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시대에 가까운 야생의 땅, 15세기전후의 조선야생동물의 변화 (3편) 역사전통마

필자가 10여년간 문화사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조선은 16세기후반~17세기초를 기점으로 '반정도 개국'을 한 셈이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축, 의복, 식생활 뿐 아니라, 한반도에 살던 동물들 역시 대략 조선 전기와 후기를 나누어 후기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변합니다.

이 글은 다음의 두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린 [조선의 생태환경사](김동진 저, 2017)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분야인 '야생동물과 가축의 변화사'입니다.

이 포스팅들에서는 야생의 땅에 가깝던 조선전기까지의 한반도의 숲과 땅의 모습에서 살아가던 한반도의 야생동물들을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야생의 '개간'과 야생동물의 흥망은 직결되므로 앞의 두 글과 밀접하게 연결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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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살았던 동물들의 수치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고, 어떻게 변화했는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추산할 수는 있다. 먼저 그 개략적 수치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15~19세기는 대형 포유류 야생동물이 번성에서 절멸로 전환된 격변기였다. 

최상위 포식자였던 범과 표범은 조선건국 이후 17세기초까지 적어도 매년 1,000마리 이상 사냥될 정도로 개체수가 많았지만 이후 급속히 줄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사실상 멸종했다.

사슴에는 순록의 일종인 대록과 꽃사슴이 있었고, 사슴과 구별될 뿐 아니라 생태적 특성이 현저히 다른 노루와 고라니도 많이 살고 있었다. 대록은 16세기 이후 전국각지에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세조~성종 무렵까지 곳곳에서 한번에 보통 1,000여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던 꽃사슴은 17세기 이후 거의 사라졌다. 18세기 이후 큰사슴은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원등 몇몇지역에서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그럼 15~19세기에 무엇이, 왜,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시기 조선이 다스리던 한반도에서는 산천 곳곳을 호령하던 범과 표범이 절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략 (앞선 글에서 살펴본) 가용공간을 확장하는 농지개간은 야생의 공간에 생성되어 있던 야생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인 범과 표범에 맞서야 했다. 

범과 표범들은 자신들의 서식영역을 지키려했고, 사람들은 소를 이끌고 야생의 공간에서 농경지를 마련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소가 호랑이등에게 물려 죽는 일이 빈번해진다. 이를 바로 '호환'이라 했다. 호환은 경작지를 넓히려는 사람과 서식지를 지키려는 범과 표범들이 충돌한 결과였다. 호환은 사람이 범과 표범이 사는 곳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범과 표범이 사람이 개간한 사는 곳으로 나올 때 발생했다. 15세기 초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내 들으니, 풍양산에 범 세 마리가 있다고 한다. 가서 잡게 할 것이니 병조에서 군사를 뽑아 보내도록 하라."

"경상도에 범이 많아, 지난해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 범에 물려죽은 사람이 무려 몇 백명입니다. 연해군현이 더욱 많아 사람들이 길을 잘 갈 수 없사온데, 하물며 밭을 갈고 김을 맬 수 있겠습니까?"

이는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황무지가 되었던 경상도 바닷가의 고을들이 다시 개간되면서 이곳에서 대규모 호환이 발생했다는 기록이다. 중략. 조선초기부터 강력히 시행된 포호정책은 범과 표범의 개체 수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갔다. 여기에 천방과 화전에 의한 농지개간이 확대되면서 범과 표범의 서식지가 크게 줄었다. 15~16세기에는 천방 개발을 통해 냇가 무너미땅이 대부분 경작지로 바뀌었고, 17~19세기에는 산록과 고산지대의 평탄지와 완경사 지역이 화전으로 개발되면서 서식지가 더욱 크게 줄었다. 그 결과 포호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었던 호비공납과 진상은 17세기에 호속목으로 바뀌었고, 18세기초에는 결국 폐지되었다. 범과 표범이 사람들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식지가 거의 완전히 소멸하여 그 개체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너미의 땅'에서 벌어진 호환을 그린 그림이 최근 소개되었습니다.
전규만 화백이 그린 2013년 그림 (출처 과학동아)

하지만 16세기후반에서 17세기초까지는 이런 기록들이 나온다. 최립 (1539~ 1612년)은 자신의 시에서 "들판에는 도적이요, 산에는 또 호랑이라"라고 노래했고, 같은 시기 장유 (1587~ 1638년)은 초저녁 시골마을에서 "누더기 여미고 찬방에서 잠이 들었다가 호랑이 쫓는 이웃집소리에 벌떡 놀라 일어났다"라고 했다. 숲으로 우거진 곳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범과 표볌이 서식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7세기초까지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호피와 표피를 마련하여 나라에 바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대동사목을 제정할 때 하삼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실상 범과 표범을 매년 바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공인되었다. 1724년(영조즉위년)이 되면 조선의 각 군현에서 매년 석달 동안 가죽을 바치게 하던 제도가 영구히 폐지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서 범과 표범의 개체 수가 극적으로 줄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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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이 호피공납의 불가능의 시점인 17세기초 (1600년대)가 바로 '화전의 극심한 폐단의 시작'과 맞물린 시점이란 것입니다 (이 2편에서는 호랑이, 늑대등의 17세기중엽까지의 모습이 많이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 조금 이 부분을 확인해보지요.

평지의 무너미 옥토개발이 16세기이후 본격화되면서 더 넓은 경작지개발을 위해 7할 이상이 산림인 국토특성상 '화전(불로 나무를 태워 경작지를 개발하는 방식)'이 17세기부터 활성화, 전국의 산이 태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의 짐승이 들끓던 굵은 몸통의 활엽수림이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점은 이 화전이 시작된 17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 (1600년대)가 한반도에도 소빙하기가 찾아온 시점이지요. 활엽수가 침엽수림으로 교체되고, 중층건축이 사라지고 온돌난방이 전면화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8세기에서 14세기중엽까지는 원시림이 약 90%, 15세기에서 17세기 중엽까지는 약 70%, 그리고  17세기중엽에서 19세기말까지 약 45%로 갑자기 떨어집니다. 그리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인 1939년이 되면 23%가 됩니다.

이를 보면 17세기초중반, 개간의 측면에서는 무너미땅 (평지)에서 이뤄지던 15~16세기의 천방개발외에 산림을 깡그리 태우는 화전이 급증하고, 기후면에서는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한반도가 갑자기 추워집니다. 나무는 더 몸통이 굵은 활엽수림에서 침엽수림으로 바뀌어가고는 시점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야담집이지만 [청성잡기]에 이런 기록이 등장하지요 (예전 온돌과 관계되어 소개한 바 있는 기록입니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년)은 정확히 임진왜란 (1592년, 당시 만4세) 직후를 주 활동시기로 살아간 인물이지요. 이 김자점이 바로 이시기 17세기초중반, 온돌을 유행시킨 인물이며 이로인해 솔잎을 모두 온돌시스템에서 소비하도록 만들면서 온돌이 대유행을 시작했다는 기록입니다.

-청성잡기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仁祖) 때 도성의 사산(四山)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上)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사실 온돌의 보급은 산림의 훼손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겠지요. 땔감으로 어마하게 썼을테니... 이처럼 17세기초중반은 단순히 '임진왜란'이라는 16세기말의 정치사적 대사건뿐 아니라 공교롭게도 한국의 자연사적 측면에서의 대변화가 문화사의 커다란 변혁으로까지 이어지는 큰 변화가 일어난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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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8세기 후반부터 몽골의 초원지대에 주로 서식하던 늑대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해수구제 정책에 따라 압도적으로 많이 포획된 맹수는 바로 늑대였다. 이 때가 되면 이미 범과 표범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부터 23년간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 호랑이는 97마리였다 (연평균 호랑이 4마리, 표범 27마리). 

한반도에서 100여마리의 표범 내외군이, 20여 마리 내외의 개체군이 번식하다 멸절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더 큰 범이 먼저 포획되어 빨리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통해 보면 15세기 무렵 야생의 한반도에 서식하던 범과 표범의 비율은 약 1 대 4 정도였을 것이다. 또한 20세기에 잔존한 개체수는 15세기 최대개체수의 고작 2~3%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15세기에는 20세기 범과 호랑이숫자의 무려 50배가량 존재).

사슴, 사라져간 시인의 친구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보면 구석기시대 이래 주거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동물의 뼈는 사슴이다. 이러한 추세는 16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어떤 종류의 사슴이 얼마나 많이 살았을까?

실록에 '대록(大鹿)'이라고 기록된 순록류'록(鹿)'이라고 기록된 꽃사슴류가 있다. 고구려 고분 무영총의 [수렵도]에 나오는 무사에 쫓기는 두 마리의 사슴이 바로 대록 암수 한 마리씩이다.  
무용총 수렵도의 大鹿 암수 한쌍

말과 비슷한 크기로 대형인 이 대록은 여러 마리가 아닌 암수 한쌍이 짝을 이룬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큰 규모로 무리를 이루는 꽃사슴과 다른 대록 특유의 생태적 특성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오늘날처럼 종을 분류할 수 있는 학문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수의 노루와 고라니들이 사슴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루와 고라니는 떼를 짓지 않고 크기가 사슴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등 생태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 구분되었다.

사슴은 숲과 개활지를 오가며 살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주변에서 언제나 일상적으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많은 우리의 문인들은 사슴에 대해 노래했고, 국가에서는 공물로 많은 양의 사슴가죽과 고기를 거두었다. 이규보 (1168~1241년)는 과거급제 후 관직을 받지 못하고 2년간 시골에 머무는데, 당시 시골에서 사슴만 벗삼았다고 노래했다. 그는 오늘날 전라도 변산반도에 있던 보안현에 있었는데 "숲의 사슴만이 벗이네"라며 자신의 처지를 읊었다. 13세기 후반 대학자인 이색 (1328~ 1396년)은 

우림위의 말 탄 무사장군을 옹위하고서
고라니 사슴 떼 산의 숲 속으로 몰아치니
한 번 쏘아 오종잡는 걸 어찌 다시 묻나

라고 노래한다. 오종은 새끼되지 다섯마리란 뜻이니, 화살 한 발에 사슴 다섯마리를 꿰어 잡아낸다는 의미다. 실록에서 태종 이성계, 이방원, 세조 이유등이 활솜씨를 자랑하는 기록은 종종 등장한다. 이색이 그린 이 상황이 15세기까지 지속된 것이다. 15세기 당시, 군사훈련에 나선 군대에서 한 번에 잡는 사슴의 무리가 무려 1,000여 마리였고, 100마리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15세기에 출가하여 승려로 생활한 김시습 (1435~1493년)은 자신이 머무는 사찰의 약초밭에 종종 사슴들이 찾아와 장난을 친다고 했다. 

암수 한 쌍을 중심으로 작은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큰 사슴(대록大鹿)무리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한반도에 서식했다. 일찌기 태종 8년인 1408년 무렵 전라도 해변의 봉수를 지키는 군사들은 틈틈이 해안에 서식하는 대록을 사냥하여 그 가죽을 진상했다. 세종 4년인 1422년에는 봉상시에서 대록 9마리로 육장을 만들었다. 경기도 일원에 살던 대록들이었다.

16세기 무렵 대록의 분포범위는 점차 만주에 연한 삼수-갑산 일원으로 좁아졌다. 16세기 초 각 도는 대록을 방물로 마련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물론 야생동물을 기르던 강무장과 같은 곳에서는 간혹 2~3마리가량을 사냥할 수 있었다. 연산군이 특별히 짐승을 기르고 사냥을 즐긴 후원에서 순록사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반정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을 정도로 예외적인 일이었다.

16세기중후반이 되면 대록은 개마고원 일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극히 희소해진다. 대록을 일상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곳은 만포, 삼수, 갑산과 같은 곳으로 한정되었다. 무너미의 땅이 상당수준 개간되는 17~18세기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 큰 사슴 무리가 서식할 수 있는 평지는 이미 농경지로 개간되었고, 개간된 곳에서는 소들이 사육되고 있었기에 사슴들이 살아갈 곳은 많지 않았다. 특히 17세기 후반 우역이 전국을 휩쓴 후 사슴들은 거의 절멸에 가까울 정도로 희소한 짐승이 되었다. 

이 시기 문인들의 시에 나타난 사슴들은 역시 큰 산자락의 깊은 비탈에서 노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김창협 (1651~1708년)은 큰아버지가 은둔하던 깊은 태백산에서 "큰 산 기슭엔 다니는 사람 적고, 가다가다 고라니 사슴 보이네"라고 적고 있다. 깊은 산골에서는 아직 들사슴이 떼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8세기를 살았던 황경원 (1709~ 1787년)은 충북 제천 청풍면의 한벽루근처 들판에서 무리지어 있는 고라니와 사슴을 만났고, 개경 천마산 적조암근처에서 깊은 봄날을 맞아 울어대는 사슴을 만난다.

하지만 16~17세기를 경과하면서 개체수가 격감하는 이 사슴들은 이후 몇차례 유행한 우역으로 인해 개체수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 채 20세기초가 되면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만다.
얀코프스키가 대록류로 추정되는 사슴을 잡은 사진 [출처- 프리미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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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이 큰사슴의 가죽은 얼마나 귀했을까요? 그리고 호랑이 가죽은 영화 [대호]에 나올만큼의 희소성을 조선전기에도 가지고 있었을까요? 호랑이, 표범, 그리고 대록(순록류)의 15세기 '경제적 값어치'를 살펴볼 수 있는 기록 한 점을 소개하겠습니다. [세종실록] 1448년 기록입니다.

종 30년 무진(1448) 10월 8일(신유)
전 가각고 부녹사 탁비의 시무 7개조 조진 상서

전의감(典醫監)에 바치는 녹각(鹿角)과 제도(諸道)의 군기(軍器) 장식(粧飾)에 쓰는 녹각 한 척(隻)의 값이 면포로는 한 필이 넘고, 미곡으로는 20여 말[斗]이며, 여우ㆍ삵ㆍ노루ㆍ수달[獺] 등의 가죽 값도 역시 이와 같으며, 무공대록피(無孔大鹿皮)의 값은 면포로는 10여 필, 미곡으로는 2백여 말이고, 대호피(大虎皮)의 값은 면포로 20여 필이며, 표피(豹皮)와 같은 것은 5,60필, 혹은 7,80필에 이르오니, ......

여기나오는 無孔大鹿皮(무공대록피)이란 말은 '구멍이 안난 최상급' 큰사슴 가죽을 뜻합니다. 즉,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대록피(큰사슴 가죽)- 면포 10필
대호피(큰호랑이 가죽)- 면포 20필
표피(표범가죽)- 면포 50~80필

보시다시피 호랑이중에서도 대호가 표범가죽의 2.5분의 1에서 1/4정도의 가격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사슴은 큰호랑이가죽의 반가격. 원래 표범가죽이 호랑이가죽보다 훨씬 부드러워서 비쌌다고는 하지만, 구한말이 되면 이 정도로 차이가 나진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덩치 큰 호랑이의 격감률이 표범보다 더 커서, 이 때가 되면 훨씬 희귀한 맹수가 되어 있었지요.

즉, 일제강점기 포획된 수는 표범이 훨씬 더 많은데,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부터 23년 동안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로 23년 동안 97마리가 잡힌 호랑이의 6배가 넘습니다. 그만큼 희귀성이 호랑이가 더 커진 셈이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조선전기 (15세기기록)때는 호랑이와 표범이 동일하게 많았고, 가죽의 '질'만으로 거의 3-4배의 가치를 표범가죽이 압도적으로 가져간 셈입니다.



사족으로 명성황후에게는 이러한 표범카펫이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하죠. 위 사진은 한국전쟁직후 미국으로 유출되어 미국신문인 [Sarasota herald tribune]에 1951년 실린 사진입니다. 오른쪽 인물은 초대 뉴욕총영사를 지낸 故 남궁염 선생. 이 표범가죽은 명성황후의 물건인지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습니다 (다만 낙랑님이 걸어주신 이 2010년의 링크글을 읽어보면 국립중앙박물관측의 자세와 지적태도에 의문이 듭니다).
명성황후 표범카펫 (추정)


그리고 대록 (큰사슴, 순록류)는 조선전기까지는 '포'로도 먹었음을 실록은 보여주는데 정확히 이 시기까지만 대록포(大鹿脯)가 등장합니다.

1478년 성종 9년
1480년 성종 11년 (2차례)
1481년 성종 12년

앞서 대록의 흥망에 대한 김동진 박사의 설명과 부합합니다.
대록은 16세기 이후 전국각지에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이 당시 흥미로운 기록 한 가지를 더 소개하자면 1478년 명황제가 조선에 요구하는 음식공물의 종류입니다. '대록포'를 포함 당시 귀한 음식 일람표를 볼 수 있지요. 鰱魚 (연어)도 보입니다.

대록포(大鹿脯), 녹편포(鹿片脯), 마른 문어(文魚), 마른 연어(鰱魚), 마른 대구[大口魚], 마른 전복[全鰒魚], 마른 오징어[烏賊魚], 마른 넙치[廣魚], 마른 숭어[秀魚], 다시마[昆布塔土麻], 김[海衣], 미역[海菜], 석이버섯[石耳菌], 향심(香簟)―국내에서 나는 좋은 물건, 밀판다식(蜜板茶食), 날복어젓[生鰒魚鮓], 조기알젓[石首魚卵鮓], 홍합젓[紅閤鮓], 은어젓[銀口魚鮓], 조개젓[白蛤鮓], 새우젓[白蝦鮓], 소주(燒酒)

또한 1488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동월(董越)이 조선의 야생동물을 묘사한 구절에도 '사슴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다음은 그가 쓴 [조선부]의 구절.

조선부

날짐승으로는 꿩 비둘기 참새 메추리가 많고 / 禽多雉鳩雀鷃
들짐승으로는 고라니 사슴 노루 포가 많네 / 獸多麋鹿麞麅

해산물로는 곤포 해의와 / 錯則昆布海衣 (해의-김, 곤포- 다시마)
여방 거오가 있네 / 蠣房車敖 (여방-굴껍질, 거오?)

생선으로는 금문 이항과 / 魚則錦紋飴項
중순 팔초가 있네 / 重脣八梢 

잉어와 붕어는 내와 못을 따라 대개 서식하고 / 鯉鯽隨川澤皆可以樔
관작은 정원에서도 그 둥우리가 자주 보이네 / 鸛雀在庭院多見有巢

대합과 같은 결명은 그 맛이 해산물 중에서 홀로 달고 / 似蛤決明味獨甘於海錯
주먹 같은 고사리는 그 맛이 산나물 중에서 가장 낫네 / 如拳紫蕨美獨勝於山肴

글자대로 살피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麋鹿麞麅 
麋 큰 사슴 (미)
鹿 사슴 (록)
麞 노루 (장)
麅 큰 사슴 (포)

우선 麋 (미)란 글자를 중국사이트에 검색하면 이런 순록류가 뜹니다.
어찌보면 뿔의 생김새가 비슷하지요.
하지만, 블로그이웃이신 응가님의 제보로 '백두산 사슴'이라는 북한지역의 대록종류의 사슴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슴이 고구려벽화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백두산 사슴

아래는 시베리아에서 찍힌 백두산사슴으로 암수 한쌍의 생생한 모습과 울음소리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고구려벽화의 이 녀석의 엉덩이부분과 거의 똑같이 암수가 한쌍으로 다니고 엉덩이색깔이 흽니다.
솔직히 뿔 모습 역시 거의 완벽히 같아 보입니다. 고구려 벽화의 저 대록은 혹 백두산 사슴의 조상이 아니었을까요.
鹿(록)은 보통 이런 녀석이 뜹니다.
麞(장)은 노루와 고라니 류입니다.
마지막으로 麅(포)는 큰 사슴과지만 순록과는 아닌 사슴.
아무튼 조선전기에는 대록, 큰 사슴, 노루, 고라니, 꽃사슴등 여러 종류의 사슴들이 그득했음을 짐작케 하는 기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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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 크고 무겁고 힘세게

마지막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동물, 소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요즘의 한우는 언제 유래된 것일까요? 그리고 조선전기의 소들은 지금 우리가 보는 그 소들이었을까요? 

김동진박사에 따르면 '소' 역시 그 품종에서 15세기이후 극적인 변화가 생겨납니다.

조선은 여러 방법으로 농업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러한 개량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과는 오키나와에서 도입한 물소와 전통한우를 교배하여 육종해낸 조선 한우다. 품종개량에서 가장 극적인 성공을 거둔 시기가 단연 15~19세기였다. (개량된) 조선의 소는 다양했지만 그럼에도 외형상 눈에 띌 정도로 중국이나 일본의 소와 달랐다. 이는 조선시대를 넘어 최근까지 그들이 한국의 소를 수입하기 위해 애쓰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소의 품종개량사실과 결과는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1858~1945년)의 다음 증언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소는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이다... 한국의 소는 키가 146~150센티에 이르고 무게는 330킬로그램까지 나간다. 중략. 발이 빠른 한국 소들은 속도나 장시간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능력에서 말에도 뒤지지 않는다. 중략. 한국 소는 물소와 여러차례 교배된 특징이 확실히 나타난다. 한국 소의 큰 키와 강인함, 활동성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회화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399년, 즉 14세기초 아직 현재의 '조선소'가 혼종으로 개량되기 이전의 조선전기의 소들의 모습이 [조선우마의방]이라는 1399년 조선 수의학 저서에 기록되어 전합니다.

조선시대 소의 모습- 1399년 [조선우마의방]에 수록된 조선전기 소의 모습 (사진 출처와 이 소들의 자세한 설명- 링크)

뭔가 현재의 소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요. 저 당시 이미 명품소로 유명한 (현재 일본 고급소고기의 근원이 된) 흑우가 보이고, 무엇보다 뿔들이 현재 한우들보다 훨씬 깁니다.
현재 한우 (조선우)

확실히 언뜻 보아도 현재 조선우보다는 오키나와 물소와 비슷합니다. 생김새로만 보자면 김동진박사의 설명인 15세기 이전인 14세기에 이미 이런 물소들이 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일단 김동진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조선은 국초부터 명의 남부에서 물소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세조7년(1461년)에 이르러서야 오키나와에서 암수 2마리의 물소를 들여올 수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물소는 경상도 웅천에서 겨울을 보내도록 한 후 서울로 가져와 창덕궁의 후원에서 사복시 관원들이 돌아가며 길렀다. 조선의 제반 의서에서 물소 기르는 법을 조사하고 이를 의생 4명이 배우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오키나와에서 들어온 물소는 잘 번식되었다. 17년이 지난 성종 10년(1479)에는 70여 마리로 불어났을 정도였으며 이후에도 번식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오키나와 물소 (사진출처)

따라서 저 그림들은 1399년 그려진 것이므로 본격적으로 오키나와 (당시는 류쿠국) 물소가 수입된 1461년까지는 아직 62년 전의 그림입니다. 혹 조선전기의 조선소들은 크기는 작아도 유구국 물소와 생김새가 비슷한 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태종대 기록에 벌써 이런 것이 보이지요.

태종 12년 임진(1412년) 2월 20일(을해)
의정부(議政府)에서 수우각(水牛角) 16척(隻)을 바치었다.

그리고 고려말에도 이미 물소가 등장합니다. 다음은 1231년 12세기초 [고려사절요]의 기록.

신묘 18년(1231), 송 소정 4년. 금 정대 8년. 몽고 태종 3년
○ 송 나라 상인이 물소[水牛] 네 마리를 바쳤으므로, 최우가 인삼 50근과 광포(廣布) 300 필을 주었다. 8월에 최우가 수레[輦]를 바쳤는데 금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색 전(氈)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왕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고, 제조를 감독한 대집성(大集成)에게 안장 갖춘 말ㆍ의복ㆍ홍정(紅鞓) 등을 하사하였다. 조금 뒤에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할 때에 물소에 수레를 매어 타고 가니, 도로에서 서로 다투어 가며 구경하였다.

조선전기의 소의 품종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위의 그림이 실린 [조선우마의방]은 책제목 그대로 이렇게 조선전기 소와 말의 병을 치료하는 설명을 자세히 풀어낸 책입니다.
1399년 조선우마의방

이렇게 개량된 우수한 대형 조선소(한우)는 18세기 이후 급증,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조선 초 약 3만마리로 추산되는 소의 사육 두수는 18세기 후반에 이미 100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났고,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110여만 마리 정도가 된 것이다. 2010년에는 268만 마리가량이 사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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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조선의 생태환경사]를 통해 15~16세기 이전후로 주요 야생동물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조선전기 아직 천방과 화전이 일어나기전의 야생의 땅에는 표범과 호랑이들, 승냥이, 삵등이 들끓었고, 화전이후 18세기에는 최상위 포식자가 늑대와 멧돼지류로 바뀌어갑니다 (여전히 호랑이와 범이 많았지만). 그리고 초식동물 역시 큰 변화를 겪는데, 우리가 고구려 벽화에서나 보는 저 생경한 사슴인 대록은 이젠 한반도의 야생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꽃사슴 역시 많이 사라집니다.

소 역시 조선전기의 소는 현재 우리가 보는 대형한우와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이 저서는 올해 읽은 저서중 개인적으로 가장 정보량이 많은 책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또 하나의 맹수류인 '곰'에 대한 설명은 전무해서 좀 아쉬웠습니다. 다음은 1910년대 맹수의 포획량으로 보시다시피 '곰'이 가장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쪽의 흥미로운 최근 호랑이 실태에 대해 소개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은 [2003년 북한 호랑이실태조사]라는 자료입니다.

여기 보면 마지막 부분에 양강도 대흥단군, 삼지연군, 자강도 용립군 와갈봉, 강원도 고산군, 세포군, 법동군 (추애산)에 '조선범'이 있으니 보호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양강도 대흥단군

이게 2003년의 자료인 것으로 보아 아직 북한지역에는 우리와 달리 호랑이가 현존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북한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백두대간들입니다. 

하긴 바로 며칠전 소개한 개마고원에도 아직 늑대와 불곰이 현전하는 별천지이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2005년 촬영 소개된 개마고원 늑대와 불곰

이상으로 3편에 걸쳐 [신화에 가까운 시대]란 이름으로 16세기이전 조선전기의 야생의 모습을 저서 [생태환경사]를 근간으로 살펴보고 소개해드렸습니다. 살펴보면 볼 수록 광의의 문화사적으로 조선은 전기와 후기에 반번정도 개국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강해집니다.

앞으로 여러 문화매체에서 조선전기를 그릴 때 많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덧글

  • Nocchi 2018/05/17 09:56 #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원령공주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군요
  • 역사관심 2018/05/18 04:00 #

    맞습니다. 오히려 호랑이가 없던 열도보다 이쪽이 더 무서운 야생이었을 듯...
  • 낙랑 2018/05/17 14:24 #

    저 명성황후 표범가죽은 신문에실린 해(1951)에 반환되었지만 이후 60여년동안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다고 하네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1970680) 다만 박물관측이 저 표범가죽의 시료를 검사한 결과 북중국표범으로 결론이 나왔다 합니다. 시료채취는 보통일부분만 하기에 수십마리분의 가죽이 전부다 북중국표범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북중국표범의 서식범위가 과거엔 아무르표범과 꽤 겹치는걸 보면 북중국 표범가죽이 국경부근에서 수입 혹은 혼획된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 역사관심 2018/05/18 04:00 #

    오 그렇군요. 기사정보를 취합해서 업데해 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열혈작가 2018/05/17 19:39 #

    우리나라에 살던 표범은 땅이 붙어있던 중국, 러시아 쪽을 오가면서 서식했기 때문에 당연히 북중국표범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북중국 표범이란 것도 근현대에 와서 표범의 아종을 분류하기 위해 나눠놓은 것에 불과할 뿐 구한말까지만 해도 이건 중국 표범이고 저건 조선 표범이다 하는 식의 분류는 하지 않았죠.

    참고로 경남에서 포획된 새끼 표범이 창경원에 살았는데 당시 찍혔던 토종표범의 사진을 보면 아무르 표범보단 북중국 표범의 형질과 매우 흡사하거든요. 골격, 외모, 발통, 꼬리다발, 무늬 등 외형질이 비슷했습니다. 오늘날엔 저마다 자국의 토종을 주장하기 위해 북중국 표범이 아무르 표범과 다르다고도 하지만 정작 유전자 검사는 둘 다 같다고 나오기도 하는 걸 보면 결국 땅이 붙어있는 한반도라고 다를 것 같진 않습니다.
  • 역사관심 2018/05/18 04:01 #

    그렇죠 조선범이나 시베리아 호랑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조선범이 멸종했다는 말도 말이 안된다는 주장도 많지요.
  • 응가 2018/05/17 19:52 #

    무늬가 아름다워 표피가 호피보다 비싸고 값지다고 하네요. 거기다 사실 구한말까지 한국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을 뭉뚱거려 '범'이라 칭했습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호랑이는 칡범, 표범은 매화범, 돈점박이)
    대록 같은 경우에는 순록과 비슷하게 거대하게 자라는 백두산사슴이란 종류가 북한의 백두산일대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말코손바닥사슴같은 경우에는 현재 북녘에도 없는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에서는 백두산사슴을 누렁이라해서 삼지연 누렁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고 그 외 북한에는 서식하나 남한에는 서식하지 않는 사슴종류가 우수리사슴(사슴) 대륙사슴 이 있습니다.
    북한의 자연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남한의 50,60년대 도시 근처는 민둥산이 많지만 깊은산에는 원시림이 남아있고 생태계도 잘 보전이 되어있는, 그런 상황인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8/05/18 04:04 #

    네 무늬도 그렇고 또한 털의 재질자체가 뻣뻣한 정도가 비교가 안된다고도 하더군요. 장산범을 조사하면서 범이란 명칭에 대해 많이 알아봤는데 솔직히 아직도 좀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도 포함해서 다시 한번 각잡고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백두산 사슴은 알아보고 추가할 수 있으면 해야겠네요! 항상 귀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 남중생 2018/05/22 10:43 #

    우의방 기록은 적륜 님이 \"소 시리즈\"에서 다루신 적이 있습니다. 적륜 님의 잠정적 결론은 중국 남부의 소 형상이 \"정형화\"된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거였죠.
    http://dylanzhai.egloos.com/3514494

    중국 환경사에는 \"코끼리의 후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짧게 추리자면 옛날에는 북경 정도까지도 코끼리가 살았는데 점점 남하해서 이제는 운남성 일부에만 있다는 거죠. 언제 기회가 되면 부분부분 번역을 해볼까 합니다.
  • 역사관심 2018/05/22 06:58 #

    아~ 이런 이야기가 또 있군요. . 엇 그런데 주신 링크는 정치관련 뉴스네요..
  • 남중생 2018/05/22 10:43 #

    아이고 ㅠㅠ 5월 18일이라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복사한 링크를 헷갈렸습니다. 폐 끼쳐드린점 사과드립니다. 원래 올리려고 한 링크로 교체했습니다.
  • 역사관심 2018/05/22 14:26 #

    감사합니다. 조금있다 여유날 때 보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8/05/27 16:49 #

    그리고보니 저 글 생각나네요- 댓글도 달았었고. 글을 읽었지만 도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 M i d s e n 2018/05/24 19:42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skian&logNo=22095159332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여기 소 얘기가 나오네오
    남방의 물소까진 아니지만 뿔도 길다란게 그림속 소처럼 보이고요..
  • 역사관심 2018/05/27 16:47 #

    흑우군요, 그림 첫번째에 나오는게 저 흑우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이론이 있더군요. 위의 영상도 그렇고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같습니다.
  • 野翁 2018/06/07 19:49 #

    글에서 나오는 김동진 박사님 어째 눈에 익다 싶었는데, 주간동아에 나오셨네요. 근데 근황이... http://weekly.donga.com/3/all/11/1326633/1

    주간동아 기자가 영 엉성하게 글을 써서 숫자와 단어가 틀린게 몇몇 눈에 밟히네요..

    가끔 들러서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시티팝에 대한 내용도 많이 배워가요.
  • 역사관심 2018/06/10 11:27 #

    아...참 안타깝습니다. 대체 왜 이런 분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는지... 참 답답합니다.

    최신 동향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대중서를 많이 내셔서 역으로 학계가 인정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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