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당대 도성성벽기록- 11세기 개성나성(羅城)의 8미터이상, 그리고 17세기초 한양도성의 12미터급 성벽높이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나성(羅城)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란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성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어린 시절 항상 궁금했는데, 이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한자 표기(음차)라고 하지요 (대체 왜 음차가 이렇게 되는지...). 

우선 필자가 좋아하는 불독맨션의 리메이크 버젼부터...


그런데 역사를 배우면서 저 노래가 개경을 감싸던 '나성'이라는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관계없이 LA란 걸 알게 된 건 그 후로 로망이 깨지던 경험...).

원래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나성'은 바로 이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을 감싸고 있던 외성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한양성같은 존재지요). 그런데 남북으로 갈리고나선 개경을 갈 수 없으니, 자연스레 우리에게 잊혀지는 이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무너졌을지언정 사진들은 있을텐데 이에 대한 공개도 전혀 없어서, 인식적으로도 완전히 잊혀진 성이 되고 있지요. 

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개성나성(開城羅城)에 대한 정의를 한번 볼까요.
=====

개성나성은 송악산 마루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 형식의 도성이다. 도시 전체를 둘러쌓았으며 길이는 16㎞이다. 지형상 특성과 조건에 따라 돌이나 흙, 혹은 둘을 혼합하여 성벽을 쌓았다. 918년에 건국한 고려는 도읍을 개성으로 정하였고 기존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919년 그 안에 궁성이 건설되면서 발어참성은 대부분 황성으로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왕 때 3차에 걸치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방어상의 필요로 개성나성이 건설되었다.

강감찬의 제의로 이가도가 책임지고 1009년부터 1029년까지 21년 동안 도시 전체를 둘러쌓는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무려 30만 4,000여 명의 장정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인 1391년부터 조선 초기인 1393년 사이에는 발어참성에 이어 성 안에 8.5㎞의 내성(반월성)이 축성되면서 개성성이 둘레 약 23㎞에 달하는 발어참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돌로 쌓은 성벽은 현재 밑면의 너비가 6m, 높이는 3∼4m정도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에는 기본적으로 돌로 성심을 채웠으며 밑 부분의 일정한 높이까지는 계단처럼 돌을 쌓고 그 위에 석비레와 붉은 진흙을 번갈아 다져올렸다. 현재 밑면의 너비는 7∼8m이다. 성벽의 높이는 3∼4m이나 그 이상의 높이로 남아있는 곳도 적지 않다. 개성나성에는 25개의 성문이 있었다. 동대문(숭인문), 오정문(선의문), 비전문(회빈문), 북성문 등 4개의 성문은 각각 동, 서, 남, 북의 큰 성문이었고 그 밖에 중간 성문 8개와 작은 성문 13개가 있었다. 큰 성문들과 기타 중요한 성문 14개소에는 옹성을 쌓아 그 방비를 강화하였다.
=====

전체길이가 16킬로. 한양도성이 18.6킬로미터이니 약간 더 짧은 정도지만 굉장한 길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원래 나성의 높이에 대한 설명은 소개에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 이렇게 무너진 고려대에 쌓은 개성의 외성인 나성은 어떤 규모였을까요?
현재의 나성 (구간별 3~4 미터 높이)

[임하필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고려성(高麗城)

고려의 도성(都城)이다. 현종(顯宗) 때 경도(京都)에 성을 쌓기를 요청하여 정부(丁夫) 30만 4400명을 동원하였다. 왕가도(王可道)가 사람들을 시켜 일산을 가지고 빙 둘러서게 하고, 높은 데 올라가서 그들을 나아가고 물러가게 하여 그 넓고 좁음을 고르게 해서 성의 기반을 정하였다. 

21년 만에 공사를 마치니, 둘레가 2만 9700보(步)에 높이가 27척, 두께가 12척이었다. 즉위 초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기사년(1029, 현종20)에야 비로소 완성하였다. 공민왕 7년(1358)에 경성(京城)을 수축하는 문제로 기구 대신(耆舊大臣)에게 자문을 구하니, 퇴임한 이제현(李齊賢)이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는 이리저리 정벌하고 토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셨으니, 만신창이가 된 백성을 가지고 토목 공사를 일으킴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성에 성을 쌓지 않았으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란이 수도를 유린하고 궁실을 불태울 적에 만약 성곽의 견고함이 있었다면 필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곽을 마땅히 수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개경의 나성은 높이가 27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영조척으로 약 8.1미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1800년대, 즉 조선후기의 문헌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외에도  고려당대의 기록이 [고려사절요] (1452년)에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20년(1029년), 송 천성 7년ㆍ거란 태평 9년
○命參知政事李可道,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徵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築開京羅城,先是,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請築之,可道初定城基,令人持傘環立,登高而進退之,均其闊狹,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廊屋四千九百一十間。

○ 참지정사 이가도(李可道)ㆍ좌복야 이응보(異膺甫)ㆍ어사대부 황보유의(皇甫兪義)ㆍ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명과 공장(工匠) 8천 4백 50명을 징발하여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성의 외곽 또는 외성(外城))을 쌓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장사 강감찬이, 서울에 성곽이 없기 때문에 성곽을 쌓도록 청하였다. 이가도가 처음에 성 터를 정해 놓고 사람을 시켜 일산을 들고 빙 둘러서게 하고는 자기가 높은 데 올라서, 둘러선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하기도 하여 그 넓이를 고르게하니 둘레가 1만 6백 60보이고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1029년 완공되는 이 나성은 흥미롭게도 둘레의 길이는 꽤나 차이가 나는데 비해 높이는 정확히 역시 27척이라는 기록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둘레기록은 아마도 외성 내성의 차이가 아닐까 일단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2000년대초반 북한에 가서 다큐멘터리로 찍은 나지막하게 남아있는 개성 나성의 영상기록입니다. 
2000년대초반 나성의 사진

출처미상의 개성성 사진

이 잔해수준의 나성이 원래 얼마나 높았느냐는 다음의 삼국시대 성벽으로 간접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신라의 삼년산성의 남은 구간인데, 아래 보이는 여성의 키를 대강 160센티미터로 잡았을때 높게 보아 4배, 약 6미터 40센티정도로 잡을 수 있습니다.

신라 삼년산성

그럼 개성 나성의 높이는 이보다도 약 1미터 70센티나 더 올라가는 겁니다. 그 정도의 높이라면 외성은 방어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입니다.
=====

[고려사절요]외에 나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1614년(광해군 6년)에 이수광(李睟光, 1563~ 1628년)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국역은 안되어 있습니다). 

지봉유설

宮室部 궁실부
勝覽言開城府羅城土築 개성부 나성을 흙으로 쌓으니 경치가 뛰어나다.
周二萬九千七百步 둘레가 29,700보이며
羅閣一萬三千間 건물(각)이 13,000칸 늘어서 있고 
중략.

아쉽게도 높이는 없지만 고려사절요의 2만 9700보(步)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직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조선중기이전의 한양도성의 '높이'기록이 나옵니다. 다음의 기록.

今漢陽城石築 오늘날 한양성은 석재로 쌓았는데
周九千九百七十五步。둘레가 9,975보이며 
高四十尺二寸。높이가 40척 2촌이다.

여기 보면 1600년대초반의 한양도성이 40척 2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려 12.18미터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꽤나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것이 [가장 웅장한 부분이 유실된 한양성- 1884년 사진]에 나오는 1884년의 사진중 숭례문근처의 높은 한양성구간은 11미터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양반의 키를 150센티로 잡으면 150*7= 10.5미터, 160센티로 잡으면 160*7= 11.2미터). 

따라서 17세기초반에 이미 이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귀한 기록입니다.
1884년 한양도성 구간 높이

=======

이상 15세기기록의 개성의 나성과 17세기초 한양도성의 높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당대의 수도 성벽을 다룰 때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웅장한 연출을 해주시면 좋겠군요 (아래는 2011년 출간된 [고려전쟁 생중계]라는 저서에 묘사된 고려- 몽골전쟁의 삽화입니다만, 기록상으로 볼때 이 정도의 장면이 충분히 나올 듯 합니다. 블로그이웃이신 解明님의 제보로 이는 충주산성전투를 그린 것임을 알았습니다).
1253년 고려-몽골전 충주산성 전투

사족이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어찌 보면 더 흥미로울 수 있는)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대한국 건축학계에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부분.

고려사절요 나성설명부분 중:
높이가 27척이며, 낭옥(廊屋)이 4천 9백 10칸이었다.

지봉유설 나성설명부분 중:
周二萬九千七百步 둘레가 29,700보이며 
羅閣一萬三千間 건물(각)이 13,000칸 늘어서 있다.

이 두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성벽위의 어떤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낭옥廊屋', 지봉유설에서는 '각'으로 표현되고 있지요. 

廊屋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이런 이미지가 주욱 뜹니다. 廊屋은 행랑 랑에 집 옥, 즉 연결된 긴 형태의 집을 말합니다.  이런 건물이 약 5천~13000칸의 어마어마한 규모로 늘어서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흥미롭게도 [지봉유설]에서 함께 소개한 한양도성부분에는 이런 설명이 없습니다. 오직 나성부분에만 나옵니다. 시대가 다른 두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꽤나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기록입니다. 어쩌면 11세기 당대의 고려 외성인 개경 나성은 8미터 이상의 높이에 저러한 행랑수비시설이 좌악 늘어선 장관을 연출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흥미로운 기록들인데 반해 아직 관심이 부족한지라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핑백

덧글

  • 解明 2018/02/17 22:10 #

    글 잘 읽었습니다. 행옥 관련 기록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소개한 『고려전쟁 생중계』의 삽화는 충주산성 전투를 묘사한 것인데, 글을 잘못 읽는다면 개경 나성을 그렸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네요.
  • 역사관심 2018/02/18 00:52 #

    이제껏 저 희미한 삽화를 나성으로 알고 있었네요. 정확한 정보 감사합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