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시대에 가까운 야생의 땅, 17세기 이전의 조선의 숲과 땅 모습 (1편) 역사전통마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97년작 [원령공주]의 시대배경인 무로마치 시대 (1336~ 1573년), 즉 14~15세기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소개한 글로, 당시 생각보다 이 원령공주의 시대가 그리 오래된 (즉 고대이전 신화시대)이 아닌 흔히 말해 동아시아의 중세정도의 시대였음을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됩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의 문화재복원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는 것. 무조건 원형고집이 아니라 유연성이 있으면서도 최대한 고증으로 가는, 그러나 원칙은 '복원에 한표'를 던지는 긍정적 사회분위기. 모르는 것은 최대한 근처의 사료와 자료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구현해내는 자세. 그리고 무엇이든 그림으로라도 그려내서 가시성을 확보하는 형태의 움직임. 

그러한 '노력'에서 탄생한 문화재나 문화작품은 사람들에게 그 진정성과 Credibility가 전해진다. 원령공주를 보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런 작품들이 다루는 역사적 시각성은 '에이 저럴리가 있어?'가 아니라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의 재현과 진정한 창조이다. 부정적의미가 아닌, 긍정적의미의 '만들어진 전통'은 그렇게 탄생한다.

사극을 만들때의 태도나, 복원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할수 있는 한 철저하면서도 상상력의 즐거움이 더해지는 유연하고 긍정적인 자세라는 것은 분명 배울 점같다. 원형고집과 돈벌이라는 양극단을 포함하는 모아니면 도, 한계를 그어버리는 경직성과 그 반대로 스스로 목을 죄는 경박함으로는 아무것도 생산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의미있는 저서가 작년 2017년 우리 학계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의 생태환경사의 전문가인 김동진박사의 [조선의 생태환경사] (푸른역사)가 그것으로 이 책은 여러 분야에서 참고할 만한 좋은 내용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한반도의 들판과 숲, 그리고 논 밭의 모습을 그려낼 여러 분야에서 꼭 참고해야할 연구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일단 삼국, 통일신라 (남북국), 고려, 조선중기까지의 한반도의 들판과 숲, 그리고 인간들과 야생의 모습에 대해 살핀 부분을 발췌해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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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세기 한반도에서 진행된 생태환경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러브록의 이러한 주장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17~18세기) 천방과 화전 개발은 조선 성립 이전과 이후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조선의 생태환경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방은 냇가를 막아 관개함으로써 하천에 연한 저습지와 무너미를 논으로 바꾸었고, 하천은 산록에 위치한 숲에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광범위한 땅을 새로운 경작지로 개간하는 수단이 되었다. 
습지와 무너미, 완만한 산록의 숲은 오랫동안 야생 동식물이 번영을 누리던 영역이었다. '산림천택', 혹은 '산림수택'이라 불리던 이곳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왕실과 국가가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공간에서 대다수 민인들이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마련하는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이 '산림천택의 이익을 백성과 함께 누린다'는 새로운 국가운영이념을 채택한 결과 야생의 공간은 논밭이 되어 삶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개와 닭이 서로 호응하여 우짖고', '밥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는' 경관으로 바뀌었다. 인간중심의 세계가 번창하는 동안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번성을 누리던 야생의 세계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농경지는 오늘날 사람들의 주변을 둘러싼 가장 특징적인 경관이 되었다.


4.1 퍼센트, 깊은 숲 속에 일군 땅

그러나 농지 개간에 가속도가 붙고 있던 고대사회 역시 촌락과 촌락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촌락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백성들은 정복전쟁에 대비하고 빈번하게 출물하는 야생동물을 제어하기 위해 일정한 방어, 사냥시설을 마련하고 있었다. 아직 한반도의 광대한 야생공간에 비해 인구는 불충분했고, 농경지로 개간할 땅은 많았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이용하던 가용공간의 구체적 면모는 어떠했을까.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었던 겁니다. 아래는 13-14세기경을 배경으로 하는 [호랑이형님(웹툰)]에 나오는 원 모습.
이른바 [신라촌락문서]로 알려진 고대문서는 이를 살필 수 있는 적절한 사료다. 당시의 도량형에 대한 연구성과를 고려하여 분석하면 [신라촌락문서]에 나타난 4개 촌락의 촌역중에서 농경지 면적은 4.1%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촌역 중 경작지는 대략 2~7%가량이었고, 농경지의 비율이 낮은 신생촌은 3년 동안 농지개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신라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 인근의 정황이 이러했으므로, 당시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본다면 농경지는 4%보다 낮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서원경의 모촌을 오늘날 청지시 초정약수터 일원으로 비정한 이인철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모촌은 서원경과 마찬가지로 큰 산자락 끝에 놓인 분지성 평지에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고작 4%미만의 경작지. 나머지는 야생의 땅입니다. 이런 모습은 호족의 중심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촌과 비슷한 곳에서 발달한 취락의 모습은 신라 하대에서 후삼국에 이르는 시기에 각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의 중심지에서도 드러난다. 상주의 아자개(?~?)나 벽진장군 이총언 (858~ 938년)등은 큰 산에 성을 쌓았고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들에 농경지를 일구었다. 큰 산과 평지가 이어지는 그곳에 호랑이와 같은 맹수가 일상적으로 출몰하면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의이씨의 시조가 되는 고려 개국공신 이도 (?~?)가 살던 '전의' 역시 차령산맥 바로 아래 넓게 펼쳐진 땅이었다. 흥미롭게도 전의이씨 시조의 마을에도 호랑이와 호랑이 먹이의 전설이 전하고, 이는 경부선 철도 개설 당시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인철은 이곳을 [신라촌락문서]의 사해점촌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은 고대사회 이래 개발이 집중되었지만 아직 많이 남아있던 큰 산아래의 넓은 들을 개간했다. 경주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이러한 땅에서 새로운 경제적 기반을 닦은 호족은 통일신라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다.
사다리 모양, 10~14세기의 농업경관

고대사회 이래의 경작지와 주거지의 입지 특성은 고려시기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 서긍은 고려시대 경작지의 전형적인 모습을 산골짜기에 놓인 '사다리 모양의 논과 밭'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고려시기에도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숲과 늪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은 야생의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마을은 큰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었으며, 마치 서부 개척기의 미국처럼 숲과 야생동물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산비탈을 개간한 곳에서 농사를 지었고, 때로는 다락밭 (계단밭)을 만들기도 했다. 

마을에 인접한 샘이나 계속의 작은 시냇물은 벼농사에 이용되었고, 저수지를 만들어 산자락 아래 펼쳐진 논에 물을 대거나 섬 둘레에 둑을 쌓아 만든 갯바닥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넓은 들판이 농경지로 이용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호남평야와 같은 지역이 산자락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향해 점점 개간되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비하면 일부 지역이 경작지로 이용되었고, 
농업의 중심지는 여전히 산자락에 근접해 있었다. 황산벌로 불린 논산의 부적면 일대는 여우들이 뛰놀고 있었고, 여행자들은 갈대와 억새숲을 지나 관촉사에서 쉬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호랑이형님]이란 작품의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이런 모습을 잡아내었는지... 여말선초 즉 13-14세기의 한반도 모습인데 바로 이 모습이 이 연구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산자락 아래 인간의 마을과 작은 경작지 (그것도 바둑판이 아닌 계단식). 그리고 그외에는 거대한 야생의 땅. 아마도 당대 조선땅의 대다수의 마을이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현재의 황산벌은 당시의 모습을 조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산자락 아래에 경작지로 일굴만한 논경지, 그리고 그 뒤로는 여우떼가 우글대던 벌판. 현재도 억새풀 투성이지만 강도들이 숨어있진 않습니다(...)
현재의 황산벌

넓디넓은 평택의 들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종 12년 (1021년)에 세워진 봉선홍경사 갈기비에는 이러한 정황에 대해 

처음 이 땅에는 전혀 객주집이 없어서 사람의 땅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서 강도가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비록 갈림길로서 중요한 지점이었지만 사실은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태평성대에 이곳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없는 평택의 들판에는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그 사이에 강도들이 숨어 있었다.
12세기에 세워진, 최루백 (1110~1205년)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때려잡은 혜음원 역시 큰 산과 평지로 이어지는 골짜기부근이었다. 오늘날에는 골짜기를 논이 가득 메우고 있지만 당시 호랑이와 같은 야생동물이 사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따라서 동물의 왕국을 지나려는 고려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살아서 도착하고 싶다면 말이다. 

12세기초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영토는 동해에 닿아있으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서 험준하고 평지가 적다. 그 때문에 농사를 산간에서 많이 짓는데,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힘써 갈고 일군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라고 했다. 평지가 적다는 말은 물론 구릉성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특성에 대한 표현할 수 있지만, 넓은 들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 언급이라 보는 편이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 우왕 1년 (1375년),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속한 거평부곡의 소재동에서 2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오늘날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동마을' 인근에 위치한 곳이다. 당시 소재동은 5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중략. 정도전이 유배되었던 거평부곡의 소재동은 나주 일원에서 볼 때 매우 외진 산골에 해당한다. 바로 이러한 곳이 고려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심지였다.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정도전 역시 우리나라의 땅을 산과 바다사이에 있어 경작할 수 없는 구릉, 수택과 같은 땅이 80~90%에 이른다고 했다. 
소재동의 정도전 초가에서

고려말 조선초의 하삼도는 이런 모습이었다. 고려 말의 진황지가 복구되고 새로운 땅이 본격적으로 개간되는 태종초에는 전결 수가 120만 결정도로 보고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14세기말 고려사기 최대경작지는 약 100만 헥타르로 추산할 수 있고, 이러한 땅은 주로 산골짜기 사이의 땅과 커다란 산자락 아래 펼쳐진 아담한 들판으로 볼 수 있다. '문전옥답'(집 가까이에 있는 기름진 논)이라는 오랜 관용구처럼 고려의 마을은 산자락 끝에 놓여 있었고, 자그마한 저수지나 마을 앞의 샘물은 논농사의 근원이었다. 골짜기 밖의 무너미 땅에 펼쳐진 넓은 들과 드넓은 평원은 아직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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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을 소개하는 가장 큰 목적은 '많이 쓰도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오래된 중앙집권적 정치체계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마치 조선중기정도가 되면 (혹은 멀리나가 고려시대, 혹은 통일신라대까지도) 한반도 땅의 곳곳이 개발이 끝나고 논밭이 들판에 있었으며, 깊은 숲을 제외하면 야생은 줄어들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요. 즉 일본이나 유럽처럼 지방분권이 강하며 소국들이 곳곳에 포진, 성벽으로 대표되는 정치적으로 Isoloated된 도시들이 주가 된 국가들의 땅모습과는 뭔가 다른 모습을 머리에 그리는 분들이 많을 듯 합니다. 
신윤복(申潤福, 1758~ 1814년?)등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작품들의 이런 한갓진 화전놀이는 위의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식에는 그간 우리의 '영화나 드라마'등의 고려, 조선시대묘사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 들판과 논밭 모습, 그리고 야생의 세계는 거의 그리지 않는 그간의 제한된 주제 (특히 정치사에 집중)로 인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반증이 2년전 소개된 영화 [대호]같은 조선반도의 야생을 그린 드라마가 꽤나 낯선 경험으로 혹은 신선한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지만 삼국-고려시대까지는 위의 그림에 보이는 것같은 현재 멸종된 '대록'(사슴/순록의 일종)까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위에 삽화로 소개한 웹툰 [호랑이형님]처럼 적극적으로 이 시기의 '진짜 한반도의 야생'을 배경으로 쓰거나, 혹은 더 나아가 아예 [원령공주]처럼 도교와 불교가 어우러졌던 삼국-고려시대의 16세기이후의 우리 전통문화의 내음과는 사뭇 다른 신비한 세계를 보여주는 소재로 이 환경이 쓰이길 기대합니다. 그 큰 한 발자국은 바로 이런 훌륭한 연구에서 비롯되리라 사료됩니다.

후속편에서는 이러한 야생의 산림과 땅, 그리고 수종의 변화, 그리고 17세기 이후 화전과 천방으로 바뀌는 이야기도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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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함부르거 2018/02/20 20:52 #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고려 시대 개경 귀족들이 촌으로 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서 귀향이란 말이 귀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그랬구나 싶었습니다. 헌데 이렇게 야생의 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촌이었다면 가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달린 문제였겠구나 싶습니다. ^^

    역사에 있어 소설가나 만화가 같은 예술가들의 작업이 중요한 게 당대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느끼게 만드는 데 있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역사책만으로는 실감이 어려우니까요. 호랑이형님 꼭 봐야겠네요. 좋은 작품 소개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8/02/21 00:47 #

    그리고보니 고려시대 귀향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저 역시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듯한데, 한번 찾아보고 쓸만하면 글로 정리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치적 관점을 제외하고 이글의 주제로).

    호랑이형님은 신과함께에 이어 한국형신화 환타지를 정말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같습니다. 이런 작품이 애니화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런지..라는 생각도 듭니다.
  • 응가 2018/02/23 18:40 #

    더 할것도없이 고종때까지만해도 '서울'의 창덕궁에서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니 말 다했죠...
    흔히 묘사되는 민둥산이란것도 어디까지나 도시 근처에서 그렇지 이사벨라 버드비숍여사같은 구한말에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교외로 나가면 어디에나 산림이 우거져있다고 적혀있습니다.

    대록이라 하는게 북한지방에는 남아있을겁니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뿔이 나는 사슴종류가 대륙사슴(꽃사슴), 노루와 개마고원에 서식하는 백두산사슴이란게 있는데 이 종류가 엘크의 일종으로 대록이지 않나 싶습니다.
  • 역사관심 2018/02/25 01:57 #

    그렇지 않아도 실록의 그 이야기, 다음 글에 실으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ㅎㅎ. 아예 궁궐후원에 호랑이가족이 자리잡은 에피소드까지 있지요. 오, 대록이 북한에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감사드립니다!
  • Nocchi 2018/03/04 08:00 #

    흥미로운 이야기 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Ps. 웹툰 작가님은 정말 대단하네요
  • 역사관심 2018/03/04 11:03 #

    언젠가 한번 개인적으로 정말 여쭤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웹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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