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시대에 가까운 야생의 땅, 조선의 숲과 땅 모습 변화 (2편) 역사전통마

1편에 이어 계속 가보겠습니다. 호랑이, 표범, 늑대떼, 빽빽한 활엽수림, 그리고 그곳을 목숨을 걸고 개간하는 조선시대의 모습입니다.

무너미의 땅과 천방

산골짜기에서 만들어진 계곡의 물은 평지쪽으로 내려오면서 시냇물이 된다. 시냇물은 장마철등 홍수가 있을 때마다 많은 양의 물이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평지쪽에서 홍수로 물이 넘쳐 흐르는 땅, 이곳이 바로 무너미의 땅이다. 무너미의 땅은 평탄하고 기름지다. 하지만 매년 필연적으로 겪는 물난리 때문에 그곳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는 많은 야생동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주로 사냥터로 쓰이던 이 곳에 들어와 영구적으로 정착하려면 필연적으로 호랑이등에게 맞서야 했다. 

즉, 평지 중 시내를 중심으로 한 양쪽의 옥토를 무너미땅이라 합니다. 이 곳은 여러 짐승들이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 떠도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요. 여기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려면 필연적으로 이들과 맞서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1518년 간행된 [속동문선]에 잘 나와 있습니다.

속동문선 비명(碑銘)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 한공 신도 비명 병서 (議政府領議政上黨府院君韓公神道碑銘 幷書 )
서거정(徐居正) 중:

또 두 포구와 두 도서는 왜인(倭人)에게 고기잡는 것을 허하여 길을 빌려주고 세금을 받으며 왕래를 정찰하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법이 없는데, 지금 파한다면 이는 울타리를 철폐하여 호랑이 떼를 높게 하는 격이라 변방의 환난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하니, 그 의논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이는 비유지만, 이런 비유를 쉽게 할 정도로 호랑이떼는 흔한 시대입니다. 즉 15세기중엽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시대에도 "울타리를 치고 호랑이 떼를 막는 마을"이란 개념이 명확히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였던 것이지요.
웹툰 호랑이 형님 중

호랑이 떼의 습격은 17세기중엽까지도 실록에 보입니다.

인조 16년 무인(1638) 2월 5일(기해)
의주에 호랑이 떼가 사람과 가축을 해치다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을 넘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

"성을 넘어 들어와"라는 개념이 보이지요. 이것이 의주성이건 어떤 고을이건 확실히 외적뿐 아니라 짐승들에게서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개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현대한국에서 그리 주목하고 있지 않은데, 김동진박사의 이번 저서로 인식의 폭이 넓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15세기초에는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까지 들어올 정도로 많았습니다.

태종 5년 을유(1405) 7월 25일(무오)
밤에 호랑이가 한경(漢京) 근정전(勤政殿) 뜰에 들어왔다.

표범도 들어옵니다.

태종 18년 무술(1418) 5월 26일(을해)
표범이 한경의 개천에 들어오다
표범이 한경(漢京)의 개천(開川)에 들어오니, 저자 사람들이 모여서 이를 잡아서 병조에 바쳤다.

15세기중엽 세종대 기록을 보면 전라도 백야곶, 즉 지금의 화양반도에 있던 목장까지도 호랑이와 표범이 우글댑니다. 

세종 16년 갑인(1434) 12월 22일(을축)
병조에서 전라도 백야곶 목장의 호랑이ㆍ표범을 순천 부사 등이 군인을 거느리고 잡게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전라도 백야곶 목장의 호랑이와 표범을, 순천 부사와 조양진 첨절제사와 각 포(浦)의 만호로 하여금 군인을 요량하여 거느리고 잡되, 그 중에 먼저 창질을 하거나 먼저 쏘아서 잡은 자가 있거든 마리수를 계산하여 벼슬을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곳은 산지도 아닌 평지에 한반도 남쪽 끝자락입니다.
무너미 땅에 천방(하천을 막아 물을 끌어대기 위한 수리시설)을 만들어 논밭으로 개간하고 관개시설을 설치하는 사례를 고대사회에서도 찾을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많지 않았다. 무너미가 본격적으로 개간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건국 이후였고, 세종과 문종대에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15세기 중엽 편찬된 [경국대전]에서 천방은 아직 수리시설 관리를 담당하는 제언사의 업무영역에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무너미 경작지와 이곳에 설치된 천방이 많지 않았다. 중략. 16세기가 되면 천방이 수령과 백성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대중적인 장소로 새롭게 등장했으며, 수려의 책임 아래 백성들이 천방을 이용할수 있게 되었다.

즉, 16세기가 되도록 (임진왜란 직전) 평지의 드넓은 옥토는 아직 본격개발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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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 천방에서 화전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천방과 화전에 대해 논의한 기록을 통계적으로 정리한 표는 15~16세기 천방중심의 농업개발이 17세기 이후 화전중심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준다. 중략. 16세기까지 천방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넓은 무너미땅이 경작지로 바뀌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산지가 많은 지역의 경우 화전개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평전이 적고, 산위나 중턱에 자리잡은 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중략. 전국의 산림지대에서 화전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양란을 거치면서 약화된 국가의 통제력은 중앙의 권세가, 지방의 요호(부호)와 부민층(부유한 백성)을 '경국대전'에서 금지대상으로 삼았던 산허리 이상의 땅으로 이끌었다. 중략.

즉, 평지의 무너미 옥토개발이 16세기이후 본격화되면서 더 넓은 경작지개발을 위해 7할 이상이 산림인 국토특성상 '화전(불로 나무를 태워 경작지를 개발하는 방식)'이 17세기부터 활성화, 전국의 산이 태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의 짐승이 들끓던 굵은 몸통의 활엽수림이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점은 이 화전이 시작된 17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 (1600년대)가 한반도에도 소빙하기가 찾아온 시점이지요. 활엽수가 침엽수림으로 교체되고, 중층건축이 사라지고 온돌난방이 전면화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런 소빙기 기록은 실록의 1655년 봄과, 1659년 봄에는 동해가 얼어 붙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효종 6년 을미(1655) 3월 3일(무자)
강원도 강릉(江陵)ㆍ양양(襄陽)ㆍ삼척(三陟)에서 바닷물이 사흘 동안 얼어,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17세기 중엽 하멜표류기를 보면 전남지역에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산간에 있는 사찰에 갔을 때 어찌나 눈이 많이 왔던지 집과 나무가 다 파묻혀 사람들이 눈 속에 굴을 뚫고 이 집에서 저집으로 다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1662년
바로 이 혹독한 추위가 반복되던 시기 조선인들은 숲을 태우는 화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화전이 얼마나 극심하게 산림을 태워나가는지 다음의 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양란이후 진황지를 재개간하고 양안을 복구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한 결과 17세기 중엽이후에는 산간지역이나 심지어 해택 (썰물때 드러나는 갯벌)에 이르기까지 '1무의 한광지도 없다'고 할 정도로 전국의 토지가 개간, 확장되었다.  중략. 화전은 17세기 조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폐단"으로 규정되었다. 화전의 심각성은 현종 4년 (1663년) 무렵 헌납 이민서(1633~1688년)의 지적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화전의 폐단이 끝이 없고, 화전이 없는 곳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높은 산에 화전을 만들며 큰 숲을 멋대로 불질러 태워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수백년 된 숲이 2~3년의 농사를 위해 한꺼번에 불태워지고 있었고, 이는 국가적 재난이었다.

안동과 예안 일원의 사례를 살펴보자. 소백산맥 아래에서 산의 구릉처럼 이어지는 구릉성 산자락에는 실개천이 흘렀고, 사족들은 이를 농경과 생활의 자원으로 이용했다. 냇가를 중심으로 논과 밭의 개간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족세가 크게 확장된 안동과 예안 일원의 사족들은 일가의 힘을 모아 산지에서 화전을 개발했다. 그것이 본격화된 시기가 17세기였다. [영가지]에는 안동의 풍산현의 니금곡촌, 월동촌, 적지촌등을 화전민 촌락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는데, 이들 마을에는 "산의 백성들이 살고있다"라고 했다. 중략. 
19세기 핀란드 화전민 모습 (싹 다 태웁니다)

김효우가 정착한 예안의 한곡 역시 화전민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선성지] 한곡사적에는 김효우가 한곡에 정착하는 과정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이 마을은 예부터 전하기를 초목이 숲을 이루어 단지 화전민 한 집만이 살고 있었으나 김효우가 대대로 사천현에 살면서 본 현의 향임으로 상리의 장점이 있는 곳을 왕래하면서 이 마을을 두루 살펴보니 땅은 비옥하고 샘물은 맛이 좋아 농사를 지을 수도 마실 수도 있었다. 드디어 이주하기로 결정하고 비로소 이곳에 집을 지었다. 네 아들중 계조와 승조의 자손들이 많이 불어서 시내 좌우로 퍼져 살았다." (주: 이 모습은 마치 서부개척이나 홋카이도개척민의 일대기를 보는 느낌이지요)

애초에 화전민이 거주하던 곳을 중심으로 '시내좌우'라는 표현에서 보이듯 천방의 시설을 통해 관개가능한 냇가에 퍼져 살게 된다. 그러나 16세기 까지 천방시설이 가능한 무너미개간이 마무리되어가면서 화전은 점차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 이귀 (1557~1633년)는 1567년 안동지방을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화전이 이뤄지는 상황을 관찰한 바 있다.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다. 촌 늙은이도 따라와서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가 어느 곳의 어느 산이라고 한다. ...촌사람들이 산의 나무를 모두 잘라 화전을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곳에서 얻은 조가 먹거리로 충분하다고 한다."

즉 안동일원의 커다란 산을 바라보는 중에 산의 곳곳에서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화전주변에 발달한 촌락은 이전의 촌락과 경관이 달랐다. 16세기 후반 생성되기 시작한 화전의 가용공간은 배산임수를 특징으로 하는 과거의 집촌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화전지대에서 사람들은 산 중턱에 집을 마련, 사는 집과 집은 서로 흩어져 있었다. 밭(화전)은 산허리에 띠를 이루어 산재했다. 
조선말기 화전민 모습을 포착한 사진 (이분들이 사는 곳은...)
주변이 이렇게 됩니다 (역시 조선말기 사진)

17~18세기 개발된 하삼도의 화전은 숙전으로 전환되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는 대부분 등기부와 지적도에 기재되었다. 17세기 이래 화전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역은 숙전화의 과정을 거쳤는데,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개발된 화전 역시 점차 하삼도와 같이 숙전화의 경로를 밟았다. 

다음은 18세기 대표화가인 김홍도가 1788년(영조12년) 9월에  오대산과 금강산을 직접 유람하고 남긴 “금강사군첩”중 월정사 부분입니다. 현재는 나무가 빽빽한 오대산과는 사뭇 다른 휑한 민둥산이 보이지요 (물론 이 그림에서 흰 부분은 회화기법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강원도 깊은 오대산까지 화전이 일상화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18세기초 (즉 김홍도시대)가 되면 오대산의 경우 사고(史庫)가 있던 깊은 골짜기 까지 화전이 침범합니다. 조금 후에 김동진박사의 글에도 등장합니다.
1788년 오대산 월정사

다음으로 '숲의 수종변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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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천택, 숲의 변화

14세기 성립되어, 15~19세기 사회를 이끌어간 조선시대에는 산림천택중 많은 면적이 가용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고려시대 한반도의 대부분은 활엽수 중심의 원시림이었다. 울창한 소나무는 개경주변의 몇몇고을과 바닷가 지역에만 많았다. 고려말 전시과 제도가 과전법으로 개편되면서 시지의 절급이 혁파됨에 따라 산림은 민간에 널리 개방되었고 산림의 이용제한은 최소화되었다. 

이는 한반도 산림천택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과전법이 시행된 14세기말 이래 한반도의 숲과 산림천택은 급속하게 농경지와 시초 채취지로 전환되었다. 16세기에 입안절수로 개발된 산림천택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확립되면서 숲의 개발은 더욱 촉진되었다. 

숲의 나무, 참나무에서 소나무로

임목축적에서 확인되는 인간의 간섭은 한반도의 숲을 구성하는 나무의 종류도 바꿨다. 원시상태의 한반도 숲에는 참나무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한 활엽수가 가장 많았지만, 인구가 늘어나 숲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의 거주지 주변에는 점차 소나무 숲이 늘어갔다. 15~19세기는 그 결정적 시기였다. 

이광희 등의 연구 (2010)는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연구결과는 현미경으로 살펴 나무의 종류를 구분해서 수치화한 그래프다. 이를 보면 선사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던 참나무는 이후 사용빈도가 9세기 이후 사용빈도가 급격히 감소했고, 선사시대에 가장 적게 사용하던 소나무는 고려시대 이래 건축재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늘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독일의 참나무 원시림

조선이 건국되고 발전하던 15~17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에서도 건축재 가운데 침엽수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조응하여 더 많은 산림천택이 농지로 개간되었으며, 농경지 주변에는 새로운 촌락이 생겼다. 촌락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더 넓은 숲에 접근하여 이를 훼손했다. 숲에서 가축을 기르거나 먹이를 채취하고, 땔감을 베고, 거름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숲의 토양을 비옥하는 많은 유기물이 숲 밖으로 이동했다. 이는 우거진 숲을 비우고, 숲의 토양을 척박하게 바꾸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소나무가 자연발아하여 마을 주변에 소나무를 단일 수종으로 하는 숲이 만들어지는 조건이 되었다.

마을 주변에 있던 활엽수림이 사람에 의해 훼손되는 만큼 소나무 숲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우선 건축재로 썼다. 천방과 화전의 개발로 표상되는 15세기 이래의 대 개간은 18~20세기 초에 사용된 건축재가 대부분 소나무 중심의 침엽수로, 활엽수는 특수한 부분에 간헐적으로 쓰이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건축물에 쓰인 수종변화 (이광희 등, 2010)

이 사실은 '소빙기 기후변화'만으로 침엽수가 득세하게 된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더 '인공적인' 화전때문에 활엽수가 태워지고 침엽수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근처로 유입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보통 침엽수가 더 황폐한 땅에서 잘 자라납니다. 우리 전통건축의 목재는 이렇게 활엽수에서 침엽수로 바뀌어 간 것입니다. 수종의 변화는 단지 건축의 모양 (예를 들어 직선에서 곡선위주)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규모에서도 차이를 가져옵니다. 다음의 예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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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등, 원시림의 바로미터

대부등은 조선시대 건축용 목재 중 가장 큰 것으로 매우 굵은 아름드리나무 또는 그런 나무로 만든 목재를 가리킨다 (최소 200~200년 수령). 조선이 건국되고 발전하던 15~17세기에는 고려시대정도로 소나무 건축재 (40~73%)가 사용되었다. 참나무 (14%)와 느티나무 (9%)는 고려시대에 비해 사용량이 크게 줄었다. 18~2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건축재의 대부분이 소나무(89~92%)로 충당되었으며, 참나무와 전나무가 나머지 대부분을 담당했다. 18~19세기 목재사용에서 특징적인 것이 전나무다. 15~17세기에 겨우 2%가량이던 전나무의 사용량이 이 시기에는 5%가량으로 늘었다. 건축물 목재에 대한 최근의 분석결과 전나무의 주된 쓰임새는 이전시기에 느티나무나 소나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부등이었다. 더 이상 느티나무와 소나무 숲에서 큰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등은 건물의 격을 결정하는 목재였기 때문에 적어도 200~300년가량 자란 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원시림과 유사한 것으로, 대부등의 크기는 건축을 축조할 당대 원시림의 상태를 반영한다. 그림 3-4는 현존하는 32종의 [영건도감의궤]에서 17~19세기 궁궐 공사에 상요된 대부등의 크기와 공급지의 변화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대부등에 사용한 목재의 크기는 나무 지름의 크기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의궤를 보면 대부등의 크기가 17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점점 가늘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에 보수된 영년전의 경우 대부등으로 만든 큰 기둥은 끝지름이 2.4척이었다. 그러나 18세기말에 지어진 팔달문과 인정전,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근정전의 기둥에는 끝지름이 1.8~1.9척의 대부등이 사용되었다. 2세기가 지나는 동안 약 22센티의 지름이 줄어든 것이다. 대부등이 각 시기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재목이라고 볼 때, 원시림이라 할 지라도 숲의 임목성장조건이 열악한 곳의 나무 혹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나무를 이른 시기에 재목으로 사용한 결과일 것이다.

즉, 건축의 주요자재 (예: 대들보)등으로 쓰이는 대부등의 굵기가 17세기후반에서 200년간 점차 크게 줄어든 것입니다. 대부등은 보통 200-300년 된 자재이므로 원시림에서 구할 수 있던 것인데, 이 규모의 축소는 원시림의 축소 (화전과 소빙기등)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필자의 의견이지만 아마도 9세기 이전 활엽수림에서 구할 수 있었던 풍부한 원시림의 거대목재는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예: 7세기 황룡사 중금당, 목탑 등).

17~19세기 조선궁궐건축의 대부등 굵기 축소경향

또한 17세기중반까지만 해도 이런 큰 기둥들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해안에서 많이 채취되지만 19세기후반에 재건된 경복궁의 주요기둥은 대부분 강원도 설악산 사면에서 벌채한 것이었다. 산림천택을 민간에 개방, 그것이 원시림을 이 시기 급격히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각 지방에 세거하던 사족들 역시 자신들의 거주지 주변에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특히 선산에 심어 영역을 표시하는 관행). 그러나 이러한 산림 이용증가는 산림토양을 척박하게 만들었다. 척박한 산림토양에서는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보다는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가 잘 자랄 수 있었다. 그 결과 15세기 이후부터 점차 지방에서 소나무 숲이 확대되었고, 소나무가 조선을 상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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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원시림이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를 살펴 봅시다. '가용산림'이란 인간이 개발, 이용하는 숲을 가리킵니다.

원시림과 가용산림

먼저 8세기의 현황은 [신라촌락문서]및 이후 자료를 통해 추산할 수 있다. 4개의 촌락 농경지는 촌역중 4.1%가량이었다. 촌역 중 농경지가 아닌 곳은 시초채취지로 사용하면서 필요할 경우 개간하여 농경지를 마련할 수 있는 땅이었다. 나머지 촌락과 촌락사이에 널리 펼쳐진 산림천택은 원시림 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중엽의 상황에 비춰보면 이러한 곳이 한반도 전역에서 90%이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고려시대 경작지와 가용산림, 그리고 사람이 간섭이 거의 없는 원시림은 어느 정도였을까? 고려 말 탁월한 성리학자였던 이제현(李齊賢, 1287~ 1367년)과 정도전의 언급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제현은 1351년 공민왕의 증귀후 국정을 총괄하며 정치개혁을 추진한다. 그는 원과의 교섭과정에서 "우리나라(고려)는 땅이 천리에 지나지 않고, 산림천수라서 쓸수 없는 땅이 7할입니다"라고 했다. '산림천수'는 대체로 원시림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신림천택, 산림수택으로도 쓰였다. 

17세기 중엽 유형원 (1622~1673년)에게 산림천택이란 "유민이 역을 피해 도망하는 곳", "재목을 기르고 금수가 자라는 곳"이었다 (반계수록(磻溪隨錄, 1670년)). 국가의 지배력이 한정적으로 미치는 산림천택은 17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히 원시림이었다. 

원문을 한번 볼까요.

반계수록
○화전만을 전업으로 하여 등록된 직업이 없는 자들에게는 한호법(閑戶法)에 의하여 부역 3일을 내게 하되 또 묘로써 계산하여 한 경이 되면 1명을 내어 부역 1일을 시킬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화전을 파먹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부역을 도피하는 곳으로 될 뿐만 아니라 산림과 천택(川澤)들은 모두 이용할 데가 있으며 또 지방에 따라 없지 못할 물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전을 파먹음으로 인하여 나무를 함부로 베어 새와 짐승들까지도 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정치라고 할 수 없다. 만일 산협 지대로서 경지가 적으며 토착민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경사지[山坂]를 파서라도 항구전이 될 수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산림을 함부로 화전으로 경작하는 것을 일체 금지할 것이다.
유형원이 쓴 또다른 저서인 [익재난고]를 보면 17세기당시까지도 이 산림천택에 늑대와 호랑이 떼가 우글거리는 모습과, 이제 막 시작된 화전민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익재난고
강릉(江陵) 길에서 박안집(朴安集)과 헤어지면서

길은 교룡과 자라의 굴을 내려다보고 / 路俯蛟鼉窟
산은 승냥이와 호랑이 떼로 이웃하였네 / 山隣豺虎群
바닷물 퍼다가 소금을 굽고 / 和泥煮白浪
화전(火田)을 일구어 구름 속에 농사짓네 / 帶燒墾蒼雲 (주: 태우는 모습을 구름으로 묘사)
이곳엔 주인 정하기 매우 어려운데 / 此地難爲主
올해는 다행히 그대를 만났구려 / 今年幸得君
유민들은 아직까지 눈물 흘리며 / 遺民尙流涕
신 장군 죽인 것을 한하는구나 / 恨殺愼將軍

승냥이는 늑대와도 여우와도 다릅니다. 이 녀석들입니다.
豺 (승냥이)

같은 시대, 남구만(南九萬, 1629~ 1711년)의 [약천집]에는 더 생생한 기록이 나옵니다.

내 일찍이 기억하건대, 설령(雪嶺)에 길을 낼 적에 수많은 큰 나무에 눈보라가 휘몰아쳐 꼭대기까지 눈이 쌓였고 호랑이와 표범과 늑대떼가 함께 나타나 떼 지어 울었다. 내가 공과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데, 길을 갈 때는 나란히 말고삐를 잡고 가고 잘 때는 연결된 막사에서 함께 묵은 것이 3일이었다. 잔약한 나로서도 또한 공에게 의지하여 용기를 내서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여기 등장하는 '설령'은 아마도 백두산에 있는 봉우리로 이곳에 길을 내려고 호랑이, 표범, 늑대떼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음시대의 정약용(丁若鏞, 1762~ 1836년)까지도 사라져가던, 하지만 남아있던 원시림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다산시문집  
호랑이 사냥 노래[獵虎行]

오월에 산이 깊고 풀숲이 우거지면 / 五月山深暗草莽
호랑이가 새끼 치고 젖을 먹여 기르는데 / 於菟穀子須湩乳
여우 토끼 다 잡아먹고 사람까지 덮치려고 / 已空狐兎行搏人
제 굴을 벗어나서 마을을 덥친 통에 / 離棄窟穴橫村塢
나뭇길도 다 끊기고 김매기도 못하고서 / 樵蘇路絶藨

산골 백성 대낮에도 방문을 굳게 닫고 / 山氓白日深閉戶
홀어미 된 자 슬피 울며 칼 꽂을 일 생각하고 / 嫠婦悲啼思剚刃
용감한 자 분이 나서 활을 당겨 잡으려 들면 / 勇夫發憤謀張弩
그 소식을 들은 현관 불쌍한 맘이 들어 / 縣官聞之心惻然
졸개들을 동원하여 범사냥을 나서란다네 / 勅發小校催獵虎
중략.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에는 귀한정보로 17세기의 원시림비율이 나옵니다.

17세기 중엽 반계수록의 기록을 참조분석하면, 가용공간이 20%, 가용산림이 35%, 원시림이 45%가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250년후인 20세기초 일제총독부가 1913년 분석한 조사를 보면 가용공간 76.7% (가용산림이 48.7%),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23.3%로 크게 줄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25년이 지난 1939년에는 헤르만 라우텐자흐가 산림통계자료를 제시했는데, 당시 한반도의 산림면적이 전국토의 73%였고, 숲이 전국토의 1/2인 33.3%라고 했다. 즉 가용공간은 산림중 숲이 사라진 40%가량과 경작지 27%, 즉 전국토의 67%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화전금지, 식림산업에도 불구 일제강점기 임목축적량은 크게 감소했고, 숲은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정리하면 8세기에서 14세기중엽까지는 원시림이 약 90%, 15세기에서 17세기 중엽까지는 약 70%, 그리고  17세기중엽에서 19세기말까지 약 45%로 갑자기 떨어집니다. 그리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인 1939년이 되면 23%가 됩니다 (주: 영화 [대호]의 시대가 이때지요. 마지막 원시림의 시대입니다).
글이 좀 길어지지만 소개하는 김에 우리에게 그간 많이 회자되지 않은 '화전'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 봅시다. 이 화전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숲의 모습과 수종을 바꾼 큰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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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화전이 된 숲

수가 무너미의 땅에 형상된 평지의 숲이라면 림(임)은 산록에 형성된 숲이었다. 17세기이후 18세기무렵, 화전의 불길은 빠른 시간에 넓은 숲을 훼손하고 화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을 정조 20년 (1796년) 순릉직장 소주중 (1753~1802년)은 "우리나라는 본래 산에 의지해 세운 나라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온 산이 모두 화전으로 일구어져 벌거숭이가 되어 전혀 산의 형세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숲의 조선이 화전개간을 통해 벌거숭이 조선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초반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윤기 (1741~1826년)는 당대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화전 火田
산골 백성 화전에서 이익을 구하니
여러 산꼭대기까지 모두 개간되고
절벽에도 남겨진 땅이 없구나.

연이은 봉우리엔 밤새 연기일고
단지 등성이 나무만 약간 남아있고
그나마 바위와 시냇물로 그치네.

밭가는 사람들 모두 넘어질까
멀리서 바라보니 오싹오싹하도다.

그렇다면 왜 화전개발이 일어났을까? 시작은 무너미의 옥토에서 일어난 화재였다. 시초채취지요 풍부한 동물의 사냥터였던 무너미의 땅에 발달했던 숲인 '수'는 15~16세기를 천방설치를 거치며 대부분 농경지로 바뀌었다. 사람의 활동이 집중된 무너미에서 일어난 불길은 당대인의 주요한 레토릭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를 넘어가며 경사진 '림(임)'으로 옮겨간다. 효종 4년 (1653년, 17세기중반) 이시방은 화전을 '산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해 이민서는 아무리 깊은 산골짜기라도 화전이 없는 곳이 없으며 "높은 산의 울창한 숲을 멋대로 불질러 태우는 바람에 100년이상 기른 것들이 한번에 소진되고, 산은 벌거숭이가 된다"고 했다. 현종 1년 1660년이 되면 "크고 작은 산골짜기 중 7~8할은 화전이 되었다"라고 보고할 정도가 된다.

18세기초에 이르러서는 강원도의 깊은 산까지 모두 개간되는 것을 넘어 오대산 사각(사고)의 금표구역까지 화전이 침범했고, 평안도 강변이나 철령, 함관령, 마운령, 마천령 등 국방의 요지마져 화전으로 산에 나무가 자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17세기말 죽령의 경우, "10여년 전에는 수목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했는데, 지금은 나무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다. 화전이란 것이 그것을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라고 했다. (승정원일기). 18세기에는 더 넓은 숲이 태워졌으며 영조 21년 (1745년) 부제학 원경하는 가우언도의 화전개간이 처음에는 산중턱까지였지만 이제는 산꼭대기까지 다 태워버렸다고 썼다. 

정조 23년 (1799년) 창원부사는 "근래 산골에 사는 백성들은 반드시 외진 곳을 찾아가서 화전농사를 지으니 산꼭대기까지 농기구가 미치고 있습니다. 산중의 수목은 한번 기르려면 거의 100년이상이 걸리는데 곳곳이 벌거숭이가 되어 모래와 돌이 쓸려내려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시기가 되면 산꼭대기까지 화전이 미친 것이다. 이를 목도한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요즘 산 중턱이상은 모두 화전으로 쓰여 큰 나무가 전혀 없는데 하물며 인삼이 있겠는가?"라면서 원시림이 소멸했음을 기정사실화했다.  
한반도 임목축적량의 변화 (김동진)


정선(鄭歚, 1676~1759년), 김홍도(金弘道, 1745년 ~ 1806년)와 신윤복(申潤福, 1758년 ~ 1814년?)은 정확히 이 시기의 화가들로 현재 한국학적 측면에서 우리의 산수나 풍류를 표현하는 대표작가들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들이 다룬 자연은 이미 그 이전 천년이상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한반도의 산림과 시내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정선의 필운대상춘에 나오는 꽃놀이모습
신윤복 꽃놀이

이제 근현대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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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남산 위에 저 소나무

20세기 한반도 야산에는 나무가 드물었고, 곳곳이 헐벗었다. 사진 3-11과 같은 황량한 산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남산위에 우뚝하니 서 있는 몇 그루안되는 소나무는 서울의 여러 마을에서 흔히 목격되는 광경이었다. 그러기에 한국인들은 애국가 2절에서 "남산위에 저 소나무"라고 부름으로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소나무처럼 우뚝하니 서 있어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일상의 경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 전국 곳곳에 나무없는 민둥산이 많았고, 그러한 산들에 간혹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기에 그 소나무들은 우뚝하게 보일 수 있었다. 
이런 산에 소나무 몇그루가 서 있으면 우뚝할만 하지요.

종종 나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이들은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부지방이 남부지방보다 침엽수가 더 많았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1943년 총독부통계는 이런 견해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침엽수의 비율은 전라남도에서 가장 높았고, 활엽수의 빈도는 평안북도에서 가장 높았다. 이는 15~19세기에 나무의 종류를 변화시킨 요인이 기후가 아닐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히려 인구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평지지역에 침엽수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산지지역에 활엽수가 많았다. 이는 인구의 분포가 산림의 나무종류를 가늠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앞서 필자가 언급한 소빙기와 수종변화라는 믿음이 꼭 진리는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오히려 '인간의 손길'때문에 활엽수에서 침엽수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결과입니다.

이런 면에서 필자가 썼던 황룡사복원(재건)시 필요한 수종은 참나무나 느티나무가 될 수 있다는 이 글과 맞닿은 연구결과입니다. 이 글은 언급되었던 이광희선생등의 2007년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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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마지막으로 2008년 [숭례문 기둥엔 왜 소나무가 쓰였을까]라는 기사중 의미깊은 구절이 있어 살펴보겠습니다.

"숭례문의 기둥과 보로 쓰인 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위층 대들보 위 기둥에 얹혀 있는 마룻보와 고주(高柱, 높은 기둥)는 조선 태조 숭례문 창건 당시의 목재였다. 화재로 불타 버린 숭례문 기둥에 쓰인 소나무는 과연 최고 목질의 나무였을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느티나무가 소나무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궁궐이나 중요한 목조건물을 지을 때 많이 쓰였다. 내구성도 느티나무가 더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실제로 경북 경산 임당동 원삼국고분이나 부산 부천동 초기 가야 고분, 신라 천마총, 고려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 16개는 모두 느티나무가 쓰였다. 

박상진 경북대 임산공학과 명예교수는 “건물의 기둥으로 소나무를 사용할 때 100년을 버틴다면 느티나무는 300년은 버틸 수 있다”며 “느티나무의 비중은 1cm³당 0.70∼0.74g으로 소나무의 0.45∼0.50g보다 커서 마찰이나 충격에 훨씬 강하다”고 설명했다. 느티나무 목재는 나뭇결이 곱고 황갈색 빛깔에 윤이 난다. 또 벌레 먹는 일이 적고 다듬기까지 좋아 고급목재로 쓰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널리 쓰였다. 중략. 간혹 마을 인근에 느티나무가 자랐지만 이런 나무는 쓸 수 없었다. 울창한 숲 속에서 자란 나무는 ‘콩나물’처럼 곧고 기다란 형태를 지닌다. 반면 열린 공간에서 자란 나무는 키가 2~3m만 자라도 가지가 사방으로 돋아나 기둥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울창한 숲 (즉 원시림의 형태나 관리된 숲)에서 자라는 목재는 곧고 길게 위로 뻗칩니다. 앞서 17세기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이런 구절처럼 말이지요. "10여년 전에는 수목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했는데,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다."

위로 죽죽 뻗는 원시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전이나 천방등으로 사라진 원시림대신 주위가 휑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는 뒤틀리고 구불구불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재로 집을 지은 조선후기의 수많은 예가 있지요. 이것을 복잡한 형이상학적 포장없이 직설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대중건축서는 필자가 아는 한 고작 2년여 전인 2015년 발간된 김동욱선생의 저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지요.

조선초기(14세기말~15세기)가 되면 농경지 확장등으로 인해 느릅나무나 느티나무가 사라지면서 이미 다른 수종은 거의 고갈되어 활용할 수 있는 대상에서 벗어났고 궁궐을 짓거나 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는 거의 소나무 일색이 되어 있었다. 그 소나무 역시 특별한 보호가 없으면 머지않아 모두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중략.

소나무 한 종류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합성재 개발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조선 후기 건물은 재료 수급측면에서 제약이 많았다. 그 결과 곧게 자라지 않아 건축용재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무를 억지로 이용해서 건물을 짓는 일도 잦았다. 자재 수습이 원활하지 않았던 영세한 불교 사원이나 민간에서 사정이 특히 나빴다. 지금도 산간의 불교 사원에 가면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살려 기둥을 세우거나 대들보를 올린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서까래는 반듯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인 집도 많다. 그나마 궁궐은 비교적 반듯한 목재들을 구해서 건물을 지은 편이지만 목재 수급이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것이 우리 건축사를 통시적으로 아우르는 한국적 미일까요? 최소 16세기이전까지의 미학이라고 통시적으로 부르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시대별 모습은 모두 다르며,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 중국과 달리 '뒤틀린 목재'를 쓰는 조선중기이후의 전통건축을 포장해서 바라보는 시점을 버리고 (자연미라든가 하는 식으로), 목재의 부족으로 일어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의미가 깊습니다. 물론 그러한 실용적이유가 선행되고 그것이 후대에 '미학'으로 승화되었을 가능성과 그 자체로서 우리 역사의 한 시대의 훌륭한 미학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고려 혹은 더 나아가 삼국시대건축에까지 무작위적으로 통용시켜 '한국건축의 미학은 항상 뒤틀리고 자연미를 살린 곡선에 있다'는 식의 주장은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이상적인 건축을 묘사한 고려변상도들을 보면 하나같이 곧바른 목재들인 것도 주목할만 합니다 (관경서분변상도 1321년).

글이 꽤 길어졌습니다. 1편부터 차분히 읽으신 분들께서는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부했던 원시림의 모습이 불과 300년전까지도 김홍도의 그림에 나오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야생의 느낌이 나는 숲이었음을 이제는 머릿속에 떠올리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회구성원이 하나하나 늘어감에 따라 그 시대를 구현하는 수많은 응용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활용된 결과물들로 인해 다시 다음세대의 사회구성원들이 더 그시대를 적확하게 표현하고 인식하는 선순환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있는 연구가 널리 쓰여 더 풍부한 우리 역사와 문화의 양태를 즐길 수 있는 21세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사족: 혹 기회가 된다면 삼국-고려-조선시대의 동물들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 저서의 내용에 근거해 글을 써 볼 계획입니다. [호랑이 형님]의 배경을 소개한 김에 눈에 띄었던 부분 하나 더.
아마도 역시 최초로 숲아래 황무지의 조선초기 원옥(圓獄)을 그려낸 모습 (호랑이 형님 중)

아래는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던 공주의 원옥(圓獄), 재래의 감옥은 원형이었습니다. 지름은 30미터이며 담의 높이는 한 길 즉 2.5~3미터, 폭은 3자 정도였습니다.
공주 공산성자락에 남아있던 조선감옥 원옥(圓獄) 1913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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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8/03/04 08:04 #

    와 길다....
    하지만 십 분 동안 숨 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그만큼 재미있네요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민가 가까히는 민둥산도 많았지만 개간되지 않은 숲도 많았겠네요
    그만큼 조선 초중기에는 정말 숲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 산림 이야기는 마치 독일의 검은숲 ( 슈바르츠발트 라던가 ) 를 연상케 합니다
  • 역사관심 2018/03/04 10:38 #

    감사합니다~. 14세기까지는 최소 70%가 원시림이니 거의 야생의 왕국이었을 것입니다. 마을에서 마을로 가려면 밤에는 절대 못가는... 그러니 소금장수등 시일내에 다녀야하는 특수직업군에 유독 귀신이나 여우에게 밤에 홀려가는 기담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Nocchi 2018/03/04 08:19 #

    http://naver.me/xlqwGun2

    별 관계 없고 약간 비과학적(?) 비문명적(?) 인 지는 몰라도
    최근에 재미있게 본 어떤 포스팅 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무를 죽이고 태웟는지 에 대한...
  • 역사관심 2018/03/04 10:38 #

    재미있는 글 소개 감사합니다. 풍악놀이와 솔방울이라!
  • 해색주 2018/03/04 09:24 #

    정말 과학적인 글이네요. 호주의 경우 원주민들의 화전 경작으로 불에 강한 유칼립투스 나무가 번성해서 코알라가 늘었다고 하더군요. 왜 조선 후기에야 화전이 늘어났을까요?
  • 역사관심 2018/03/04 10:43 #

    김동진박사의 글에 개인적으로 원전이나 아는 정보를 보탠 글일 뿐인데 과찬이십니다. 우선 이 저서에서는 15-16세기에 천방개간으로 늘릴 경작지는 한계에 이르렀고, 그것이 일단 평지의 화전으로 시작, 점차 산중턱, 그리고 꼭대기까지 세기가 지남에 따라 늘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임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 지방의 요호와 부민층을 경국대전당시 금지대상으로 삼았던 산허리이상의 땅으로 경작지의 확대를 이끌었다고 설명합니다.
  • 응가 2018/03/04 09:46 #

    정선이 오대산 월정사를 그린 그림에서 보면 산이 민둥산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냥 그림을 그렇게 그린것 아닐까요? 조선고적도보에서도 오대산 월정사 뒷산에 공터가 있긴한데 규모도 작고 오재산에는 나무가 빽빽합니다.
    남한에도 1950,60년대까지 표범이 서식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호랑이가 남아있는(?) 1960년대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한여인이 호랑이에게 홀려 신들린 무당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는 최근에 읽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https://storyfunding.kakao.com/episode/32302) 여우나 담비한테 홀린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호랑이는 처음입니다.
    이 글을 쓴 로져 셰퍼드라는 뉴질랜드인은 북한의 백두대간을 거점종주하기 위해 북한을 자주 방문했는데 다른 연재를 보시면 북한 백두대간의 현 상황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으실겁니다.
  • 역사관심 2018/03/04 10:47 #

    말씀듣고 보니 확실히 성급한 면이 있어 첨언을 달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링크글 정말 재미있네요. 거의 실제 창귀설화같은 느낌마져 듭니다. 더군다나 60년대라니... 역시 백두대간입니다.
  • 無碍子 2018/03/04 13:38 #

    조선개국시기 인구가 7백만정도에서 망국시 15백만정도, 5백년간 두배가 늘었으니 농업외 다른 산업이 없고 식량을 수입할수없는 폐쇄경제에서 주거지나 경작지가 두배로 늘어나는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8/03/06 04:38 #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그러한 숫자에는 익숙하지만, 이에 따른 '자세한 풍경과 생태의 변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거나 인식속에선 아예 없었지요. 또한 경작지나 농업의 발달등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었지만, 역으로 '숲과 야생의 사라짐'이라는 측면에서의 180도 관점전환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매우 의미깊은 연구가 아닌가 합니다.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8/03/04 20:13 #

    정말 재밌는.글이네요 확실히.산림의 변천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생각하는 계기가.되었네려
  • 역사관심 2018/03/06 04:39 #

    네 저 역시 이 책과 몇 논문으로 그간 막연하게 궁금하던 한 측면이 좀 걷히는 느낌이었습니다.
  • 바람뫼 2018/03/04 21:29 #

    저도 며칠 전 우연하게도 "소나무는 저렇게 구불구불한데 궁궐이나 절의 길쭉길쭉한 기둥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랍니다. 정답은 소나무가 아니었던 거군요...
  • 함부르거 2018/03/06 01:11 #

    소나무도 자라는 장소가 빽빽한 숲 속이면 곧게 자랍니다. 정선, 영월 같은 강원도 산간에 가 보시면 그런 소나무를 아주 많이 보실 수 있죠.
  • 역사관심 2018/03/06 04:47 #

    네 함부르거님의 말씀처럼 그리고 본문에 나오듯 빽빽하게 자라는 원시림자체가 사라지면서 성근 공간안에 혹은 해안가에 자라던 소나무들이 그런 형태가 된 것 같습니다. 정보를 좀 더 드리자면

    "지조와 절개의 상징답게 소나무는 원래 곧게 자라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주변의 구불구불한 소나무는 자연환경에 의해 그 성질이 인위적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소나무가 곧게 자라는 이유는 다름 아닌 호르몬 때문이다.

    식물이 자라는 곳은 생장점이고 이는 주로 가지의 끝이나 뿌리의 끝에 분포돼 있다. 생장점에는 길이 생장을 촉진하는 옥신(Auxin)이란 호르몬이 있는데, 소나무와 같은 겉씨식물의 옥신은 정아(끝눈)에서 처음 만들어져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옥신의 신호를 가장 먼저 받는 이 정아가 수직성장을 주도하는 것이다. 이때 옥신은 정아 양 옆에 있는 눈인 측아의 생장을 저지해 중심줄기가 더욱 높이 자랄 수 있도록 돕는다.출처 : http://www.sedaily.com/NewsView/1OHCL2JHJB/GD05"

    이렇기 때문에 원시림형태의 빽빽한 환경에서는 위로위로 햇빛을 찾아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는 활엽수도 마찬가지인데, 따라서 우리에게서 거대하고 곧게 자라는 나무들이 많이 사라진 것은 전란과 화전등으로 원시림비율이 18세기정도가 되면 크게 줄면서, 목재들이 작아지고 뒤틀린 것이 많아진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춥고 건조한 황폐한 곳에서는 소나무같은 침엽수가 생장하기 더 쉬우므로 느티-참나무 계열의 우리 원래 전통활엽수들은 많이 사라진 것이지요. 거기에 15세기중반이후부터 갑자기 추워진 소빙기를 맞으면서 더욱더 그런 경향이 생기고...

    요즘은 온난화가 되면서 오히려 참나무계열이 다시 소나무를 침식해간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우리는 다시 삼국시대-고려초의 숲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함부르거 2018/03/06 01:30 #

    역시 어딜 가나 자연 최대의 적은 인간입니다. 화전이 그렇게 대규모로 산림을 파괴했을 지는 생각 못했네요.

    일본도 에도 막부 이전엔 대규모 삼림파괴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막부의 강력한 규제로 원시림이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를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숲이 없어지는 문제를 인식하고 막아보려 했지만 일본 쪽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보는데, 체제의 차이가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봉건제의 일본은 몇몇 가문에게 숲을 관리하는 권한을 대대로 줘서 사유지처럼 관리하게 했으니 말이죠.
  • 역사관심 2018/03/06 04:50 #

    저 역시 화전민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수적인 존재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번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대로 확실히 봉건제가 산림관리에는 더 효과적이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란이후 중앙통제가 약화되면서 화전급등이 맞물리니...
  • M i d s e n 2018/03/06 13:42 #

    일본에서는 마을단위로 나무를 벨 수 있는 구역을 정해놓고 그 밖에서 나무를 베면 목을 벳다더군요
    그러니 마을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나무를 심었고 지금 일본은 산마다 곧은 나무들이 가득차서 앞이 안보일 정도죠
  • M i d s e n 2018/03/06 13:43 #

    사실 몇십년 전만해도 온나라가 나무심느라 바빴뎃죠
    통일신라시대 경주 주변에는 집짓는데 곧은 나무를 다갖다써서 몇십리에 걸쳐 곧은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고요
  • 역사관심 2018/03/06 15:30 #

    맞습니다. 식목일이 큰 행사였던게 불과 얼마전...
    윗글과 이글의 흥미로운 정보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 2018/03/12 15:2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3/14 04:0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8/03/14 14:1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3/14 16:1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남중생 2018/05/18 21:38 #

    무너미는 "범람지"의 순우리말이군요. 문명 게임에서 범람지에 농사를 지으면 식량이 많이 생산되죠^^
    그나저나 "남산 위의 저 소나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김홍도 등의 그림은 과연 저걸 민둥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사진과 비교하니까 확실히 알겠네요.
  • 역사관심 2018/06/07 04:37 #

    맞습니다 범람지. 저 역시 저 구절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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