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한국의 조선초 "루침樓寢"에 대한 이상한 번역 한국의 사라진 건축

본 블로그에서 큰 주제중 하나로 (엄밀히 말하자면 주제자체는 아니지만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고려-조선전기까지 존재하던 2층이상의 기거용건축물을 '침루寢'라고 했습니다. 즉 '잠을 잘 수 있는 누각형 건축물'입니다.

우리의 선입견은 무서운 것이어서 실상 樓라는 개념자체가 '2층이상건축물', 특히 주변국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2층이상의 '벽체를 가진' 보통의 건물임을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즉, 애시당초 타국에서는 樓라는 글자는 유독 이런 주위가 뻥 뚫린 亭(정)자형 건축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亭'의 중국측 검색결과는 이런 건축들이 결과로 나옵니다. 단층이건 복층이건 사방이 뚫리면 정(정자)이란 개념이 강합니다.
이는 일본도 동남아국가들도 비슷합니다. 흥미롭게도 태국측 검색엔진으로 '정'을 검색하면 한국에서 '루'라고 부르는 건물들이 주르륵 태국의 정자들과 함께 뜨지요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조선후기식 '루'를 '정'으로 모두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측에 ''라는 개념을 검색하면 이런 벽체형 다층건물이 뜹니다. 지금도 아파트나 초고층현대건축 역시 그들은 '루'라고 부릅니다.

언제부터 우리만이 유독 이런 사방이 뚫린 형태의 기둥으로 올린 건축을 '**루'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필자가 아는 한 이런 역사적 맥락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분도 없습니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 12세기말의 대표적 고려지식인 이규보 (李奎報, 1168년∼1241년)는 이 두가지 개념 (루와 정)을 확실히 구분했습니다.

構屋於屋 집 위에 집을 지은 것을 
謂之樓 누(樓)라 하고 

作豁然虛敞者 툭 트여서 텅 비고 허창(虛敞)한 것을 
謂之亭 정(亭)이라 한다.

집위에 집이라는 것은 당연히 온전히 벽체를 가진 복층 건축을 뜻합니다. 이런 건물이 아니지요.
영남루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여러 글을 나눈바 있습니다. 그중 2개만 소개하면 다음의 것입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우리의 이런 독특한 '관념'이 어떤 고정관념에 의한 선입견을 만들어내는 가에 대해 현재우리가 보고 있는 '문헌기록정보'로 살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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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침樓寢이 "누각과 침실"인가?

앞서 소개한 몇 글에서 필자는 우리 중세건축중 '침루'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즉, 잠을 자는 용도의 숙박용 다층건물입니다. 
寢 (잘 침) 樓 (다락 루, 층집 루)

하지만 '침'이란 글자에는 휴식하다는 뜻도 있으므로 혹 요즘같은 정자형 루도 포함하지 않나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최소 요즘 우리가 보는 건축과 다른 온전한 2층건축 (숙박용)이 있었음은 앞서 소개한 글에서도  문맥상 다른 해석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확히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런 맥락을 살필 수 있을 텐데, 오늘은 '침루'를 뒤바꾼 '루침樓寢'이란 글자의 해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재 고전번역원측에서는 이 글자를 누각과 침실이라고 즉 두 개의 명사로 나누어 해석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8월 5일 辛卯 1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부엉이가 경복궁 누각과 침전 위에서 울다
○辛卯/鵂鶹鳴于景福宮樓寢殿上。
부엉이가 경복궁 누각과 침전(寢殿) 위에서 울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이 樓寢이란 글자는 정확히 총 5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모두 태종(太宗, 1367~ 1422년)-세종(朝鮮 世宗, 1397~ 1450년)대에만 몰려 있습니다. 만약 '누각과 침전'이란 말이 관용어로 쓰이는 단어조합이라면 상식적으로 당연히 후대에도 계속 등장해야 합니다. 루와 침전은 다층이건 단층이건 후대에도 계속 건립된 건물이니까요. 그러나 이 조합은 이 시대에만 국한되어 등장합니다. 이는 조선전기에 '침루'형식 즉, 2층이상의 건물에서 자는 형식이 존재했고, 후기에는 사라졌다는 하나의 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현재 제공되고 있는 위의 해석은 얼마나 한국건축학계가 우리의 전통 다층건축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실은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鵂鶹鳴于 부엉이가 
景福宮樓寢殿上 경복궁 루침전(寢殿) 위에서 울었다 (즉 누각형식의 침전).

계속 소개해 보지요.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3월 18일 戊寅 2번째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창덕궁의 누각·침실과 진선문 밖의 돌다리 공사에 박자청을 감독관으로 하다

○搆樓寢室于昌德宮, 又作進善門外石橋, 以工曹判書朴子靑董其役。
누각(樓閣)과 침실(寢室)을 창덕궁에 짓고, 또 진선문(進善門) 밖에 돌다리[石橋]를 놓았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박자청(朴子靑)을 시켜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해석을 보면 마치 "樓閣 (누각)"이란 단어와  "寢室(침실)"이란 단어가 제대로 들어간 합성어인양 오해하기 딱 좋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이러하지요.

樓寢室于昌德宮
즉, 樓寢室 (누침실)을 昌德宮(창덕궁)에 지었다.

역시 누각형식의 침실 (복층침실)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8년뒤인 세종 1년의 기록입니다.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10월 4일 乙亥 6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새로 수강궁루의 침실을 짓다
○新作壽康宮樓寢室。
새로 수강궁루의 침실을 지었다.

여기서는 제대로 해석해 두었습니다 (유일하게 이런 식으로 해석한 기사입니다). 위의 해석대로 일관되게 했다면 '수강궁의 루와 침실을 지었다'라고 했겠지요. 이 구절 역시 어떻게 보아도 '루에 있는 침실'이라는 이 번역이 옳습니다. 

그 다음의 유명한 세종 27년조의 정보는 명확히 위의 '루침실'들이 누각에 있던 침실임을 보여주는 구체적 기사입니다.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1월 28일 壬寅 1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거처를 연희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승정원에 전지하다
○壬寅/傳旨承政院:
昨日左議政等以衍禧宮多蟲蛇, 請幸椒水里, 不從, 又請幸開城, 又不從。 然忽思之, 若蟲蛇果多, 恐未安心過夏。 且松木鬱密, 而北垣低微, 樓寢室遮陽朽破, 將伐松築垣, 修葺遮陽, 予欲移御他處, 畢修而還。

命宦者田吉洪, 往審喜雨亭修治。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어제 좌의정 등이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이 있다고 하여 초수리(椒水里)로 가기를 청한 것을 듣지 않았고, 또 개성으로 가기를 청한 것도 또 듣지 않았으나, 문득 생각하니 만일에 벌레와 뱀이 과연 많다면 안심하고 여름을 지내지 못할까 싶다. 또 소나무가 울밀하고 북쪽 담이 낮고 미약하며, 다락(루)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환자(宦者) 전길홍(田吉弘)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을 가 보고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아직도 의심스럽다구요, 다음을 봐주시지요. 다음은 1482년 성종 13년조 기사에 나오는 궁궐도 아닌 일반 저택의 루침실의 묘사입니다.

성종실록 142권, 성종 13년 6월 16일 癸丑 2번째기사 
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제안 대군의 아내 박씨가 종과 동침한 일은 무고한 것임을 아뢰다
○ 중략. ’ 又一日, 今音德倚我枕, 欲接我口, 我言: ‘婢主間敢如此哉?’ 叱之猶不已强之, 且言: ‘夫人之乳甚好。’ 請捫摩, 我以手揮置。 又一日夜, 無心到樓寢室下, 推問屯加未、內隱今、今音德、今音勿等, 我則入睡不知, 翌日朝聞無心聲, 問諸內隱今, 答云: ‘無心推問吾等: 「與夫人同寢。?」 答云: 「以夫人之敎同寢。」’  중략.

또 하룻밤에는 무심(無心)이 다락 침실(寢室) 아래에 이르러서 둔가미·내은금·금음덕·금음물 등을 추문(推問)하였는데, 나는 잠이 들어 알지 못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무심의 목소리를 듣고 내은금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무심이 우리더러 「부인과 동침했느냐?」고 묻기에, 「부인이 시켜서 동침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였습니다.

보시다시피 한밤중에 무심이라는 자가 박씨부인이 자고 있던 '루침실아래(樓寢室下)'에 와서...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명확히 한밤에 숙박하는 형태의 '루침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시대인 '성종 9년'(1478년)의 저택제한기사를 보면 결국 '침루'와 '루침실'이 같은 건축물을 뜻함을 거의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기사중 굵은 체입니다.

성종 9년 무술(1478) 8월 22일(신해)
공조에서 민간이 사치하는 풍속을 경계하기 위해 집의 간각과 척수를 제한하기를 청하다

공조(工曹)에서 아뢰기를,
“전일 사헌부(司憲府)의 수교(受敎)에, ‘근래에 민간의 풍속과 세속의 습관이 오로지 사치만 숭상하므로 참람함이 넘쳐서 제한이 없으니, 무릇 집의 간각(間閣)과 척수(尺數)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고 하였으므로, 신 등이 참작해서 자세히 정해 보았습니다. 대군(大君)의 집은 60간(間) 안에 정방(正房)ㆍ익랑(翼廊)ㆍ서청(西廳)ㆍ침루(寢樓)가 전후퇴(前後退) 아울러 12간인데, 고주(高柱)의 길이가 13척, 과량(過樑)의 길이가 20척, 척량(脊樑)의 길이가 11척, 누주(樓柱)의 길이가 15척이고, 나머지 간각은 기둥[柱]의 길이가 9척, 대들보[樑]의 길이와 척량(脊樑)의 길이가 각각 10척입니다. 왕자(王子)ㆍ제군(諸君) 및 공주(公主)의 집은 50간 안에 정방ㆍ익랑ㆍ별실(別室)이 전후퇴 아울러서 9간인데, 고주(高柱)의 길이가 12척, 과량(過樑)의 길이가 19척, 척량(脊樑)의 길이가 10척, 누주(樓柱)의 길이가 14척이고, 중략.

寢樓竝前後退十二間,
침루가 전후퇴 12칸

즉 [無心到樓寢室下]의 '루침'과 [寢樓竝前後退十二間]의 '침루'는 각각 1482년과 1478년, 완전히 동시대의 기록에 나오는 형식으로 같은 건축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앞선 기록의 고전번역원측 해석처럼 '누각과 침실'이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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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문집에 나오는 '루침樓寢' 기록

앞서 살펴본 것은 실록의 기록이고, 다음으로 일반 문집에 나오는 루침기록들을 보겠습니다.

정충신(鄭忠信, 1576~1636년)의 [만운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甲戌正月初一日。行墓祭。初五日。公日記曰。久臥田中。京信甚阻。 玉樓寢膳。중략.
옥으로 된 루에서 자고(쉬고) 먹다.

다음으로는 임란직후의 문인인 이건(李健, 1614~1662년)의 [규창유고]중 나오는 구절.

丁丑三月。自襄陽配所。初到舊家感懷
樓寢閣獨登臨。開戶如聆歎息音。舊事思來先隕淚。落花啼鳥動悲吟。
서루침각(서책을 넣어두는 침루)에 홀로 올라 내려다본다.

이제껏 살펴본 '침루'와 '루침'기록을 연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침루'
이집(李集, 1327~ 1387년) [둔촌잡영]
성종실록 1478년
성종실록 1482년
송순(宋純, 1493~ 1583년) [면앙집 (俛仰集)]
노수신 (盧守愼,1515~1590년) [소재집]

'루침'
태종실록 1408년
태종실록 1411년
세종실록 1419년
세종실록 1445년
정충신(鄭忠信, 1576~1636년) [만운집]
이건(李健, 1614~1662년) [규창유고]

보시다시피 1400년대 조선초기에서 1500년대후기까지 집중적으로 몰려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지요 (임진왜란은 1592년). 1600년대에 하나의 문집기록이 더 있기는 하나 이는 싯구의 비유이므로 생략합니다. 마지막으로 실록보다 더 자세한 기록을 제공하곤 하는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인조 5년 1627년의 기록을 소개합니다.

승정원 일기
인조 5년 정묘(1627년) 9월 29일(임진) 맑음
전의감에 도둑이 든 정황을 보고하고 좌변포도대장 등을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병조의 계

병조가 아뢰기를,
“방금 전의감 관원(典醫監官員)의 첩정(牒呈) 내에, ‘이달 28일 밤에 적인(賊人) 7, 8명이 칼을 가지고 본감(本監)의 전매청(典賣廳)에 돌입하여 동쪽 창문 아래 벽을 헐고 들어와서는 누판(樓板)을 부수고 장차 곳간에 들어가려 할 즈음에 고지기(庫子), 수직(守直) 군사 등이 알아차리고 적인들을 붙잡으려고 서로 싸워 칼로 때리고 찌르고 하여 충주(忠州) 정병(正兵) 안돌시(安乭屎)가 몸을 찔려 즉사하였고 적인은 창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능장(稜杖) 1개(介), 대겸(大鎌) 1개를 버려두고 달아났습니다.’ 하였습니다. 

즉, 괴한이 혜민서 건물인 전매청에 들어와서 도둑질을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누판을 부수고' 털어가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東窓下毁壁以入, 打破樓板
동쪽 창문 아래 벽을 헐고 들어와서는 누판(樓板)을 부수고

누판은 이 부분을 뜻합니다.
물론 우리가 요즘도 보는 '다락'의 밑을 부순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이 기록 역시 기록의 시대를 감안하면 침루형식의 건축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듯 한 한번 살펴봐야 할 구절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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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마지막으로 김남시선생의 [본다는 것](2016년)의 몇 구절로 오늘의 주제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폴란드의 과학 철학자인 루드비치 플렉은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집합적 지식의 체계를 '사유양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공동체의 역사, 지리적 조건, 그리고 사회, 문화적 배경들에 의해 형성되는 사유양식은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세상의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13-15세기에 출간된 해부학 서적중에 사람의 내장 기관을 다섯 개의 달팽이 껍질 모양으로 그려 놓은 삽화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내장 기관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지요. 왜 그럴까요? 한편으로는 당시의 드로잉 기술이 세밀하고 복잡한 사물을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내장기관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배 속 허파, 위, 대장과 소장, 간과 방광 등의 많은 기관들은 서로 층을 이루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웬만해서는 서로 구별해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 각각을 서로 구별하게 해 주는 앎과 명칭이 확립되어야 하지요. '소장'과 '십이지장'을 서로 구별하고, '직장'과 '대장'을 나누어 '볼 수' 있게 하는, 해부학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날 앎이. 그런 지식을 가지지 못했던 15세기 유럽의 해부학자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내장 기관을 그가 알고 있던 '어지럽고 복잡한 유기체 형태'의 하나인 달팽이 모습이라고 '본' 것이지요. 

본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앎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본다는 것이 아는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가능성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계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러기에 근본적으로 과거의 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요. 그 때문에, 우리가 가진 세상과 사물들에 대한 '선입견'과 '관점'이 고집스럽게 이어진다. 그 선입견을 반박하는 새로운 현상을 두고서도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게 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게 되는 것들이, 늘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전번역원의 '루침' (혹은 루침실) 번역은 현대한국인들의 '현존하는 '루'형식'에 대한 앎이 중세건축 기록에 투영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졸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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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남중생 2017/12/10 11:17 #

    인용하신 세종 27년 1월 28일 기사에는
    “다락(루) 침실의 차양(遮陽)이 모두 썩고 부서졌으니, 장차 솔을 베고 담을 쌓고 차양을 수리하여야 하겠으므로, 내 다른 곳에 옮기었다가 수리가 끝난 뒤에 돌아오려고 한다. 환자(宦者) 전길홍(田吉弘)에게 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을 가 보고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라고 적혀있군요. 루침을 수리해야겠으니... 정(亭)을 수리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때 루와 정이 같은 의미로 쓰였거나 이규보도 혼동을 바로잡고자 일부러 명시한게 아닌가 싶네요.
  • 역사관심 2017/12/11 04:31 #

    말씀을 듣고 매우 흥미로워서 조금 찾아보니 희우정은 세종이 1424년에 지은 현재의 망원정이더군요. 망원정은 궁궐내에 있지 않고 현재 양화대교쪽 강변북로옆에 있으므로 문맥상 궁궐내의 루로 보이는 곳과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단 듭니다. 제 생각으로는 따로 줄을 떼어 쓴 것으로 보아 (원문), 궁궐내의 침루를 수리하는 동안 가 있도록 희우정 역시 수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즉 글에 나오는 '내 다른 곳에 가 있다가'의 그 다른 곳이 희우정일 가능성입니다.

    이 글의 바로 전날 기사를 보면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1월 27일 辛丑 1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좌의정 신개 등이 초수리나 개성으로 행차하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좌의정 신개·우의정 하연·우찬성 권제(權踶)·좌참찬 이숙치·우참찬 정인지·도승지 이승손이 아뢰기를,

    "지금 연희궁에는 벌레와 뱀이 많아서 여름을 지내시기 어렵사오니, 초수리에 행차하시기를 원하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옛부터 제왕들이 모두 두 곳에 서울을 두는 것은 순행(巡幸)하기를 예비하는 것이옵니다. 더군다나 개성은 조종(祖宗)께서 왕업을 일으키신 땅이옵고, 또 한양과 거리가 멀지 않사오니, 행차하여 옮기시기를 청하옵나이다."

    하였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되어 있어 문맥상 저 수리하라는 '침루'는 초기이궁인 연희궁내에 존재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추후 좀 더 살펴볼 구절같은데 흥미로운 정보 감사드립니다!
  • 남중생 2017/12/11 10:59 #

    저야말로 항상 흥미로운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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