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지붕건축은 그냥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통일신라 대교인 월정교가 거의 완공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문루의 저 흰벽. 조선후기식의 연분홍 혹은 연노란색등의 일률적 색감에서 벗어난 최초의 고대건축 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개선되어야 할 것은 천편일률적인 상록하단 단청).

당장 백제재현단지만 해도 이런 시도는 못했지요.
사비궁 중문 (백제재현단지)

그런데 종종 이런 비판이 월정교 재건에 들리곤 하지요. "저런 '누교' 즉 교각위의 지붕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냐, 상상아냐?".그리고 조금 더 아는 사람은 이런 비판을 합니다 "고작 기와조각 한 두점 나왔다고 저런 상상복원이라니".

과연 그럴까요? 

오늘은 이 부분을 조금 더 짚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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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 발굴과 86년 모형도

우선 월정교의 역사와 기본정보부터 알고 싶은 분은 이전 포스팅을 먼저 간략하게나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월정교는 그 규모나 경주에서의 지리적 위치에 비해 그다지 많은 주목을 받던 곳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80년대까지도 사회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하던 곳이지요. 언론에서의 초창기 기록도 이와 같은 단편적 사실나열에 그칩니다. 다음은 1933년 일제강점기의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1933년 8월 1일자 기사중

이후 역사소설의 짧막한 배경으로 쓰이는 등, 실질적인 연구가 전무하다가 수십년이 흐른 1975년 교각, 교대 실측조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를 기점으로 1984년 석재조사, 1986년 발굴조사 등 관련 조사와 학술연구를 꾸준히 이어갑니다. 실은 간략한 문헌기록만 알고 있다가 실측을 하면서 사회적인 관심을 조금씩 끌어모은 유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6년의 발굴이후 약 20년동안 학계의 연구가 꾸준하게 이어집니다. 특히 86년의 조사당시 국가적인 관심을 가질 만한 발굴소식이 들리면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86년 4월 1일에는 이런 소식이 보입니다. 
1986년 4월 1일 경향일보 기사

내용을 보면 1,200년전의 것으로 보이는 나무다리 유구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1,200년전 즉 8세기말경 '거대한 나무다리'유구가 월정교 유지근방 (19미터 남쪽)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굴당시에는 이 유구들을 석재유구가 남아있던 월정교보다 더 이전에 세워진 거대교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2년전인 2005년 [월정교 복원 기본계획 및 타당성 조사 연구]를 통해 복원 (이라곤 하지만 중건 혹은 재건)계획이 세워지게 되지요. 하지만, 사실 이런 부분은 그냥 언론을 통해 접하는 단편적인 정보일 뿐, 86년 제대로 전면 발굴당시 어떤 유구가 나왔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기사나 정보는 만나보기 힘듭니다.

따라서 대체 왜 '누교', 즉 지붕이 있는 교각으로 재건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대중적으로 생기는 현상이 나오고 있지요 (또한 최근의 광화문 복원비리등 학구적 이유가 아닌 사회적이슈로 함께 그 진정성이 폄하되는 면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지붕이 있는 교각형식은 2005년 이후, 즉 월정교복원 기본계획이 생겨나던 시점에 나온 아이디어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미 전면발굴 당해인 1986년말 동아일보에 문루와 지붕이 있는 월정교가 모형도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입니다.
1986년 11월 5일 동아일보 기사

이 기사가 쓰여진 시점은 1986년 11월 5일. 언론에서는 86년에 발굴했다고만 나오지만 실은 이는 2차발굴이었고, 1984년 11월 26일부터 1985년 봄인 4월 24일까지 약 5개월간 1차발굴이 있었습니다. 발굴이 생각보다 규모가 커지자 제 2차발굴을 하기로 결정, 1985년 11월 13일부터 장장 10개월에 거쳐 1986년 9월 8일까지 발굴을 마칩니다.

즉 위에 나오는 86년 11월의 기사는 2차발굴이 마무리되고 겨우 2개월 후 공개된 것입니다. 서두르면 서두른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저런 모형을 선보일 근거가 발굴시 나왔기에 과감한 공개를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80년대에도 발굴후 저렇게 자신있게 상상도나 모형도를 빨리 공개하는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진설명을 보면 그냥 모형도가 아니라 '월정교 복원을 위한 모형도'라는 확실한 설명이 보이지요. 즉, 일정수준의 자신감이 없다면 (근거가 없다면) 저런 식으로 급히 공개하기는 좀 어렵다 사료됩니다.

그럼 당시 어떤 발굴결과가 나왔기에 이런 모형도를 내놓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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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986년 1, 2차 발굴- 와당과 쇠못기록

우선 한 가지 언론이나 넷상에서 정확히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은 중요한 기록 하나를 짚고 가고자 합니다 (사실 필자도 위의 첫 포스팅글에서 이 부분을 사료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쓴 기사도 있습니다만, 더 흔한 표현이 다음의 것입니다. 다음은 필자가 쓴 월정교 포스팅중 일부입니다.

월정교를 정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삼국사기에 798년 (8세기말)에 궁남의 교량이 화재를 입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다리위에 회랑식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다리가 아니었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월정교의 기록이라면 누각으로 볼수 있는 것이, 목조다리가 아니면 화재가 날리가 없는데 현재유구를 보면 월정교의 교각부분은 돌다리임이 드러나므로, 결국 윗부분에 목조 누각이 있었음을 추정하게 되는 것이죠.

굵은 체를 봐주세요. '798년 궁남의 교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량이란 말은 그냥 단순히 '다리'라는 말이지요. 당시 이렇게 썼었는데 삼국사기 원문을 보니 실은 더 직접적인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것입니다.

14년(798년) 봄 3월에 궁 남쪽 누교(樓橋)가 불탔다.

삼국사기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다음을 봐주세요.
분명 "'누교(樓橋)'가 불탔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팩트는 이것입니다. 798년 (8세기말) 통일신라 왕성 남쪽에 있던 '누교'에 화재가 났다

樓橋라는 말은 그냥 교각이 아니라, 교각위에 '루' 즉 어떤 건축물 (본뜻은 중층건축)을 이고 있는 다리를 말합니다. 그럼 비슷한 시기의 이웃나라 '누교(樓橋)'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다음은 815년 건립된 중국의 절강성 소흥시(浙江省紹興市)에 있는 "절강소홍섬도교(浙江紹興纖道橋)"라는 누교입니다. 이 모습이 원모습은 아닐지 모르지만, 누교형식의 홍예교 (월정교 기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라는 점은 분명하지요.
9세기초 절강소홍섬도교

참고로 현전하는 누교중 비슷한 시기것으로는 좀 더 후대의 송대누교인 무원의 '채홍교'도 들 수 있습니다.

거의 원형을 유지한 교각으로 나무부분은 썩으면 복원을 계속해서 유지했다고 합니다.
송대 누교 무원 채홍교 (彩虹橋)

자, 일단 기록으로 월정교가 누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다리가 일정교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건립시기가 완전히 같은 경덕왕 19년인 점을 볼 때, 두 교각 모두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리있는 추론일 것입니다). 

다음은 '기와 한 두개 나왔다고 지붕이라니'라고 비판받는 부분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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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 유구

1984~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마치고 방대한 양의 분석결과를 2년후인 1988년 '월정교'라는 이름의 두꺼운 책자로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그 중 '누교'의 근거가 된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지요.

월정교 발굴에서 가장 주목 받은 것은 '기와'와 '목재', 그리고 '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들은 월정교가 '누각'일 경우 윗부분인 목조건축 부분을 구성하는 소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당시 보고서에 기록된 기와 (암막새와 수막새) 그리고 와당들입니다. 찬찬히 보시기 바랍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암막새도 그냥 아무 장식이 없는 무문이 아닌 화려한 장식들 뿐입니다.
다음은 발굴된 대형 철제못들입니다.
발굴당시 암막새 (빨강), 수막새 (파랑)가 발견된 장소를 표기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기와 한 두점이 아닌 많은 양이 다리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보다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필자의 주목을 끈 분석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

한편 木材는 1호교각지 西南모서리 橋脚 拖礎登石아래 10~20cm에서 露出되었는데,棒經은 4.1x0.24x0.17m의 크기로 다른 2枚의 木材 위에 직각으로 걸쳐져 있었으며 (사진 31) 檢濫주위의 모래층에서는 鬼目文 암막새를 비롯한 약간의 와편이 출토됐다.(사진 32-2) 橡濫의 옆면에는 기와를 얹었던 홈이 0.3m 의 간격으로 9군데 남아있고 나머지 部分은 부식이 심하여 홉의 혼적 이 보이지 않는다.
목재(木材)유구 (1호교각지 西南모서리)

여기 보면 1호교각지에 남서모서리 (즉 아래 그림의 붉은 부분유구의 왼쪽아래부분) 석재부근에서 발견되는데 검함(檢濫)주위의 모래층에서는 귀목문(鬼目文) 암막새를 비롯한 약간의 기와가 출토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주목을 끈 부분은 그 다음 부분 "橡濫의 옆면에는 기와를 얹었던 홈이 0.3m 의 간격으로 9군데 남아있고 나머지 部分은 부식이 심하여 홈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입니다. 즉, 약 4미터 짜리 대형 목재를 '橡濫(상함)'으로 보고서에서 판단하고 이 목재의 30센티마다 기와를 얹은 홈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 보고서 뒷쪽에 등장하는데 다음입니다.

木材類
① 橡濫 (사진 83ᅳ1,2, 3 그림 24)
橡濫은 韓式木造建物의 처마 구성 部材로서 서까래 또는 부연 끝의 평고대위에 기왓골을 받기 위하여 암키와가 놓일만큼 반달모양으로 총총하게 엔 木材이다. 금번 調査에서 出土된 橡濫은 남은 길이가 4그 m 로,한쪽 끝에 서 2.9 m 까지는 암키와를 얹었던 30cm, 에 인깊이 10cm의 반달홈 9개가 일정 간격으로 잘 남아 있으나 그외는 腐她으로 인해 부러졌으며 홈의 형태도 없어졌다.

상태가 양호한 쪽 끝에는 11cm 크기의 주먹장 이음홈이 그대로 남아있어 다른 橡濫과 연결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외 연함을 고정시키기 위한 쇠못을 박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연함의 재질은 보존처리분석 결과 경송류(Hard pines) 로 밝혀졌다. 1號橋脚址와 2號橋脚址사이의 석재밑에 깔린채 모래층에서 後述할 木材 B, 木材 D 위에 직각방향으로 얹힌채 출토되었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상함]부분입니다.

그럼 '橡濫'이라는 부재는 어떤 때 쓰는 것일까요? 상함(橡濫)은 목조건축의 처마 구성부재로서 서까래 또는 부연 끝의 평고대위에 기왓골을 받기 위하여 암키와가 놓일만큼 반달모양으로 총총하게  놓은 목재입니다.

한옥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바로 '지붕'이 떠오실 겁니다. 즉, 전통목조건축의 지붕 끝부분인 처마에 쓰이는 것으로 서까래나 부연의 끝인 평고대에 기와를 놓기 위해 홈을 파놓은 목재가 바로 '橡濫'이고 이것이 월정교 교각아래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아래 는 평고대 설명그림입니다. '부연과 서까래, 그리고 연함'이 보이시죠 (보고서를 보면 월정교에선 같은 곳에서 '연함'까지 나옵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한국 고건축이란 서적중 평고대와 상함에 관한 실례가 나옵니다. 한번 보지요.

平交臺 및 橡濫 (평고대, 상함)
장연 위에는 蓋板을 얹었다. 초매기는 장연마구리에서 26mm 안으로 들이밀어져 놓여 있다. 부연 위에는 이매기와 연함을 두었다. 초매기의 단면은 부연이 경사지게 놓인 각도에 따라 초매기 상부를 비스듬히 치목하였으며 높이는 85mm, 폭은 105mm이다. 이매기는 90 X 90mm 단면의 각재를 사용하였으며 이매기 마구리에서 36mm 정도를 들이민 위치에 연함을 설치하였는데 운두는 80mm 내외이다.

여기 나오는 '이매기'는 이런 모습입니다.

부연위에 이매기로 마무리를 하면 이렇게 위 사진처럼 됩니다 (이매기를 걸고 있는 장면).

즉, 월정교 교각 1호지에서 나온 4미터짜리 상함과 연함의 존재는 이런 지붕을 얹은 구조물이 있었음을 수많은 기와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유구가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보고서에는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1호교각지와 2호교각지사이는 강우량이 많은 夏節期에는 강물이 이 곳으로도 흐르지만 水量이 적은 冬節期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이다. 調査가 冬節期에 실시되었으므로 表面으로 흐르는 물은 없었다. 그러나 摘脚의 恶礎릎石아래 0.7~0.9m 까지 깊게 조사함에 따라 橋脚의 莊礎臺石 틈사이와 모래층에서 스며드는 몰의 양이 많아 계속적인 양수작업을 병행하면서 調효를 실시했다.  결과, 가공되어 형태파악이 가능한 石材 40여점을 비롯하여 90여점의 各植石材가 노출되었고 또한 橡濫과 함께 불에 탄 흔적이 있는 3점의 목재가 출토되었다.

위에 설명드린 부분은 1호교각지에서 나온 것이고 그와 별개로 1호교각지와 2호교각지 사이, 즉 월정교 다리기둥(석재)의 두 기둥사이에서 90여점의 각진 석재와, 위에 설명한 또 다른 '상함'과 함께 '불에 탄 흔적이 있는 3점의 목재들'이 발굴됩니다. 

자 [삼국사기]의 저 기록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발굴결과입니다.
14년(798년) 봄 3월에 궁 남쪽 누교(樓橋)가 불탔다.

뿐만 아니라 3호교각지와 4호교각지 아래에서도 상당량의 목재가 발견됩니다. 아래의 사진들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장식불상까지 발견되었습니다. 다리에 장식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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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렇듯 월정교의 최초 전면조사시 나온 기와와 목재의 구성은 일부 넷상에서 돌아다니듯 '기와 한 두 점'이 나온 수준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상함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규모있는 지붕을 갖춘 누각다리였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사실 월정교유적에서는 (또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년 초여름 또다른 흥미로운 발굴소식도 있었습니다.  다음의 인터뷰는 2016년 6월 대구지역 뉴스에 나온 '월정교 특수기와 발굴'부분입니다.
내림새란 건 이런 장식을 말합니다. 즉, 암기와 끝에 내림새가 함께 붙어있는 화려한 기와가 발굴된 것이지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혹은 추론적 과정의 합의가 없이 지자체가 마음대로 구미에 맞게 짓는 일명 '복원'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고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필자는 이런 일부의 시도들이 고대-중세건축 복원 혹은 재건담론에 끼치는 큰 폐단을 바로 오늘 소개한 이 월정교에 대한 시각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나름 충분한 고증과 증거를 갖춘 건전한 시도들조차 일부 언론이나 위의 폐해로 인한 색안경부터 발생하는 습관적 비난/비판이 그것입니다. 사실 월정교 복원과정 역시 현장을 가보면 많은 정보가 공개되고 있지만 학자들과 언론들의 더 투명하고 세세한 정보의 제공이 아쉬웠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소개한 이런 내용들을 기자들이나 일반대중들은 알 길이 없었고, 이에 '기와 한 두점 나왔다고 복원한다'라는 비난등이 생겨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70년대 불국사를 제외하면 우리의 고대중세건축 중건(재건) 문화는 이제 첫걸음 수준입니다. 여기서 '첫 단추'가 매우 중요한데, 이 첫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결국 앞으로의 활발하고 '발전적'인 결과물들을 생산하느냐 혹은 소모적인 공회전식 논쟁이나 정치싸움으로 변질되고 마느냐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특히 학계에서 더 활발한 결과물을 언론에 홍보하고 이를 문화재청등 복원관련기관에서 Systematic하게 소화하고 대중에게 제공하는 채널이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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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이와 같은 연구를 알고 있기에 2009년 이런 사설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전통건축의장 서설 
다리 위에 지은 집

김홍식
2009.09.01

옛날에 미生(이름은 전해지지 않음)이라는 착한 선비가 살았다. 그는 인생의 신조를 신의(信義)라고 굳게 믿었다. 어느 날 술집에 놀러 갔는데 기생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한번만 보기에는 너무 미련이 남아, 다음 보름날을 기약하여 다리 아래에서 만날 것을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러나 그날은 마침 요즘 같은 장마철이었는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선비는 신의를 지켜서 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기생은 설마 이런 우중에 다리 밑창에서 기다리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느냐 싶어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물이 점점 불어나 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으나, 비록 기생과 한 약속이지만 지키기 위해서 다리발을 붙잡고 버티다가 결국 떠내려가고 말았다.(중국 고사로서 여러 문헌에 보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울물이 흘러가는 다리 밑은 아름다운가 보다. 특히 보름달이 뜬 날 다리 밑을 거닌다는 것은 참으로 낭만적인 일이 것이다. 더구나 다리 위에 누각이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이태리 피렌체 등 서양에도 다리 위에 집을 지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층 높이지만, 동양에도 다리 위에 집을 지어 낭만적 분위기를 북돋운다. 중국에는 이런 집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호남성 통도현 황도채 보수교의 예를 보면, 교각(다리발) 위에는 높은 탑 모양의 누각을 지어서 장식을 하고 나머지는 맞걸이(3량)집을 회랑처럼 길게 늘어 세웠다. 이것이 원래는 다리의 목조 상판이나 보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일본의 경우 구주 대분현 우좌신궁 앞의 오교(吳橋)에서 볼 수 있듯 썩기 쉬운 다리발은 돌로 가공했지만, 그 위에 얹어지는 다리 보와 상판은 나무로 만들되 이것이 비바람에 맞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다리 위에 집을 지었다. 이것이 형식화해서 누마루집처럼 아름답게 정형화한 예이다.
일본 구주 오교(吳橋)

반면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순천 송광사 어귀의 우화각은 무지개(아치)형 돌다리 위에 세워져서, 이것이 다리 상판에 비가 들치는 것을 막는 원래의 기능이 아니고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해서 지어졌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조적식 돌다리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에 멍에돌을 걸치고 귀틀돌을 올려서 이것의 원류는 목조였음을 암시하면서 상부에 목조 건물을 지었다. 길이는 4간이고 너비는 1간인데 바깥쪽 정면(짧은변)은 합각으로 만들어서 앞을 얌전하게 정리했고 안쪽은 박공으로 잘라서 내부의 개방감을 틔웠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입부의 조형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다리 위에 집을 지은 예는 우연찮게 순천읍성 남문 앞의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말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개인 소장이기 때문에 여기서 공개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금 경주에서는 월정교를 복원하고 있다. 월정교에 대해서는 고려 명종 때(12세기 후반)의 김극기의 시가 남아 있고 충렬왕 6년(1280)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고려 중기까지는 사용했던 다리이다. 이후 1985~87년에 발굴을 해서 다수의 목재 부재와 기와 와당이 발견되었으므로, 이것이 우리나라 초기의 집이 있는 목조 다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런 다리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비추어보면, 이것을 복원해 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의 구체적 고증을 문제 삼아 복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비전공자들의 트집이고 이것을 복원 설계해 봄으로써 전통 구조기술을 고구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 우리나라 건축문화를 풍부하게 하는데도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

http://www.anc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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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포스팅:



덧글

  • 바람뫼 2017/10/15 11:14 #

    저런 누교에서 장시가 열려 하천 양쪽 사람들의 물류교류의 장이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봤습니다.
  • 역사관심 2017/10/16 04:04 #

    통일신라시대의 시장이라... 상상하면 꽤나 즐겁네요.
  • 타누키 2017/10/15 11:21 #

    오오 이거 좋네요~ 다 재건되면 한번 가볼만 하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7/10/16 04:04 #

    이래저래 말도 많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면이 보이구요.
  • Positive 2017/10/15 14:23 #

    얼마전 경주 다녀왔는데,이게 그 월정교였군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역사관심 2017/10/16 04:05 #

    부럽습니다 ^^ 그리고 고맙습니다.
  • 우왕구우웃 2017/10/16 05:15 #

    과거 유산의 복원뿐만 아니라 현대 남아있는 사찰들도 박제시켜놓지 말고 중창했으면 하고 앞으로는 현대식 건물이 동양식으로도 지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역사를 근대화 전후로 단절시켜버리는 바람에 이런 것들을 무슨 박물관 견학하듯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 그것을 넘어 동양국가라는 정체성을 되살리고 일상생활에 체화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한국은 정말 이도저도 아닌 나라같아요, 정체성에 혼란도 오고요. 전쟁으로 전부 불탔다고 징징대기만 할게 아니라 이제는 엘리트분들이 이런 고민들을 진지하게 해야될 때라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7/10/17 03:34 #

    사실 복원, 중건쪽에 대한 치열한 연구가 각계에서 진행되는 구석도 분명 있지만, 더 조명받아야 할 유구들이 그냥 방치된 곳도 (하남시등) 많습니다. 하느냐마느냐 유네스코 강령등만 따지고 드는 현학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외에 지자체중심으로 이미 진행중인 복원사업등을 중앙국책으로 돌릴 건 돌리고, 제대로 연구성과가 반영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할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것 없이는 결국 셋트장소리나 위에 말씀드린 뒤틀린 시각만 양산할게 뻔하니까요..
  • 우왕구우웃 2017/10/16 05:14 #

    그리고 훌륭한 포스팅 너무 잘봤습니다. 몇년동안 주기적으로 찾는 블로그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정말 많은걸 배워요.
  • 역사관심 2017/10/17 03:35 #

    고마운 말씀입니다. 미력하나마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전달되면 좋겠네요.
  • 아빠늑대 2017/10/16 13:02 #

    얼마 전에도 월정교에 다녀 왔습니다만 아직 공사중인지라 복원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네요. 뭘 그리 꽁꽁 싸메는지... ;;
  • 역사관심 2017/10/17 03:37 #

    사실 이런면에서는 일본측 시스템을 좀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언론에도 투명하게 계속 연구성과도 보고하고, 어떻게 어떤 문양을 넣고 있다도 마켓팅식으로 홍보... 평성궁 복원공개시에는 무지무지한 인파가 몰렸죠. 이렇게 지자체언론에서만 다루고, 경주시민 몇분이나 공개하는 곳에 가는게 아닌...월정교급쯤 되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개하고 관심받고 (그래서 결국 거기서 신뢰성도 나오고) 그렇게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만.
  • 아빠늑대 2017/10/17 18:04 #

    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그냥 오랜 기간 공사만 하는 공사판 그것 이외에는 없더군요. 물론 마냥 모든걸 다 풀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필요할건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17/10/17 23:18 #

    문화재청에 생각을 한번 개진할까도 고려중입니다 ^^
  • 아빠늑대 2017/10/18 16:55 #

    오늘 다시 가보니 드디어 장막을 걷어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실물이 보이네요. 아직 주변이 정리되지 않아 다리만 좀 쌩뚱맞기는 합니다만.
  • 우왕구우웃 2017/10/18 18:51 #

    일본쪽이 알게모르게 복원하고 그런게 많더라고요, 우리가 전국시대 무장 갑옷이라고 알고있는 것들도 에도시대 후기부터 시대가 올라가는건 다이쇼 시대때 만들어진 것도 있다고. 이걸 복원이라고 할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지 만드는건 진짜 잘하는 것 같아요, 일본이
  • 역사관심 2017/10/19 23:44 #

    장막을 걷어냈군요. 완공된 것은 아니길 바라는데...(밑의 댓글처럼 현어등의 마무리가 되어야..)
  • 우왕구우웃 2017/10/18 19:44 #

    월정교 보고왔는데 현어가 없네요?그리고 단청같은 경우 무엇을 근거로 저렇게 했을까요? 발굴된 목재유구에 색조라도 남아있었는지? 문루는 어떤 근거로 2층이 되었는지, 여러가지 궁금한게 많습니다.
  • 역사관심 2017/10/19 23:43 #

    현어가 쓰일수도 있고 안 쓰일수도 있는데, 원계획에서는 만들기로 했는데 마지막에 하려나요. 상록하단은 무조건 비판합니다- 저건 정말 그냥 '한국적'이라는 미명아래 밀어붙인 느낌밖에 안드네요. 문루 2층은 창작에 가깝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비판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목조건물이 세워지고 계속 변형되는데, 후대에 문루를 세운다고 크게 문제될 건 없어보입니다. 다만, 이것은 원형이고 이것은 중건 그리고 문루는 중창한것이다라는 점만 명확하게 공개하면 됩니다.
  • 신병훈련행성알바리움 2017/10/19 11:39 #

    기와 와 지붕을 사용해서 디스당하기 보다도, 또 조선풍이냐?! 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3국시대는 자료가 거의 없으니 비슷하게나마 만드는게 최선이 아닌가 합니다...

    일본에나 가야 참고자료가 될것인데 현지화 되느라 변화가 없었다고는 말 못할것이고요.

    애초에 백제시대 지었다던 목탑도 불타고 난리가 나며 3~4번은 바뀌어서 원 형태를 알기

    어렵게 되어버렸다더군요. 약소국이자 동네북이었던 시절의 비애이죠 ㅠㅠ
  • 역사관심 2017/10/20 07:14 #

    조선풍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를 저는 순위별로 1) 색채 (단청), 그 다음이 2) 지붕모양 (우진각 전무)로 꼽습니다. 솔직히 아시아건축에서 '원형유지'는 불가능합니다. 유네스코 강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이쪽 전통건축 특유의 철학위에 기반한 제대로 된 지역형 스탠다드를 아시아건축학계에서 만들어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변화'되는게 나쁘다는 건 1849년 존 러스킨이 쓴 [건축의 일곱 등불]부터라 봐도 과언이 아닌데, 그 전에는 한중일등에서는 전대의 건축을 마음대로 변형하는 것에 말 그대로 '아무런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유로중심철학이지요. 이 책을 쓴 동기가 '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였고, "진정한 건축의 색은 자연석의 색이며 다양한 자연의 색으로 얻지 못할 조화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요- 전형적인 서구인의 플라톤적 사고(본질주의)이며 석조건축기반적 사고입니다. 아시아는 그렇지 않지요. 예컨대 중국만 해도 가장 앞선 시기의 문헌 (서지정보가 안떠오르네요)에 '집은 현세에 내가 살기편하고 아름다우면 짓고, 그 후에 그 다음세대는 (그위에 혹은 다시) 새로 지어도 된다"라는 문맥이 나옵니다. 오죽하면 왜 동양에서는 석조가 부족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목조건축위주로 갔느냐에 대한 오래된 철학적 해답으로 이 실용적 사고를 드는 이론도 나오고 있지요.

    그렇다고 '전통'이란 것이 중요하게 된 20세기초 민족국가시대의 중력하에 사는 우리가 조상들처럼 사고할순 없겠지만, 20세기식 완전 서구중심사고에서 벗어나(혹은 진화해) 우리의 전통과 사고, 철학체계가 반영된 새로운 가치관을 건축에도 만들어갈 시점이 21세기엔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 우왕구우웃 2017/10/20 19:25 #

    역사관심님 너무너무 좋은 말씀입니다, 근대화(이런 표현 좋아하지 않지만) 이후의 서구일변주의가 바뀌었으면 하네요.
  • 2017/10/21 15: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10/24 03: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참기름 2017/10/27 00:31 #

    전통이랑 특히 한옥에 관심 많은 열여섯이에요 제가 읽긴 조금 어려운 내용들이 많지만 그래도 많은 도움되고 이런 글 많이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 역사관심 2017/10/27 02:59 #

    반가워요. 젊은 분들이 전통에 관심이 많아서 희망이 있습니다 ^^ 자주 들러주시길~
  • 쿠사누스 2017/11/07 14:43 #

    작년에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가 이 월정교를 '국적불명'이라고 비난했던 모양이더군요....
    국적불명이라는 비판은 옛 건축물을 복원하거나 현대 한옥을 건축할 때마다 늘 따라붙는 욕인데, 저는 항상 국적불명이라고 시비거는 사람들을 향해 '건축에 국적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고 싶네요.
    황룡사 9층목탑을 지을 때 신라인들은 적국인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를 초대한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아스카의 호류지를 건축한 사람들은 거의 백제 기술자들이고, 그렇게 건축이 발전했던 백제도 무령왕릉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남조의 건축양식을 받아들였고, 일본의 삼나무가 삼국시대 한반도에 수입되어서 각종 건축과 공예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었는데도 건축에 무슨 국적이 있는 것처럼 두부 자르듯이 국적을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지 참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 역사관심 2017/11/08 01:06 #

    사실 이런 문화계도 (혹은 '...야말로') 정치적인 성향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동아시아만큼이나 협소한 민족국가주의가 강한 지역도 드물지요. 몇번이나 블로그에서 지적했듯 고대-중세 문화를 되살리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판국이니 건축이야...
    http://luckcrow.egloos.com/2529077
  • 쿠사누스 2017/11/08 07:46 #

    주인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동아시아는 민족주의가 너무 강해서 지금 현재의 민족주의가 과거 역사까지 투사되는 바람에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공통적인 문화정체성과 문화적 교류의 경험마저 부정되기 일쑤인 것같습니다.

    서양인들은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치고박고 했어도 문화사조가 한번 유행하면 거의 모든 유럽에서 서로 공유하고 교류하는 게 보편적이었거든요.
    로마네스크 양식이 등장하면 거의 대부분 유럽 지역에서 그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하고, 고딕 양식이 등장하면 유럽의 내노라하는 도시들마다 고딕 양식을 따르는 교회 건물을 짓고, 팔라디온 양식이나 고전주의 부흥 양식이 유행하면 또, 그 양식들을 모방하는 궁궐들을 유럽 각국의 왕들이 짓기 시작하고, 아르누보 양식이 등장하면 각국의 부르조아 시민들이 열렬히 추종하고... 건축 스타일을 당시 시대의 주류였던 건축 사조와 시대 정신으로 분류해야지, 동아시아의 일부 대중들이나 그 대중들의 편견을 먹고 사는 저널리즘이 한국 양식, 중국 양식, 일본 양식의 건축으로 쉽게 단정짓고, 그런 분류를 천년전 고대까지 소급해서 구분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행위인 것같습니다.

    아마 건축의 국적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그 분들께서는 중국 청나라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飛檐 비첨은 중국 5천년 내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심지어는 중국 하상주 시절에도 존재하는(?) 중국 건축의 고정불변의 결정적 특징이고, 우리나라 청록하단의 단청은 고조선 단군임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랑스러운 한국 전통의 특징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
  • 더러운 이누이트 2018/12/04 01:25 #

    월정교 복원은 중요한 성과이긴 하나 미완의 성과이기도 합니다.

    1.월정교의 국적불명 비판은 복원당시 중국 남부지방의 목교들을 많이 참고해서 입니다. 석조교각과 목조교량판 사이의 지지구조를 중국 남부지방 목교의 구조를 참고했죠. 이건 사실 고증이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2. 교량판 상부의 목구조를 부석사 무량수전의 구조를 변형해서 만들었죠. 두 시기가 너무 멉니다.

    3. 양쪽에 있는 누각을 백제식(일본 호류지의 스타일)으로 디자인했죠. 문제는 현재 진행중인 황룡사는 당나라 양식에 가까운 신라식 누각으로 설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같은 지역의 두 2층 건축이 구조와 양식이 현격하게 다르게 복원되는 모순이 발생하죠.

    많은 복원연구와 설계를 해본 입장에서, 복원연구는 학술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과거의 진정한 모습과는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자칫 후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우리대에서 그 기반 정보를 교란시키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 더러운 이누이트 2018/12/04 01:28 #

    그나저나 김홍식 선생님 옛글을 보니...정말 운치있는 멋진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빨리 건강 회복하셔서 좋은 글 더 쓰셔야 할텐데....
  • 더러운 이누이트 2018/12/04 01:35 #

    복원설계의 문제점은 중간의 각 과정에서 학자들이 평균적인 보편적인 선택을 한다는 점입니다. A를 복원설계 하면 그럴듯 하고 멋지죠. 하지만 B를 복원하고, C를 복원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들간에 거의 다른 부분이 없기 때문이죠. 대동소이 할 수밖에 없죠. 설계의 중요 단계에서 항상 평균치를 선택했으니....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축들만 봐도 동시대의 건축이라 할지라도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칩니다.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데 말이죠.

    복원연구, 설계 많이 해봤지만, 이걸 유적위에 실제로 짓는 것은 정말이지 신중해야 합니다.
  • 역사관심 2019/01/19 03:46 #

    앗 이런 좋은 댓글을 지금에서 봤네요; 연말에 댓글이 몰려서 답글이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부분들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조금 다른 의견 (예를 들어 1번- 중국남부참조는 괜찮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도 있습니다만, 추후 더 추가할 부분이 생기면 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복원', '중건', '재건'식으로 명확하게 카테고리를 나누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공회전격인 소모적 논쟁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동안 철학적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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