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한증막의 역사 (찜질방의 역사, 그리고 240년간의 공백) 역사전통마

세브란스 병원 홈페이지의 '찜질방의 역사'를 보면 이런 간단한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찜질방의 기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한증소(汗蒸素)’라는 민간치료요법에서 찾을 수 있다.이후 ‘한증막’이라는 명칭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이용되었으며, 1990년대 초부터 ‘찜질방’이라는 명칭으로 기존의 한증막을 보다 현대화하여 현대인들의 휴식 공간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설명만 보면 마치 조선시대 500년 내내 우리에게 이런 찜질문화가 있었던 것처럼 들리지요. 더 자세한 기록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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汗蒸所 & 汗蒸

우선 "汗蒸所" 한증소라는 단어는 세종대에만 등장합니다. 실록기록을 보지요.

세종 4년 임인(1422년) 
10월 2일(병술)
동ㆍ서 활인원과 한증소에서 치료하다 사람을 상해한 의원을 죄주도록 하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동ㆍ서 활인원(東西活人院)과 서울 안의 한증소(汗蒸所)에서 승인(僧人)이 병의 증상(證狀)은 묻지 않고 모두 땀을 내게 하여, 왕왕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하니, 이제 한증소를 문밖[門外]에 한 곳과 서울 안에 한 곳을 두고, 전의감(典醫監)ㆍ혜민국(惠民局)ㆍ제생원(濟生院)의 의원을 한 곳에 두 사람씩 차정(差定)하여, 그 병의 증세를 진찰시켜 땀을 낼 만한 사람에게는 땀을 내게 하되, 그들이 상세히 살피지 않고 사람을 상해시킨 자는 의원과 승인(僧人)을 모두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고, 동ㆍ서 활인원과 서울 안의 한증소는 그전대로 두기로 명하였다.

활인원은 당시 '빈민의 질병구제'를 목적으로 한 기관으로 동 활인원은 동대문 밖, 서 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한증소가 서울안에 있었으므로 최소 3군데의 한증소가 자리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글을 보면 사대문밖에 한증소를 한 곳 더 설치한다고 되어 있어 4곳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기록답게 그저 땀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의원을 두어 병에 맞게 땀을 조절하게 합니다. 1422년의 기록입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기록이 약 한달 반 전인 8월 25일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냥 시행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기록연구를 통해 교지한 것이라 추정됩니다.

세종 4년 임인(1422년) 
8월 25일(기유)
한증소의 이익과 무익에 대해 전지하다

예조에 전지(傳旨)하기를,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汗蒸所)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로 인하여 사망한 자가 흔히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시킬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하였다.

5년 후인 1427년에는 한증(찜질)을 하기 위한 기금확보와 운영법을 예조에서 제대로 마련합니다. 

세종 9년 정미(1427년) 
4월 24일(임오)
한증으로 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기금 확보와 운영 방법을 예조에서 청하니 따르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한증(汗蒸)하는 승려로 대선사(大禪師) 천우(天祐)ㆍ을유(乙乳) 등이 말하기를, ‘한증으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인애하는 정치의 한가지가 될 만한 일입니다. 지난 계묘년에 대사승(大師僧) 명호(明昊)가 탕욕(湯浴)하는 장소를 만들어서 병 있는 백성을 구제하려고 성상께 말씀을 올렸던 바, 성상께서 가상하게 여기시어 바로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욕실(浴室)을 만들라고 명하셨었는데, 일이 미처 착수되기도 전에 명호가 죽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널리 시주를 받아들이어 연전에 욕실(浴室)을 증설한 바, 한증으로 병을 고친 자가 계속하여 끊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병자는 땔나무를 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죽을 쑤어 먹기와 소금ㆍ간장 따위도 마련하기가 쉽지 아니하므로, 저희가 비록 안타깝고 민망하오나 공급할 길이 없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

당시 기록을 보면 불교문화가 살아있던 조선초기답게 승려들이 사찰에서 한증을 시행한 것이 보이는데, 이는 예전에 다룬 [고려말-조선전기 목욕문화 & 해주 객관 목욕실]의 '사찰과 목욕실' 부분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당대 사찰의 목욕문화는 꽤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목욕시설뿐 아니라 '한증막'시설도 당대의 사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고찰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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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싱개(싱게)물 노천탕중 남탕 (조선시대 추정)

특이한 것은 이 '汗蒸'이라는 단어는 조선초기인 세종대와 문종, 그리고 성종(成宗, 1457~1495년)를 마지막으로 실록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실록에서 연대상 마지막 한증기록은 1481년의 성종대 것입니다.

성종 13년 임인 (1482년) 
2월 28일(정묘)
남윤종ㆍ민사건ㆍ윤석보 등이 해청을 기르는 일과 매를 구하는 일의 잘못을 아뢰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비전이 한증(汗蒸)을 하는 때이니, 생물(生物)을 진상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리고 좌우패(左右牌)도 폐지할 수가 없다. 중략"
"三殿汗蒸時, 凡生物不可不進"。

여기 나오는 삼대비전(三大妃殿)이란 대왕대비 정희왕후, 왕대비 소혜왕후, 왕대비 안순왕후를 뜻합니다. 즉, 이 삼대비가 '한증'(찜질)을 하고 있으니 '생물'을 진상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생물은 '해동청' 즉 '조선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욕과 관계없는 구절로 당시 좌우패(훗날 좌우금위)에서 기르던 해동청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폐지하자는 요청을 성종이 거절하는 장면인데 이를 보면 한증(찜질)의식과 해동청의 진상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汗蒸"이라는 단어는 1777년의 정조때까지 무려 300여년간 실록에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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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외의 조선초문헌 기록

실록외의 문헌기록으로는 '한증소'라는 단어는 역시 조선초기의 기록으로 김여지 (金汝知, 1370~1425년)가 쓴 [창주집(滄洲集)]에 챕터명으로 등장합니다.

창주집
한증소에 대해 의논하여 올린 글

비슷한 시기 김안로(金安老, 1410 ~ 1537년)의 [희락당고]에서도 한증에 대한 글이 발견되지요.

희락당고 중:
瘴溽如湯汗蒸饙

이외에 '蒸炊' (증취), 즉 끓이고 달이는 것같은 더위라든가 증취하는 곳에 있는 것 같다라는 표현은 종종 등장하지만 '한증'이라는 단어는 흥미롭게도 실록과 마찬가지로 저 창주집을 마지막으로 전혀 문헌기록에 필자가 파악하는 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라져버리지요. 즉, 김안로 (1537년 사망)에서 한증에 대한 기록은 일단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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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한증막 (汗蒸幕)

그러다가 갑자기 18세기 정조대에 [심리록]등에 요즘 우리가 아직도 쓰는 '한증막'이란 단어로 재등장하지요. 즉, 이 1777년의 기록까지 무려 240년동안 (16세기중반~18세기말) 아예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등장합니다.

정조대(正祖, 1752~ 1800년)의 범죄기록문헌인 [심리록]에는 이런 흥미로운 기사가 나옵니다.

심리록 
정유년(1777년) 
○ 함경도 영흥(永興) 

김종대(金宗大)의 옥사
김종대가 주영기(朱永起) 등과 모여 이야기하던 중 용맹을 과시하여 장난삼아 한 번 발길질했는데, 16일 만에 죽게 하였다.
[상처] 척려(脊膂)에 피멍이 들고 약간 딱딱했으며 청적색(靑赤色)이었다.
[실인] 발에 채인 것이다.

유년 5월에 옥사가 이루어졌다.
[본도의 계사] 한증막(汗蒸幕)에서 한담하였으니 애당초 악의는 없었고, 장난삼아 우연히 발길질했으니 고의적인 범행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죄인의 심리를 신중히 다루는 정사로 보아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1777년 한증막에서 김종대와 주영기란 인물등이 모여 용맹을 과시하다가 발길질로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함경도 영흥'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란 점. 왜 지명이 흥미로운지는 조금 후에 설명할 테니 일단 기억해 주세요.

같은 정조대이자 7년후인 1784년의 기록을 보면 한증막이 당시 병이 걸린 자들의 접근성이 아주 쉬운 장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 8년 갑진(1784년) 
윤3월 25일(경진)
경외(京外)의 살옥(殺獄)에 대한 형조의 의계를 판하(判下)하였다.

죽은 장덕남(張德男)은 본래 고질병을 앓고 있었다. 마침 극도로 더운 때, 그와 서로 싸우면서 넘어지고 엎어지던 이때 이정백에 의해 힘껏 돌무더기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런데도 참외를 사 먹고 방향을 돌려 한증막(汗蒸幕)으로 향했다가 결국 계속 피를 토하며 죽었으니, 혹 병중에 더위를 먹은 것에 죽은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것이 실로 의심이 생기는 단서이다. 다시 도백으로 하여금 상세히 사정을 수집한 다음 다시 옥에 갇힌 죄인을 엄히 심문하여 의견을 내서 이치를 따져 장문하게 하고, 장문이 올라온 뒤 품처하라.
'더운 날'씨에도 병을 고치러 참외를 사먹고 한증막으로 향했다가 사망. 얼마나 흔하게 다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양반도 아닙니다.

홍경모(洪敬謨, 1774∼1851년)의 [관암전서(冠巖全書)]에는 이 정조대 (18세기말)의 한증막에 대해 꽤 자세히 묘사해 두었습니다.

관암전서 중:
窨蒸敵蠲酲。찌는 움집에서 숙취를 없애는 법

處處作窨室。 곳곳에 움막을 짓다. 
燒榾柮而熱之。나무등걸과 땔나무를 태워 열을 내고
雖微病者。비록 사소한 병자라도 
輒就其中發汗。늘 가서 땀을 내곤 한다.
俗尙一如西路。풍속이 서로와 같으니(?)
名曰汗蒸幕。이를 한증막이라 이름붙인다.

중간에 물음표는 '서로(서쪽 길)'과 같다라고 되어 있는데, 같은 저서중 다른 부분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如關西之汗蒸幕矣
즉, 관서지방의 한증막과 같다.

관서(關西)지방이라 하면 황해도와 평안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황해도'지역에 굉장히 큰 규모의 목욕시설이 조선중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 포스팅글 [고려말-조선전기 목욕문화 & 해주 객관 목욕실]에서 상세하게 다뤄 본 바 있습니다만, 이런 시설이 나오고 있지요.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온천(溫泉) 부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돌난간의 욕실(浴室)이 있다.

어쩌면 관서지방이 이런 목욕시설과 찜질문화로 꽤 유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온천]이란 책을 보면 황해도와 함경도에 북한의 온천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온도 굉장히 높습니다.



이 표에서 흥미로운 것은 '황해도' (15곳)과 함께 최대의 온천수를 자랑하는 북한지역의 장소가 바로 '함경도'(15곳)이란 점입니다. 이 함경도 영흥에서 위에서 살펴본 1777년 김종대의 한증막내에서의 발길질 살인이 일어나지요.

이 외에 같은 당대 인물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여유당전서]에서도 '한증'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至若汗蒸一節,雖曰相親之間,不忍拒絶,渠若無犯,則重傷之人,留置其家,身自扶護,至死不離,有是理乎?鼻頰之間,旣非要害,被傷之後,亦能行步,此雖可疑,【是乎乃】 重傷之人,蒸以發汗,風寒外襲,毒氣內攻,纔出窨戶,遂至殞命,【是如乎】 若不被打,無此汗蒸,若不汗蒸,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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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한증막의 모습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당시 한증막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위에서 홍경모(洪敬謨, 1774∼1851년)이 19세기초의 한증막을 묘사한 글을 보았지요.

處處作窨室。 곳곳에 움막을 짓어, 
燒榾柮而熱之。나무등걸과 땔나무를 태워 열을 내고
雖微病者。비록 사소한 병자라도 
輒就其中發汗。늘 가서 땀을 내곤 한다.
俗尙一如西路。풍속이 서로(관서지방)와 같으니
名曰汗蒸幕。이를 한증막이라 이름붙인다.

이보다 약 1세대후 (그러니까 약 50년)의 인물로 유명한 풍속화가가 있습니다. 19세기중엽에서 말기까지 (북한쪽) 강원도의 원산시을 비롯한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 생몰년 미상)이 주인공입니다.

명성에 비해 그의 출생과 삶 그리고 작품 활동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이제까지 연구에 의하면 김준근은 상업적 풍속화가로서 주로 부산과 원산을 비롯한 개항장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1895년 서양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m, 1863~1937)이 존 버니언의 소설 [The Pilgrim's Progress]를 한국 최초로 번역한 [텬로력뎡(天路歷程)]의 삽화를 그가 그렸다는 것이 그나마 알려진 이력입니다. 이 소설이 1895년의 것이므로 그가 대강 1800년대중반에 태어나 1900년대초반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분이 그린 그림중 조선의 '한증막'시설을 제대로 그린 그림이 한 점 귀하게 남아있습니다. 바로 아래의 것입니다.
19세기말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 ?~?) 한증막

그저 움집이 아닙니다. 이미 이 당시의 시설은 요즘 우리가 '찜질방'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한 그것의 것과 거의 흡사한 외양과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을 보고 만들었을리 만무하겠지만, 흥미롭게도 거의 똑같은 모습입니다.
마무리

찜질방이라는 개념은 대중탕에서 개별적으로 발전되면서 2000년경부터 급속하게 확산됩니다.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구체적 모습은 최소 1700년대말의 한증막과 굉장히 닮아 있습니다. 20세기후반에도 계속 인기였던 대중탕의 한증식 방들과 달리 말이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20세기중후반의 한증막 모습에 대해 잘 알지 못해 현대식 대중탕의 부속시설로 있던 유리로 된 창을 가진 작은 방구조만 생각했었는데, 블로그이웃이신 홍차도둑님의 제보로 인천지역에 지금도 있는 '송현시장의 한증막'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래 2016년의 기사를 보니 무려 80년이 넘은 곳으로 이렇게 되면 최소 1930년대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곳은 우리 문화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로 보입니다.

전통방식 고집하는 80년 한증막
한증막이 궁금하다고 하자, 주인 할머니가 포대 하나를 건네준다. “뜨거워서 그냥 들어가면 큰일 나.”
만들어진 지 80년이 넘었다는 황토방은 지금도 전기가 아닌, 나무 땔감으로 가마에 불을 올린다. 그러고 보니 둥그런 황토방 입구의 두꺼운 나무문은 그을음으로 까맣게 변해있었고, 한편에는 나무 장작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내가 여기서 한증막을 운영한 지가 20년 가까이 됐어. 원래 식당 했는데, 한증막 주인 할머니가 나이가 많아서 내가 한증막을 물려받았지. 오래됐지만 없앨 수가 없어. 이렇게 큰 막장(황토방)이 얼마나 좋은데 없애. 이곳을 찾는 어르신들이 아주 많아. 우리 한증막이 없어지면 그분들 다 어디 가.”

흥미로운 것은 역시나 생김새가 저 19세기말 김준근회화때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이 한국식 한증막 모습은 역사가 이어진 모습일지 모르겠군요.
인천 송현 한증막 모습 (원형그대로)
내부구조

또 하나의 의문점은 1482년에서 1777년의 약 300년간의 대공백기입니다. 15세기말에서 18세기말에 이르는 이 시기에 한증소, 한증막은 완전히 기록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혹시 이것도 온돌문화의 유행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 혹은 조선초기이후 급격한 중세식 불교문화의 쇠퇴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연구주제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꽤나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덧글

  • 홍차도둑 2018/01/16 10:12 #

    1970-1980년대 어렸을 때에 인천 송현시장...양키시장 건너편이죠. 수도국산 재개발 이후 그동네 시장이 확장되고 지금은 그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만...
    송현시장 안에 한증막이 있었어요. 할머님께서 가끔가다 가셔서 저도 가서 놀다오곤 했죠. 그땐 목욕탕 안에 사우나가 있는 곳도 별로 없던 때라서(사우나는 1980년대 이전엔 꽤 큰 목욕탕에서도 아주 작게 있었어요. 작은 대중탕에도 사우나가 필수로 있게 된건 1980년대 이후로 기억합니다. 1970년대는 워낙 어려서 기억도 안남) 어렸을 땐 왜 이 더운데에 있나...목욕하는 것도 아닌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생긴건 지금 찜질방의 저 모습과 다를건 없었어요, 다만 황토로 만들었고 대부분이 좀 컸다는 기억이 나네요.
    대중탕의 부속이 아닌 한증막을 따로 영업한 곳도 있었습니다.
    지금 찜질방의 그것은 중간을 건너뛴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 왔다고 보심 될겁니다.
  • 역사관심 2018/01/16 12:15 #

    와우, 너무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이 부분은 의문점으로 있었습니다만, 글에 첨부할 정보가 생겼네요. =)
  • 홍차도둑 2018/01/16 12:25 #

    추가해 주신 사진 보니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네요, 저기 씻는 곳은 이전에도 샤워기가 없었어요, 그냥 세숫대야에서 씻고만 가던 거라서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 모습 그대로 있었군요.
  • 역사관심 2018/01/16 13:26 #

    왠지 샤워시설이 어울리지 않는 곳같습니다. 말씀대로 그런 방식으로 씻고 나와야 더 운치가 있을 것 같은...ㅎㅎ
  • Nocchi 2018/01/16 11:31 #

    언제나 그렇듯 내공이 없어 끼어들 능력은 없지만 흥미로운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8/01/16 12:05 #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남중생 2018/01/16 12:29 #

    흠... 어쩌면 “한증막” 자체는 함경/황해 등 추운 지방의 풍습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핀란드의 시우나처럼 말이죠!

    또 한편으로는 온천과 불교문화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 역사관심 2018/01/16 13:27 #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기록들의 대부분이 북쪽지역 이야기였으니... 다만, 김준근의 경우 주로 강원도 (북측)에서 부산까지 왔다갔다하면서 활동한 흔적이 있긴 합니다.
  • Positive 2018/01/16 22:58 #

    정말 잘 읽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8/01/17 00:27 #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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