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김용환 화백 거북선 후속 추적글 역사



한국 근대만화의 대표작중 하나인, 코주부로 (고바우가 아님) 유명한 고 김용환 화백께서 17세기추정 일본제작추정 거북선도를 보고 그리셨다는 그림인데 (아무튼 온라인정보상으로 보자면, 그리고 필자생각에도), 색감이나 느낌이 현대적으로 잘 표현된 듯 하다. 이러한 작업은 꽤나 의미가 있어보인다. 그리고 아래그림은 아마도 조선전역해전도(이건 20세기 것)를 보고 그린 삽화같다. 그런데 한가지 그러나 중요한 의문점이 있다.

과연 김 화백께서 이 그림을 어떻게 언제 그렸느냐 하는 점이다. 김화백께서 타계한 해는 1998년, 그런데 위의 거북선 그림이 한국사회에서 알려진 시점은 2004년 8월 미국뉴욕에서의 공개서부터였다 (관련기사링크). 우선 알고 싶은 점은 위의 그림이 김화백님의 그림인가 하는 점 (인터넷상의 정보는 그러한데 확실한 출처를 알고 싶다), 그리고 그렇다면 어느 책에 실렸느냐는 점이다. 

그림의 출처는 여러 검색을 해보면 예전에 계몽사에서 출간된 그림한국사 (전 10권)인데, 이 그림책의 그림들이 놀라운 수준. 추정이지만, 아마도 1987년의 초판을 증보개정한 판본들의 삽화가 아닌가 싶다. 그중 개정판에 추가된 거북선도일 것인데, 이 가설이 맞다면 궁금증의 핵심이 생겨난다. 과연 김화백님은 이 그림의 원화를 '언제 어디서' 보신 것일까? 

이제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저 그림은 1867년에 니가타현 인근의 나카오카 성벽을 허물때 발견되었고, 그 이후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아래 미국으로 옮겨졌다. 그렇다면 김화백은 이 그림을 미국에서 보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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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약 4년전 김용환 화백의 그림을 우연히 발견하고 가졌던 의문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 그림의 출처로 생각되는 속칭 17세기 [채색 거북선도]와 20세기 [조선전역해전도]를 김 화백이 본 시점 (만약 보고 그린 것이라면)이 요지입니다.

우선 한가지 확실한 점은 윗글처럼 1987년이후 증보판에서 이 그림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초판에 이미 삽입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래는 87년 초판으로 추정되는 본이며 이 책안에 이미 위의 거북선도와 해상전투도가 들어 있습니다.

계몽사 그림한국사 (전 10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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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화백의 생애

우선 간단하게 김화백의 생애를 다룬 글들을 살펴보지요.

김용환은 한국에서 '일본 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 같은 존재. 일본에서 최고의 삽화가로 명성을 떨치다 해방 직전 한국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렸다. 1945년 창간된 <서울타임즈>와 <중앙신문> 등에서 시사만평과 <코주부>를 게재했고, 단행본과 잡지 등을 통해 만화를 대중화시켰다. 

펜화에 있어서는 지금도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바우 김성환,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홍길동> 감독 신동헌, 만화 및 캐리커쳐의 달인 박기정 등 한국 만화의 1세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 존재였다. 너무 뛰어난 재능 탓에 6.25 당시 남북한 정권이 코주부 쟁탈전을 벌였고 그 결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돈을 가장 잘 버는 예술인이기도 했다.195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98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기사를 보면 그가 199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3년후인 1998년에 미국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김화백의 생애를 좀 더 자세하게 다룬 글 (링크)을 보면 그가 일본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특히 이순신장군에 대한 관심이 자세히 나옵니다.

김용환은 1959년에 한국을 떠나 도쿄에 있는 미군 극동사령부의 작전국 심리전과에서 1972년까지 근무하게 된다. 미군 극동사령부는 1955년부터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여 전국의 관공서와 학교는 물론 농촌의 마을 단위에 이르기까지 배포된 일종의 미군 홍보지였다. 김용환은 이 잡지에서 표지 그림을 맡았다. <자유의 벗>의 표지는 상당 부분 한국적 소재를 다룬 이미지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의 풍속, 역사, 전통을 친근하게 되살리는 듯한 이들 이미지는 앞뒤 표지에 컬러로 인쇄되어 그림의 맛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당시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감안하면 양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자유의 벗>의 컬러 표지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할 터. 거기에 김용환의 세밀한 풍속화가 곁들여졌으니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당연했다. 
 
김용환은 평생에 걸쳐 이순신과 그의 전적을 다룬 그림들을 그렸다. 심지어 일본의 한 군사잡지에서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등에 대한 글을 3년여에 걸쳐 연재를 할 만큼 이순신에 대한 연구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식민 지배에 대한 경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간 만화잡지였던 <만화뉴스>의 기사로 해군을 취재하던 차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를 탐사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순신 장군에 관한 그의 이미지 작업은 만화로, 역사화(달력, 잡지, 단행본)로, 펜화로, 슬라이드로 구현된다. 가히 전방위적인 영역에 걸친 작업이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에 대한 이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량해전이나 명량해전과 같은 충무공의 활약상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 작업 역시 거의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숱하게 접했을 이순신에 관한 이미지의 생산자가 바로 코주부 김용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시각적 경험의 상당 부분을 김용환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모르고 있을 뿐. 어쨌든 우리가 이순신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시각적 상상력의 영토는 결코 김용환이 해낸 작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 개인의 노력으로 숱한 사람들의 지식과 문화적 경험의 층위를 이만큼 결정적으로 구성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이 글을 보면 김화백이 충무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주간 [만화뉴스]의 해군취재기사 탐사였으며, 그가 일본 군사잡지에 무려 3년간 거북선에 대한 연재글을 올릴 정도로 관심과 지식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에 대한 이미지는 전적으로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충무공의 해전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는 거의 김용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60-70년대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알린 인물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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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귀갑선해전기 출판

1959년 김용환 화백은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가 동경의 미군 극동사령부에서 1972년까지 근무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읽었지요. 사실 그가 이 13년간을 미군 작전국 심리전과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 다른 일반화가들보다 더욱 많은 양의 정보를 볼 수 있었다는 예상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가 1972년까지 이 곳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일단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1983년 김화백이 잠시 귀국해 인터뷰를 했던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아래 버전으로 보시길.
이 기사를 주목하는 까닭은 두 부분 '그는 몇년 전에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귀갑선 해전기]를 일본에서 펴내기도 했다'라는 것과 '동경 교외에서 부인 요나미지 미쓰코 여사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는 그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일본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라는 부분입니다.

잠시 예전 포스팅에서 저 '거북선도'의 출처를 짧게 다룬 부분을 발췌해 보지요.

저 그림은 1867년에 니가타현 인근의 나카오카 성벽을 허물때 발견되었고, 그 이후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아래 미국으로 옮겨졌다. 

즉, [채색 거북선도]는 19세기말 나카오카 성의 벽을 허물때 최초로 발견되었고, 1970년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이 그림이 1970년까지는 일본에 있었다는 말이 되지요. 그리고 김용환 화백은 정확히 이시기 (60년대)를 일본에서 미군 극동사령부 정보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한 관심은 계속 증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1979년 일본에서만 출판된 [귀갑선 해전기]라는 저서입니다. 김화백이 일본으로 이주한 시점이 1959년, 위의 기사에 나오는 [귀갑선 해전기] 발매가 1979년. 보통 '출간'전 몇년정도 정보수집기간을 생각하면 1970년, 이 그림이 미국으로 넘어갈때 정보를 취합하셨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고려대 소장 귀갑선해전기 
 
책 내부를 살필 길이 없어 아쉽지만, 어쩌면 이 책의 삽화에 이미 1987년 저 [그림 한국사]에 실렸던 거북선삽화와 비슷한 그림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래 보이는 이 책의 커버를 보면 이미 87년 한국에서 출판된 그림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귀갑선해전기 표지 (1979)

아래는 1987년 [그림한국사]중 김용환 화백의 삽화. 위의 장군 갑주와 거의 똑같은 갑주입니다. 허리에 찬 검은 대모습까지 똑같습니다.
원래 전 포스팅에서의 '의문점'은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 어떻게 '일개 화백'이 한국에서 일본내에서만 알던 거북선도를 보고 (그것도 1970년에 미국 개인소장으로 넘어간) 이러한 삽화를 그린 것일까였지요. 그런데, 오늘 적어도 알게 된 것은 그가 '일본'에 있었으며 이순신에 대한 개인연구에 치열했고, 그것도 정보취합에 적합한 '미군 정보부'에서 13년이나 일을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에 그려진 [조선전역해전도]를 이미 반영하신 것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당시 (70년대) 취합가능한 정보를 모두 모아 그리신 느낌인데, 그 와중에 70년에 기사가 뜬 저 전설의 [거북선도] (와 일본에 있던 [조선전역해전도])를 보신 것이 아닐까하는 추정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미국에서 보신 것일까?'라는 제 전 포스팅의 질문은 '일본에서 보셨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답을 합니다.

김용환 화백과 두 그림사이의 의문점은 이 정도로 일단 풀고, 좀 더 깊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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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채색거북도선과 발견경위

아래의 그림이 김화백이 (아마도) 많이 참고한 듯한 2005년 우리에게 비로소 공개된 (가칭) 채색거북선도입니다.
문제의 17세기(추정) 일본발굴 채색거북선도

자 이 그림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요? 일단 2005년 국내소개당시 기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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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원형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화가 16일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거북선의 모습은 ‘이충무공전서’(1795년 간행)에만 대략적인 스케치로 그려져 있고 몇몇 민화 형태로 전해오긴 했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고서화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고서화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학계에서 극소수 학설로 알려진 3층 거북선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가로 1.4m, 세로 2.39m 크기로 2장의 대형 비단천에 그려진 그림은 거북선 4척과 판옥선 1척, 소형선 7척 등과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병사들이 무기를 점검하는 모습, 평상복 차림의 민간인들이 보급물자를 나르는 모습 등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또 윗등이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 등 거북선 모양에 대한 학자들의 엇갈린 주장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체가 바래 육안 해독은 불가능하지만 왼쪽 하단에 일본으로 반출된 후 일본사학자가 ‘해동편(역)사’에서 발췌해 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 제원이 기록돼 있어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해 판독이 이뤄질 경우 거북선의 완전 복원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고서화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이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으며, 16일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공개됐다. 평양 숭실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선교사 데이빗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인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처음 발견된 것으로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반입됐다.

재미 한국고미술연구가인 최영래씨는 "최근 조지아대학에 의뢰해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가 최고 1640년대로 추정됐다“며 “임진왜란(1592∼1595) 후 거북선 기지창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화로 보인다"고 말했다. 

뉴욕=김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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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담당한 김노열씨는 현재 미주 한국일보 부국장으로 활동중인 분입니다. 한국에 당시 소개된 기사는 위의 내용이 전부였지요. 하지만 당시 기자가 속해있던 미주판 한국일보의 기사는 좀 더 그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었습니다. 아래의 기사입니다.


윤원영 사장 ‘거북선 실사도’ 어떻게 수집했나
2004-08-18 (수) 
3년여 끈질긴 설득작업
자칫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를 거북선이 고서화<본보 8월17일자 A1면>를 통해 현실 세계에 모습을 보인 것은 윤원영(롱아일랜드 거주) 서진무역 사장의 한국 역사 유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동기가 됐다. 

윤 사장은 약 4년전 우연한 기회에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가 중요한 한국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우리 여사를 만났다. 그러나 마우리 여사는 고서화를 팔려고 하지 않아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3년만인 지난해 1월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윤 사장은 그간 이 고서화를 조지아 대학 연구소와 국내외 전문가들의 감정을 통해 진본이라는 판단이 서자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전격 공개한 것이다. 마우리 여사는 옛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지낸 데이빗 마우리씨의 손주 며느리로 한국 태생의 남편 데이빗 마우리 3세와 젊은 시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여러 점의 한국 및 일본 고미술품을 수집한 소장가.

윤 사장이 구입 당시 마우리 여사와 나눈 대화 녹음 테이프에 따르면 이 그림이 최초로 발견된 때와 장소는 1867년 일본 교토 인근 니이가타 현의 나가오카라는 성이다. 당시 일본의 메이지 천황 정부와 막부간의 권력다툼에서 천황정부가 승리하자 당시 풍습대로 항복의 표시로 다이묘(일본의 지방영주)는 성벽을 일부 허물고 천황을 맞이했으며 그 성벽을 허물 때 그림이 나왔다. 

’메이지 천황이 교토의 쇼군 거처이자 막부의 상징이었던 니조성으로 행차했다’는 기록은 도널드 킨이 저술한 ‘메이지 천황’(다락원, 김우동 옮김)의 213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발견시 같은 크기와 종류의 그림이 한 장 더 있었으나 훼손이 너무 심해 복원이 불가능했으며 현재 그림은 두 폭의 가리개 형식으로 표구돼 상당부분 수채물감으로 덧칠한 상태다.

마우리 여사는 남편과 1970년 미국으로 반입해 오기 위해 일본골동품반출협회로부터 반출 승인절차를 받았으며 그 후 33년간 메릴랜드주 세인트 마이클 타운의 자택에 보관해왔다.하지만 마우리 여사는 이 그림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오기까지의 경위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윤원영 사장은 마우리 여사로부터 거북선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 3년이 넘는 설득 기간이 필요했다며 여사는 거북선 그림이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는 데 사용되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김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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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 여사

이 기사를 보면 당시 그림을 공개한 서진무역이란 회사의 사장인 윤원영 사장은 쉽게 이 그림을 얻은 것이 아니라, 메릴랜드에 거주하던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라는 분을 2001년 만나 약 3년간의 설득끝에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기사에는 이 '마우리 여사'라는 분의 가족관계가 나옵니다. '옛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지낸 데이빗 마우리씨의 손주며느리'이자 '데이빗 마우리 3세의 부인'으로 소개됩니다. 

필자가 알아본 결과 이 부분은 약간의 오류가 있는 듯 합니다. (다른 분이 계시지 않는 한) 우선 숭실 평양전문학교 교장은 '데이빗'이 아니라 '일라이 M. 마우리' 박사입니다.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른 마우리박사는 없습니다. 따라서 기자가 이름을 착각한 듯 보입니다. 아래 표가 역대 숭실대 (숭실전문학교 포함) 교장/학장 목록입니다. 당시 마우리라는 분은 E.M. 마우리 한 분입니다 (이 표에서는 모우리로 표기).
따라서 우선 이 '일라이 M. 마우리'박사에 대해 좀 알아 보지요.

1967년 기사를 보면 이 분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꽤 유명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E.M. 마우리박사는 1909년에 20대청년으로 한국에 와서, 1919년 3.1. 운동때 한국인 제자들도 도와주고 6개월간 감옥까지 다녀오신 분이었군요. 또한 20~30년대에 존재하던 제 5대 평양 숭실전문학교 (현 숭실대)의 교장이었습니다.

이로부터 2년뒤 동아일보에서는 기자를 파견, 오하이오주 컬럼버스 시에 있던 그의 자택을 방문해서 취재합니다. 다음은 1969년 기사.



이 기록을 보면 이 자택에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의미있는 여러 문화유물이 소장되어 있지요. 필자가 이 기사에 관심을 가진 부분은 붉은 부분, 즉 아들 '데이비드 마우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기억나시죠?

이 고서화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이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으며, 16일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공개됐다. 평양 숭실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선교사 데이빗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인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처음 발견된 것으로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반입됐다.

마우리 여사는 옛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지낸 데이빗 마우리씨의 손주 며느리로 한국 태생의 남편 데이빗 마우리 3세와 젊은 시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여러 점의 한국 및 일본 고미술품을 수집한 소장가. 마우리 여사는 남편과 1970년 미국으로 반입해 오기 위해 일본골동품반출협회로부터 반출 승인절차를 받았으며 그 후 33년간 메릴랜드주 세인트 마이클 타운의 자택에 보관해왔다.

기사에서는 '데이빗 마우리 3세'라는 사람이 엘리자벳 마우리 부인의 남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 이 그림을 남편과 미국으로 옮겼다는 것인데, 기사의 붉은 부분을 보면 3세라고는 되어 있지 않지만 데이빗 마우리는 E.M. 마우리박사의 아들이며, 그가 일본 요코하마시에 69년 당시 살고 있었으며 '몬산토 미국 화공회사'의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9년 동아일보의 취재내용이 사실일까요? 이 기록은 2014년 미국에서 발간된 "Historical Dictionalry of Pyonyang"이란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Historical Dictionary of Pyongyang (공저: Justin Corfield (2014)) 중:
이것은 평양과 관련있는 인물들의 인명사전격인데, 중간에 '데이빗 토마스 마우리 (David Thomas Mouwry, 1917년생)라는 이름이 보이죠. 마우리 박사의 자녀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69년의 기사를 보면 데이빗 마우리는 '몬산토'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1984년 미국의 [Who's who in Technology Today: Chemistry and biotechnology]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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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who in Technology Today: Chemistry and biotechnology
Barbara A. Tinucci, Louann Chaudier (
J. Dick Pub.,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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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이 1969년 동아일보기사 당시 그러니까 52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몬산토 화공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Monsanto Japan이라는 미국계 화공회사에서 1965년에서 1974년까지 근무한 것으로 나옵니다. 자 원 기사를 다시 한번 볼까요.

마우리 여사는 남편과 1970년 미국으로 반입해 오기 위해 일본골동품반출협회로부터 반출 승인절차를 받았으며 그 후 33년간 메릴랜드주 세인트 마이클 타운의 자택에 보관해왔다.

따라서, 1970년 만약 데이빗 토마스 마우리씨의 부인이 기사에 나오는 '엘리자벳 마우리'여사라면 이 부부가 저 거북선 그림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승인을 받아 옮겼다는 것이 문맥상 유려하게 이어집니다. 또한 70년 혹은 이전, 이 부부가 미국 메릴랜드에 집을 구입했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이 기록들을 볼때 '마우리 일가'와 한국과의 인연, 그리고 그림의 출처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의 행적은 '미국인의 일본그림 구입'과 어느정도 Rationale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 부분.

'윤 사장이 구입 당시 마우리 여사와 나눈 대화 녹음 테이프에 따르면 이 그림이 최초로 발견된 때와 장소는 1867년 일본 교토 인근 니이가타 현의 나가오카라는 성이다. 당시 일본의 메이지 천황 정부와 막부간의 권력다툼에서 천황정부가 승리하자 당시 풍습대로 항복의 표시로 다이묘는 성벽을 일부 허물고 천황을 맞이했으며 그 성벽을 허물 때 그림이 나왔다. ’메이지 천황이 교토의 쇼군 거처이자 막부의 상징이었던 니조성으로 행차했다’는 기록은 도널드 킨이 저술한 ‘메이지 천황’(다락원, 김우동 옮김)의 213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성벽이 허물어진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요? 
현재 남아있는 나가오카 성 성벽초석 일부

나가오카 성은 공교롭게도 1867년 이듬해인 1868년, 에도막부와 신정부군사이의 치열한 전투인 '호쿠에쓰 전쟁'이 일어나 완전히 파괴됩니다. 이 때 성벽들도 많이 붕괴되지요. 따라서, 전쟁 전해인 1867년 막부군과 신정부군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신정부측이 승리했다는 것은 순서상 힘듭니다. 

따라서 이런 결론을 내 봅니다. 혹시 '마우리 여사'가 말한 1867년이란 것이 실은 1868년의 이 '호쿠에쓰 전쟁'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인이자 이방인인 (더군다나 2001년 당시 이미 고령인) 그녀가 1년정도 햇수를 잘못 이야기했을 가능성은 얼마든 있지요. 실은 이 호쿠에쓰 전쟁의 양상을 보면 "교착된 전국을 타파하기 위해 신정부 군은 1868년 5 월 19일 요이타번 어용 상인에 의한 선박의 원조를 받아 시나노를 도하하고 나가오카 성벽 아래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라고 되어 있어, 이 당시 성벽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인터뷰내용처럼 1868년 신정부군이 승리한 이 호쿠에쓰전쟁 이후 메이지천황이 나가노성을 방문, 이 때 성벽일부를 허물고 맞이했을 가능성도 보입니다. 이 부분은 더 조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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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개 이후, 어느덧 12년. (많은 문화재관련 기사와 토픽이 그러하듯) 아직 이 그림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학계에서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이 회화에 대한 깊은 검토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약 이 그림이 정말로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에서 나온 17세기 당시의 그림이라면 그 가치는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특히 사료가 부족한 토픽을 메꿀 수 있는 이런 귀한 발견이 나왔을 때, 우리 학계나 관련기관(정부포함)에서 연구기금을 마련해서라도 발빠르게 뛰어들 수 있는 풍토가 생기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많은 경우, 한 주간 검색어순위에 올랐다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귀중한 가능성을 내포한 문화재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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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7/08/03 10:56 #

    과연.......보면서 놀란게 정말 우리나라.만화작가들중.이런.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점과 교차검증으로 여러가지 정보를 알려주시는 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튼 정말 중요한 문화재인데 과연 행방이라도 정확히 찾는게 가능한지 궁금할 따름이네요 잘봤습니다.
  • 역사관심 2017/08/04 01:50 #

    글 감사합니다. 김용환화백이나 김성환 화백같은 분들은 (사실 그렇게 멀리 갈것도 없이 윤승운, 이향원, 박수동등 80년대 만화가까지도) 인터넷 훨씬 이전세대분들이라 요즘 작가들에 비해 확실히 잊혀지기 일쑤인 존재들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카이빙과 전통의 이용이라는 주제가 다시 나오게 되지요 ^^ (이쯤에서 각설하지 않으면 또 주저리..).

    답답한 것은 예전 둔황석굴 신라인 그림 발견뉴스나 발해동전 뉴스등등, 한국사에서 사료부족이 명확한 주제가 나오면 언론에서 하루이틀 톱뉴스로 다루다가 후속뉴스나 연구소식도 없이 그냥 묻혀버린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도 이곳에서 몇번이나 했는데, 이런 종류의 정보가 전문가들의 제대로 된 고증없이 묻히기 일쑤라는 것이 가장 문제이고, 또한 그런 고증이 없기에 결과에 대한 명확한 이야기없이 카더라 수준의 넷상 글로 유포, 변질되기 쉽지요. 언젠가 이 주제만으로 글을 한번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라라 2017/08/04 15:06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세금을 저런 연구에 제대로 쓰면 아깝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문체부 장관이 환빠라...
  • 역사관심 2017/08/06 10:05 #

    뭔가 거대한 주제나 뜬구름 잡는 주제에 파고드는 경향이 일부 있는데, 정말 필요한 곳에 제대로 투자하고 차근차근 기초를 쌓아가고, 또한 세부담론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연구와 프로젝트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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