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호랑이 사냥꾼의 호구(虎裘, 호랑이가죽옷), 그리고 세조의 차림새 역사전통마

이 그림은 명작웹툰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호랑이형님]의 초기에 나왔던 호랑이가죽옷입니다. 

虎裘- 호랑이 호, 갖옷 구

그러니까 이런 옷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비슷한 형태의 옷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착호갑사(捉虎甲士)와 호랑이 패션(虎衣)]이란 글에 새로운 정보를 주신 남중생님의 다음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합니다.

성호전집 제12권 서(書)
정여일에게 보낸, 《농포문답》에 대하여 논하는 편지 갑자년(1744, 영조20)〔與鄭汝逸論農圃問答 甲子〕

국초에 목장(牧場)은 150곳이었는데, 대부분 서북 지방의 높고 마른 땅에 나쁜 짐승들을 모두 제거하고 크게 목장을 열었으니 반드시 해변의 풍기(風氣)가 유약한 땅보다는 나았습니다. 또 무사(武士)들이 호랑이 갖옷〔虎裘〕을 입었으니 역시 그 요체(要諦)를 매우 잘 안 것입니다. 옛날에 창과 방패는 반드시 호랑이 가죽으로 감싸 두니 이것이 이른바 건고(建櫜)라는 것입니다. 《좌전(左傳)》에 “영고숙(穎考叔)이 고비(皋比)를 뒤집어쓰고 먼저 올랐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군중에서 호구(虎裘)와 갈관(鶡冠)을 사용하는 것은 그 용맹한 점을 취한 것이니, 어찌 그런 의미가 여기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까. 

고려조에서는 무예를 숭상한 까닭에 화살로 짐승을 사냥할 때에 병사들을 조련하여 나쁜 짐승들을 멀리 쫓아 버렸으니 이것이 국초에 목장을 산간에 둔 까닭입니다. 비록 징험이 되는 문헌은 없지만 제 생각으로 단정할 만합니다. 지금 용감한 병사들이 서로 수렵으로 겨루게 하여, 능히 호랑이를 쳐서 죽인 자는 적의 수급(首級)을 바친 것과 동등하게 공을 인정해 주고 위험을 무릅써서 호랑이에게 물린 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것과 동일하게 상을 주며, 변장(邊將)과 부령(部領)은 이것으로 우두머리를 삼는다면 호피를 뇌물로 가져다 바치고 얻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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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익(李瀷, 1681~1763년)의 [성호사설]에 실려있으며 그가 정여일이란 자에게 보낸 1744년에 쓴 편지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글은 호랑이가 많았던 조선초에 비해 조선후기인 현재 (1744년)는 많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문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고로 고려-조선전기까지의 야생의 모습은 이 글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 조선초기에는 호랑이사냥꾼이 호랑이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히고 그 창과 방패 역시 호랑이 가죽으로 감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且武士虎裘。亦甚知要。
또 무사(武士)들이 호랑이 갖옷(虎裘)을 입었으니 역시 그 요체(要諦)를 매우 잘 안 것입니다.

古者干戈必包之以虎皮。所謂建櫜也。
옛날에 창과 방패는 반드시 호랑이 가죽으로 감싸 두니 이것이 이른바 건고(建櫜)라는 것입니다. 

건고(建櫜)는 실물을 확인할 방법은 없는데, 조선초기 장방패(長防牌)는 다음의 것으로 국조오례의와 세종실록 오례의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런 무기류를 호랑이가죽으로 감싸두었을 수도 있겠지요.

또한 '갖옷'이라는 것은 이렇게 '털옷 (현대로 치면 모피)'을 뜻합니다.
19세기 조선갖옷

위의 기록은 [성호사설] 즉 18세기의 것입니다. 즉 조선초의 이야기를 후대에 적은 것이지요. 이런 경우 하나의 기록만으로 신빙성을 얻기는 조금 힘들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호랑이가죽옷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더 찾아냈습니다. 첫번째는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구절.

임하필기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세조(世祖)의 검소한 덕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세조는 그 성품이 참으로 공경스럽고 검소하였다. 내가 언젠가 내전(內殿)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보니 감색(紺色)의 무명옷과 호구(虎裘)를 입고 청초혜(靑草鞋)를 신었으며 갓끈은 무명베를 사용하였고 죽장(竹杖)을 휴대하고 있었다. 비록 옷을 빨아서 입었다고 하는 한(漢)나라 문제(文帝)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이 역시 1877년의 기록이지만, 여기 나오는 구절은 조선초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이 당대 왕인 세조에 대해 이야기한 것으로 본인이 궁궐내전에 들어가서 세조의 복장을 직접 본 것을 구전에 옮긴 것입니다. 여기보면 세조가 '감색(紺色)의 무명옷과 호구(虎裘)를 입고 청초혜(靑草鞋)를 신었으며 갓끈은 무명베를 사용하였고 죽장(竹杖)을 휴대하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이 묘사는 그대로 영화나 드라마, 웹툰등에서 차용해도 무방할 구절로 감색 옷 베이스에 호랑이가죽옷을 걸치고, 푸른색 짚신과 대나무지팡이를 지니고 있었다라는 것이지요. 참고로 영화 [관상]에 나오는 세조(이정재 분)의 모습도 조금 겹치는군요.

마지막으로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이 기록보다 더 전대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년)의 것으로 임하필기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전자체가 유명했거나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임하필기가 차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일단 원문을 봐주세요.

연려실기술
○ 세조는 성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신하들이 일찍이 내전에 들어가보니, 감색 무명 호구(虎裘)를 입고 푸른 짚신을 신고 나무 갓끈에 대나무 지팡이를 끌었으니, 이는 비록 씻은 옷을 입은 한 문제(漢文帝)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필원잡기》
世祖聖性恭儉。嘗入內殿。見 御紺色木綿虎裘。穿靑草鞋。笠纓用純木。携竹杖。雖漢文澣濯。亦不如是其儉素也。
여기보면 '신하들이 내전에 들어가보니' 라고 되어 있지요. 이에 비해 임하필기에서는 '서거정'이라는 개인이 들어가서 본 것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두 저서의 편찬시대를 비교해보면 이는 '사실성'을 더 뒷받침해주고 있을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보통은 후대에 참고글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 더 '일반적'인 사실을 다룰 가능성이 큽니다. 즉 '서거정'이라는 인물의 일을 시간이 흘러 '신하들'로 표기할 가능성이 그 역보다 큰 것이 좀 더 상식적이지요. 그런데 이 임하필기와 연려실기술은 반대로 연려실기술이 더 앞선 문헌입니다. 즉 '서거정 개인'의 기록으로 쓰여진 기록이 더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이는 두 기록이 서로 참조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원전이나 Source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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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호랑이가죽옷'의 존재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는 다음의 기록에서 보입니다.

명곡집(明谷集)
節度使韓川君李公神道碑銘
절도사한천군이공신도비명

乘馬何之。公衣虎裘。말을 타고 꾸짖으니 공의 옷은 호랑이가죽옷(갖옷)이었다.
立陣前射賊不已。진을 치고 먼저 공격하니 도적들이 이미 사라졌다.
衣裘盡被脫去. 갖옷이 다해져 버리고 가다. (화살을 옆구리에 맞은 직후의 묘사)

이것은 필자가 아직 국역본이 없는 기록을 본 것으로 임란 말인 1599년(선조 32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고 이어 감찰로 전임되어 그 뒤 연해(沿海) 지역인 보령현감으로 발탁되었던 이의배(李義培, 1576년~ 1636년)이라는 무신의 비명에 적혀 있는 구절입니다. 이 기록은 최석정(崔錫鼎, 1646~1715년)의 명곡집(明谷集)에 적혀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이의배가 도적들을 징벌하는데 그 옷차림새가 '호랑이가죽'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적이라고 하지만 도적떼가 아니라 그가 공청병마절도사로 참가한 병자호란당시 청나라군대와 맞섰을 때를 묘사한 기록입니다. 참고로 그는 병자호란에서 전사합니다.

이의배의 이 호랑이갖옷기록은 동시대 다른 기록으로 교차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송파(松坡) 이서우(李瑞雨, 1633~1709년)의 문집인 [송파집]과 황경원(黃景源, 1709~ 1787년)의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에서도 이의배의 차림새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송파집
望見公衣乕裘。與軍官李檍射賊不已。一人旁立奉箭。乃營奴曹丑生也。時潰軍亦多在巓。望見公仆。莫不頓足叫號。公之孫汝發年十六。與叔稈等間行。求公屍不得。丑生之妻。亦往求夫屍。能認公貌。倂得公屍。掩而標之。歸告公家。汝發率家人往審之。果是矣。鬚髮無損。腹脇左脚。各着一箭。衣裘皆剝去。


강한집(江漢集)
李義培
字宜伯。朝鮮韓山人也。중략. 淸人進薄。禆將安三五僕人貴卜。進馬請騎。義培叱曰。事至此。唯有死耳。乘馬何之。於是。衣虎裘。立陣前。射虜不已。중략.

마지막으로 1700년대 같은 시대에 꽤 중요한 그림이 전합니다. 이미 이전 글에서 소개한 회화이긴 하지만, 위의 기록들과 일치하는 시대의 것이라 한번 더 소개하지요. 18세기의 [당채호렵도]에 나오는 호랑이 사냥꾼의 가죽옷입니다.
18세기 당채호렵도


2000년대 들어 우리의 전통 털가죽옷인 '갖옷'이 이성계나 수양대군의 예처럼 종종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 좋은데, 앞으로 이러한 호랑이가죽 역시 활발하게 쓰면 좋겠습니다.

사족으로 신라군의 맹수의 머리가죽으로 만든 장군기(將軍旗) 깃발도...

그나저나 [호랑이형님]의 여말선초 문화사적 표현은 고증과 우연이 겹쳐진 것일테지만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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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8/05/09 06:04 #

    오늘 글은 네이버 메인이나 신문의 한 코너에 올려도 될 만한 재미가 잇는 듯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역사관심 2018/05/09 06:06 #

    감사합니다~.
  • 남중생 2018/05/09 10:34 #

    세조는 정말 영화 “관상”의 이미지네요! 흥미롭습니다.
  • 역사관심 2018/05/10 04:02 #

    더 검소한 버젼으로 호랑이 갖옷입히면 멋질듯 합니다.
  • 로그온티어 2018/05/09 19:42 #

    호피무늬옷 보고 맨날 놀려댔는데 전통의상일 줄이야
  • 역사관심 2018/05/10 04:03 #

    조상님들중에서도 위용을 뽐내시는 분들이 주로 입으시던 호피의상 ㅎㅎ
  • 응가 2018/05/10 20:00 #

    호랑이가 나라의 상징이라 여기는데 정작 이런건 안나오더군요... 결혼식대 가마에도 호피를 씌우고 명성황후 표범카페트(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412711) 같은것도 좀 사극같은데서 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실제 세조의 초상은 후덕한 인상인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3240045) 임금이 되기전 모습은 관상과 비슷할지도 모르는 노릇인거 같습니다ㅎㅎ
  • 역사관심 2018/05/10 23:28 #

    오오 세조초상이 남아있다니! 전혀 몰랐네요. 말씀대로 임금님이 되시고 찌셨을수도 ㅎㅎㅎ 그리고 저런 호피를 잘 사용하면 꽤 러프한 시대의 이미지가 나올텐데 좀 자주 쓰면 좋겠어요. 결혼식가마, 행차가마, 초상화등에도 자주 보이는데...
  • 열혈작가 2018/05/16 22:56 #

    주인장님 혹시 조선시대 보부상들을 주제로 글을 써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문헌의 기록들을 찾아내시는 것도 굉장히 디테일하신데 제가 얼마 전 보부상들에 대해 알게 된 게 있는데 이들이 단순한 장사꾼들이 아니라 엄청 거칠고 사나운 성격을 띈 조직들이더군요. 보부상들에 대해 기록들을 읽어보니 대중적인 문화 컨텐츠로 쓰일 만한 개성과 색깔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 역사관심 2020/02/14 01:34 #

    왜 이 댓글을 지금에사 발견했을까요? 제가 그런 능력이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 주제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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