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화시대는 [실제적]으로 '현재, 여기' 존재하는가? 역사전통마

혹은 돌려 말하자면 문화재 고증복원이 먼저인가, 만화가 먼저인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주제는 완벽하게 1:1 대응이 되는 관계는 아니지만 닭과 달걀이라는 해묵은 문제와도 닮아 있습니다. 조금 더 이론적으로 보자면 저번 주에 소개한 이 논제와도 관련된 문제라 생각합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을 통해 역사가 어떤 식으로 재구성되는지에 대하여 정리하며 역사가에 의해 방향성을 가질 뿐 아니라 발명되고 과장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주: 혹은 원래 '전통'은 그러함을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역사가의 역할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역사학도 근대 역사학의 실증주의 시대를 거쳐서 성장하였다. 즉, 실증주의 역사관의 치열한 사료비판과 사실 고증은 역사가가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것으로 근대 역사학이 축적시킨 결과가 현대 역사학을 가능케 한 것이다.

한국건축사를 여기에 대입해 보자. 한국건축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표방하는 것은 실증주의적 고찰이었다. 당시 일본건축사학자들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역사학을 전개시킨 인물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이를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표방하는 바는 언제나 실증주의적인 고찰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건축사를 일본인 학자들이 시작하였고 이들의 대부분은 역사적 고증을 중요시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당대의 건축물을 비롯해 다양한 사료가 남아 있었으므로 고증작업이 상대적으로 순조로웠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 석조 건축물과 고분을 제외하면 실물사료가 많지 않아서 한국건축사의 고증작업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이후 일본건축사가 실증주의적인 고증을 넘어서서 현대 역사학의 흐름에 발맞추어 새로운 건축사를 서술하기 위한 시도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한국건축사는 여전히 고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주: 즉 중국과 일본의 경우, 이미 실증주의를 넘어선 역사학적 단계처럼 새로운 해석과 재건을 통한 전통건축과 건축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한국건축사가 반드시 현대 역사학의 흐름에 발맞추어 가야 하는가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한국건축사는 언제쯤 역사고증 이후를 고민할 수 있는가? 현재 진행형인 한국건축사의 역사 고증 작업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 끝맺음의 가능성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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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전통건축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을 '전통문화전반'으로 대입시켜도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은 주제입니다. 사실 아래 부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임시저장으로 써 둔 글인데 적당한 시기를 찾지 못해 몇 년동안 묵혀둔 것입니다. 전통문화를 '응용' 혹은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부분에서, 특히 '신화' 혹은 '고대-중세의 생경한 신비스러움'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쓴 것입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성공적인 예로서의 전통문화의 정체성정립과 관련 마켓팅의 '선순환'이 이루어진 나라가 공교롭게도 이웃국 일본이라 볼수 있을 겁니다. 이 중 일단 '애니메이션'에서의 신화적 컨텐츠 활용을 들고자 하는데 2002년 안혜정씨가 쓴 다음의 글이 적절할 듯 해서 발췌합니다 ('합니다'체로 고침).

일본의 강한 캐릭터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에마키로 13세기 이래 교토(京都)의 서북쪽 산에 있는 코잔지(高山寺)에 보관되어온 네 개의 두루마리 [쵸쥬기가(鳥獸戱畵)]가 있습니다. 이 [쵸주기가]를 보고 있자면 최근 개봉한 미아자키 하야오의 최신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폴짝거리는 개구리신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구리들의 모습과 행동, 개구리들의 기발한 몸짓이 [쵸주기가]에 등장하는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이지요. 또한, 꼭 개구리가 아니더라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초주기가 (13세기, 헤이안시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1세기- 2002년)

일본의 전통 온천장을 중심으로 외부에서는 거리의 풍경, 내부에서는 빽빽하게 들어찬 장벽화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 각지의 전래민화와 토속신앙 속의 정령, 귀신들과 각종 요괴들이 총출연합니다. 상상의 세계를 잃어버린 현대 어린이들에게 일본 전통을 선사하고 싶은 미야자키 하야오감독만의 바램이지요. 미야자키는 이미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모모노케히메)], [붉은 돼지(포르코 로쏘)]를 통해 일본 전통 속에 살아 숨쉬는 인격이나 신격을 갖춘 동물들과 정령들, 그들의 변신하는 모습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또 굳이 미야자키가 아니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보면 12세기 에마키서부터 드러나는 강한 캐릭터 전통이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곧잘 발견하곤 합니다.
가쿠조시 (12세기, 헤이안시대) 

예를 들어 다카하타 이사오(高畑 勳)감독의 애니메이션 [헤이세이 너구리대작전]의 그 많던 너구리들의 기발한 전투장면, 혹은 히라기 아오이(ひいらぎあおい)의 원작 만화 [고양이 남작 바론]을 바탕으로 한 콘도 요시후미(近藤喜文)의 [귀를 기울이면] 등의 애니메이션을 조금만 눈여겨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무수한 귀신들과 요괴들, 인간에서 동물로 변신하거나 때론 그 반대되는 현상들, 인격과 신격을 함께 지닌 캐릭터의 근원이 바로 12세기에 등장했던 에마키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안혜정, 에마키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까지- 일본의 캐릭터 전통, 2002, 디자인DB웹진)

일본은 한 예일 뿐, 프랑스, 이탈리아등 유서깊은 국가들은 물론 중국쪽의 컨텐츠에서도 이런 느낌 (즉 현대적인 느낌과 다른 생경함)을 종종 느끼곤 합니다. 당장 올해 본 [서유기 월광보합 리턴즈]도 좋은 예입니다. 도교적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데 이러한 생경함이 우리 관객들에게는 이질감으로 작용, 작품에 대한 한국측 별점이 낮아진 느낌도 있습니다.
서유기 월광보합 리턴즈 중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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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느낌, 신화와 현대

기실, 우리에게도 컨텐츠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필자가 계속 소개해 온 기담/괴담 카테고리의 글들은 물론, [삼국유사]라는 우리의 대표적인 고대문화의 텍스트만 '맨눈'으로 들여다 보아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텍스트는 넘쳐납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글을 보시지요. 시간이 없으신 분은 대강 건너 뛰어가면서 읽어보시길.

삼국유사 중:
무루(無漏)에 관하여

석(釋) 무루의 성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바다 배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천축국(五天竺國)으로 가서 팔탑(八塔)을 예배하려고 하였다. 이미 사막(沙漠)을 건너서 우전국(于闐國)을 지나 서쪽으로 가 총령(蔥嶺)에 이르러서 큰 절에 들렀는데, 그 절의 비구(比丘)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중들이었다. 중들이 무루가 천축으로 가는 뜻을 물어보고는 기절(奇節)이 없으면서 천축으로 간다고 여겼다. 이에 승들이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름나지 않은 사람은 천축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곳에는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독룡을 교화하여 징험이 있으면 그곳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루가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연못가의 언덕에 올라가 보니, 오직 호상(胡床) 하나만 보였다. 이에 그 호상에 앉아 있었다. 밤이 장차 다하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그 괴물이 기운(氣運)을 토하매 갖가지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밝았다가 어두워지곤 하였다. 무루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큰 뱀이 나타나서는 그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이에 무루는 그를 몹시 불쌍하게 여겨 삼귀(三歸)를 받게 하자 뱀이 떠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하여 와서는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법사의 덕분에 도탈(度脫)하게 되었으니, 의리상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3일 후에 비늘이 덮인 몸을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반석(盤石)이 있는데, 그곳이 이 제자가 형체를 버린 곳이니, 역시 저의 유해를 찾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무루가 묵묵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천축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에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있는데, 그곳에다 기도하면 영검이 있으니, 기도하면서 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길하고 상서로운 조짐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무루가 이에 관음성상 앞에 서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49일이 지나자 온몸에 종기가 생겨 몸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곧바로 탄알만 한 크기의 쥐새끼가 나타나 왼쪽 넓적다리에서 누런 색깔의 고름을 여러 말 빨아내자 종기가 모두 나았다. 

무루가 기한이 다 되어 응험을 얻자, 여러 중들이 말하기를, “선사를 보건대 화연(化緣)이 마땅히 당나라 땅에 있겠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교화할 뜻을 간직하고 있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부질없이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억지로 교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선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무루는 성현(聖賢)의 말이 반드시 헛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즉시 되돌아왔는데, 출발할 즈음에 중들이 무루에게 말하기를, “난(蘭)을 만나면 즉시 그곳에 머물러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의 이름에 난(蘭) 자가 들어간 곳이 있었다. 이에 말[馬] 앞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는 드디어 그 산속으로 들어가서 백초곡(白艸谷)이란 곳을 찾아내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얼마 뒤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금색(金色)을 한 사람이 어전(御前)에서 보승불(寶勝佛)을 염불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사문(沙門) 가운데 행적이 일반 중들과 다른 사람이 이 산에 살고 있는데, 항상 그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습니다.”하였다. 이에 그를 불러오자, 황제가 보고서 이르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다.” 하고는, 곧바로 내사(內寺)에 있게 하고 공양하였다. 

무루는 여러 차례 표장(表章)을 올려서 예전에 숨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에 그를 몹시 아꼈으므로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없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내문(內門)의 오른쪽 미닫이 위에 두 발이 생겨났는데, 땅 위로 몇 자가량 떠 있었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상주하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직접 그곳에 임하여, 옛날에 숨어 살던 산 아래에 장사 지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표(遺表)를 찾아내었다. 

이에 즉시 그대로 하게 하고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상여를 호송해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루가 회원현(懷遠縣)에서 교화를 많이 행하였으므로, 그를 인하여 그곳에다 집을 짓고는 하원(下院)이라고 불렀는데, 상여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신좌(神座)를 들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별도로 당우(堂宇)를 지어 그곳에다 안치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체(眞體)가 단정하게 그대로여서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 신승전(神僧傳)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신승전]은 신이한 승려 208인의 전기를 기록한 책으로 명나라 태종 (14세기)이 몸소 만든 것과 다른 훨씬 이전의 신라 원효 (7세기)의 저서(현전하지 않음)의 것입니다. 즉, 이 텍스트는 7세기경의 한국의 고대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헌입니다.

읽고 나면 느껴지는 감정은 '신비로움', 혹은 '지금과도 그리고 조선후기와도 다른 느낌의 문화적 생경함'일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쓰자면 '신화적' (비실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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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삼국유사의 대부분의 글은 이런 느낌을 줍니다. 아마 신라의 고대기담집인 [수이전]이 발견되어 읽어본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으리라 거의 확신합니다. 사실 이런 저런 문헌에 일부 등장하는 [수이전]의 파편 역시 그런 느낌이니까요. 당대의 다른 나라의 문헌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많은 기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조금 알려진 고구려의 수정으로 된 성인 [수정성 기담]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느낌의 텍스트는 과연 우리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을까요? 아니, 소비자체는 되고 있는 것일까요? 필자는 이러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 활용하는 대중매체는 현재 한국의 TV, 스크린, 혹은 만화책등의 어떤 곳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에 비해 조선후기 교조적 유교프레임의 분위기가 이런 매체들에서 생생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의 일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90년대까지 느껴보지 못한 17-18세기식 Atmosphere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편중 현상은 필자의 주 관심분야인 건축뿐만이 아닌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 당장 동화 역시 조선후기식 프레임을 그대로 걸치는 예도 많습니다. 삼국시대의 텍스트를 조선시대식 프레임으로 필터를 거쳐나오는 많은 어린이용 동화책도 좋은 예입니다)

즉, 삼국유사나 수없이 전해오는 각종 전설/민담/설화, 그리고 조선시대의 수필집이나 설화집에 부분실려 있는 (수이전등의 기록등) 많은 전승기록들을 조금 심하게 말해 창고에 쳐박아 두고 있거나 편중적으로 꺼내 적당히 깎아 선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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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적 복원과 신화시대의 사이

그리고 이런 특정 시대를 제외하면 역시 '고증적'분위기로 돌아섭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설사 삼국-통일신라(남북국)시대의 사료가 부족하다 해도 우리에게는 같은 시대에 해당하는 그리스-로마시대나 수-당나라시대나 헤이안시대를 인식하는 각국의 현대인들의 시각과 필적하는 시각이 매우 부족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물리적으로 처박아 두거나 필터링을 거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들에게 '그 시대'를 인식하는 틀이 너무 '실증적'인 것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 문제의 또다른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서두에서 소개한 한국건축사의 문제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1997년)의 시대적 배경말입니다. 이 작품은 보신 분들은 모두 느끼셨겠지만 그야말로 '신화의 향연'입니다. 사무라이시대이전의 이민족지역이던 홋카이도 지역의 신화가 수려하게 펼쳐지고 있어 마치 '고대'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우리로 따지면 고작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무로마치시대 (14~16세기)가 배경입니다.

물론 당대 이 쪽 지방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알수 있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그 당시에도 이곳은 대화족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대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생소하며 에조지내의 역사구성에 대해서는 상상력의 여지가 많을 수 밖에 없는 형국입니다만, 그럼에도 핵심은 '상상의 여지가 많은 시대'를 (그것이 중세건 고대건) 현재에 어떻게 그려내는가 하는 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홋카이도 지역의 많은 신화들과 유구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상상력으로 활발하게 사용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신화'라고 일반인에게 떠올려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단군신화를 거점으로 하는 고조선시대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필자가 물어보지 않았으니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럴 것이라 추정합니다). 당장 [삼국유사]라는 걸출한 이야기구조를 보유하고도, 이러한 인식적 습관이 붙어있지요. 

그럼 우리 대중이 '신화적 시대' 혹은 '그런 분위기'를 멀리하는 굉장히 현실적인 민족이냐 (여기서 민족이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멀리는 유럽, 가까이는 중국 일본의 동시대의 풍부한 스토리텔링과 신화적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쓰이고 있는것을 감탄하고 부러워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매체나 언론이나 연구자도 지적하는 바를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어떠한 드라마나 영화도 '신화적' '신비적'으로 이 시대를 그려낸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외려 80년대의 '전설의 고향'중 일부 신라시대를 그린 느낌에서 간헐적으로 맛본 적은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우리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명한 작품인 [음양사]입니다. 원작은 소설, 이를 바탕으로 90년대에 만화가 나왔고, 영화화되었습니다. 921년 태어나 1005년 사망한 아메노 세이메이라는 실존했던 퇴마사를 소설-만화에서 되살렸는데 영화나 만화 모두 보고 나면 '당시의 지금과는 다른 문화적 혹은 인식의 시스템'을 '신비로운 생겸함'속에 체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음양사 중

영화 음양사 중

우리에게는 이러한 '이야기의 당대의 컨텍스트'를 담아 재현하거나 느끼려 하는 욕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런 '체험'을 할 기회를 아직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예가 각종 전문기관에서 제공하는 스토리의 프레임입니다. 다음의 예를 보시지요. 

이 이야기는 조선후기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의 저서인 [임하필기]에 나오는 기이한 이야기로 서해에 위치한 대부도에 해마다 특정일 출몰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닷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하필기 
춘명일사(春明逸史)
대부도(大阜島)의 불

남양부(南陽府) 대부도 바다에서 매년 상원일(上元日)에 횃불 같은 불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동쪽에서 일어나고 하나는 서쪽에서 일어나 서로 합하여 큰 횃불을 이룬다. 불빛이 물에 번쩍이고 나는 불꽃이 별처럼 흩어지되 순식간에 섬광이 일어나니,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이다. 이날 섬의 남녀들이 서로 달려가서 빛의 크고 작은 것을 보고 그해의 풍흉을 점친다.

보시다시피 대부도 바다에 상원일에 횃불같은 큰 불이 나타나는데 동서에서 나타나 합쳐지며, 섬광이 터지는 것이 기이한 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고 대부도의 청춘남녀들이 달려가서 그해의 운수를 점친다는 내용.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의 대표적 문화컨텐츠 제공사이트중 하나인 [문화컨텐츠닷컴]에서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불을 가지고 하는 싸움은 크게 횃불싸움과 불의 세력을 다투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싸움의 형태로 격렬하지만 후자는 불을 가지고 하지만 완만하다. 그러나 모두 불을 통해 복을 빌고 액을 물리치고자 하는 목적은 같다고 여겨진다. 불의 세력을 겨루는 풍속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소개하고 있는데, 남양부 대부도에서 매년 상원에 남녀가 동서로 편을 이루고 각기 큰 불덩이를 물에 대서 일어나는 화광의 세를 겨루어 한해의 운세를 점친다고 하였다.
<참고 문헌>
조완묵,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 정신세계사, 1996.

차이가 확 느껴지지요. 원문의 어디에 이런 '해석'이 있습니까? 혹은 해석을 할 여지가 있습니까. 물론 정월대보름에는 등불을 집집마다 밝히는 축제가 있었고, 쥐불놀이도 했습니다. 하지만, 임하필기의 저 기록은 '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이게 어떻게 이렇게 해석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증적 해석'을 억지로 하려다 보니 이런 컨텐츠가 제공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아니 우리 역사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신화적인 느낌이나 지금 (혹은 조선후기)의 문화적, 인식적 틀과 다른 시대의 생경함 혹은 신비함을 될 수 있는 대로 '그대로' 바라보는 혹은 그 느낌을 효과적으로 혹은 영리하게 이용하는 여러 변주를 우리 문화계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럴만한 역량과 데이터가 이젠 어느정도 쌓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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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물론 이 포스팅의 말미에 나오는 질문은 매우 철학적인 것입니다- 이미 개인적인 결론은 매듭지어 두었지만 아직은 나누기에 무르익지 않아 몇년째 미루는 중입니다만. 담론이냐 실체냐라는 질문에 오늘의 포스팅내용이 작지만 연관이 되는지라 링크를 걸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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