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을 통해 본 15세기 조선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정체성 인식 역사

조선시대 고구려및 삼국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는 정사 문헌자료는 많지만, 오늘은 [표해록]에 나오는 꽤 중요해 보이는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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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무신년(1488, 성종 19) 
3월 15일

아침엔 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더니 오후엔 흐렸습니다. 요동(遼東) 사람 진이(陣圯)ㆍ왕찬(王鑽)ㆍ장경(張景)ㆍ장승(張昇)ㆍ왕용(王用)ㆍ하옥(何玉)ㆍ유걸(劉傑) 등이 장사하는[商販] 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신 등이 이른 것을 듣고, 청주(淸酒) 3병ㆍ엿[糖餳] 1쟁반ㆍ두부 1쟁반ㆍ떡 1쟁반을 가지고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고는, 또 말하기를, “우리 요동성(遼東城)은 귀국(貴國)과 이웃했으므로 정의(情誼)가 한집안과 같은데,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사례합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귀지(貴地)는 곧 옛날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는데,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른 점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 리 밖에서 표박(漂泊)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足下)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것과 같습니다.” 하니, 진이는 말하기를,

“내가 정월에 길을 떠나서 2월 1일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4월 초순쯤에 돌아가게 될 것이니, 아마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먼저 천지(賤地 자기의 사는 지방을 낮춘 말)를 지난다면 안정문(安定門) 안에 유학(儒學) 진영(陳瀛)이란 사람이 있는데 나의 아들이니 나의 소식을 잘 전해 주기 바랍니다.” 하고는, 서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신 등은 노를 저어 하진창(下津廠) 앞에 이르러 정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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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이 수록된 [표해록]은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갔던 최부(崔溥, 1454~1504년)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고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중국 절강성 영파부(寧波府)까지 표류하였다가 북경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6개월 동안 견문한 바를 적은 기행기입니다.

이 글이 수록된 제2권은 2월 5일 절강성의 수도 항주를 출발하여 3월 25일 천진위(天津衛)를 지날 때까지의 내용입니다. 즉, 북경에서 한양으로 오는 중간에 아래 보이는 요동지방에 거쳐 오게 되는데 이때 요동성에 있던 요동사람들과 최부의 대화내용을 기록한 것이지요.

특히 [표해록]은 중국의 산천과 풍토, 그리고 습속을 자세히 담았다하여, 왕의 명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왕실서적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여기 나오는 내용은 꼼꼼히 살피고 만약 외교적인 문제가 있거나 민감한 내용이라면 필터링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서 우선 요동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요동성(遼東城)은 귀국(貴國)과 이웃했으므로 정의(情誼)가 한집안과 같은데,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사례합니다.”

그러자 신이(최부가) 다음의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귀지(貴地, 요동)는 곧 옛날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는데,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른 점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 리 밖에서 표박(漂泊)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足下)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구절이니 원문을 다시 보지요.

貴地。卽古高句麗故都。高句麗。今爲我 朝鮮之地。地之沿革。雖因時有異。其實同一國也。

귀지 (貴地, 당신들이 사는곳, 즉 요동지방)은 원래 고구려의 옛 지방 (번역원에서는 故都를 도읍지라고 국역했지만 옛성, 옛지방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한듯 함)이었다. 그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땅의 연혁이란 것은 비록 때에 따라 달라지지만, (요동지방과 조선은) 실상 하나의 나라인 셈이다. 

이 구절을 보면 1488년 당시 최부를 비롯한 당대 조선지식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정체성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짧게 요약하면 요동인들(당시 명나라인들)이 조선과 요동성은 바로 이웃이니 반갑습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건네자, 최부가 원래 요동은 고구려땅이었고 현재 "고구려는 조선이 되었으니" 한 뿌리나 다름없다 반갑다라는 화답을 건넨 것입니다.

최부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었습니다. 이 관직은 원래는 외방사신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초기에는 당하 참상관출신이 맡던 꽤 고위직 (3품)입니다. 따라서 최부는 당대 조선의 지식인 그룹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외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그것도 북경등을 거쳐 겨우 돌아오는 형국에 당대 명국의 사람들(요동인들)을 만나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은 당대 조선과 명국 양국의 고구려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합의가 분명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표해록]은 비단 조선왕실의 명으로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명-일본에 모두 번역되어 출간된 인기서적이었습니다. 만약 고구려에 대한 이 구절이 조금이라도 문제가 된다면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료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15세기 조선전기, 조선과 명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파악하는 연구에 유용한 자료라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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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로부터 두 달뒤인 1488년 5월 24일의 기록을 보면 또다른 중요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표해록 
무신년(1488, 성종 19) 
5월 24일 맑았음. 

계면(戒勉)이란 중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말이 능히 통했습니다. 그는 신에게 이르기를,

소승은 세계(世系)가 본디 조선(朝鮮)인데, 소승의 조부가 도망해 이곳에 온 지 지금 벌써 3세(世)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지역이 본국(本國 조선)의 경계에 가까운 까닭으로 본국 사람이 와서 거주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가장 겁이 많고 용맹이 없으므로, 만약 도적을 만난다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 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으므로, 반드시 본국 사람으로서 귀화(歸化)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으로 인정하여 선봉(先鋒)을 삼게 되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 사람 10명, 100명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인데 중국에게 빼앗겨 소속된 지가 100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끼친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 고구려사(高句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여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鳥飛返故鄕 狐死必首丘]’고 하였으니, 우리들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으나, 다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인정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몸뚱이와 머리가 따로 있게 될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은 머뭇거릴 뿐입니다.”

晴。有僧戒勉者能通我國語音。謂臣曰。僧系本朝鮮人。僧祖父逃來于此。今已三世矣。此方地近本國界。故本國人來住者甚夥。中國人最怯懦無勇。若遇賊。皆投戈奔竄。且無善射者。必抄本國人向化者。以謂精兵。以爲先鋒。我本國一人。可以當中國人什百矣此方卽古我高句麗之都。奪屬中國千有餘載。我高句麗流風遺俗。猶有未殄。立高麗祠以爲根本。敬祀不怠。不忘本也。嘗聞鳥飛返故鄕。狐死必首丘。我等亦欲返本國以居。但恐本國反以我等爲中國人。刷還中國。則我等必服逃奔之罪。身首異處。故心欲往而足趑趄耳 
중략. (신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면은 하직하고 물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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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 기록이 요동성에서의 것이고 약 두 달후인 5월말의 이 기록은 요양역(遼陽驛, 5월 23일에 당도합니다)에서의 것입니다. 즉 이 기간 최부는 요동지방에 머문 것이지요. 이 요양역에서 그는 조선출신으로 이곳에 살고 있는 계면이라는 승려를 만납니다. 조선말을 쓰는 그와의 대화에서 계면이 말하기를 '원래 내 조상은 조선인인데 할아버지가 도망와서 지금 자신이 3세대다. 이 지역(요동성)은 본국 (즉 조선)과 가까워서 조선인이 많이들 이주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일단 그가 '본국'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점으로 (我本國一人, 必抄本國人向化者), 19세기 민족 국민국가이전에 이미 아주 오래전에 이런 정체성을 다른 나라로 가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은 요즘과 매우 흡사합니다. 유럽식 국민국가 담론과 다른 아시아 담론이 생겨나야 하는 것이 아닌지 근본적인 생각을 점점 굳혀주는 기록이 많습니다.

두번째 부분이 오늘의 글주제와 직결된 것으로 여기서 명나라 요동에 살고 있던 15세기 승려 계면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요동지방은 원래 고구려의 고도(옛 지역)로 중국에게 "빼앗겨" 천년가까이나 된다(此方卽古我高句麗之都。奪屬中國千有餘載). 그럼에도 이때까지 고구려의 풍속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는 요동사람들이 고구려사를 정체성의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사는 많은 사람들은 본국(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으나 조선에서 이미 명에 동화된 중국인으로 여길까봐 머뭇거리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원문을 뜯어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此方卽古我高句麗之都
이 곳은 즉 옛 우리 고구려의 도시이다.

조선인 승려인 계면은 관직자와는 거리가 먼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무명의 일반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我高句麗, 우리 고구려'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요. 이처럼 [표해록]을 통해 우리는 조선전기 (15세기) 이미 명국의 땅이 된 요동지방에 대한 인식을 통해 당대 조선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생생한 정체성의 인식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도 비슷한 부분을 본 기억이 나는데, 확실히 삼국통일이후 이 세나라에 대한 국조에 대한 왕실의 제사로 대표되는 공적 인식뿐 아니라, 민간차원의 인식에서도 지금과 맞먹는 (혹은 더한) 확고한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 명나라에서는 고구려를 외국으로 인식하고 있음도 역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생각되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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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조선시대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사료로 다음의 기록도 첨언합니다. 이 기록은 15세기 표해록보다 약 1세기 뒤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쓴 [조천록]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요양성의 이런 사람들은 계속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천록 (朝天錄 )
수많은 조선인을 만나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백성들 중 난리를 피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이 상당히 많다. 계사년과 갑오년에 계속 흉년이 들었는데, 이때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오래도록 양남(兩南) 지방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양남 지방을 유랑하던 조선의 백성들은 모두 방자(幇子)라는 명목으로 총병의 군중(軍中)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런 조선의 백성이 거의 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유 총병의 군대가 철수하여 돌아갈 적에 그들을 따라 강을 건너갔다. 그래서 이때부터 요양(遼陽)과 광녕(廣寧) 일대에 우리나라 백성과 가축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내가 요양에 도착했을 때, 젊은이 한 사람이 자주 내 숙소에 와서 하인들과 서로 친숙해졌다. 그가 말했다.
“나는 공덕리(孔德里)에 살던 사람인데, 요양에 들어와서 수(修) 씨 집안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또 말했다.
“요양성(遼陽城) 안에 들어와서 사는 조선인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름을 잊어버린 한 무사(武士)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름난 가문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이 나를 교사(敎師)로 부르며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60〜70리쯤 떨어진 곳에 특별히 군사훈련장을 만들고는 요양 사람 가운데 영리한 사람을 직접 선발해서, 나에게 매일 무예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봉급도 두둑하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 중에 무예를 성취한 사람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또 동관보(東關堡)의 길 옆에서 중국옷을 입고 조선 사람의 관(冠)을 쓴 한 여인이 우리 일행을 보고 울면서 말했다.
“저는 옛날에 사직동(社稷洞)에서 살았고, 천한 신분도 귀한 신분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살게 된 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또 산해관(山海關) 밖의 여관에 머물 때에는 어떤 사람이 밤중에 몰래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고향이 그리워서 항상 탈출해서 돌아가려고 하지만, 주인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 빈틈을 탈 수가 없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조선인이 모두 30여 명이나 됩니다. 만일 한 사람이 나서서 일을 주도하면 모두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이곳에 와서 바로 장사를 시작해서 재산을 많이 불렸고, 큰 집을 사고 아름다운 계집을 끼고 살면서 부귀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따금 만난 조선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밖에 알지 못하는 조선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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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바람불어 2018/04/25 06:51 #

    단순히 지리적 계승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민족의식(?) 계승같은 게 보여서 재미있네요.
  • 역사관심 2018/04/25 10:03 #

    분명 관련연구가 있을텐데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동아시아적 민족주의의 원형과 국가형성은 분명 유럽과는 큰 차이가 있어보입니다.
  • 바람불어 2018/04/25 08:12 #

    그리고 번역에서 '기실동일국야'에서 기실은 그 열매가 아니라 '그 실제', '사실상' 정도의 뜻인것같은데요.

    '땅의 연혁이 비록 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사실상 같은 나라이다'
  • 역사관심 2018/04/25 10:01 #

    다시 생각해보니 실제가 더 맞겠습니다. 수정하지요.
  • 까마귀옹 2018/04/25 08:09 #

    그러고 보니 최부가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을 언급한 부분도 있지요. 이렇게요.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으므로, 병졸 된 사람들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장상을 위해 죽었다. 그래서 천하의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친 것이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후략)'

    '두 번'은 당연히 살수 대첩과 안시성 전투 등을 말하는 것이고, '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삼한일통을 뜻하는 것이겠죠.
  • 역사관심 2018/04/25 10:04 #

    이 부분도 본 기억이 납니다. ㅎㅎ 확실히 지금의 인식과 같음을 보여주는 기록이었지요.
  • 남중생 2018/04/25 11:10 #

    임진/정유 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노예만 생각하기 쉽지만 중국으로도 갔겠군요. 정치적인 이유로 이런 “포로”는 덜 조명을 받았는지도...
    임진왜란은 그만큼 승전국, 패전국 구도를 잡기 어려운 전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8/04/25 23:06 #

    현저히 무관심한 영역중 하나죠. 그래서 지금도 이쪽 지방에 가끔 다큐를 찍으러가면 깜짝 놀랄만큼 친근한 사람들의 인식수준이 나오곤 합니다.
  • 쇼미더머니 2018/04/25 11:21 #

    박지원 열하일기에도 요동 우물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사람만 지나가면 물이 솟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원래는 고구려(=조선) 사람이 떠나갔기에 생긴 전설이지 않을까요.
  • 역사관심 2018/04/25 23:07 #

    그런 구절이 또 있었군요. 확실히 우리와 연관많은 지역이란 생각입니다.
  • 남중생 2018/04/25 23:34 #

    냉정冷井 이야기군요.

    "요동(遼東)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왕상령(王祥嶺)이란 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어 10여 리를 가면 냉정(冷井)이 있는데, 사행(使行)이 있을 때는 장막을 치고 조반을 먹는 곳이다. 돌로 쌓은 우물이 아니요, 길가에 솟는 샘으로, 물 줄기는 확을 넘고 있다. 물 맛은 달고 맑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다. 우리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흘러 넘치게 솟다가도 조선 사람이 떠나면 즉시 말라 버린다고 하니, 대개 요동은 본래 조선 땅이므로 기운이 서로 감응해서 그렇다고 한다."

    http://inuitshut.egloos.com/1880673
  • 역사관심 2018/04/26 03:25 #

    아, 이 포스팅을 읽고도 당시에는 주제가 아닌지라 지나쳤었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 함부르거 2018/04/25 13:37 #

    동아시아의 민족 개념은 서구와는 다르게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어 왔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겠네요.
  • 역사관심 2018/04/25 23:08 #

    이 분야는 오래전부터 감으로만 그럴것이라고 생각중인데 관련연구를 제대로 찾아본 적이 없어서 한번 알아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광주사태 설문조사 2018/04/25 16:01 #

    고려가 한민족이라는 인식은 왕씨고려 이후 주입된 것으로 봅니다. 고려를 구성했던 부여, 예, 맥 그리고 옥저는 발해에서 각각 별도의 지방행정기구로 편제되었는데, 고려사를 보면 발해가 망하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고려인이 아니라 여진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인이 여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낙랑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은 대부분 요서와 중국 각지로 사민당하였습니다.
  • 광주사태 설문조사 2018/04/25 16:12 #

    이 지도가 참고가 될 것입니다.
    http://qindex.info/s.php?i=4385
  • 역사관심 2018/04/27 01:35 #

    그럴수도 있겠지요. 다만, 당시 여진인이라 했던 기록이 팩트이듯 이런 기록도 팩트이고 최소 고려이후 무려 천년간 고구려를 한국사로 양국에서 인식해온 것도 팩트인지라 결코 무시할 수도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측에서 접근성 힘든 지역이 고구려영토였고 지금도 그런지라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접근성의 증가와 또한 그쪽지역의 더 많은 자료의 발굴과 함께 더 심층깊은 연구가 필요하고 나오리라 봅니다.
  • 역사관심 2018/05/16 04:23 #

    특정이데올로기논쟁으로 흐르는 댓글들이 있어 이 주제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 응가 2018/04/25 18:43 #

    마오쩌뚱이 '요동은 원래 옛 조선땅'이라 발언한 바가 있으니 중국(특히 한족)도 조선과 비슷하게 인식을 하고있었던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시대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요동, 만주에 살았던걸 생각하면 인종적으로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 국경을 결정하게 된건 근대의 일인 셈이라 생각합니다. 북한이 조중변계조약당시 압록강, 두만강 이북을 포기한것에 대해 아쉽기도 하지만 도리어 고려말처럼 요동을 효율적으로 운영할수 있었을까 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요동이 한반도 국가의 영향력을 벗어난지가 하도 오랜지라 지금은....
  • 역사관심 2018/04/25 23:15 #

    중국측에서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고구려를 한국사영역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은 거의 명확한 듯합니다. 또한 압록강-두만강경계의 양쪽에 걸쳐 우리 사람들이 수없이 살아간 것과 또한 함경도쪽에서 여진인들이 함께 살아간 것등을 생각해 보면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그리고 또한 현재 70년째 섬으로 살아온 우리의 인식확대도 앞으로 더 필요하고 기회에 따라 생겨나지 않을까 (자연스레) 하는 전망도 조심스레 하고 싶습니다.
  • 다문제일 2018/05/14 22:38 #

    아무튼 고려와 그 후대 왕조인 조선이 고구려에 대해 실질적인 계승은 고사하고 '계승 의식'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은 히스테리에 불과하죠.

    전에 까마구둥지님께 고구려-고려의 민간 풍속 면에서 유사했음을 드러내는 자료(http://luckcrow.egloos.com/2426998)를 드린 바 있지만, 고려가 고구려에 대해 실질적인 계승이 이뤄졌을 가능성, 그러니까 신라 시기 고구려 고지(故地)인 한 삭 명 3주에 고구려계 주민들이 고유 문화를 간직한 채 잔존하다 태봉-고려 정권을 성립시키고, 그것이 나말여초의 발해 여진인의 유입과 겹쳐서 중세 한반도 지역에서 신라에 대해 일정 수준의 문화적인 격절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고려의 중심인 양경(兩京) 지역은 분명 그랬을 겁니다.

    거기에다 고구려가 5세기에 금강 유역까지 남하한 바 있고 그 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부용국으로 전락했으며 멸망 직전까지 신라를 밀어붙였던 백제의 언어가 고구려와 유사했음을 감안하면, 중세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계승이라는 북한 학계의 이론을 쇼비니즘적 망상으로만 치부하기 힘들기도 하고요.
  • 역사관심 2018/05/16 04:02 #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계승의식이 분명히 있었고,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체성요소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 액시움 2021/10/03 04:27 #

    레벤스라움 마렵네요.
  • 역사관심 2021/10/03 06:07 #

    잘 몰랐는데 덕분에 공부할 개념 알게 되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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