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및 문화계 스스로의 팔자르기- 중요한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폐해 한국의 사라진 건축

예전부터 존경하고 좋아하는 김동욱 교수님의 1995년 선구자적 글. 이번 주가 되서야 만날 수 있었는데 필자의 생각과 오버랩되는 주장을 이미 22년전에 펴고 계셔서 반갑고 놀라웠습니다. 참고로 가장 최근저서인 2015년의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에 대한 서평을 남긴 바 있는데, 이런 열린 분이니 이 글에 나오는 이런 부분이 솔직하게 눈으로 보이셨으리라 사료됩니다.


1995년의 이 논문 [광복이후 건축사학의 전개와 일본 식민의 영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는 이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비단 건축뿐 아니라 전방위적인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 (좁게 말해 한국학)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필자가 몇번이고 주장한 '뿔없는 도깨비론'으로 대표되는 '한국 요괴담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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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팔자르기가 된 부메랑격 철학

논문중 주요 부분을 발췌합니다. 그다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니 조금 시간을 들여 읽어보시길.

2. 일본에 대한 기피 내지는 무관심
일정기 네댓도 되지 않는 소수 일본인 학자들이 3,40년대의 제한된 학문 환경속에서 기술한 한국건축 연구는 결국 시간이 가면 모두 사라지고 말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중략.

정작 문제는 그런 과거 일본인들의 몇몇 저술보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는 식민화의 피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의식은 우선 학문연구에서 일본 것은 무조건 기피하려는 자세와 역사전개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일본의 탓으로만 치부해 버리고 내재적인 원인분석을 게을리 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우리 역사인식을 우리 스스로 크게 제한해버리고 절름발이로 만들 소지가 크다.

이 문제에 대해 건축사학의 학문적 성장에 장애라고 생각되는 것 두 가지를 예로 들고자 한다. 하나는 근대 이전의 일본건축을 비롯해서 일제시대 건축에 대한 무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근대건축이 쉽게 성숙하지 못한 원인을 일본의 식민지배 탓으로 돌리고 더 이상의 역사적 검증을 하지 않는 점이다. 

근대 이전에 일본 건축이 어떤 형성과정을 겪었는지를 다룬 논문은 이 50년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고작 고대에 한국인 기술자가 미개한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 금당을 지어주고 또다른 집짓는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중략. 일본인들은 우리가 글자를 가르쳐주고 건축술을 가르쳐 준 이후에도 여전히 문화적으로 미숙하고 지은 집도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편견만이 자리잡았다고 짐작된다. 마치 17세기에 일본을 방문했던 통신사들이 눈에 보이는 일본도시의 번성함을 굳이 외면하고 유학에 조예가 없던 왜인을 야만시하던 자세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사이 일본의 고대나 중세건축은 이미 수십년동안 서양인들에 의해 소개되고 평가되어 세계 건축문화의 대열에 당당히 올라서 있다. 우리만이 여전히 고대나 중세 일본건축을 무시하고 외면하려 들었을 뿐이다. 중략.

주변나라의 사정을 밝게 아는 것이 바로 자신의 특질을 이해하는 지름길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주: 더군다나 동아시아 삼국처럼 서로 문화적 공통점과 교류가 잦았던 경우라면). 그 동안 이런 점에서 우리는 너무 무관심했고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강점기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우선 기피하려는 자세가 있었다. 결국 자신의 특질을 확인하고 그 특질을 세계에 내놓는 작업이 늦어진 결과만을 초래했다.

일본에 대한 기피현상은 또다른 측면에서 학술적 답보를 초래한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은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는지 모르겠다. 근래 2,30년동안에 도심부에 있던 일제시대 건물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이점에 대해 진지한 검토조차 없었다. 일본인들이 짓고 살았던 건축의 성격이나 그 역사적 평가를 시도한 것도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학술적 조사나 진단을 하기도 전에 건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초 건립목적이 식민착취에 있다해도 그 36년간 그리고 고아복이후 수십년간 오랫동안 이 건물들은 우리 민족과 함께 시대를 이어온 역사적 산물이다. 또 우리 근대 도시경관의 형상에 큰 몫을 차지해 오기도 했다. 이런 건물들을 충분한 학술적 조사도 거치기 전에 허물어 없애버림으로써 우리 근대사는 또 하나의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짓고 살았던 집만이 아니다. 이 시대에 우리 민족이 지어낸 살림집들도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시대 변화의 조류에 맞추어 새로운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여 소위 근대적인 개량을 시도한 한옥들도 왜식이 가미되었다는 (되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학술적으로 외면된 채 사라져 갔다. 한옥의 변천사에도 커다란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조선시대 건축이 순조롭게 근대적인 것으로 변화해가지 못한 원인은 일단 식민통치 때문으로 말해 버릴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천편일률적인 답변만 내놓고 있다면 식민통치가 끝난 후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이어나가는데 곧 한계를 겪고 만다. 식민지배 이전단계에서 우리 건축술이 도달해 있던 위치는 어디였으며 식민 지배때문에 빚어지게 된 굴절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천착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없이는 광복 이후 한국건축사의 서술도 완전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마음깊이 자리잡고 있는 일본건축에 대한 기피나 무관심이다. 이런 무관심의 결과가 결국은 우리 자신의 폐회적인 한계로 되돌아 오고 한국 근대건축의 역사전개과정에 공백만을 늘려 놓게 된다는 결국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배의 후유증속에 (주: 그리고 그 컴플렉스로 인한 자신의 목조르기에) 사는 셈밖에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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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로그를 꾸준히 찾아주신 손님들은 그리 낯설지 않은 주제라고 느끼실 지도 모르겠군요. 예를 들어 이 글은 지금도 많은 분이 읽어주고 있는 필자의 이전 포스팅과 많은 부분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어떤 학문분야든 철저하게 알아보지 않고, 특히 극단으로 가는 경향은 지양해야 할 주의점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신화-설화연구라는 분야에서도 이는 엄연히 적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는 일제시대의 잔재라면 치를 떨고 모든 것을 없애려는 즉흥적인 감성주의가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데,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이해가 되지만, 적어도 학문의 분야에서는 주의해야 할 태도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우리의 '도깨비' 연구도 그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90년대중반 이후, 한국의 도깨비에 대한 '외형'연구에서 가장 큰 주장이자, 이제는 한국사회에 어느덧 만연해가는 주장은 이 문구로 보입니다: "뿔이 달리고 가시가 박힌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무서운 도깨비들은 일본의 오니(鬼)의 이미지다. 우리의 도깨비는 뿔과 방망이가 없거나 나무방망이를 들고 있으며, 털이 많으며 순박하며 어리숙하고 사람과 씨름을 좋아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정말 한국의 도깨비는 일괄적으로 "뿔이 없고 방망이가 없는 순박한" 한 종류의 모습일까요? 적어도 필자가 파악하는 바로는 그렇게 일괄적으로 단정지을 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도깨비 담론이 '내용'에 그치지 않고 '매력있는 외형구축'에 힘을 실을 수 있으려면 '성격'상분류에만 천착, 이런 조상들이 남긴 조각조각들의 시각적/가시적 성과들을 무시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어불성설입니다 (막말로 거꾸로 요즘들어 나오는 나무방망이를 들고 뿔이 없는 도깨비 그림- 우리 역사상 남아 있는 그림, 단 한 점도 없습니다)."
18-19세기 조선 민화중

특히 필자가 이야기한 결론 부분은 오늘 소개한 김동욱 교수님의 이야기와 거의 똑같습니다.

"도깨비담론에서 일제시대의 잔재가 있다면 그건 야차가 정형화된 일본의 오니가 아니라, '그들과는 달라야 하기에', 역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인 야차나 뿔이 달린 귀매류들을 과감하게 어떤 치열한 연구나 고민없이 담론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컴플렉스성 이데올로기화된 태도, 그래서 수많은 우리 문화적 대상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태도. 바로 그것이 다름아닌 '일제시대가 남긴' 우리의 심각한 문화적 적폐라 해도 과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건 요괴담론뿐 아니라 건축담론, 나아가 한국미 담론에서도 흔하게 보입니다)."

기실 이런 시각이 여전히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은 다음의 글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조금만 발췌해보자면:
승리거리 남측 끝에 위치한 평양대극장은 전통건축의 모습을 갖춘 문화시설로 민족건축양식의 초기 건물이다. 평양에는 평양대극장 이외에 옥류관과 인민문화궁전 및 인민대학습당 등 시민들이 이용하는 많은 시설들이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일행 중 국악을 전공하시는 선생님의 “우리는 왜? 저런 건물을 짓지 못하느냐”는 역정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는 건축가가 전통건축을 설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움은 콘크리트 한옥으로 공공시설을 설계해야했던 한 건축가가 디자인을 통해 전통건축의 미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보다 준공 후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일본색이나 중국건축 냄새가 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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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통시적이고 풍부한 문화정체성을 세우는 데 큰 걸림돌

앞으로 소개할 글이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로 한중일 삼국의 건축이 서로 공통점보다 차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색깔과 갈 길을 가기 시작한 본격적인 시기를 아무리 멀리 잡아도 12세기, 가깝게는 14세기 즉 여말선초로 잡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9세기, 12세기의 건축인 황룡사 9층목탑, 연복사 5층 전각/목탑을 재건한다면 삼국공통의 분모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전혀 숨기거나 부끄러울 일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광의로 보자면 '소중화주의'라는 주제에도 어떤 면에서 연관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중세까지 세계 각국 (동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등 전세계)은 '자국문화'에 대한 '정체성강화'에 대한 의식도 정의도 더 나아가 자긍심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좋은 부분을 배우고 교류하고 대국이나 문화강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그대로 적용해도 아무런 문제도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건축으로만 좁혀보아도 이는 우리가 유럽 각국, 나아가 호주나 미국의 영미권 국가에서 보는 그리스-로마식 건축전통양식에 대한 인식에서 잘 보입니다. 그들은 이 건축양식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기제로 보거나 창피한 문화식민지적 사고로 전혀 보지 않습니다. 그저 고대-중세의 문물교류나 영향력으로 볼 뿐, 자랑스러운 자국의 문화재건축물로 볼 뿐이지요.

백제가 일본의 건축을 돕고, 장인이 법륭사를 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 그걸 자랑스레 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교류로 보는 것이 더 건강한 시각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각은 일견 우리의 자긍심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나, 바로 이 시각이 현재 존재하는 중국, 일본건축의 색감 (엄밀히 말하면 당시 동아시아 공통의 색감)이 섞여도 마땅한, 재건될 우리 고대-중세건축물의 올바른 재건을 혹은 우리 요괴담론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반대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작년에 복원된 월정교의 조선중기 이후의 단청일 것입니다. 
월정교 (최근 복원- 역시 상록하단 단청)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쓴 바 있습니다.

황룡사나 미륵사를 '재건'한다는 의미는 숭례문을 그대로 다시 복원하는 일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최대한 남아있는 사료와 연구결과를 충실히 반영, 그 시대를 한번 '되살려'보면서 또 하나의 '창작'을 해내는 작업입니다. 

연구결과가 쌓이고 있는 이상, 고대건축이 사라진 한국에서 현재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조선후기식 단청을 입은 팔작지붕의 건물을 다시 재건된 황룡사에서 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붕이 우진각이어야 하는 이유도 예전에 소개했습니다. 불령사전탑연구)

연구성과가 없다면 모를까, 이러한 부분부분의 연구가 실질적인 반영이 되는 '시스템의 성립'이 절실하고 급해 보입니다. 이런 연구성과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면서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또한 Credibility가 쌓이면서 기대가 증폭되는 선순환효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밀실 프로젝트'에 가까운 형태의 고대건축 프로젝트로는 국민의 동의도 학계의 동의도 얻기 어렵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김동욱 교수님의 논문중 결론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민의 후유증은 역사왜곡측면이라는 또 다른 스펙트럼의 폐해와 더불어, 오늘 지적하는 우리의 역사적 산물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컴플렉스성 철학을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김동욱 교수님이 지적하신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우리 전통건축뿐 아니라, 삼국-남북국-고려-조선초에 이르는 방대한 시간의 건축및 문화양상 역시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발성 정체성찾기 (그 결과 한국적=조선후기적이라는 프레임이 강해진)'으로 인한 왜곡된 필터링을 거치게 되는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담백하게 적용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 문제가 비단 정통역사뿐 아니라 한국문화계에서도 곳곳에서 풍부한 문화적 가능성과 양태들을 거세하는, 스스로 팔자르기 현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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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21세기도 17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국민국가'와 '자국중심 문화정체성'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정서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럼에도 유럽의 예에서 보듯, 각국 혹은 문화권간의 문화교류가 건강하고 능동적이며 발전지향적이려면 서로간의 교류와 영향력을 인정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건축쪽만 보자면 한국건축은 고대-중세의 경우 현전하는 것이 없는 관계로 어찌보면 우리에게도 세계에게도 '새로운' 과거를 재건해내는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류가 빈번했던 이웃국의 '색감'이 나오는 것을 당연하고 건강하게 보는 시각은 해외가 아닌 우리 사회 스스로가 먼저 가져야 할 시각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을 잡아줄 집단은 바로 '전문가집단'입니다. 위의 많은 예에서 아직 '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바로 이런 아무런 도움되지 않는 삼국간의 '공회전격이자 에너지 낭비격'인 문화적 논쟁을 낳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일부를 본 포스팅의 마무리로 대신합니다.

"이런 문화적 정체성 탐구에서 시원성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는 하루빨리 버리는 것이 국가간의 건강한 관계에도, 그리고이러한 문화계뿐 아닌 역사적 사실의 해석에 대한 민감한 부분의 협력적 연구에도 훨씬 도움이 된다. 이는 모든 건축등 모든 문화영역에 적용된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려대건축이라도, 고려만의 건축특징이 반영되고 있고 우리가 사용한 건축이라면 그것은 고려의 건축이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을 투명하고 솔직하게 설명해주면 된다- 마치 그리스 로마 건축의 영향이 전유럽에 미쳤듯-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늘은 본 논고의 큰 주제를 살펴보았고, 추후 조선말기 새로운 조선식 한옥의 흐름에 대한 글 (꽤 긴 글이 될듯)에서 다시 인용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덧글

  • 울산왜성 2017/09/10 12:12 #

    일본의 주요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보기를, 유럽같은 곳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소위 내력있어 보이는 건축물들이 참 많이 늘어서 있고, 관리도 잘 되던 것 같더군요. 민족정기란 광기 아래의 한국의 건축문화재들의 현황과 비교된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저 국내 문화재에 대해 견문이 짧은 자의 섣부른 예단일까요?
  • 역사관심 2017/09/12 07:36 #

    근대 혹은 그 이전 건축뿐 아니라 현대건축이나 도시의 랜드마크적인 장소도 우리는 경제논리에 밀려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그 경제논리으로도 사실 그런 장소는 보존해주는게 훨씬 장기적으로 이익이라는 게 함정...
  • 레이오트 2017/09/10 12:40 #

    그나마 도깨비의 경우에는 공유 덕분에 그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다양한 모습의 도깨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다행이죠. 거기다 저승사자와 삼신할미도 말이죠.

    무엇보다 한국인은 비단 전통문화 외에도 사회 전분야에 걸쳐있는 (이원복 교수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주장한) 극한 추구 MEME(정신적 유전자)을 구제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 역사관심 2017/09/12 07:37 #

    신과 함께 역시 그런 면에서 꽤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
  • 존다리안 2017/09/10 16:10 #

    어쩌면 여전히 아직도 일제 잔재를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앵무새마냥 구호를 외치는
    이면에는 심하게 말하면 실제로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게 아닌 "어느날 갑자기" 외세의
    힘에 의해 독립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 초기는 우리의 주체적인 결정보다는 여전히 열강의
    이해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는 컴플렉스가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역사관심 2017/09/12 07:38 #

    일제잔재를 못벗어난다라는 구호가 '이데올로기화'되는 순간부터 반대기제로 우리의 목을 조르는 부메랑이 되서 돌아오고 있지요.
  • Nocchi 2017/09/11 06:35 #

    여러모로 공감가는 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7/09/12 07:38 #

    항상 감사합니다~, 조금씩이라도 여러시각으로 이런 문제를 들여다보면 좋겠네요.
  • 迪倫 2017/09/11 13:00 #

    잘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7/09/12 07:39 #

    감사합니다 적륜님! 혹시나 하고 들어가보니 7월부터 시동을 거셨더군요 (반갑..). 7-8월에 개인사가 있어 이런저런 소식을 요즘에사 업데중인지라 몰랐습니다. 조만간 차근차근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 M i d s e n 2017/09/11 13:38 #

    도깨비에 뿔만 그리면 와서 한국 도깨비에는 뿔이 없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걸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 역사관심 2017/09/12 07:40 #

    문화적 양태를 놓고 '단정형'으로 말하는 건 이데올로기적 조금 심하게 말해 정치적인 짓이나 다름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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