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조선전기에만 등장하는 침루(寢樓)와 누방(樓房)기록 한국의 사라진 건축

본 블로그에서는 그간 여러 글들을 통해 고려~조선전기까지 존재하던 저택내의 2층구조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더 찾아낸 기록을 더해 '침루'와 '누방'의 기록의 연도들을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소개해 온 문맥상 중층구조의 문헌사료들은 모두 제외하고 명확히 저 두 단어가 쓰여져 있는 기록(그리고 두 단어가 연접하지 않았어도 직접적으로 일맥상통하는 기록)만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여 그렇게 시도를 합니다.

연도를 강조해 보겠습니다.
1500년대 추정- 남흥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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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루(寢樓)

우선 1478년 성종실록의 기록부터 봅니다.

성종 9년 무술(1478,성화 14)
8월22일(신해)
공조에서 민간이 사치하는 풍속을 경계하기 위해 집의 간각과 척수를 제한하기를 청하다

大君家六十間內, 正房、翼廊、西廳、寢樓竝前後退十二間, 高柱長十三尺, 過樑長二十尺, 脊樑長十一尺, 樓柱長十五尺, 其餘間閣柱長九尺, 樑長、脊樑長各十尺。
공조(工曹)에서 아뢰기를,
“전일 사헌부(司憲府)의 수교(受敎)에, ‘근래에 민간의 풍속과 세속의 습관이 오로지 사치만 숭상하므로 참람함이 넘쳐서 제한이 없으니, 무릇 집의 간각(間閣)과 척수(尺數)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고 하였으므로, 신 등이 참작해서 자세히 정해 보았습니다. 대군(大君)의 집은 60간(間) 안에 정방(正房)ㆍ익랑(翼廊)ㆍ서청(西廳)ㆍ침루(寢樓)가 전후퇴(前後退) 아울러 12간인데, 고주(高柱)의 길이가 13척, 과량(過樑)의 길이가 20척, 척량(脊樑)의 길이가 11척, 누주(樓柱)의 길이가 15척이고, 나머지 간각은 기둥[柱]의 길이가 9척, 대들보[樑]의 길이와 척량(脊樑)의 길이가 각각 10척입니다. 

예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는 기록으로, 15세인 성종대에 민간집의 규격을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대군' 즉 '왕자'들의 집의 규모를 정하는 부분에 '정방(正房)ㆍ익랑(翼廊)ㆍ서청(西廳)ㆍ침루(寢樓)가 전후퇴(前後退) 아울러 12간인데, 고주(高柱)의 길이가 13척, 과량(過樑)의 길이가 20척, 척량(脊樑)의 길이가 11척, 누주(樓柱)의 길이가 15척"이라는 부분이 나오지요. 여기보면 고주(高柱), 즉 내부의 기둥높이가 13척 즉 약 3.93미터 이며,  누주(樓柱) 즉 루의 기둥이 약 4.54미터라고 되어 있어 상당히 높은 '침루 (숙박용 루)'가 왕자들의 집에 마련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된 고려 문인 이곡(李穀, 1298~1351년)의 문집 [가정집(稼亭集)]의 구절입니다.

가정집
율시(律詩)
여흥(驪興)의 객사(客舍)에서 차운하다

누에서 하루 묵은 것으론 아무래도 부족하니 / 一宿樓中猶未足
조각배 타고 뒷날 느긋하게 유람을 해야 할 듯 / 扁舟他日辦長閑

역시 '루'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나는 모습으로 '침루'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고려시대로 오래된 기록중 하나로 [둔촌잡영(遁村雜詠)]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이 문헌은 조선 태종 10년(1410년)에 고려말 학자 둔촌 이집(李集, 1327~ 1387년)의 문집을 목판본 2권 1책으로 간행한 것입니다.

둔촌잡영 遁村雜詠
 七言四韻律
贈交州李按廉

交州地僻民居少。薄賦輕徭異四方。海寇邇來冞入阻。土人從此各離鄕。喜聞禾黍今秋熟。燕寢樓臺八月涼。幸是同年作太守。鐵原亭上共銜觴。各一本作却

寢樓臺八月涼- 편안한 침루에 서늘한 달정도의 뜻이 될까요.

다음은 1431년 세종대의 기록입니다.

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6월2일 (갑오)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전례를 들어 공평하고 신중한 옥사 판결을 명하다

又有臨江 王三郞瞰江
樓居, 其妻凭欄食菓, 偶核墮舟中少年之巾, 少年擧首, 意婦人挑之, 及暮, 行入其家, 闃無人聲, 隨復登舟, 覺濕其履, 置竈焙乾。

또 임강(臨江)에 왕삼랑(王三郞)이란 사람은 강이 내려다 보이는 다락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내가 난간에 기대어 서서 과실을 먹다가 씨가 공교롭게도 배에 있던 소년의 수건에 떨어졌다. 소년이 쳐다보고 부인이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날이 저물자 그 집에 들어갔더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으므로 곧 다시 배에 올랐는데, 그 신이 젖은 것을 깨닫고 부뚜막에다 놓고 불에 쬐어 말렸다. 

王三郞瞰江樓居 -왕상람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루'에 살았다.

즉, 아내와 그가 살던 곳이 (그냥 잠시 경치를 감상하러 들르는 게 아니라) '루(樓)'인 것입니다. 이런 주거용 누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누각 2층에서 왕상람의 아내가 과일을 먹다가 아래 지나가던 소년에게 떨어뜨리는 장면이지요.

다음으로 조선전기의 문신, 노수신 (盧守愼,1515~1590년)의 [소재집]에 등장하는 기록입니다.

소재집
穌齋先生文集卷之四
夢覺泣書十一月

雙親分席寢樓中。一稚隨身臥檻東。辛酉中冬廿夜夢。記來非吉亦非凶。

둘이 한겨울밤에 자리를 나누어 침루에서 잔다는 기록입니다. 다음은 역시 조선전기 송순(宋純, 1493~ 1583년)의 [면앙집 (俛仰集)]에 나오는 침루기록입니다.

면앙집
俛仰集卷之三
 詩
次美哉堂韻 三首

閑吟今着舊溪山。物色人情摠向安。白首逢君天所借。酒杯隨處好懷寬。
淸溪閒釣罷巖隈。還倚松牕待月來。世事不曾驚我夢。百年天地好徘徊。
百里雲山一寢樓。近籬溪曲更淸幽。詩情每與閑情在。時共沙鷗作勝遊。

해석은 확실치 않아 일단은 그대로 두지요. 다음은 '침루'라는 단어는 아니지만 '루에서 잔다'는 기록입니다. 이언적(李彦迪, 1491~ 1553년)의 문집 [회재집(晦齋集)]의 기록입니다.

회재집
고시(古詩) 금시(今詩)
비안의 작은 누각에서 묵다〔宿比安小樓〕

들판 밖에 병풍처럼 산이 두른 곳 / 屛山橫野外
먼 데서 온 나그네 루(누각)에 묵네 / 遠客宿樓中
창 앞에는 오동나무 잎이 푸르고 / 梧葉當窓翠
물 위에는 점점이 연꽃이 붉네 / 荷花點水紅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치자 / 蕭蕭疏雨響
채색 구름 하늘을 물들이누나 / 艶艶綵雲籠
홀로 앉아 오래도록 읊조리다가 / 獨坐沈吟久
유유히 고개 들어 하늘을 보네 / 悠然見太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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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방(樓房)

지금부터는 누방(樓房), 즉 2층방 기록입니다.

우선은 예전에 따로 소개한 바 있는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신돈의 저택구조입니다.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辛旽宅尙餘層樓一區 平昔爲惠民局 審藥居之 李敞爲都事時 刊其層合爲一屋 今爲常平倉 余先人?廬 近在其前 余兒時嘗登其樓 處處陷作曲 白晝如漆 蓋辛旽當路。故誣朝士。拘諸狴犴。朝士之妻委來乞哀。辛旽嘗殺白馬。以其陰曝乾。磨而作屑。和酒飮朝士妻使之醉。行淫於其樓云。

신돈(辛旽)의 집은 아직도 층루(層樓) 한 구역이 남아 있다. 지난날 혜민국(惠民局)이 되어 심약(審藥)이 여기서 살았다. 이창(李敞)이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위층을 헐어 합쳐 한 채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상평창(常平倉)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 집이 가까이 그 앞에 있어 내가 어릴 적에 그 누(樓)에 올라간 일이 있다. 

곳곳에 우묵하게 후미진 방을 만들어 대낮에도 깜깜했다. 이는 신돈이 요직에 있었을 때, 고의로 조정 관리들을 속여 폐간(狴犴 감옥. 옛날 감옥 문에 사나운 폐간을 그려 붙인 데서 나온 말)에 가두고 그들의 아내가 와서 애걸하게 되면, 신돈은 흰 말을 잡아 그 음경(陰莖)을 말려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그들의 아내에게 술에 타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이 누(樓)에서 음행(淫行)을 저질렀다고 한다.

'누방 (2층방)'에 대한 기록으로 고려말 최대권력가였던 신돈의 저택구조인데 예전글에서 이미 혜민원을 개조해 만든 중층누각임을 밝힌 바 있지요. 그냥 2층방이 아니라, 넓은 2층에 여러 채의 방이 구석구석 존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辛旽宅尙餘層樓一區 신돈의 저택중 층루(여러층의 누각)한 구역이 남아 있었다.
刊其層合爲一屋  나눠진 그 층을 합해서 한 채로 만들었다.
余兒時嘗登其樓 내가 어릴때 그 루를 오른 경험이 있다.
處處陷作曲房  루의 곳곳에 우묵하게 구부러진 방들을 만들었는데
白晝如漆    밝은 대낮에도 깜깜했다 .
行淫於其樓云 그 누에서 음란한 짓을 한다.

즉 누각위에 방이 한개가 아니라 복잡한 복도를 지나 여러 개가 존재하는 대규모 루임이 드러나는 기록입니다. 신돈(辛旽, 1322~ 1371년)의 저택이었는데 문헌의 저자인 차천로(車天輅, 1556~ 1615년)가 어린 시절 직접 그 루에 올라가 보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소 1560년대초까지는 (약 200여년간) 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태조실록 1400년의 기록입니다.

태조실록 4년 (1400년)
東隅有連排三間 西隅有連排樓五間 (중략) 東樓三間 有上下層 (중략)西樓三間 有上下層 (중략) 東西角樓各二間 중략) 東西樓庫之類總三百九十餘間也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중략)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중략) 서루(西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중략) 동·서각루(角樓) 각각 2간 (중략)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중략.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ㆍ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에 닿았다.

이것은 태종대에 지은 경복궁의 모습으로, '누방'이 5칸이니 꽤 큰 규모의 2층방이 있고, 동루와 서루라는 누각이 각각 상하층이 있다고 되어 있으며 특히 이 누각들은 행랑으로 각각 연결되어 있음이 보입니다. 
다음은 그로부터 약 120년후인 중종대의 기록. 이 '누방'이라는 곳이 확실히 상층에 존재하던 실내의 방임을 보여주는 역시 임란전인 기록입니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탕빙이라는 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당시 한량이던 윤탕빙(尹湯聘)을 말합니다.

중종 53권, 20년(1525 을유 / 명 가정(嘉靖) 4년) 3월 14일(계유) 5번째기사
유세창의 공술 
유세창을 국문(鞫問)하니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나이는 32세입니다. 신은 서소문 밖에서 살고 한량 윤탕빙은 아이고개(阿伊古介)에서 사는데 갑신년 12월부터 반송정(盤松亭)에서 서로 만나 그대로 함께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탕빙이 매양 신의 집에 왔고 더러는 반송정에서 함께 활쏘기를 하였습니다. 이달 초승 무렵에 폐문(閉門)할 때쯤 탕빙이 충찬위(忠贊衛) 김말진(金末珍)과 신의 집에 왔다가 신이 말진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갔는데, 그가 평소 침실로 쓰는 행랑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도록 했습니다. 중략.

아우 세영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4경 무렵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도 각각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탕빙이 신에게 ‘함께 다락방으로 올라가 이야기하자.’고 하며 탕빙이 신에게 ‘전시(殿試) 보이는 날 함께 놀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신이 ‘어떤 놀이를 하며 노느냐?’고 묻자, 탕빙이 ‘반송관(盤松館) 뒷동리에 각기 술과 과일·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소혁(小革)) 을 쏘며 놀이한다.’고 하기에, 신이 ‘좋다.’고 했었습니다. 중략.

원문을 보면 이렇습니다.
共上樓房, 作話。같이 다락방 (누방)으로 올라가 이야기하자.

이때가 4경, 즉 새벽 1-2시경입니다. 즉 16세기전반 당시 유세창이란 자의 집에 '2층방'이 있었다는 기록이 됩니다. 비슷한 기록으로 약 20년후인 명종대 기록도 나옵니다.

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7일(정묘)
臣初入經筵而退, 與王希傑。在政院樓房, 憑修草冊, 相與言曰
신이 처음으로 경연에 들어갔다가 물러나와 왕희걸(王希傑)과 더불어 궁궐정원의 다락방(樓房)에 앉아 초책(草冊) 을 증빙 정리할 때 서로 말하기를... 중략.

여기 보면 궁궐정원의 누방에 앉아 초본원고를 정리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즉, 이 곳도 '실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더군다나 같은 1545년 그해 명종을 이어 즉위한 인종실록 기록을 보면 2층에만 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하방 즉 누각의 1층도 방인 구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 6월 27일 무오 8번째사 
1545년 명 가정(嘉靖)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영의정 윤인경 등이 들어가 상의 환후를 살피다

仁鏡等隨任而入, 上在樓下房, 房不爽快, 炎氣薰然。

윤인경 등이 윤임을 따라서 들어가니, 상이 다락 아래 방에 있는데 방은 상쾌하지 않고 더운 기운이 훈훈하였다. 상이 백립(百笠)·백포(白袍) 차림으로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 기록을 보면 '상', 즉 '인종'이 樓下房 (누하방, 즉 다락아래방)에 있는데 방이 덥고,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즉, 2층건물의 1층부분에 방이 있는 구조가 됩니다. 특히 이 기록은 '인종'임금의 기록이므로 당시 경복궁등 궁궐내의 침루이 기록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더 이전기록으로 유명한 세종대의 기록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1445년 '누침실'이라는 말이 대놓고 나오는 기록입니다.

세종 107권, 27년(1445 을축 / 명 정통(正統) 10년) 1월 28일(임인)
거처를 연희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승정원에 전지하다    
昨日左議政等以衍禧宮多蟲蛇(중략)若蟲蛇果多 恐未安心過夏 且松木鬱密 而北垣低微 樓寢室遮陽朽破 將伐松築垣 修葺遮陽 予欲移御他處 畢修而還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어제 좌의정 등이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이 있다고 하여 초수리(椒水里)로 가기를 청한 것을 듣지 않았고, 또 개성으로 가기를 청한 것도 또 듣지 않았으나, 문득 생각하니 만일에 벌레와 뱀이 과연 많다면 안심하고 여름을 지내지 못할까 싶다. 또 소나무가 울밀하고 북쪽 담이 낮고 미약하며, 다락(루)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환자(宦者) 전길홍(田吉弘)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을 가 보고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樓寢室 (루침실), 즉 '누의 침실'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침루에 '차양'이 있었음도 나옵니다. 

조선전기의 사료들이 속속 번역소개되면서 조금씩 그 실체가 보이는데, '누방'이라는 단어는 실록뿐 아니라 일반문집에서도 조선전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후기에는 사라집니다. 대부분 사찰기록입니다. 우선 김수온(金守溫,1409~1481년)의 [식우집]의 기록입니다.

식우집(拭疣集)
原文图片 記類
奉先寺記 

樓房三間。名曰虛寂寮。西樓房三間。名曰燕寂寮。佛供殿六間。名曰香積堂。正廳二間,房一間。名曰興福寮。正廚二間幷五間辦都房。前後有退四間。名曰轉熟堂。庖廚之所。有樓庫地庫幷十六間。傾廊造餠廳,湯子房,洗閣幷十五間,沙門三間。名曰離幼門。以楹計者。摠八十有九間。중략.

이 기록은 봉선사(奉先寺)라는 사찰에 대한 기록인데, 봉선사는 원래 969년(고려 광종 20) 국사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때(15세기초) 절을 혁파했다가, 1469년(예종 1)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고 칭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저자 김수온의 생몰시대인 15세기, 즉 세종대왕대의 봉선사 중창기록입니다. 위에 '종루각'을 만들었다는 굵은 체 부분은 정확히 1469년의 중창기임을 보여줍니다 (참고로 현재의 봉선사는 1848년(헌종 14)에는 화주 성암(誠庵)과 월성(月城)이 중수한 모습입니다). 

東樓房三間。名曰虛寂寮。西樓房三間。名曰燕寂寮。
즉 동쪽누방은 세칸이고 (이름은 허적료), 서쪽누방도 세칸(이름은 연적료)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역시 조선전기의 문인인 주세붕(周世鵬,1495~ 1554년)의 [무릉잡고]에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명찰 개경 영통사(靈通寺)에 대한 기록입니다.

武陵雜稿卷之一○原集 原文图片
贈六全上人 

明月對酌毗盧堂。儒談釋語雜今古。終宵枕流西樓房。渠凌絶險我由麓。分溪半日會朴淵。朴淵飛瀑天下奇。중략.

終宵枕流西樓房 
"밤새도록 서쪽 누방에 베개를 누이다." 라고 되어 있어 조선전기까지의 영통사에는 침숙용 누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반저택의 누방기록입니다. 1482년 성종실록에 실려 있는 기록으로 역시 예전에 따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1482년 성종실록
성종 13년 6월 16일 계축
제안 대군의 아내 박씨가 종과 동침한 일은 무고한 것임을 아뢰다

또 하룻밤에는 무심(無心)이 다락 침실(寢室) 아래에 이르러서 둔가미ㆍ내은금ㆍ금음덕ㆍ금음물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나는 잠이 들어 알지 못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무심의 목소리를 듣고 내은금에게 물었더니 (중략).

又一日夜, 無心到樓寢室下
推問屯加未.... 我則入睡不知

이 장면은 제안대군 이현(齊安大君 李琄, 1466~1525년)의 아내인 박씨부인이 가종과 사통했다는 것을 추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씨부인이 추문중 자신의 정당성을 반박하는 논박을 하는 와중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無心到樓寢室下- 루의 침실의 아래에 무심(종 이름)이 와서..."

이 기록은 당시 2층집구조의 침실이 있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문헌기록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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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마지막으로 위에 소개한 '침루'와 '누방'에 대한 기록을 리스트로 작성해 보겠습니다. 문집과 실록기록을 따로 뽑아 연대순으로 정리합니다.

태조실록 4년 (1400년)
세종실록 13년 (1431년)
세종실록, 27년(1445년)
성종실록 9년 (1478년)
성종실록 13년 (1482년) 
중종실록, 20년(1525년)
인종실록, 2년 (1545년)
명종실록, 즉위년(1545년)

이곡(李穀, 1298~1351년)
신돈(辛旽, 1322~ 1371년)
이집(李集, 1327~ 1387년)
김수온(金守溫,1409~1481년)
이언적(李彦迪, 1491~ 1553년)
주세붕(周世鵬,1495~ 1554년)
노수신(盧守愼,1515~1590년)
차천로(車天輅, 1556~ 1615년)

이 중 마지막 '차천로'의 경우는 자신의 집이 아니라 '신돈 저택'의 2층구역이 당대까지 남아 있던 것을 구경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아서 보니 명확하게 보이지요. 1400년 태종실록에서 1545년 명종실록까지, 그리고 1298년 이곡부터 1554년 주세붕까지입니다. 1592~1599년의 임진왜란 전에 모두 몰려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조선전기와 후기의 건축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런 '문헌기록'으로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저택의 2층루는 임란직후인 17세기 (숙종대)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정확하게 '침루' 라든가 '누방'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별채용 (객용)으로 지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앞으로 드라마나 영화등의 매체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선전기 주택구조에 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최근 몇년간 슬슬 시동이 걸리는 분위기지만) 나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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