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만월대의 大樓, 의봉루의 규모를 보여주는 사료들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연경궁은 지금 '만월대'로 불리던 곳에 위치한 정궁입니다- 하지만 연경궁은 개성환도후의 정전이고 그 이전 만월대의 정궁은 회경전과 건덕전이 위치한 곳입니다. 강화천도후 이 개성의 연경궁을 그대로 본떠서 이름도 연경궁으로 짓고 강화에 고려궁을 짓지요. 연경궁은 919년 지은 건축물입니다.

연경궁이 소실된 최후의 사건은 홍건적의 난 (136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21세기들어서야 남북이 합동으로 제대로 저 '묻혀버린' 궁궐을 발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주 작지만 이 연경궁에 있던 '대루 (큰 누각)'이자 대표적인 루엿던 '의봉루'의 규모를 유추해 줄 단서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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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봉루(儀鳳樓)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의봉루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봉루(儀鳳樓) 처음 이름은 신봉루(神鳳樓)였는데 뒤에 이 이름으로 고쳤으니, 즉 연경궁(延慶宮)의 대루(大樓)이다. 무릇 태묘(太廟)에 제사지내거나, 연등대회(燃燈大會)와 팔관회(八關會) 때에는 임금이 이 누에 나와서 계간(鷄竿)을 높이 세우고 대사면(大赦免)을 하며, 혹 승려 수만 명에게 밥을 먹이고, 혹 중앙과 지방에 대포연(大酺宴)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르면 원래 의봉루의 이름은 '신봉루'. 고려시대의 대대적 연중행사였던 팔관회에는 왕이 의봉루에 나와서 계간(鷄竿), 즉 고려대 깃발중 하나였던 금계기(金鷄旗)를 세우고 죄수들을 사면하고 승려 수 만명에게 밥을 먹이던 곳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누각에서 수만명을 먹인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었던 대규모 공터이자 격구장인 '구정'에서 행한 것입니다. 이 구정의 규모와 위치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의 글입니다.


아래는 위의 글을 통해 필자가 유추해 본 격구장 (구정)의 범위 (분홍색, 혹은 붉은 색)입니다. 보시면 이 구정의 윗쪽에 '신봉문'이 보이지요.
이 '신봉문'이 '루'였으므로 '신봉루'가 됩니다. 즉, 이 곳이 후일 '의봉루'가 된 것입니다. 이 의봉루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왕의 중요한 행사에 단골장소가 됩니다. 고려말기인 충목왕(忠穆王, 1337~1348년)때까지도 팔관악등 주요행사를 이곳에서 관람합니다.

고려사절요
충목왕(忠穆王)
병술 2년, 원 지정 6년
11월에 왕이 의봉루(儀鳳樓)에서 팔관악(八關樂)을 구경하였다. 이때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용겸(金用謙)이 그 조카인 환자 김용장(金龍藏)을 통하여 갑자기 왕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으며, 또 김용장의 조카인 곽윤정(郭允正)도 그 세력에 의하여 대경(大卿)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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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봉루의 높이와 너비를 짐작케 하는 문헌기록

그럼 의봉루는 얼마만한 규모였을까요? 일단, 남한쪽에서 만든 미니어쳐의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의 가장 앞쪽에 있는 처마가 없는 2층건물이 신봉문, 즉 의봉루입니다.
현재 네트웍상에서 실제 의봉루의 터를 볼 방법은 없습니다. 딱 한장의 사진, 그것도 일부로 보이는 사진만이 한 장 공개되어 있는데 다음의 사진입니다.
의봉루터 (부분)

그렇다면 의봉루는 저 미니어처에 나오는 규모처럼 컸을까요? 일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즉 연경궁(延慶宮)의 대루(大樓)이다"라는 표현으로 보아 만만한 건축은 결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문헌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중 이자겸 열전에는 다음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은 예전에 한번 살핀 바가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이자겸 중
왕이 신봉문(神鳳門)으로 와서 황색 일산을 펴니 척준경의 군졸들이 바라보고 늘어서서 큰 절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고 환호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무엇 때문에 무기를 소지하고 궁궐로 왔느냐고 묻게 하자, “역적들이 궁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직을 지키려고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역적도 없고 짐 역시 무사하니 너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는, 내탕(內帑)의 은폐(銀幣)에 줄을 매어 군졸들에게 내려주고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과 기거사인(起居舍人) 호종단(胡宗旦)을 시켜 군사들을 잘 타일러 무장을 해체하게 했다. 

노한 척준경이 칼을 뽑아 들고 이중 등을 쫓아버린 후 군졸들에게 다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크게 함성을 지르게 하였다. 더러 화살이 왕 앞에까지 날아오자 방패로 화살을 막았다. 의장 휘하의 승려들이 도끼로 신봉문(神鳳門) 기둥을 부수자 문루를 지키는 사람이 기둥을 부수는 자에게 화살을 쏘아 머리를 맞추어 즉사시켰다. 중략.

義莊之徒, 以斧斫神鳳門柱, 有自樓上射斫之者, 中其頭卽斃.

이 기록은 1126년 인종의 이자겸(李資謙, ? ~ 1127년) 제거 사건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인종이 척준겸과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시도에 이 둘이 무력으로 반격하는 장면인데, 여기보면 '의장'이라는 승려의 지휘아래 승려들이 '도끼'로 신봉문 기둥을 때려부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왕의 군사들이 화살로 반격, 기둥을 부수는 승려들의 머리를 맞추는 급박한 묘사도 등장하지요. 여기에 다음의 구절이 나옵니다.

有自樓上射斫之者

즉, 저 번역버전에서는 글자그대로 표현하지 않은 "(신봉문의) 누 '위'쪽에서 궁수와 베는 자가 있어" 라는 구절입니다. 비록 '상층'이라는 말은 안나오지만 어감상 '樓上'에서 활로 쏘아 막는다는 말은 신봉문 누각의 높이가 꽤 높았음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만약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면 고려대의 무술이 뛰어난 전투승들이 저 정도 높이를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 '기둥을 부수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기둥을 부수는 자들에게 2층에서 화살을 날리죠. 즉, 검이나 직접 손이 닿을 정도의 높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위의 미니어처의 중층누각정도는 되어야 나올 수 있는 장면 같습니다. 

다음은 '너비'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사절요] 충선왕대 1313년조에는 다음의 흥미로운 기록이 전합니다.

고려사절요
충선왕(忠宣王)
계축 5년(1313), 원 황경 2년
○ 팔관회(八關會)에 왕이 의봉루(儀鳳樓)로 나아갔다. 상왕은 왕사(王師) 정오(丁午), 혼구(混丘)와 더불어 누의 서쪽에 있었으며, 공주는 왕과 숙비(淑妃)와 함께 누의 동쪽에서 풍악을 구경하였는데, 권력있는 귀인들의 종복들이 넓은 뜰에 들어와 서로 싸우다가 던진 돌이 누 위까지 올라와 시신(侍臣)의 붉은 가죽띠의 갈고리가 혹 맞아 떨어진 것이 있었다. 상왕이 위사(衛士)에게 명하여 몇 명을 잡아다가 모두 곤장을 쳤다.

○八關會,王御儀鳳樓,上王與王師丁午,混丘,在樓西,公主與王淑妃在樓東觀樂,權貴僕從,入廣庭相鬨,投石及於樓上,侍臣紅鞓鉤,或有中落者,上王命衛士捕數人,皆杖之。

1313년 충선왕대의 기록으로 이제는 '신봉루(신봉문)'에서 '의봉루'로 이름이 바뀐 시대입니다. 역시 '팔관회'를 관람하는 장면인데 여기 흥미로운 묘사가 나오고 있지요. 

上王與王師丁午,混丘,在樓西,상왕은 왕사, 정오, 혼구와 함께 누의 서쪽에서
公主與王淑妃在樓東觀樂 공주는 왕, 숙비와 함께 누의 동쪽에서 보며 즐겼다.

즉, 같은 행사(팔관회)를 관람하는데 상왕 일행은 루의 서쪽에, 공주, 왕, 그리고 숙비는 루의 동쪽에서 관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왠만한 규모의 누각이라면 이런 묘사가 가능했을까요. 상왕과 왕의 일행이라면 어느정도의 규모는 있었을 것입니다. 각 일행이 서로 '동 서'로 나뉘어 최소 작은 소리로 나누는 대화는 닿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이런 묘사는 타당합니다. 또한 노비들이 싸우다가 던진 돌이 누의 상층(2층)까지 닿았다는 표현에서도 높이가 느껴집니다. 

이러한 문헌기록들은 고려대 당시 위봉루(신봉루, 신봉문)의 규모를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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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루'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곳은 경복궁과 대비하자면 광화문과 같은 곳입니다.

현재 발굴조차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인 이런 유적들은 사실, 한국이었다면 당연히 경복궁급 위상을 가지고 발굴과 연구가 진행중이었을 귀중한 궁궐건축들인 것입니다. 고려시대가 (필자의 생각으로) 삼국시대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거의 '기억상실'의 시대가 된 것은 역시 '접근성'의 이유가 가장 크다는 생각입니다.

언젠가 '우리 역사'의 이러한 귀중한 장소와 유적들을 마음껏 탐구하고 알리고 재건하는 시기가 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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