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통신사船 실물크기복원과 시급한 과제 (시대별 통신사船 구현) 역사전통마

2018년까지 현재 해양박물관에 1/2로 복원되어 있는 통신사 선박을 실물크기로 만든다고 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8년까지 실물 크기로 제작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조선시대에 일본에 파견된 외교 사절인 조선통신사가 탔던 배가 최초로 실물 크기로 복원된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802년 편찬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의 기록과 '헌성유고'(軒聖遺稿)에 나온 설계도, 국립해양박물관과 일본 미술관 등에 있는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통신사선(船)'을 2018년까지 복원한다고 27일 밝혔다이번에 복원되는 배의 크기는 길이 34m, 너비 9.5m, 높이 3m이며, 형태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배인 한선(韓船)처럼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다연구소는 9월까지 실시설계를 마치고, 내년 (2017년) 초부터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갈 방침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조선통신사선은 선수와 선미가 솟아 있고, 배에 방이 많은 점이 특징"이라며 "선미에는 선원들이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배를 조종하는 키는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있고, 노가 좌우에 6개씩 있었다"며 "돛은 2개를 설치했는데, 돛대 위에는 풍향과 기상을 알기 위해 꿩털을 달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를 제작하기 위해 직경 50㎝가 넘는 소나무를 많이 확보했다"며 "국립해양박물관에 2분의 1 크기로 만든 조선통신사선이 있지만, 실물 크기로 복원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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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다. 다만, 우리의 '통신사선'관련 이야기에는 원론적인 주제가 빠져있다. 그건 바로 '시대별 통신사선의 다양한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서 2014년에 다음의 통신사선관련 포스팅시리즈를 쓴 적이 있다.


이 글들은 1719년 제 9차 (후기) 통신사선부터 살펴 본 글들로 그 이전의 1~8차 통신사선에 대해서는 살피지 못했다 (아주 짧게 오늘 소개하는 글을 따로 소개한 바 있긴 하지만). 그런데, 최근 [용주유고]라는 저서에 제 5차(조선후기)에 해당하는 1643년 통신사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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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 통신사선에 대한 조선 문헌기록

5차 (후기) 통신사는 윤순지(尹順之, 1591~1666년)가 이끌었다. [용주유고(龍洲遺稿)]는 조경(趙絅, 1586~ 1669년)의 문집이다.

용주유고
동사록(東槎錄)
그림 장식과 이층 다락이 있는 배 이야기〔畫樓船說〕

숭정(崇禎) 계미년(1643, 인조21) 봄, 일본국(日本國)에서는 자기네 나라에 후계자가 태어났다 하여 우리 통신사에게 그 경사를 함께 하자고 청하였다. 주상께서는 그 말이 사실이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상히 여기시어 허락하셨다.
나는 이에 외람되게 부사의 명을 받들고 2월 모일에 주상께 하직 말씀을 올린 후 출발하여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에 다다랐다. 일을 담당한 자들이 그림으로 장식한 배 세 척을 벌써 준비해 부두에 정박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 사람의 사신(使臣)을 각각 한 척에 태우려는 것이었다.

나는 드디어 조타실(操舵室)에 올라 배의 제도와 의장(儀仗)을 살펴보았다. 배의 길이는 40척 남짓이고 너비는 15척 남짓이며 저판(底板)은 여섯 개가 이어져 있고 삼판(杉板 외판(外板))은 열 개가 쌓여 있었다.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한 자 정도 되는 것이 열둘이었다. 

가운데에 기둥 둘을 설치했는데 기둥 사이에 판자로 집을 만든 것이 좌우에 있었다. 왼쪽은 침실로서 그 가운데 두 자리가 있고 판자로 벽을 만들어 능화지(菱花紙)를 발라 놓았으며 네 벽에 모두 문이 있고 희고 붉은 칠을 해 두었다. 여기가 바로 내가 누워 잘 곳이다. 오른쪽 또한 왼쪽과 같으면서 조금 좁았으니 편비(褊裨 군영의 부장(副將))가 거처할 곳이다. 

그 뒤에 방이 둘 있으니 통역관과 여러 역원(役員)이 거처할 곳이다. 판자로 만든 집 위로는 평승루(平乘樓)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난간을 둘러 두었으니 바로 사신(使臣)이 집무하는 곳이다. 침실의 좌우로는 모두 판자로 길을 만들어 배를 부리는 곁꾼(格軍 사신의 배를 부리는 뱃사공)이 오가며 일을 하기에 편하게 했다

또한 그 사이에는 노(櫓)를 늘어놓았는데 좌우 아울러 모두 열여섯 개다. 뱃머리에서 허리까지 각각 높은 돛대를 세웠고 배의 뒷부분에 있는 구멍에는 커다란 키를 설치했다. 배를 만든 제도는 대략 이러했다.

배의 왼쪽에는 깃발을 세워 두었는데 용을 그린 것이 하나이고 글자를 수놓은 것이 넷이었다. 배의 오른쪽에는 의장기(儀仗旗) 및 절월(節鉞)을 세워 두었다. 뱃머리에는 또 악기를 다는 기둥을 세워 커다란 북을 이어 놓았는데 대포와 돌쇠뇌 쏘는 자, 군악을 연주하는 자, 징을 치는 자가 또 커다란 북을 사이에 끼고 머물러 있었으며, 배에는 채색 장막으로 휘장을 드리웠다. 그 의장에 쓰이는 물건들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백발의 케케묵은 선비로서 수의(繡衣)를 입고 사신의 부절을 쥐고 엄연히 하루아침에 다락배(누선)를 타고 장군의 일로 나서게 되었으니 분수에 넘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고개 숙여 생각하고 우러러 탄식했다. “우리 임금이 예로써 사신을 보낸다는 것을 이에 볼 수 있고, 우리 임금이 사신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이에 볼 수 있다. 옛날에 한(漢) 무제(武帝)는 박망후(博望侯) 건(騫)을 만여 리 멀리 대완(大宛)까지 보내어 이르게 하였으나, 따르고 호위하는 무리의 성대함은 우리 통신사의 행렬에 외려 미치지 못했다. 하물며 그 밖에 다락배의 의장으로 쓰인 물건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唐) 덕종(德宗)은 위단(韋丹)을 해외로 파견하며 오직 사적관(私覿官) 10명만을 배정하여 사사로이 편의를 따르도록 하였을 뿐 식량과 금과 비단을 하사함으로써 여행길에 은총을 베풀기를 오늘처럼 성대히 했다고는 듣지 못했다. 제군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선도(善道)를 사수하여 저들을 심복시켜서 우리 임금께 보답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 바다에 두고 맹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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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면 제 5차 통신사선의 구조에 대한 아주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다. 그림만 없다뿐이지 이걸 토대로 1600년대의 통신사선을 복원해도 될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전 글에서 소개한 일본측 회화중에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간나베 역사민속자료관에 소장중인그림이 있다.
1719년 9차 조선통신사 선단도 병풍

이 그림은 1719년의 제 9차 통신사 선단을 그린 그림으로 소개되고 있다. 1643년 5차때와의 시차는 정확히 76년. 그럼에도 이전 포스팅들에서 살펴본 여러 회화중 이 그림이 가장 흥미롭다. 70여년의 차이가 있다해도 선박의 기본모델이 거의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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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 9차 통신사선 (일본회화)과 1643년 5차 통신사선(조선문헌)

하나씩 뜯어보자.

우선 세 척이라는 점이 기록과 같고, 또한 '그림으로 장식한 배'라고 되어 있는데 배의 옆면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일을 담당한 자들이 그림으로 장식한 배 세 척을 벌써 준비해 부두에 정박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 사람의 사신(使臣)을 각각 한 척에 태우려는 것이었다.'
배의 세부묘사로 들어가 본다.

1. 배의 길이는 40척 남짓이고 너비는 15척 남짓이며 

즉  길이12.12미터, 너비 4.55미터라는 뜻이다. 위의 선박크기와 거의 같아 보인다.

2. 가운데에 기둥 둘을 설치했는데 기둥 사이에 판자로 집을 만든 것이 좌우에 있었다. 왼쪽은 침실로서 그 가운데 두 자리가 있고 판자로 벽을 만들어 능화지(菱花紙)를 발라 놓았으며 네 벽에 모두 문이 있고 희고 붉은 칠을 해 두었다. 여기가 바로 내가 누워 잘 곳이다. 오른쪽 또한 왼쪽과 같으면서 조금 좁았으니 편비(褊裨 군영의 부장(副將))가 거처할 곳이다. 

자 여기서부터는 아랫쪽 그림을 보기 바란다. 배의 가운데 붉은 동그라미 부분을 보면 기둥 두개가 서있고, 그사이로 판자로 만든 집이 좌우로 만들어져 있다 (그림의 초록색 네모 부분). 또한 선명치는 않지만 선실의 색깔이 묘사처럼 흰색과 붉은 색으로 보인다. 

3. 판자로 만든 집 위로는 평승루(平乘樓)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난간을 둘러 두었으니 바로 사신(使臣)이 집무하는 곳이다. 침실의 좌우로는 모두 판자로 길을 만들어 배를 부리는 곁꾼(格軍 사신의 배를 부리는 뱃사공)이 오가며 일을 하기에 편하게 했다

평승루라는 것을 큰 배의 망루라고 쓴 번역도 있지만, 사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평승루平乘樓- 평평할 평, 탈 승, 누각 루.

한문으로 平乘을 검색하면 이런 그림들이 나온다. 즉 무언가 평평한 모양의 눕거나 쉴 수 있는 곳이다. 잘 보면 '난간'은 없지만 사람이 서 있는 선실위는 이런 평평한 두터운 대같은 곳이다. 
다만, 이런 구조를 (위에 아무런 구조물이 없이) 일반적으로 '루'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럼에도 1643년의 글은 분명 이 배가 '누선'이라고 하고 있어 의문점이 생기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2014년 또다시 발견된 1764년의 11차 통신사선 (글 맨 마지막 부분에 소개)을 통해 해소해 보겠다.

4. 그 뒤에 방이 둘 있으니 통역관과 여러 역원(役員)이 거처할 곳이다. 

방이 2개인지 1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배 후미에 분명히 선실이 있다.

5. 또한 그 사이에는 노(櫓)를 늘어놓았는데 좌우 아울러 모두 열여섯 개다. 뱃머리에서 허리까지 각각 높은 돛대를 세웠고 배의 뒷부분에 있는 구멍에는 커다란 키를 설치했다. 

이 부분이 결정적인데 배 옆의 동그라미 (노 나오는 부분)을 보면 한쪽이 8개, 즉 좌우 16개다. 배 뒤에 키가 있는지는 명확히 알수 없다.

6. 배의 왼쪽에는 깃발을 세워 두었는데 용을 그린 것이 하나이고 글자를 수놓은 것이 넷이었다. 배의 오른쪽에는 의장기(儀仗旗) 및 절월(節鉞)을 세워 두었다. 

세세한 의장이야 70년의 세월동안 많이 변했겠지만, 1719년의 통신사선에도 분명 의장기가 많다.

7. 뱃머리에는 또 악기를 다는 기둥을 세워 커다란 북을 이어 놓았는데 대포와 돌쇠뇌 쏘는 자, 군악을 연주하는 자, 징을 치는 자가 또 커다란 북을 사이에 끼고 머물러 있었으며, 배에는 채색 장막으로 휘장을 드리웠다. 

이 부분 역시 결정적이다. 배의 앞쪽 연두색 동그라미를 보자.
확대한 그림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이다. "뱃머리에는 또 악기를 다는 기둥을 세워 커다란 북을 이어 놓았는데 대포와 돌쇠뇌 쏘는 자, 군악을 연주하는 자, 징을 치는 자가 또 커다란 북을 사이에 끼고 머물러 있었으며" 거의 문헌묘사 그대로다.

위의 대선외에 중선, 소선도 잘 묘사되어 있는데 중선의 경우, 대선과 구조가 거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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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의 통신사선 복원문제

자 이렇듯 1600~1700년대의 통신사선들은 대중들의 인식보다 훨씬 자세하고 많은 자료가 현존한다. 이 시기의 선박은 특히 중요한 것이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임란후 통신사 규모 (위키백과 참고).
문헌기록의 1643년때는 462명, 그림의 1719년때는 479명이 참가한다. 

그럼 서두에 알려진 '원래 크기 완전복원'을 목표로 한다는 통신사선은 언제 것일까? 기사를 보면 현재 해양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는 1/2 크기의 통신사선을 원래 크기로 (즉 현재의 두 배) 만든다는 것이 요지다. 
2012년 복원, 전시중인 해양박물관 모델

기사를 보면 마치 조선시대의 통신사선은 모델이 저것 하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준다. 몇 차 통신사선을 복원한다는 기본적인 정보도 없다. 대중들은 아마도 이 기사를 보면 조선시대 수백년간 (1400년대에도 통신사는 많았다) 일본을 왕래한 통신사선은 해양박물관의 저 모델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기 십상이다. 

결론적으로 조선통신사 선박 모델들에 대해 (1)에 개인적인 추론을 밝힌 바 있다.

위의 모델은 아래 보이는 조선선 입진지도(朝鮮船入津之圖)라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 도서관에 소장중인 통신사선 그림을 거의 그대로 보고 만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닮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예전에 이미 확인한 것처럼  "朝鮮船入津之圖』は、安政2年(1855)に対馬に赴いた訳官金継運一向の船を描いたものとされ."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즉 '조선선입진지도'는 1855년에 대마도에 다녀간 역관 김계운의 배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는 것이다.

윗 링크글을 통해 필자는 이미 현재 (2012년 복원) 부산 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복원모델은 19세기 중후반, 즉 통신사의 극후반 선박에 가까울 것 같다는 결론을 낸 바 있다. 또한, 글중 나오는 조선회화 '범차도'에 등장하는 선박은 단순한 대마도를 다녀오던 선박이  아닌, 12차 통신사선중 (규모로 볼때) 중선이나 소선일 모델일 가능성 역시 크다는 설명도 했다. 이유가 궁금한 분은 다른 흥미로운 정보가 많으니 윗 링크글의 후반부를 읽어주시기 바란다. 

아래 미니어처처럼 일본측에서도 이 1855년의 김계운 선박을 통신사선이라고 이름붙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 아래에 소개하겠지만 일본측은 1600-1700년대의 통신사선의 회화 역시 적극적으로 모두 홍보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이 모델은 그냥 가시적으로도 1719년의 저 그림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다. 노의 갯수도 양쪽 합해 6개밖에 안된다 

이번 기사에 내년 실물크기로 복원한다고 하는 이 모델에 대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의 이야기를 보면 "배를 조종하는 키는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있고, 노가 좌우에 6개씩 있었다"라고 되어 있어 현재 1/2크기의 두배로 만드는 느낌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 보았듯 1643년 조선문헌과 1719년 일본회화의 경우, 5차, 9차 모델은 모두 한면 8개, 그리고 양쪽의 노 총합이 16개였다. 벌써 모델이 다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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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 1764년 10-11회 통신사선

예전 글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1719년보다 약 반세기후에는 이런 통신사선 또한 존재한다. 일본회화로 일어설명으로는 "勝本浦에서는 백여 마중 배가 조선 통신사 일행을 맞았다."라고 씌여 있다. 꽤 대규모 선박인데 勝本浦 라는 곳은, 이키섬의 카츠모토항구이다. 
1764년 11차 통신사선 (카츠모토 항 입항모습)

필자는 大-中-小 통신사선박은 각기 어떤 모양일까, 일본그림들의 진위보충기록 (3) 을 통해 이 그림이 1764년 조엄의 11차 통신사선을 그린 것일 것이라는 추정을 조엄의 기록인 [해사일기] 9월 13일자 '부러진 치목'기록으로 해본 바 있다.

이 배 역시 같은 동그라미와 사각형으로 1643년 문헌기록 (5차 통신사선)과 교차비교해 보았다. 역시 1719년보다 훨씬 상이한 모델임이 드러난다. 다만 '평승루(平乘樓)'라는 부분은 '루'라는 개념에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이 '루' 부분을 설치한 모델도 있고 설치하지 않은 모델도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가설치가 가능한 구조라든가). 왜냐하면 보통 '누선'이라고 하면 이런 확실한 2층구조를 말하기에 글 서두의 1719년 모델의 판자집위의 평평한 평승루구조는 엄밀히는 이상한 구조이다. 저 평승루 부분에 이런 구조물을 (난간으로 둘렀다고 되어 있다)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야기가 가능성이 높은 증거를 맨 마지막에 소개할 또다른 11차 통신사선의 입항한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글 말미에 '사족'으로 설명을 단다). 우선 그림을 보자.
보시다시피 11차 통신사선박의 또다른 이 그림을 보면 3척씩 얼핏보기에는 다른 배가 정박해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배 옆면의 외장을 제외하고는 두 모델은 사실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구조상 다른 부분은 평평한 초록색 단위에 '루'같은 구조물 하나를 2층으로 세워둔 것 뿐이다. 따라서 맨 앞에서 소개한 1719년의 회화에 나오는 9차 통신사선의 위에도 이런 구조물을 설치한다면 1643년 조선문헌에 나오는 것과 매우 흡사한 구조가 된다. 이 두 부분말이다.

2. 가운데에 기둥 둘을 설치했는데 기둥 사이에 판자로 집을 만든 것이 좌우에 있었다. 중략.
3. 판자로 만든 집 위로는 평승루(平乘樓)와 같은 것을 만들어 난간을 둘러 두었으니 바로 사신(使臣)이 집무하는 곳이다. 

현재 쓰시마 이즈하라항에는 이 카츠모토항 11차 통신사선도를 타일로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확대한 모습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 (쓰시마) 이즈하라항에 있는 11차 통신사선 그림


결언

살펴보았듯 통신사 선박의 모습은 시대별로 아주 다르다. 2018년에 복원하려는 통신사선은 그중 하나인, 그것도 1800년대중반이후의 통신사 전성기모델도 아닌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박물관에 전시할 경우 이런 정보를 대중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언젠가 추가연구를 통해 1600년대, 1700년대 어찌보면 통신사 전성기의 모델들도 추가적으로 복원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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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2014년 발견된 병풍 후속정보)

사족으로 예전 포스팅에서 2014년 당시 새로운 발견이었던 다음 그림의 정보를 추가적으로 알아냈다.
당시에는 이 그림의 소장처라든가 이름도 몰랐는데 이 그림은 현재 일본재단도서관 소장중인 "세토우치 해상퍼레이드 307척" (원제: 通信使室津湊御船備図屏)이라는 병풍도이다. 참고로 이 그림에 대한 뉴스는 국내에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본측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근 출현한 위의 지도 병풍은 무로쓰만의 지형을 바로 위에서 정확하게 그리고 있고, 항구의 풍경도 극명하게 그려진 드문 것입니다. 항구를 가득 메운 히메지 번 수군의 배는 전체 선단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고, 들어 가지 않는 선박 港外에 정박했습니다. 이 무로쓰 바다에는 구경선이 무수히 있고, 그 중 1 척이 조선 선박에 너무 가까이 전복되어 구조되고 있습니다. 배에(통신사선 추정)에 가까이 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포고령도 빈으로 비슷한 사건이 전후해 종종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1764년 즉 제 11차 통신사 일행이 에도로 가는 도중 무로쓰 항에 들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즉 이 그림의 배경은 室津湾 즉, 타토츠시의 작은 항구 무로쓰 (室津)만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이 곳은 위의 대규모 선박들의 퍼레이드와는 달리 현재는 한적한 시골항만이 되어 있다.
무로쓰 만 사진출처 (링크)

통신사의 행로중 효고현에서 오사카로 가기전 들르던 곳이기도 하다 (아래 지도).
찾아보니 일본은 '가시적 정보'를 잘 이용한다는 느낌을 물씬 받는 것이 2014년 발견된 이 조선통신사선을 그대로 확대, 아래처럼 벌써 활용하고 있다. 이 사진은 무로쓰센터 '미나토찻집'이란 곳으로 한 때 "히메지 번 오차야가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 할 때 숙소로 사용된 곳이라고 한다.
1764년 통신사선이라면 위에 보이는 가츠모토항 입항도에 나오는 모델과 같은 것이다. 확대해서 보면 분명히 닮은 점이 보인다 (특히 뒷쪽 모델). 위의 가츠모토 항 그림보다는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병풍의 크기상), 옆에 늘어서 있는 여타 일본선들과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가츠모토쪽 그림처럼 큰 규모의 선박임이 드러난다.
무로쓰만에 정박한 통신사선들 (11차, 1764년)- 2014년 발견된 그림

비교하자면 병풍그림의 윗쪽에 위치한 일본선들이 병풍에서는 자잘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런 규모다.
이 선박과 아래쪽에 위치한 통신사선을 비교하면 가츠모토항 그림에 나오는 11차 통신사선박의 규모와 거의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통신사의 정치적, 문화적 의미도 좋지만, 시대별 통신사선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많은 연구도 실제적인 홍보나 복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좀더 전공자들의 치열한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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