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만큼 알 수도 있어야 한다. 역사전통마

'한국적 미'라고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우리 미학계, 혹은 미술사학계의 초창기거두이신 고유섭, 김원용, 최순우선생들의 당시로서의 정리를 보면 그 정의들이 21세기 한국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학자 고유섭(高裕燮, 1905∼1944년)과 미술사학자 김원용 (金元龍,1922~1993년), 그리고 최순우(1916~1984년)선생 모두 한국미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자연주의', ‘무관심’, ‘무기교의 기교’ 또는 ‘무계획의 계획’
'은근미', '순리미', '담조미', '백색미', '추상미', '익살미', 또는 '곡선미'

아마도 매우 친숙한 개념들일 겁니다. 이 개념들은 위의 선각들이 30-40년대에 주로 정립한 것들로, 특히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아있던 조선후기위주의 건축, 공예, 회화등에 대해 일본학자들의 왜곡된 폄훼에 맞서 정립한 감이 강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개념들은 당대 부족한 사료를 근거로 '화려하고 정교한' 중국과 일본과는 '달라야 했던'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한 시대의 우리 선각자들의 고민과 피땀어린 노력이 담겨 있는 결과물들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들은 우리의 수천년 역사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을까요?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분명해집니다. '자연주의', '무기교, '은근미', '담조미', '추상미', '여백미' 등은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 모두 구체적 실체를 치밀하게 다루는 것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담론에 가깝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전 글들에서 의견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위의 선각자들의 주제들 중 '무관심', '무기교', '무계획', '은근미', '담조미', '백색미'에 대해서는 이와 다른 삼국, 고려시대의 미학을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시리즈]와 더불어 다음의 글들에서 의견을 낸 바 있으며,


'자연주의', '무계획', '추상미'에 대해서는 극히 최근의 연구인 작년 조경사비판과 함께 이런 글을 쓴 바 있습니다.


한국미학의 선각자들께서 이룬 성과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특히 일제시대에 식민지 당위론적인 미학에 맞서 당당히 제자리를 잡은 조선후기적 미학은 이 분들의 덕택에 존재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70년대부터 대중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고려불화]로 상징되는 조선후기 이전의 문화재와 건축연구 (건축의 경우 극히 최근에서야 삼국-고려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전기조차 조금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실정)의 축적을 '통시적'으로 담아내기에는 매우 부족한 담론으로 보입니다. 특정시대 (17세기이후 조선후기)의 미학의 발전에 그치지 않고, 그 프레임으로 그 전대의 모든 것을 바라보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도 하고 있는 내부동력이 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담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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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지은원 [오백나한도]중

그도 그럴 것이 언급한 선각자들의 전성기인 30-40년대에는 아직 고려불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요즘과 달리 해외박물관의 우리문화재에 대한 접근은 언감생심에 그런 개념조차 잡혀있지 못했을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국내에 흔히 볼 수 있고 남아있던' 특정시기와 특정종류의 유물만을 가지고 주로 연구할 수 밖에 없었지요.

예를 들어 고유섭 선생은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학연구실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이때부터 중국, 일본, 인도와 구별되는 한국 특유의 미의 본질을 찾고자 연구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당시 고유섭선생의 미술사연구의 주자료이자 촛점은 바로 일본, 중국등의 목탑과 달리 당시 산재해 있던 전국의 '석탑들'이었습니다 (특히 30년대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시절).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무기교의 기교'라는 현 한국미의 기본틀이 되는 논리를 성립해내십니다. 이 무기교는 '비균제성(非均齊性)'이라고도 하는데 비균제란 즉 '가지런하고 정돈되지 않은 어지러운'이란 뜻입니다. 즉, '무논리', '무질서', '무기교'에 가까운 상태, 이를 극대화하면 '자연미'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인간이 별로 터치않은 자연그대로의 상태.

이 비균제성을 만든 사람이 조요한 (1926~2002년) 선생으로 고유섭의 '‘무기교의 기교’와, 김원용의 ‘자연주의’를 ‘자연순응성’으로 말을 바꾸어 이 두 개의 축으로 한국미를 정리합니다. 그것이 이 분의 한국미의 탐구에 대한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결코 순응할 수 없는 논리를 펴시죠. 조요한선생은 한국예술에 깃들어 있는 ‘비균제성’과 ‘자연순응성’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를 추구하려고 하는데, 한민족의 조상들이 서북아시아에서 출발하여 동북아시아로 옮겨 오고 다시 한반도에 남하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체질 속에 스며든 무교적(巫敎的)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즉, 단군시대부터 계속 무기교, 자연미, 질박미등의 미학을 우리 선조들은 체질적으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이미 위의 많은 글에서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학자로서의 사명감, 정체성이랄까 거꾸로 한계랄까, 특히 한국미의 본질, 한국예술의 특성을 따지면서 일본, 중국 등의 그것과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이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려던 20세기초반의 각국의 문화계의 흐름의 일부로, 현재도 이 흐름에 (특히 동아시아는) 함몰된 감이 강합니다. 

조금이라도 중국 혹은 일본등과 비슷한 색감의 건축이나 회화가 나오면 그것을 부끄럽거나 무관심의 대상으로 두는 경향,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문화교류를 고대부터 해온 삼국의 많은 문화적 테제가 비슷한 것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며, 주체성이 없는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풍부한 문화적 양태들을 생산해온 '협력관계'로 보아야 고대-중세의 문화권을 우리 스스로 읽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스스로 팔자르기'로 묘사, 역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그럼, 21세기에서도 18년이나 흐른 현재는 이러한 20세기초의 조선후기식 관념담론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의견들이 주류일까요? 2009년 [고미술의 유혹]이란 저서를 낸 김치호 역시 이러한 논의를 현대에 이어가는 수많은 학자들 중 한명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볼까요?

"......고유섭의 논의를 따르면, 그러한 성격들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미술의 핵심적 조형원리는 '무기교적 기교(技巧)' '무계획적 계획(計劃)'이다. 기교와 계획의 독자성, 엄격함, 특수성이 자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치한 맛, 정돈된 맛이 부족하나, 질박 순후한 맛과 순진한 맛이 뛰어나며 구수한 맛과 생동감이 표출된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자연에 순응하는 심리인 무욕과 무관심을 바탕으로 한다. 손가는 대로의 제작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늘 우리 미술이 일본 미술의 인공미나 중국 미술의 과장미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자유로움과 여유가 그 본질임을 생각하고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러한 관념들이 21세기 현재에도 그대로 변함없는 주류담론임을 어렵지 않게 여러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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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학자들의 현재 큰 스승이자 20세기말-21세기초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미술사학자는 역시 '유홍준 선생'이십니다. 유홍준 선생은 선각자중 한 분인 최순우 선생의 후예임을 항상 밝히시고 있지요. 예를 들어 다음의 글.

이 책은 그런 최순우 선생이 생전에 집필한 전집 중에서 누가 읽어도 이해되기 쉬운 부분만을 따로 편집해서 만든 책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한국미에 대한 아름다움 숨어 있으며,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가슴 설렘이 묻어 있다. 서구적인 시각으로 우리 문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문화를 보는 혜안이 담겨 있는 책인 것이다.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체험학습 중의 하나는 아무래도 고리타분한 박물관 기행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박물관에 가면 볼 게 별로 없다. 거기에는 이집트의 피리미드나 스핑크스 같은 웅장한 것도 없고,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나 풍만한 여신상도 없다. 진시황의 병마용갱이나 자금성 같은 대륙적 풍모의 문화재도 없다. 

오로지 있는 것이라곤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흙으로 빚은 토기, 고려 청자, 조선 백자, 그리고 그 흔하디 흔한 불교 관련 문화재 몇 점 뿐.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의 서예와 회화가 대미를 장식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볼 거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왜 우리는 중국이나 서양처럼 폼 나는 문화재가 별로 없을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고유의 문화재야말로 가장 품위 있고, 폼 나고, 아름다운 문화재임을. 그동안 우리는 눈이 멀었다. 일본의 식민지와 남북 분단이라는 비운의 역사를 겪으면서 우리 문화를 똑바로 보는 눈을 잃어 버렸다. 우리의 문화재가 갖는 그 독특한 여백의 미와 조형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저 초라하고 재미없고 시시한 문화재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최순우 선생은 바로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40년 간 우리 문화재를 완성해 온 선생은 비꾸러진 우리의 문화재 관을 바꾸기로 결심하셨다. 그래서 필생에 걸쳐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문화재의 독특한 순백미를 문자로 표현하신 것이다. 서문에 보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문화유산 답사라는 하나의 ‘문화’를 창출해 낸 유홍준 교수의 의미 있는 멘트가 하나 나온다.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 그게 바로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뜨는 좋은 방법이라며 최순우 선생에 대한 존경의 염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한국미술의 특질과 자존심에 대하여 주장한 바의 대부분은 선생의 안목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기사를 보면 유홍준 선생의 유명한 테제인 다음의 문구가 최순우선생을 비롯한 이러한 선각자들의 물줄기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유홍준 선생의 필생의 작업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이러한 선각들의 학풍을 담아, 특히 우리 사회의 수많은 대중들에게 다음의 유명한 테제를 명확히 각인시켰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책에서 인용되는 테제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축수업 (김진애, 2012)]를 볼까요?


과연 우리 문화는 '아는 만큼 보여야만' 할까요? 소박하고 검박해 보이는데, 그래서 그냥 가서 보면 솔직히 와닿지 않는데, 알아야만 보인다가 우리문화의 전부일까요?

이에 대해 필자는 감히 다음의 이견을 수년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사전공부 없이도 우선은 '보이는 만큼 느껴져야'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미뿐 아니라 그대로 보아서 화려하고 매력적인 가시적인 미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발생학적으로는 '눈'이 먼저라는 것이 필자의 철학입니다(이에 대해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따로 이론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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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장인수준과 고려불화, 그리고 고려미인도

오늘은 위에서 정리한 졸견들을 보강하는 몇가지 '고려시대' 문헌과 회화자료를 추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하고 상세히 문물을 기록한 서긍(徐兢, 1091~ 1153년)은 [고려봉사선화도]에서 당대 고려장인의 수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공기(工技)
高麗。工技至巧。其絶藝。悉歸于公。如幞頭所,將作監。乃其所也。常服白紵袍皁巾。唯執役趨事。則官給紫袍。亦聞契丹降虜數萬人。其工伎十有一,擇其精巧者。留於王府。比年器服益工。第浮僞頗多。不復前日純質耳。

고려는 장인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幞頭所)ㆍ장작감(將作監)이 그곳이다. 이들의 상복(常服)은 흰 모시 도포를 입고 검은 건을 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관에서 자주색 도포[紫袍]를 내린다. 

12세기초 고려의 문화를 담당한 장인의 수준을 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高麗。工技至巧。
고려는 장인의 기술이 지극히 공교하다.
 
최근 들어 속속 발굴되는 고려시대의 문화수준은 이런 표현에 도달해 있습니다. 아래는 리움박물관에 소장중인 고려나전칠기입니다.
고려나전칠기 (리움박물관)

이 나전칠기를 소개한 기사를 발췌해 볼까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영국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보스턴 박물관, 암스테르담 박물관 소장품들도 모두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구입해간 것이다. 일본은 외교적으로도 구해갔지만 고려 말 왜구들이 약탈해 온 것을 ‘사중(寺中)의 보물’로 간직했기 때문에 많이 전하는 것이다.

고려 나전칠기는 정말로 섬세하여 무늬로 넣은 낱낱 자개 편이 1㎝도 되지 않아 손가락으로 잡을 수 없다. 꽃 한 송이를 위해서는 화심 1개, 화판 8개, 넝쿨손 10여개 등 20개의 작은 자개가 필요로 했으니 상자하나에 4000 내지 8000개의 자개 편이 들어갔다."

서긍(徐兢, 1091~ 1153년) 역시 고려의 나전수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토산(土産)
器用漆作。不甚工。而螺鈿之工。細密可貴
그릇에 옷(漆) 칠하는 일은 아주 잘하지는 못하고, 나전(螺鈿)의 세공은 세밀해서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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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6년 역사스페셜에서 소개된 귀한 영상으로, 당시 일본의 사가현립박물관에 소장중이던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와 교토 지은원의 '오백나한도'를 중심으로 고려불화의 정교함과 극세밀함을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10분이니 잠깐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정교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진행자 고두심씨의 멘트는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그다지 바뀌지 않은 '고려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재진행형인 무관심 수준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 것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고려불화는 불과 40년까지도 학자들사이에서도 중국불화로 잘못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다른 분야에 비해 아직 연구가 뒤쳐져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인들이 더 잘 알고 있고 그 가치도 우리들보다 외국인들에게서 더 인정받고 있는 고려불화. 그런 현실이 어쩐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영상 마지막 멘트)

고려불화의 비밀 (2006년)
 

영상을 조금 캡쳐해볼까요. 일본학자의 설명입니다. 여기 어디에 '무질서', '무기교', '질박함', '자연미', 그리고 비균제성(非均齊性, 가지런하고 정돈되지 않은 어지러운) 미학이 있을까요?
'장식성'은 오히려 당시 우리 미술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회화'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형이상학적 담론에 가까운 '공간론'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의 현재 전통건축학계 역시, 조선중기이후의 건축담론 프레임을 고려-삼국시대 건축에 적용시켜선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은 원정수 교수의 98년 선구적 논문 [고려시대 고미술품에 표현된 건축요소에 관한 연구]의 결론 부분입니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전기까지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미학이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한반도 곳곳에 삼국-고려시대의 건축들과 회화가 그대로 남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양태들은 당시까지도 강한 힘을 발휘한 불교와 어우려져 많은 부분, 고려에서 이어지는 미학을 간직했을 것입니다. 당장 어제 소개한 글에 나오는 조선 전기의 궁궐모습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국적'으로 보일 지 모릅니다. 이 글은 명나라 사신인 동월(董越)이 1488년 조선 한양에 와서 지은 글입니다.

궁실을 지은 제도는 / 宮室之制
의 제도와 같네 / 與華亦同
바른 것은 모두가 붉은 칠이고 / 其塗皆丹
덮은 것은 모두가 동기와네 / 其覆皆

고려시대의 '장식미'와 '극세미'는 현재의 한국미술사학계 혹은 더 나아가 건축을 포함하는 한국학계의 주류테제 혹은 프레임으로는 담아 낼 수 없기에 그에 걸맞는 시대별 미학담론을 분류, 정리, 재건해 내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그때 다음과 같은 문제도 해결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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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되찾는 통시적 균형- 고려시대의 화려미도 우리의 미학: 이제 걸음마를 뗀 통시적 미학담론

지금부터 각각 5, 3년전인 2012, 2015년, 필자의 이목을 잡아 끈 매우 좋은 전시회들이 열렸었습니다. 각각 기사에서 발췌해 보겠습니다.


한국미(美)를 소박한 여백의 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6월 2일까지 열리는 고미술 기획전 ‘금은보화(金銀寶貨)- 한국 전통공예의 미’ 전시는 이런 편견을 버리라고 한다.

국보 9점과 보물 14점을 비롯해 금은보석으로 만든 전통 공예품 65점은 “우아하고 화려한 금속공예 또한 한국미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외치는 듯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미국 보스턴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등 국내외 주요 박물관 소장품을 빌려왔다. 

한국미술 명품들로 구성된 ‘금은보화’전은 한국미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한국미는 소박함과 잔잔함, 여백의 미가 강조돼왔지만 이번 전시품들은 화려함, 정교함,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금·은·옥·수정·호박 등 진귀한 재료와 고도의 세공 능력, 수준 높은 미적감각이 어우러진 것들이다.

전시회에는 기원전 1세기~대한제국기의 전통공예 명품 65점이 나온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국보 9점, 보물 14점도 포함됐다. 신라와 가야의 금관, 불상·사리함 등 불교조각, 금을 입힌 고려청자와 나전 거울, 각종 장신구는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은제도금 주자 및 승반’(고려·12세기)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은제주자로 기법·미적으로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소장, 국내에선 쉽게 보기 힘든 작품이다. 봉황과 연꽃이 두드러지는 몸체 전반에 대나무 줄기와 죽순, 연꽃, 각종 꽃 문양이 기막힐 정도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황금빛과 푸른빛 곡옥이 찬란한 금관은 ‘서봉총 금관’(신라·5세기·보물 339호)과 ‘가야 금관’(5~6세기·국보 138호)이 나왔다. 불교미술은 통일신라시대 ‘금제여래입상’(국보 80호)과 ‘금동사리외함’(보물 1359호), 고려시대 ‘수종사의 사리기·9층탑·사리병 등 사리장엄구’(보물 259호) 등이 조형성과 더불어 종교 미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중략. 기사링크

보시다시피 필자가 몇년에 걸쳐 주장하는 바를 이 기사는 이미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2015년의 리움박물관의 [세밀가귀전]에 대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글을 쓴 이가 바로 '유홍준'선생입니다. 이 기사를 읽고 당시 필자가 선생님의 유연함과 개방성을 존경할 만한 것이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도 합니다. 발췌해 봅니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미를 검박한 아름다움에서 많이 찾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건대 그것은 한국 미의 여러 특질 중 조선 선비 문화의 소산이었을 뿐이다. 우리 미술사에는 고구려의 강인함, 백제의 우아함, 신라의 화려함, 그리고 고려의 세밀가귀도 있다. 이제 그런 넓은 시각에서 보자는 것이 이 전시회의 큰 뜻이다.

나(유홍준)는 두 차례 이 전시회를 보면서 아마도 내가 이제까지 본 한국 미술 특별전 중에서 가장 화려한 전시회가 아니었나 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실은 주류담론에서 비껴 있었을 뿐 (특히 해외문화재라는 접근성의 한계로 인해), 이런 아쉬움이랄까 목마름은 78년 고려불화가 일본에서 소개되면서 한국사회에 알려지자 마자 피력된 바 있습니다. 다음은 1978년의 유명한 야마토 분카칸에서 열린 고려불화 52점 특별전시회에 대한 1978년 12월 1일 경향신문의 기사입니다.

단편적이자 직선적 발전사관을 벗어날 때가 된 것이라는 점을 이미 정확히 40년전인 1978년의 신문기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채색면에서 고려가 조선조보다 훨씬 앞서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분야는 어떤 시대가 더 뛰어났고 또 다른 분야는 다른 시대가 더 뛰어났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미학도 분야별로 시대별로 발전되고 알려져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미인도는 18세기후반의 신윤복의 이 작품입니다. 조선후기 특유의 담백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그윽한 명작중의 명작이지요.
하지만, 2015년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도 주목받지도 못한 큰 발견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려미인도'입니다.
2015년에 발견된 고려미인도를 소개한 유일한 매체는 교수들만이 주로 읽는 한정된 매체인 교수신문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사실 앞서 소개한 우리 미학의 선각자중 한분인 최순우 선생이 중앙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이던 1993년 최초로 소개된 것으로, 모두 일본에 존재하고 있던 중, 2015년 두 점이 국내에 입수되었고, 마침내 올해 2018년 1월 사진 3번의 연지미인도가 돌아옴으로써 세 점 모두 국내에 반환되었습니다 (Akatsuki님 제보). 이중 마지막 3번은 조선전기그림이라는 최근 설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에겐 생소한 머리모양과 화려한 채색을 한 의복이 보이지요. 확대한 그림을 보면 얼마나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이 의복에 새겨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려미인도 중 확대 (13, 14세기추정)

이런 뉴스가 그다지 화제도 되지 않고, 매체에도 소개되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만약 김홍도의 밑스케치가 한 장 발견되었다면 이랬을까요?

이런 에피소드가 바로 필자가 항시 주장하는 '조선후기식 프레임에 갇힌 이데올로기적 한국학'의 문제점인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많은 필자의 글중 '스스로의 팔자르기'현상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대표적으로 "심각한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오래된 국가"라는 것이 주는 갈증과 의문이 블로그의 중심테제이자 시작하게 된 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제기와 개선이 2010년대가 되어 조금씩 여러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재기되고 있어 힘을 얻는 요즘입니다.
2007년 동아시아 학술원 연구원인 강소연박사가 10년전 쓴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 중

발췌부분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 커다란 구멍을 메꾸는 첫 단추는 우리가 우리문화에 대해 가져온 편견을 과감히 버리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문화도 우리의 특정한 시대의 문화양태지만, '보는 만큼 아는' 것도 중시되어야 하며 그러한 미학 역시 우리에겐 존재했다는 것이 필자의 졸견입니다.



덧글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8/03/25 12:16 #

    제가 님의 블로그를 구독하는게 요즘의 즐거움이에요 정말 우리나라 전통미학의 담론은 언제나 형이학적이죠 그걸 누가 공감하며 누가 재창작 할까요? 기본적으로 재창작이란게 있어야 문화가 살아나는데 그런면이 하나도 없으니 우리의 전통문화는 어느샌가 죽어버린 면이 강한거 같아요

    단편적으로 말하면 촌스러운 한복

    분명히 신라나 고려때만 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가.기억하는건 조선시대 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미학적 담론이 주류학계로도 좀더 확장되야 새로운 재창작이 이뤄질텐데 말이죠...

    전 지금의 k팝을 위시로 하는 한국의 문화에 대해 불안한 점은 너무 한순간이란 점이죠, 물론 최신 트랜드는 맞지만 소비가 너무 빠른 문화란게 불안합니다. 관광객들이 언제까지 소비가 빠른 문화에 끌려 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빨리 전통문화가 제대로 보여지어 전통과 미래를 공존하는 한국상을 외국에 보여줬음 합니다
  • 역사관심 2018/03/26 03:30 #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만, 제 글은 특정시대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후기의 미학도 똑같이 소중한 우리 문화이고 현재처럼 지키고 개발해나가야합니다. 다만 우리가 잊고 지내고 무관심한 영역에 있는 우리문화도 활발히 발굴하고 쓰고 재건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
  • 열혈작가 2018/03/25 13:19 #

    조선 후기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의견들에는 공감이 가지만 그렇다고 조선 후기의 것들에 대해 폄하하는 의견들은 공감이 안 가네요. 이건 이거대로 저건 저거대로 다르게 봐야죠.

    까놓고 말해서 조선 후기의 것들(문화적 컨텐츠)에 대해 안다면 얼마나 알고들 있을까요? 구한말 조선까지 고구려의 문화가 평안도 지역에 이어져 왔고 신라의 문화가 경상권에 이어오고 있었다고 하고 함경도에는 여진족의 문화를 이어오고 있었다는 내용을 이곳 덧글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까지 갈것도 없이 불과 100년 전 우리나라에는 삼국, 고려시대의 파편들이 꽤 많았다는 증거가 되지요. 그러면 그걸 얼마나 디테일하게 발굴하고 연구하느냐가 관건이지 조선 전기와 고려시대, 삼국시대는 화려하고 다양했는데 조선 후기는 지리멸렬하다는 흑백의 구분은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본의 만화가가 그린 한복 입은 캐릭터들을 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학이 돋보이는 디자인이란 걸 처음으로 느껴봤었습니다. 고려미인도를 예로 들며 고려는 무조건적으로 화려하고 지금 우리가 아는 한복은 뒤떨어지고 단순하다는 건 또다른 편견을 낳을 위험이 있습니다.

    다른 걸 예로 들어 씨름이란 것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씨름이 구한말 조선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달랐다고 하는데요.

    당시에 매년 특정 시기에 전국의 씨름꾼들이 함경도 개마고원을 찾아와 웅장한 씨름판이 펼쳐졌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씨름은 지금과는 룰이 달라서 손이 바닥에 닿으면 패배하는 거였고 그 외에는 금지된 게 없었는데 지금처럼 바뀐 배경에는 당시 씨름이 거칠어서 다치는 사람들이 꽤 나왔고 일제가 스포츠로 안전하게 바꾸자는 것에 씨름계가 적극적으로 동의해서 바뀌었단 이야기였습니다.1920년대 이후의 씨름이 지금처럼 바뀌어갔다고 하던데요.

    이 이야기는 당시 구한말 조선 씨름선수였던 분께서 증손자분께 얘기를 해줬고 당시의 씨름 기술들도 조금 알려줬다고 하더군요. 불과 100년도 안 된 짧은 과거에도 급격하게 달라진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2018년인 지금 이전 역사인 조선시대를 디테일하게 알지 못하면 그 다음 역사인 고려, 신라,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고 봅니다.

    조선시대를 디테일하게 연구하려면 결국 가장 가깝고 지금 사람들에게 이질감이 덜한 조선 후기, 구한말 조선의 문화 컨텐츠를 다양하게 발굴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고 봅니다. 여기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연구를 해야 시대마다 엮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고요.

    단순히 고려는 화려했고 조선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우린 지금 조선시대조차 반만 알고 나머지 반은 알지 못하거나 엉뚱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써 봤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고려는 거칠고 상무적인 기질이 강했는데 조선은 나약하고 주둥이만 떠드는 키보드 워리어의 시대로 구분해서 바라보는 사람들 꽤 많을 걸요. 씹선비라는 말 자체가 고려는 저렇고 조선은 이렇다 라고 단순하게 구분지어버리는 생각에서 나온 오해라고 봅니다. 조선시대가 고려시대에서 이어져온건데 자꾸 다른 역사처럼 구분하는 건..

    전통문화라는 건 만들어가는 것이지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존이라는 것만 치우친다면 그건 시대가 바뀌면 박제품에 불과하죠. 달라지는 시대에 적응하며 계속 만들고 다듬어가는 것이 사람들 곁에 살아있는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죠.
  • 역사관심 2018/03/26 03:31 #

    네, 이글 역시 첫문단이 주제입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것인데, 현재는 아직 이 시점으로 저것을 바라보는 것이 워낙 강한 것이 한국학의 실제라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고려는 화려하고 조선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다양한 양태 역시 작금의 시각으로는 담아낼수가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무려 500년의 문화양태를 단순하게 담아낼 수도 내서도 안되지요). 바로 말씀하신 그러한 씨름이라든가 조선의 유교적 ethic에서 벗어난 많은 매력적인 설화와 기담등이 해방후 2000년대가 되도록 주목받지못하고 있는 것, 모두 포함된 이야기입니다. 고려미인도를 예를 든 것은 세밀한 미학의 또다른 미인도가 있음에도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을 알리고자 한것입니다- 신윤복 선생님의 조선 미인도는 말할것도 없이 대단한 걸작이지요.

    단순히 고려는 화려하고 조선은 아니다 라는 시각은 (당연하게도)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시각일 뿐이겠지요. 이 글은 그런 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제 필력이 부족했나 봅니다. ^^; 열혈작가님의 첫 문단 즉 이것은 이것대로 좋고, 저것은 저것대로 좋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통시적으로 살려나가야할 연구가 쌓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실은 그래서 글제목도 "....도 중요하다."라고 지은 것입니다. 항상 좋은 고견 감사합니다.
  • 열혈작가 2018/03/25 13:42 #

    역사관심님의 의견엔 저도 동의합니다. 고려미인도를 저도 지금 처음 봤는데 솔직히 드는 느낌이 원나라의 미술(고려가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까) 같은 느낌이 더 강했거든요. 그만큼 이질적이고 알려지지 않았단 얘기죠. 다만 현실적인 부분에서 저는 다른 면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바로 우리나라 역사를 대하는 중국의 행동입니다.

    중국은 계속 우리나라를 자신들의 일부라고 여기고 근래 더 노골적이죠. 지금은 고구려에 이어 백제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넣었다고 하던데 이러한 측면에서 문제점을 꺼내보자면 고려시대의 회화를 두고 발전시킨 고려의 미학을 실물로 만들어 우리나라의 문화가 되었을 때 중국인들이 와서 보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부분입니다.

    몽골이 세웠던 원나라 역시 지금 중국의 역사이니 배웠던대로 이 나라의 역사는 자기들의 일부구나 하지 않을까요? 이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현실적인 부분에서 생각해보자는 뜻입니다. 거기다 중국의 역사관점을 거부하고 경계하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고려미인도의 느낌과 특징을 문화적으로 발전시킨다면 아마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고려미인도가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보자마자 꼭 중국, 원나라 회화라 봐도 어색하진 않겠다 싶은 느낌이 먼저 들었거든요. 현실적인 감성에서 역사,문화를 떼어놓을 순 없기에 이 부분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저는 중국, 일본과 다른 특징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이해는 하거든요. 아마 현실에서 충돌하게 될 이러한 정치적 갈등을 경계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식민지배부터 온갖 지배를 당했던 역사의 파편은 지겹다는 거죠.
  • 역사관심 2018/03/25 13:44 #

    이 부분은 벚꽃관련글등 다른글에서 자주 언급했는데, 전 의견이 좀 다릅니다만, 좀 길어질 주제고 오늘 스케줄상 답글로는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말씀하신부분 역시 충분히 이해하며 하지만 이제는 동아시아의 학계와 문화담론이 다음레벨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수혜국은 아마도 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사견입니다. 좋은 주말 되시길!
  • 열혈작가 2018/03/25 13:50 #

    우리가 수혜국이 될 거라는 부분은 어떤 근거로 가능해지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나중에 시간 되시면 이부분을 주제로 글을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학계와 문화담론이 성숙해지려면 결국 대중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물론 타국에서도 서로 존중해주는 자세가 필요할 것인데 지금의 중국과 일본을 보면 솔직히 와닿지는 않거든요.
  • 역사관심 2018/03/25 13:58 #

    네, 몇몇 글에서 부분적으로 쓴 적은 있는데 언제 주제로 삼고 써도 좋은 주제같습니다(다만 많은 준비와 연구를 요하는 주제지요). 감사합니다.
  • 남중생 2018/03/25 18:08 #

    고려 미인도가 전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흥미롭네요.
    송자관음과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조선후기"에 미인도가 다시 아기를 안고 등장하기까지는 족히 몇 백년이 지나고, 이번에는 성모상의 도상이 영향을 주죠^^
  • 역사관심 2018/03/26 11:30 #

    저 역시 이 부분을 언뜻 생각했었는데 추후 한번 제대로 들여다 볼 부분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 응가 2018/03/26 18:55 #

    저는 생각이 좀 다른편인데 각 시대별로 화려해지는 부분이 각각 달라지는것 같습니다.
    유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에는 금속공예(특히 누금세공).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속공예에다 금동불상과 석조물. 고려중기는 청자, 후기로 가면 불교미술, 나전칠기, 금속공예. 조선초에는 다시 불교미술과 석조물, 금속공예 그리고 의복, 회화, 도자기, 목공예 중기 후기에는 도자기와 회화, 금속공예(후기)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화려한것과 세련된것은 다르다 생각하는데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유물이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될 수 밖에 없다. 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유물로만 이 시대 미술의 특징은 이러하다! 라고 평가하는건 아쉽다고 밖에 이야기를 못 하는것 같습니다.
    그런이유때문에 개인적으로 저는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는 조선의 금속공예와 불교미술이 저 평가 되는게 아쉽습니다. 조선의 은입사 공예와 불교미술, 목공예같은게 화려한게 참 많은데.....
  • 역사관심 2018/03/27 10:47 #

    응가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시대별로 강점이 다르듯, 화려한 분야도 달라지는데 이는 말씀하신 분야별로는 물론, 건축만 해도 부분별로 발전하는 부분이 시대별로 다르니까요. 또한 화려한 것과 세련된 것이 다른 것도 물론입니다 ^^

    이 글로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사실 응가님의 말씀과는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단편적인 유물로 특정시대를 판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제 블로그의 큰 주제이기도 한데, 이를 넘어 '특정 시대의 미학으로 전대를 모두 아우르는 선입관이 강한 경향'이 제가 느끼는 아쉬운 점인지라 졸견을 내고 있습니다. ^^; 이런 점 때문에 그러한 좁은 필터링을 통과하지 못하는 우리의 풍부한 유산을 현대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많이 즐기지 못하는 감이 분명 있어보입니다. 그 필터링의 색감을 벗어나려다보니 글중 그에 대비되는 우리가 흔히 잊고 지내는 (이 부분은 저 두 신문기사에서도 보이고 있지요) '화려함' '세밀함'을 자꾸 알리게 되는데, 아무래도 고려대의 유물과 조선전기의 유산이 우리에게 그 가치에 비해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아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맥락이 물론 맞지만 아무래도 시대적 분위기와 색감이란 것도 있으니.또한 화려함이 더 낫고 담백함, 소박함은 나쁘다는 주장을 펴고자함은 아닙니다 (그런 맥락의 댓글을 쓰신 것도 아니지만) .

    끝부분에 말씀하신 조선금속공예와 불교미술의 평가역시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예입니다. 졸견인 "문화는 연역적이 아닌 귀납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말씀인지라 당연히 동의합니다. 항상 고견 감사드립니다.
  • 응가 2018/03/27 19:01 #

    현재 세계에서 보여지는 한국미술이 중국, 일본, 태국에 비해서는 마이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폄하되어지거나 과소평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양미술에 무지하듯 무지에서 비롯된것이겠지요. 그런와중에 상대적으로 비슷한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만의 '독창성'을 보여주게 된것이 다름아닌 지금의 '자연스러운' 미술이겠지요.

    하지만 '국화와 칼'에서 일본을 잘 설명해주는 'but also'가 한국미술에도 접목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건물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지만 법당과 전각의 단청은 가장 화려하게 발전하게 되었고, 외형은 단순함을 강조했지만 도안은 화려함을 강조했다...라고
  • 역사관심 2018/03/27 23:07 #

    아 제 뜻은 국내에서의 시선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해외의 시선이야 우리하기에 따라 달렸지요. 두번째 문단에 깊이 동의합니다.
  • Akatsuki 2018/03/26 20:36 #

    글 말미의 고려미인도 세 점이 일본에 존재한다고 쓰셨는데, 세 점 모두 국내에 반입되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5/2018012500216.html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1/25/0200000000AKR20180125048100005.HTML?input=1195m
  • 역사관심 2018/03/27 03:39 #

    오오, 예전 기사로 쓴 글이었는데 올해 모두 돌아왔군요! 경사네요. 당연히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따로 알려드려야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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