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 8세기 수세식 화장실터 경주서 발견 (2017.9.27) 역사뉴스비평

지난 2004년, 익산 왕궁리 유적지에서 백제의  6-7세기 '수세식 변소'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발굴되었습니다. 

다음의 뉴스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9년 그간의 연구성과를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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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기 백제 반 수세식 화장실

2009.4.3
익산 왕궁리 대형 뒷간터 석축 수로 등 분석
일본학자 “한일 고대사 통틀어 유일한 유적”

시대와 공간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의 배설 욕구는 변치 않는 법이다. 1400여년전 이땅에서 살았던 선조들은 어떤 방식으로 대소변이 마려운 ‘생리 현상’을 해결했을까.

흥미로운 단서가 있다. 지난 2004년 6~7세기 백제 궁궐터로 유력한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처음 발굴한 대형 뒷간터다. <한겨레> 보도로 처음 알려진 이 유적은 왕궁리 궁터 서북쪽 공방터 부근에서 발견된 깊이 3.4~1.5m정도의 대형 분뇨 구덩이 세 개가 핵심. 동서 방향으로 잇따라 열을 지어 판 구덩이들은 각기 한쪽 끝에 꼬리 모양의 작은 물길을 틔워 옆 석축 수로로 오수를 흘려보내는 얼개다. 

구덩이 안에서 밑닦이용 나무 막대(주목)와 나무 기둥, 기와 조각 등이 수십여점 나왔고, 바닥 흙을 파서 분석해보니 기생충알들도 다량 검출됐다. 백제인의 분뇨로 가득했던 국내 최고의 뒷간임이 입증된 셈이다. 국내 화장실 유적 조사는 1990년대 이후 광주 신창동 선사 유적과 경주 신라 왕경 유적 등에서 변소터 혹은 인분으로 추정되는 유적, 유물들이 보고된 것이 단초였다. 하지만 이들 유적은 명확한 실증 분석 자료를 남기지 못해, 왕궁리 유적은 지금껏 국내에서 공인된 유일한 고대의 뒷간 유적으로서 국내 ‘화장실 고고학’ 의 모태로 자리잡았다.
기사에 나오는 분뇨구덩이 세 개 (물이 흘러 분뇨가 내려가는 구조)

연구소쪽은 왕궁리 변소터가 구덩이 위에 나무 판재로 배변 발판을 대고 그 위에 풀과 기와로 지붕을 올린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후대 고고학자들의 짓궂은 물음은 계속된다. 정말 구덩이 위에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봤을까? 궁터의 주인이었을 귀족들도 하층민들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볼일을 봤을까? 실제로 2001년 이 유적에서는 좌변식 변기 비슷한 휴대용 변기가 출토된 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9, 10일 열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왕궁리 발굴 20주년 국제학술대회(원광대)에서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화장실 유적을 처음 비교 검토한 일본 학자의 가설이 나와 눈길을 모았다. ‘일본 고대 도성의 분뇨처리 구덩이론’을 발표한 일본 나라 문화재연구소의 이노우에 가즈히토 부장은 “왕궁리 변소 유적은 지금껏 발굴된 고대 한일 유적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수세식 변소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비슷한 7~8세기 고대 일본 왕경인 헤이조쿄, 후지와라쿄의 경우 발굴된 서너곳의 변소터들은 볼일 보는 곳이 아니라 휴대용 변기통의 분뇨를 버린 투기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왕궁리 변소 유적의 경우 연속된 분뇨 구덩이가 물길로 인근 수로와 이어져 있고, 위에 건물을 올린 흔적이 뚜렷해 쪼그린 채 볼 일을 보고 오수는 밖으로 흘리는 기능을 했다는 견해다. 다만 위치가 궁터 중심부에서 떨어진, 공방 근처여서 하층 장인들이 변소를 쓰고, 왕족들은 매우틀(요강)로 배변한 뒤 내용물을 담아 이 변소에 버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노우에는 “일본의 경우 고대 궁궐 안팎 도로변 하천이나 인근에 변소터를 썼으리라 추정해왔지만, 궁성 규모에 비해 숫자가 너무 적고, 하천보다 유적이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물을 끌어들이는 수세식 구조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전용호 부여연구소 학예사도 “왕궁리 변소터를 신분별로 다르게 썼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며 “인분 구덩이에서 수로로 틔운 물길의 경사도가 낮은 점으로 볼 때 오수는 흘려보냈지만, 인분 등 내용물은 퍼서 치우는 반수세식 얼개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주: 즉 수세식이긴 하지만 경사도를 볼때 소변은 내려보냈지만 큰 것들은 퍼서 치웠을 것이란 추정이지요).
익산 왕궁리 화장실 모형

고대인의 배설물과 배설 공간을 탐구해 당시 생활 문화의 실상을 파악하는 화장실 고고학은 서구와 일본에서는 1970년대 이래 보편화한 연구조사 방법론이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유적, 인도의 모헨조다로 고대 유적, 일본 규슈 하카타의 외국 사신 숙소터인 고로칸 유적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일본 학계의 경우 고대 궁성 화장실에 쌓인 분뇨의 악취 때문에 수도를 이리저리 옮길 수 밖에 없었다는 ‘분뇨 정치사’까지 거론될 정도로 화장실 고고학이 활성화되어 있기도 하다. 
모헨조다로 화장실 유적

아직 연구는 걸음마 수준이지만, 국내에서도 화장실 유적은 추가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유적 발굴 과정에서 화장실 용도를 고려하지 않거나 발굴갱 구덩이의 유기물 분석에 주목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의 관점만 바꾼다면, 다른 신라, 고려, 조선시대 유적에서도 화장실 유구가 잇따라 나올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2006년 경기도 양주의 조선초 거찰인 회암사터 발굴 현장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시대 해우소(변소) 유적이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적도 있다. 중략.

익산/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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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말미에 '발굴조사의 관점 (즉 흥미 혹은 관심)'에 따라 앞으로 얼마든 화장실 유적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단 익산 화장실 유적은 연구가 많이 되었고, 비교생활사측면에서 일본측에서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동영상을 한 번 보시면 이해가 쉬우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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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신라 8세기 수세식 화장실

그런데 바로 어제, 8년전 기사말미에 적은 것처럼 이번엔 '신라의 화장실'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화장실이 아니라 이번에도 '수세식', 그리고 익산의 그것에 비해 한결 더 발전한 녀석이 발굴된 것입니다. 익산 유적이 6-7세기 추정이니, 약 100년 후의 발전된 모델이겠지요.
동궁/월지 북동쪽 석조변기와 배수시설 (왼쪽 가운데 변기가 보이고, 오른쪽 아래 경사로로 흘러내려가게 되어 되어 있지요)

[뉴스웨이 전규식 기자]신라의 태자가 생활한 별궁인 경주 동궁에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세식 화장실 유적이 나왔다. 우리나라 고대 화장실 유적 중에 화장실 건물과 석조변기, 오물 배수시설이 모두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6일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경주 ‘동궁과 월지’ 북동쪽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초석 건물지 내 석조변기와 배수시설을 공개했다. 이 건물지는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전체 넓이는 24㎡다. 석조변기는 두 개의 방 중 한쪽에만 설치됐다. 

석조변기는 출토 당시 타원형 변기 좌우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널찍한 직사각형 판석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면 오물이 암거(물을 빼낼 수 있도록 밑으로 낸 도랑)를 통해 배출된다. 타원형 변기의 크기는 길이 90㎝, 너비 65㎝다. 옴폭 팬 변기에는 직경이 약 12㎝의 구멍이 뚫렸다. 이 구멍은 기울어진 암거를 통해 배수로와 연결된다. 타원형 변기 위에 올린 판석의 길이는 175㎝, 너비가 60㎝다. 
타원형 변기가 보이지요

연구소 측은 판석도 과거에 다른 장소에서 변기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타원형 변기를 제작한 뒤 발판을 만들기 위해 판석을 가져와 재활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발판으로 놓는 과정에서 판석의 좌우를 바꿔 배치했다는 설명이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판석의 아귀를 맞추면 가운데에 타원형 구멍이 생기는데, 구멍 옆에는 볼록하게 솟은 별도의 발판이 있다”며 “화장실 옆에 있는 또 다른 방은 용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이어 “물을 유입하는 설비가 따로 갖춰지지 않은 점으로 미뤄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변기에 흘려 오물을 씻어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화강암이 쓰였고, 변기 하부와 배수시설 바닥에 타일 기능을 하는 사각형 전돌을 깐 것을 보면 신라왕실에서 사용한 고급 화장실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주: 위에 보면 전돌이 보입니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경주와 익산 등지에서 고대 화장실 유적이 출토됐다. 익산 왕궁리에서는 7세기 배수저류식 화장실 유적과 뒤처리용 나무 막대기가 나왔으나, 석조변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주: 위에 소개한 녀석이죠). 또 경주 불국사에서는 8세기에 제작된 변기형 석조물이 발견된 바 있다 (주: 아래를 보시길). 
8세기 신라 변기 판석 (위 아래 사진)
신기하달까 당연하달까, 같은 시기인 아래 보이는 8세기 불국사출토 변기들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모두 8세기 신라의 것이지요.

8세기 불국사 석조변기 (앞의 두개가 남성용, 마지막 것이 여성용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화장실 유적 외에도 남북 길이 21.1m, 동서 길이 9.8m인 대형 가구식 기단 건물지가 발견됐다. 가구식 기단은 석재를 목조가구처럼 짜 맞춘 기단이다. 이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왕경 도로와 맞닿아 있다. 규모에 비해 큰 계단시설이 있다. 연구소는 거대한 적심(주춧돌 주위에 쌓는 돌무더기)이 발견돼 그간 경주 동궁에서 나오지 않았던 출입문(동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길이가 110m에 이르는 배수로와 깊이가 7.2m인 우물에서도 새로운 유물이 출토됐다. 배수로는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매립 당시 바닥에 소의 골반뼈를 두고 토기를 놓았던 것이다. 우물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토기와 작은 사슴을 넣어 의례를 지낸 뒤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위의 토층에서 인골 4구가 나왔다. 

장은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인골은 30대 남성과 8세 소아, 3세 이하의 유아, 6개월 미만의 아이로 분석됐는데, 모두 고려시대에 묻혔다”며 “우물을 무덤처럼 활용한 것인지, 인신공양 의례를 지낸 것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거에 안압지로 불린 동궁과 월지는 7세기 후반에 조성됐다. 지난 1975년 조사에서 인공 연못과 섬, 건물지가 발굴됐다. 유물 3만여 점도 출토됐다. 지난 2007년부터는 동궁과 월지 북동쪽에서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장 연구사는 “발굴지역에서 나오는 기와와 토기의 양상은 1975년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과 비슷하다”며 “동궁은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반까지 사용됐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신라 동궁의 영역은 학계에서 논란이 있는데, 이번 조사로 동궁의 궁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전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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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현재 기사에서 보이는 바로는 일단 이 유적지가 신라왕궁인 동궁의 출입문 (동문)일 가능성을 보고 있군요. 왕경도로에 맞닿은 점, 그리고 규모에 비해 계단이 크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런 시설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은 왕궁 입구에 (즉 통행도로와 닿은 곳에) 설치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워집니다. 만약, 또 다른 왕궁 문 유적에서 이런 화장실이 발견된다면 당시 (통일신라 8세기) 왕궁 문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지겠지요.

다음은 어제자 YTN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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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연구가 진전되면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그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써도 될 것 같군요.

그나저나 타임머신이 있고 3번 기회를 준다면 고구려 안학궁 전성기때, 연복사 5층 전각(목탑)이 있던 개성, 그리고 8-9세기 경주를 가보고 싶어집니다.

8-9세기 경주란 곳은 알면 알수록 신비한 시기와 장소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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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수달 2017/09/29 14:07 #

    오.... 신기 신기...
  • 역사관심 2017/09/30 09:13 #

    저도 신기했습니다. 저 정도 시설이 나올줄은 @.@
  • 우왕구우웃 2017/10/01 16:43 #

    통일신라는 정말 나라구실은 하는 나라였던것 같네요.포장된 도로 유물이나 월정교같은 대교 유적들, 위와같은 배수시설이 갖추어진 수세식변기 같은걸 보면
  • 역사관심 2017/10/03 02:31 #

    8-9세기 경주는 정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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