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 후기건축물- 중층에서 단층으로 바뀐 실증적 예 (최근 논문, 2016) 한국의 사라진 건축

본 블로그의 가장 큰 축중 하나는 조선중기 이전의 한국건축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500년 조선시대를 거의 200년/300년으로 나누는 1592년의 임진왜란 (1392~1592/ 1592~1897)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기점으로 많은 한국의 유무형의 문화적 양태가 변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중 하나인 건축을 주로 다루어 왔습니다.

많은 포스팅이 있지만, 예를 들어 2층이상 건축을 뜻하는 '루(樓)'에 대한 의미변화를 수차례 문헌정보를 통해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일부만 소개하자면 이런 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특정건축물의 변화를 다룬 연구는 거의 없었지요. 2016년 나온 이종석선생의 논문은 그 갈증을 풀어준 좋은 연구였습니다. 간단히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여 포스팅으로 다뤄 봅니다.

=====
흥해배씨 종가 금역당(琴易堂)의 건축과 조선후기의 구조 변화

종가의 구전에 따르면 금역당은 배삼익이 부친 배천석을 따라 도목촌으로 ‘복거(卜居)’한 1558년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금역당은 안동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口’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이외에 별채인 대청채가 있다.<그림 4>

그런데 금역당 종가에는 금역당구가도(琴易堂舊家圖) 가 전한다. 구가도는 1812년 간기가 있는 상례비요(喪禮備要)의 건(乾) 권 후면의 빈 종이에 그려져 있다. 가도의 획선을 보면 건축을 위한 설계도면이 아니라 기존의 가도를 옮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금역당에는 현 종손의 9대조 배집(1710∼1755)이 종가를 대폭개축했다는 구전이 있다. 따라서 칸의 구획과 용도, 창호의 위치, 쪽마루까지 표시되어 있는 구가도는 배집이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기 전의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이 금역당구가도 의 평면은 현재의 금역당은 물론, 다른 주택들과도 크게 다르다.
금역당구가도 琴易堂舊家

금역당구가도 는 구가의 평면과 칸 구획을 보여줄뿐더러 각 칸에 글자를 기입하여 용도나 구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 ‘중당’은 내부를 구획하지 않고 바닥에 마루를 시설한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당 남단의 동쪽 낭무는 2칸을 ‘침(枕)’(③)으로 2칸을 ‘내방·실’(②)로 표기하였다. ‘침(枕)’은 공간의 구조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베개’를 뜻할뿐더러 ‘침(寢)’과 음이 같아 침실로 짐작된다.
 
‘내방’과 ‘실’은 내밀한 공간으로 여성이나 부부의 전용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당의 남변 동쪽 낭무는 외부인의 접근이 통제되는 사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당 남변의 서쪽 낭무에는 각 1칸의 ‘장(藏)’, ‘방’, ‘사랑’, ‘책방’(④·⑤·⑥·⑦)이 있다. 이러한 표기는 이 공간이 남성 가족과 손님을 위한 공간이었음을 알려준다.
=====

주: 아래 부분이 필자의 관심축인 중층구조에 대한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건물은 중층구조였던 것도 확인된다. 하단에 배치된 남북축의 두 낭무에는 ‘각(閣)’이 기재되었다. 동쪽 낭무에서 북쪽 첫 칸은 ‘내각(內閣)’(⑯)으로, 남쪽 세 칸은 ‘동각(東閣)’(⑰)으로 기재하였다. 서쪽 낭무도 북쪽 세 칸을 ‘내각’(㉑)으로 기재하였다. 이 ‘각(閣)’은 서쪽으로 연장된 낭무에도 기재되었다(㉗). 자의를 고려하면 ‘각(閣)’은 공간의 용도보다는 구조나 품격을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단 동서축 낭무의 서쪽 두 칸에도 ‘각’을 표기하고 그 하부에 마구간인 ‘구(廐)’를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㉒). 이는 가도의 ‘각(閣)’이 중층 건물의 상층을 뜻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낭무의 동쪽 두 칸 역시 상부가 ‘고방(庫房)’이고 하부가 ‘구(廐)’여서(⑱), 이 부분도 중층이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하단에 남북축과 동서축으로 놓인 낭무는 모두가 중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역당 구가는 상단의 옆으로 누운 ‘日’자형 평면에, 서쪽의 대청과 하단의 중층 낭무가 연결된 형태였다. 배삼익의 부친 배천석이 1558년에 도목촌으로 ‘복거(卜居)’한 기록이 있거니와 이와 유사한 평면을 지니고 현존하는 향단이 1543년경 건축으로 전한다는 점에서 금역당은 구전대로 1558년 건축일 가능성이 크다. 중층건물의 배치는 조선전기 주택 건축의 한 특징이라는 점에서도7) 금역당 구가는 조선전기 건축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금역당구가도가 어느 시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초창시의 모습이라면 이는 조선전기의 구조와 칸의 용도를 알려주는 것이 된다. 반면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기 직전의 모습이라면 이로부터 초창 이후 발생한 변화, 나아가 조선후기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축된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구가도에는 ‘주(廚)’와 ‘조(竈)’가 표기되어 있어 이를 통하여 구가도가 반영하는 시점을 판단할 수 있다.

‘조(竈)’는 현재 ‘부엌’이나 ‘부뚜막’ 등으로 해석된다. 구가도에 ‘조(竈)’는 모두 3곳에 표시되었다. 이들 ‘조(竈)’가 독립된 칸에 표시되었다는 점에서 ‘조(竈)’는 취사용 부뚜막을 뜻함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3곳의 ‘조(竈)’가 모두 ‘방(房)’과 연접한 것으로부터 이들 ‘조(竈)’는 난방을 위한 온돌 시설과 결합되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구가도의 주택은 온돌 아궁이에 부뚜막을 설치하여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로부터 구가도의 주택은 초창시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기 직전인 조선후기의 모습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 상류주택에는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온돌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급격히 확산되었다.

주: 즉, 이 그림에는 온돌과 취사용 (부엌)이 붙어 있는 형태로, 완전히 조선 초창기의 모습이 아닌 임란직전후의 금역당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역당 구가가 가문의 구전대로 1558년 건축이라면 초창시에는 온돌이 없거나 부분적으로만 시설되었을 것이다. 주택의 평면과 입면도 온돌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을 것이다. 금역당 구가가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에 건축되었다는 점은 구가도에 ‘주(廚)’가 표시되어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주(廚)’ 역시 취사공간, 즉 ‘부엌’을 뜻하는 한자이다. 금역당 구가에서 ‘주(廚)’는 상단의 동쪽 끝에 있으며 6칸에 이르는 넒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부엌의 위치나 구조가 온돌 시설과 결부하여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금역당을 처음 지었을 때에는 온돌 난방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붉은 부분이 현재 남은 부분

현재 금역당의 평면은 금역당구가도와 전혀 다르다. <그림 2>에서 보듯 현재 금역당의 안채는 경북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口’자형이며, 안채 서쪽에 별동의 대청채가 있다. 그런데 현재의 건물 중 상당부분은 금역당 구가의 일부가 남은 것이다. 구가 건물은 안채에서 몸채와 직교하는 동·서 익랑 및 별동의 대청채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림 3>은 금역당 안채의 평면과 칸살을 표시한 것이다. 이 중 상단의 동A·B와 서A·B 칸은 안마루와 함께 몸채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동C·D·E 칸은 동쪽 익랑 부분이고, 서C·D·E 칸은 서쪽 익랑 부분이다. 동F와 서F 칸은 각기 동·서 익랑과 남쪽 행랑이 중첩되는 부분이다. 
현재는 이 두 칸의 층고가 행랑과 같아 행랑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평면 및 높이가 대칭인 동·서 익랑은 행랑보다 층고가 높을뿐더러 많은 부분이 중층으로 되어 있다. <그림 4>에서 보듯 현재 동익랑은 C·D·E칸이 중층이다. 하부는 부엌이고, 상부에 다락이 있다. 또한, E와 F칸의 경계를 이루는 중방에는 C·D·E칸과 동일한 높이에서 다락 장선을 끼웠던 장부구멍이 있어 이 역시 중층이었음이 확인된다.<그림 5, 상>

이처럼 동익랑에서 현재 중층이거나 과거에 중층이었음이 확인되는 부분은 금역당구가도 에서 모두 중층을 의미하는, ‘각(閣)’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또한, 구가도에서 동익랑은 4칸 전체가 ‘각(閣)’이고, 이 중 북쪽 첫 칸이 ‘내각(內閣)’으로, 남쪽 세 칸이 ‘동각(東閣)’으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칸의 구획은 현 금역당에서도 확인된다. 동C 칸과 동D 칸의 경계를 이루는 다락 상부의 보와 하부의 보방향 중방에는 문 혹은 벽선을 설치했던 홈이 대칭으로 나 있어 동C 칸이 다른 칸들과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그림 5, 중·하>
중층의 흔적은 서익랑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서익랑은 C칸만 중층이지만, <그림 6>에서 보듯 단층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서D 칸에도 다락 장선을 걸었던 장부구멍과 청판을 끼었던 홈이 중방에 남아 있다. 이처럼 현 금역당의 동·서 익랑은 칸 구획과 중층구조 면에서 금역당구가도의 하단부에 배치된 남북축의 동·서 낭무와 일치한다. 특히 동익랑은 동쪽 낭무의 ‘내각·동각’ 4칸과 완전히 일치한다. 서익랑은 구가도의 ‘내각삼칸’과 비교하여 현재 두 칸만 중층구조로 확인되지만 지붕의 높이를 고려하면 역시 구가도와 일치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주: 사견입니다만 '각'으로 표기된 부분중 일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아래는 1550년대 그려진 [연지계회도]입니다. 붉은 부분은 분명 중층의 건축으로 행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550년대 연지계회도

현 금역당의 동·서 익랑은 금역당 구가 하단의 중층 낭무가 남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현 금역당의 행랑도 구가의 중층 구조가 단층으로 변형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앞서 동쪽 익랑과 접하는 북쪽 벽의 중방에는 다락 장선을 설치했던 홈이 익랑의 다락과 같은 수평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행랑의 상부 벽면에는 익랑과 동일한 양식의 고식 붙박이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림 2, 상> 현 금역당의 행랑도 본래 익랑과 동일한 높이였는데 개축하면서 지금처럼 단층 높이로 낮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 중층의 낭무라면 이런 기둥식도 있을 수 있고, 상하층이 모두 벽체를 가진 유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래는 15세기 노은리 고택의 추정도입니다.
따라서 동·서 익랑은 평면뿐 아니라 입면까지 금역당 구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행랑은 구가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익랑과 행랑 외에 별채인 대청채도 구가의 대청 건물이 일부 변형된 상태로 남은 것이다.

중략.
그러나 금역당 구가의 대지는 이와 같은 조건이 되지 못했기에 상단의 낭무를 확장하여 몸채로 삼고 여기에 하단의 기존 ‘ㄷ’자형 낭무를 결합시켜 ‘口’자형 안채로 변형하였다. 그러므로 금역당이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형된 가장 큰 요인은 온돌 난방의 보편화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주: 그 동안 온돌의 보편화 (16-17세기)가 결국 우리 건축의 단층화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여러 설이 있었지만, 이렇게 하나의 동일건축을 대상으로 고 건축도와 현재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분석, 온돌이 중층을 단층으로 만든 이유라는 결론을 보여준 연구는 필자가 아는 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굉장히 의미있는 연구라 생각됩니다.

결론중
금역당 구가는 "가례"를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 16세기 성리학자들의 열의를 배경으로 건축되었다. 가례에는 관·혼·상·제의 의례공간을 갖춘 주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 양반층 주택의 구조는 이와 전혀 달랐다. 현존하는 조선전기 주택들을 보면 남녀의 공간 구분이 엄격하지 않은 ‘口’자형 평면이 보편적이었다. 

이에 금역당의 건축주는 가례에서 확인되는 ‘청사·외청’, ‘정침·중당’을 그가 이해한 구조대로 건축하였다. 그 결과 관례를 행하고, 문상객을 접대하며, 선조(시조)를 제사하는 ‘대청(청사·외청)’이 바깥쪽으로 돌출하였다. 계례를 행하고, 주인이 사망하며, 빈소를 차리고, 가까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중당(정침)’은 주택의 중앙에 남북축으로 놓였다. 금역당 구가가 건축될 무렵 다른 곳에도 이와 같은 주택들이 건축되었다.

그런데 금역당 구가는 조선후기에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구가도가 없으면 이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만큼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금역당 구가를 개축하게 된 핵심적 이유는 온돌 난방의 보편화였다. 금역당 구가를 건축할 1558년에는 상류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으므로 온돌을 고려하지 않고 평면과 입면을 설계하였다. 이후 온돌이 보편화되자 금역당 구가는 초창시부터 지니고 있던 채광과 통풍, 동선 등의 불리함에 더하여 온돌을 설치하기 어렵고, 설치해도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는 단점이 부각되었다. 

창시의 부엌인 ‘주(廚)’와 온돌 설치 이후의 부엌인 ‘조(竈)’가 공존하는 금역당구가도는 온돌이 보편화되면서도 구가의 평면을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시기를 반영한다. 금역당의 개축을 전후하여 유사한 구조의 다른 주택들도 철거되거나 변형되었다. 금역당 구가는 사상적인 요인을 기반으로 건축되었다가 온돌난방이라는 실용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개축되었다. 

따라서 온돌난방은 조선후기에 상류주택의 평면과 입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금역당 구가는 16세기 성리학자의 신념이 주택 건축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의 금역당은 온돌의 보편화가 조선후기 상류 주택건축에 끼친 영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현 금역당은 조선시기 상류주택 건축의 산 증인으로서, 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3년 이전하기 전 도목 낙동강변 시절의 종택전경


현재 남은 종택의 모습

=====
마무리

이러한 조선전기 저택 연구는 2000년대중반이후 꽤 활성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많은 연구가 쌓이고 있으니 언젠가 (이른 미래에) 조선전기식 한옥을 다시 재건해보는 움직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욕심같아선 고려시대 귀족저택 (조선전기와는 또다른)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 실제로 목격하는 때가 오면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의 인식속에 조선중기의 화가 이징(李澄, 1581년~ ?)가 어린시절 숨어 있던 '다락'의 모습과 에피소드가 명확한 가시적 형태로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흘동안이나 모든 식구가 찾아도 못찾던 그 복잡한 구조의 저택을 말이지요.

연암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사흘 동안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때렸더니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림에 온통 빠져서 영욕(榮辱)을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사견이지만 이러한 중층과 복잡한 연결구조(행랑, 익랑, 낭무식 연결)의 새로운(역설적으로) 한옥은 현재 불고 있는 '도시형 한옥'의 움직임에 많은 영감과 직접적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우리의 재산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때, 이런 생각 짧은 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날이 올 것입니다 

"전주시는 한옥마을의 정체성 논란을 불러온 2층 한옥과 변형된 한옥 건축을 규제하는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한다고 12일 밝혔다. 전주시는 2층 한옥이 고유의 전통한옥이 아닌데다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건축 규제에 나섰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따로 주제를 잡아 글을 쓰고 있으니 언젠가 소개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덧글

  • Nocchi 2018/01/13 10:31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담당 공무원 뉘신지 몰라도 공무원다운 마음 자세 제대로네요 무식과 무견 복지부동 ...
    하지만 공무원 만 비난 할 수 없는게 아직까지는 일반 국민들 머릿속에도 조선시대 집 하면 1 층 일 테니 그걸 함부로 어겼다가 민원(..) 이래도 들어오면 큰일 일 거 같네요
  • 역사관심 2018/01/14 10:25 #

    감사합니다. 공무원도 문제지만, 사실 저런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일부 한옥전문가들의 식견이 문제같습니다. 결국 공무원들에게 조언을 주는 것도 그분들일테니까요..
  • 남중생 2018/01/13 13:57 #

    연지계회도의 중층 구조는 "문루" 같이 보이네요. 노은리 고택도 마찬가지로 출입구를 위에서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되어있고요...
    이건 일본/조선의 군사 건축(성)에서 흔히 보이는 구조인데, 조선 전기 가옥구조에도 영향을 준걸까요?

    그리고 온돌의 보편화가 주된 이유라면,17세기 소빙기가 한옥 구조에도 대대적인 영향을 줬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 역사관심 2018/01/14 10:26 #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재밌을 것 같은 주제네요. ^^ 그렇습니다 소빙기는 분명 우리 건축구조에 여러모로 크나큰 영향을 주었지요- 일단 수종부터 크게 달라지니...
  • 천하귀남 2018/01/13 17:18 #

    온돌에 맛을 들이면 헤어나오기는 힘들겁니다. 온돌 도입으로 바뀌는 건축문화는 여러가지로 재미있군요.

    헌데... 재료와 기술이 달라진 현대에서 2층 한옥에 대한 규제는 좀 아니라 보긴 합니다. 저 부분도 제대로 개선되 주면 좋겠군요. 물론 모양만 한옥인 요상한 건축의 규제는 필요하다 보긴합니다.
  • 역사관심 2018/01/14 10:27 #

    이제는 한옥하면 단층, 조선후기식 전면온돌이라는 고정시각에서 벗어나서, 그런 한옥도 있고 조선전기, 고려시대 건축양식도 있고..란 식으로 한옥의 외연확장을 하면 합니다. 더 풍요로운 한국적 미가 나와주면 좋겠어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