사(歸法寺)·홍화사(弘化寺)등 여러 사찰의 승려 2천여 명이 도성의 동문에 집결했는데 성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자 도성 밖 민가를 불지른 후, 숭인문(崇仁門)까지 불태우고 들어가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했다. 이의방이 이를 알고 부병(府兵)을 불러 모아 이들을 쫓아내고 승려 1백여 명을 죽였으나 부병도 전사자가 많이 났다. 이의방은 부병을 시켜 도성의 각 문을 분담해 지키면서 승려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한편 또 부병을 보내 중광사·홍호사·귀법사·용흥사(龍興寺)·묘지사(妙智寺)·복흥사(福興寺) 등의 사찰을 파괴했다. 중략.

명종 6년(1176), 이의방의 문객인 장군(將軍) 이영령(李永齡), 별장(別將) 고득시(高得時), 대정(隊正) 돈장(敦章) 등이 이의방의 원수를 갚으려고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일이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먼 섬으로 유배당했다.

이 기록을 보면 이의방군과 여러 고려 대사찰의 승군연합부대가 대규모 전투를 벌인 것이 보입니다. 이 일로 이의방이 권좌에서 내쳐지자 그의 측근들이 정중부를 암살하려 하는데 이 중 '대정 돈장'이라는 사람이 보이지요. 이 기록들은 모두 명종대(재위: 1170~ 1197년)의 것으로 저 고려불화가 그려진 1235년으로부터 고작 30-40년의 기간차가 있는 기록들입니다. 당대라 봐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당시 대정(隊正)의 직책을 가졌던 김의인(金義仁)이 발의하고 주도한 이 그림은 단순히 중국이나 인도의 승려를 그린 것이라기 보다는 13세기초 그의 주변에 수없이 많이 보이고 만날 수 있던 맹군인 고려 승려군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특히 급박한 상황의 자국의 수도와 변방을 지키기위해 발원한 그림을 자국인 모델로 그림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습니다.
앞으로 김의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좀 더 깊은 연구와 이 승려의 복식등을 바탕으로 고려승군의 모습이나 기상을 더 확실하게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 하는 바램입니다.




덧글

  • 빵꾼 2017/03/16 05:14 #

    재가승은 김일성 시대까지도 더럿 있었다하는데, 다만 라마불교의 강했다네요. 고려 후기 불교가 아무래도 원나라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테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7/03/18 02:37 #

    맞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흩어져 있을지도... 사실 밀교는 고려대까지만 해도 굉장히 대중적인 것이었는데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그 미학이 현존하지 않는다는게 많이 아쉽습니다. 사천왕사같은 곳을 제대로 복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프로젝트일 것 같습니다 (다만, 또 조선후기식인 프레임을 적용하는 우는 버려야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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