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를 발로 차 몰아 집에 온 사나이- 力士 이징옥 (문화컨텐츠화 될만한 인물) 역사전통마

보통 한국사에서 전술이나 리더쉽이 아닌 삼국지연의식의 완력이나 무술로 꼽을 때ㅡ 즉 명장이라기보다 맹장- 일순위는 고려의 신장 '척준경', 고려후기의 무신 결사대장 '김경손', 그리고 여말선초의 맹장 '이성계', 그리고 임진왜란의 조자룡 '정준경', 고구려의 마왕 '연개소문'등을 꼽습니다. 

이성계조차 최근들어서야 태조가 아닌 맹장으로써의 면모를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금 보여주기 시작했을 뿐, 아직 이런 맹장들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준 작품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실 바로 이 면에서 말은 많았지만 이순신의 순수한 '무장으로써의 매력'을 보여준 최초의 작품으로서 [명량]은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 리스트에 (훗날 소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한 분이 더 있습니다. 바로 세종대의 맹장 '이징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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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우선 이징옥(李澄玉)은 1399년 ~ 1453년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무신이며 별명은 소년 절제사, 세종 때에 김종서를 따라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북방지역의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절제사와 변방의 외직에 있으면서 여진족 토벌과 수비를 총괄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1453년 수양대군(세조)의 정변에 반발하여 거병, 정변을 일으켜,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스스로를 황제로 칭한 인물이 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보면 이 양반은 타고난 무신입니다. 가장 인상깊은 내용은 아래의 두 에피소드...

멧돼지는 발로 몰고, 맹호는 취미로 잡아죽이고

[오산설림초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징석(李澂石)과 이징옥(李澂玉)은 아산(牙山) 사람인데, 징옥은 징석의 아우이다. 징석이 열여덟 살 때 징옥은 열네 살 때, 그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구나.” 하였다. 두 아들은 곧 물러갔다. 징석은 이날 돼지 한 마리를 쏴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징옥은 이틀 뒤에야 비로소 맨손으로 돌아왔다. 그 어머니는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 전에 말하기를, ‘네 형의 용력(勇力)이 매우 너에게 못 미친다.’ 했는데, 네 형은 바로 산 멧돼지를 붙들어와 나에게 보여 주었고, 너는 이틀이나 되어서 빈손으로 돌아 왔으니 웬 일이냐.”고 물었다. 

징옥은 꿇어 앉아 말하기를, “어머니께서 시험 삼아 문 밖에 나아가 보십시오.” 하므로, 그 어머니가 따라 나가니, 큰 돼지 한 마리가 문 밖 마당에 자빠져 눈을 부릅뜨고 씨근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징옥이 꼭 어머니로 하여금 산 멧돼지를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뒤 밟아 쫒아, 어떤 때는 몰고 어떤 때는 역습을 당하면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밤낮을 다하여 발로 차고 협박하여 그 놈을 굴복시키고,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에 발로 차서 몰고 왔을 것이다.
즉, 어머니가 이징석.징옥형제에게 살아있는 멧돼지를 보고싶다라고 하자 (이 어머니의 취향도 범상치는 않음), 형인 징석은 산놈을 바로 잡아왔는데, 이징옥은 이틀이 걸려서야 집에 도착합니다. 평소 동생인 징옥의 용력이 더 세다고 들은 어머니가 의아해하자, 그는 밖에 나가보시라고 합니다. 나가보니 그가 발로 차고 몰고온 산 멧돼지가 씩씩대며 자빠져 있더라는 것...

그러니까 잡아서 편하게 오는 방법보다 이틀간 라이브로 발로 차고 길들여서 지발로 걸어오게 했다는 믿지 못할 에피소드입니다. 멧돼지로는 성에 찰리 없지요. 아래 기록을 보면 그는 '맹호를 활로 사냥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 이징옥의 시대 즉 1400년대초중반은 조선 역사상 호랑이가 두번째로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던 시대였습니다.
오산설림초고
이징옥은 맹호 쏘기를 좋아하였다. 활을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호랑이는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니, 호랑이를 한 발(發)에 거꾸러뜨렸다.

그것도 여러 발이 아니라 호통쳐서 기죽이고 한 발로.

호랑이를 얼마나 우습게 제압하는지는 다음 기록을 보면 나옵니다.

○ 이징옥이 일찍이 김해 부사의 집에 갔었는데, 부사는 사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젊은 부인이 매우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그 연고를 물었더니, “내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 가서 현재 대밭 가운데 있습니다.” 하였다. 징옥은 팔을 걷어 올리고 대숲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끼고 나와 그 배를 가르고, 그 사람의 육신을 다 빼내니,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다. 부인으로 하여금 그 육신을 싸게 하고,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그 부인에게 주면서 부사에게 말하게 하였더니, 부사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쫓아와 사례하고 돌아오게 하였으나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 당시 늘어난 호환을 당해 남편을 읽은 길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부인을 위해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산채로 끼고 배를 가르고, 소화가 다 안된 남편을 빼내어 장사치르게 해줬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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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대장부

위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 볼 점은 마지막 구절 '사례를 받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힘만 세고 폭력을 휘두르던 사내가 아님을 볼 수 있는 기록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래의 기록.

○ 이징옥의 아내가 교만하여 징옥을 배반하고 갔다. 징옥은 그것을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 뒤에 징옥이 영남절도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벌써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되었다. 징옥이 여러 고을을 합하여 크게 사냥하고, 그 뒷남편 집 앞에서 많이 잡고 적게 잡은 것을 검사하여 보고, 뒷남편 된 사람을 불러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 수백 마리를 모두 다 주었다. 이것은 주매신(朱買臣)의 고사와 비슷하다.

당시는 1400년대 초입니다. 이런 옛날인데 그의 아내는 그를 떠나 다른 사내와 새 결혼을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조선전기가 확실히 더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걸 훼방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 결혼한 새남편을 위해 (즉 부인을 위해), 사냥을 해서 수백마리의 짐승을 선물로 줍니다. 사내대장부....


드디어 무장으로, 오랑캐 정벌과 인품

이런 그를 나라에서 그냥 둘리 없지요. 그는 '소년 절제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답게 18세에 강계부사가 되고, 명신 김종서의 추천으로 세종대에 '북도 절도사'가 됩니다. 절도사라함은 즉 그 충무공 이순신이 맡았던 그 중책입니다. 특히 북도 절도사는 함경북도지역으로 여진과 항상 목숨을 건 전투가 벌어지던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습니다.

○ 이징옥은 열여덟 살에 강계 부사가 되었다. 김종서 공이 사표를 내고 돌아오게 되자, 세종이 그 후임을 물색하기 어려워,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김 공이 징옥을 추천하니 허락하였다. 세종은 드디어 그를 채용하여 북도(北道) 절도사로 삼고, 이어서 은밀히 유시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지 않으면 너를 소환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런 곳에서 그는 물만난 고기처럼 수하를 정비하는데, 조선인뿐 아니라 여진등의 북방출신 사람들을 예속시켜, 회령쪽은 흰 백마에 흰색부대, 종성쪽은 푸른 말에 푸른부대, 이외에도 색깔별로 3천 정예병을 만들어 북방을 정벌하고 수비합니다.

징옥이 북도 절도사가 되자, 6진 가운데 오랑캐로서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자를 뽑아, 모두 부하로 예속시키고 각각 나누어 편대를 만들었는데, 회령(會寧) 오랑캐는 모두 흰 말에 흰 옷이요, 종성(鍾城) 오랑캐는 모두 푸른 말에 푸른 옷을 입힌 것과 같이, 다른 오랑캐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날마다 교련을 시키니 두어 해 뒤에는 정예가 된 자들이 모두 3천 명이나 되었다. 여러 고을을 순찰할 때마다 각각 경계에 나와 맞이하고 보내게 했다. 

징옥이 두만강을 순찰하면서 살펴보다가, 오랑캐를 만나면 귀순자를 물어 강가에 살게 하고, 귀순을 원하지 않는 자는 쫓아 보냈다. 약속하기를, “내 명령을 범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니, 강을 지나 열흘길을 가도록 오랑캐의 자취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두만강을 정찰하다가 오랑캐가 잡히면 귀순여부를 물어 조선인으로 귀화시켜 살게하던가, 아니고 그냥 집적대는 놈들은 무력으로 제압, 축출해버립니다. 그 후 두만강에서 열흘길을 갈 정도의 지역에도 수상한 여진족이 사라져 버렸다는 에피소드.

현재의 두만강 (이런 곳이 모두 우리 선조들이 치열하게 활동하던 장소였습니다)

그 후에 조정에서의 의논이 오랑캐를 뽑아서 졸오(卒伍)를 만들고, 군중(軍中)에 편입시키면 징옥은 이들을 좌우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이 맡게 되면 필시 잘 하지 못하여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이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내 이징옥이 오랑캐를 좋은 말로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미 의(義)를 향하여 귀화하였으니 우리 사람과 같다. 다만 농사짓는 데 편안하도록 하고, 토지세와 부역을 없앰이 옳겠다. 그러나 만일 법령으로써 묶고 척적(尺籍 호적)과 오부(伍符 병적)에 편입시키면 곧 이것은 너희들을 구속시키는 것이니, 이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제한다.” 하였다. 그러나 오랑캐들은 징옥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고, 먼 곳 사람까지도 사모하였다.

그의 '대장부스러움'은 오랑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 귀화인들을 조선인들과 똑같이 대접, 조정에서 후임자들이 오면 이징옥만큼 이들을 관리하지 못할 것을 우려, 이들을 몰아내고자하자 이징옥은 오히려 역으로 세법을 없애줘서 이들이 마음속으로 진정한 조선에 감사를 느끼고 귀화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세조반정과 죽는 순간까지 보여준 용력

아마 그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북벌이라든가 여진토벌은 계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세조가 반정(反正)하자 다른 사람으로서 북도 절도사를 대체하고 징옥을 불렀다. 징옥이 교대를 하고 길주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조정에서 큰일이 있지 아니하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한 임금의 교(敎)가 일찍이 있었는데, 이제 일 없이 나를 체직시키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도로 달려 경성(鏡城)에 이르러 신임 절도사에게 물으니 말하지 아니하였다. 

징옥은 종자를 돌아보고 신임 절도사를 움켜잡아 내리라 명령하고, 교의에 앉아 꾸짖기를, “네가 만일 말을 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하니, 그 사람은 숨기지 못하고 사실을 말했으나 마침내는 죽였다.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서울을 향하면서 말하기를, “내 위신(威信)이 본래부터 산융(山戎 되놈을 가리킴)에 드러났으니, 이제 마땅히 강을 건너가 대금황제(大金皇帝)의 손발이 되리라.” 하고, 내일 군대를 인솔하고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때에 육진(六鎭) 판관들이 모두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으로 있었다. 회령 판관이 사람을 판자 위에 잠복시켰다. 이날 밤에 징옥은 동쪽 채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사 두 사람이 장검을 쥐고 판자에서 줄을 잡고 내려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찍으니 징옥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 그 검을 빼앗아 역사를 찍고, 알몸으로 날듯이 나와 왼손으로 후려갈기니, 죽은 사람이 수십 수백이 되었다. 마침내 비 오듯 하는 화살 속에서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24세였다. 내가 어렸을 때, 정평부사 이충백(李忠伯)과 영흥부사 이언화(李彦華)가 모두 말하기를, “일찍이 야사(野史)를 보았는데 그 말이 위와 같았다.” 하였다. 징석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를 평정할 때에 공이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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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반정에 성공하고 그를 죽이려고 북방에서 한양으로 불러냅니다. 그러나 그는 세종대의 밀명 (널 부를 때는 중대한 일이 있을때 뿐이다)를 간직한 그는 이를 의심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냅니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제압하러 가던 그는 잠을 자던 도중 2층에 숨어있던 장사 두명에게 급습을 당해 큰 칼로 오른팔이 잘려져 나갑니다 (참고로 이 '판자위에서 내려온 암살자'와 에 관해서는 조선전기 건축글에서 따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징옥의 암살자가 내려 온 곳). 

놀라운 것은 왼손 하나로 장검을 빼앗아서 그 두명을 베어버리고, 수십명 이상을 더 베어버립니다. 한팔로 싸우는 징옥을 제압하지 못한 관군은 결국 화살집으로 만들어버려 그를 죽입니다. 이 때가 고작 24세.... 너무나 아까운 천하의 장수를 조선은 잃어버린 것이지요 (* 다만, 이 때 그의 나이가 24세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징옥의 생몰년 (1399년출생)과 활약 연대, 즉 1455년의 세조반정을 생각하면 이미 그의 나이가 56세가 됩니다. 따라서, 24세가 되려면 1431년 전후로 출생해야 맞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24세(二十四)라는 기록을 54세(五十四)의 오기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정서록]등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이징옥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가 머리에서 피를 철철흘려 죽는 예지몽을 꾸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오른 팔이 떨어져나가고나서도 수십 수백명을 죽이는 그의 용맹함은 여러 문헌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 이징옥이 관속을 배치하고 장차 강을 건너려 종성(鍾城)에 이르렀는데, 마침 날이 저물었다. 종성 판관 정종(鄭悰)이 밤을 타서 도모하려하여 이징옥에게 말하기를, “어두운 밤에 행군하면 군사들이 부대와 행오(行伍)를 잃어버리게 되니 새벽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이징옥이 옳게 여겨 믿고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이징옥의 아들이 의자 앞에 엎드려 있다가 홀연히 이징옥에게 고하기를, “꿈에 아버지의 머리의 피가 의자 다리로 흘러내렸다.” 하였다. 이징옥이 길한 징조라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정종이 용사를 거느리고 돌입하였다. 이징옥이 높은 담을 뛰어 넘어서 민가에 숨었는데, 정종이 추격하여 죽였다. 이는 아마 이징옥의 방비 없음을 틈타서 엄습한 것이리라. 《유편(類編)》 《정서록(征西錄)》

그때에 정 종이 집 판자 위에 사람을 숨겨 두었다가 그날 밤에 역사(力士) 세 사람이 긴 칼을 가지고 집 판자 위로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 이징옥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 오른쪽 팔을 찍었다. 이징옥이 놀라 일어나 그 칼을 빼앗아 찍으며 알몸으로 뛰어나와 좌우 손으로 쳐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는 쏟아지는 화살에 죽었다. 그때 나이 24세였다 한다.

[북창개창지]를 보면 이 때 이징옥만 죽은 게 아니라, 두 아들, 첩의 아들등 30여명이 몰살을 당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담대한 무인'이었음은 이 '세조반정'소식을 듣고나서 결정한 '길'입니다.   24세의 나이에 이런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고 그는 뭘 결정했느냐.... 아래 [여지승람]에 나오는 굵은 체를 봐 주십시오.

○ 정종(鄭倧)이 이징옥을 죽일 때에 종성부사(鍾城府使) 정종(鄭種)이 처음부터 꾀를 내어 함께 의논하고 밤에 종성의 내상군(內廂軍)을 거느리고 이징옥의 처소에 돌입하여 이징옥과 그 아들 자원(滋源)ㆍ윤원(潤源)과 첩의 자식 철동(鐵同)과 군관(軍官) 박문헌(朴文憲) 등 삼십여 명을 죽였다. 관찰사가 정종(鄭種) 등의 공을 장계하여 모두 녹훈(錄勳)하였다. 《북관개창지(北關開創志)》

종성의 선생안(先生案) 전임관의 명부을 상고하여 보면, 정종(鄭悰)이란 사람은 없고 부사 정종(鄭種)이 종성에 부임한 년월과 이징옥이 모반하다가 죽은 시기가 서로 부합하고 또 정종(鄭種)이 이징옥을 죽인 공으로 녹훈하여 대대로 충의위(忠義衛)가 되었다. 《부계기문(涪溪記聞)》

이징옥이 강을 건너 금(金) 나라의 옛 도읍을 점거하려 하였는데, 경성도진무(鏡城都鎭撫) 이행검(李行儉)이 꾀를 써서 이징옥을 종성에 머물게 하여 죽이고 그 공으로 특별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승진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즉,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옛 대국이었던 대금(大金, 1115~1234년)의 도읍을 정벌해서 황제가 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인물은 후대로 가면 정말 흔치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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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다시 잘 보입니다.

이징석(李澄石)ㆍ이징옥(李澄玉)은 양산(梁山) 사람인데, 징석은 징옥의 형(兄)으로 다같이 뛰어난 용력(勇力)이 있었다. 징옥은 맨손으로 맹호(猛虎)를 때려잡았고, 18세에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어 번호(藩胡)들에게 위엄을 떨쳤는데, 세조반정(世祖反正) 이후 조정에서 까닭없이 그를 소환하자, 그는 자기 후임으로 그곳에 온 사람을 베어 죽이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가면 대금황제(大金皇帝)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고는 그날로 거사(擧事)하였는데, 회령 판관(會寧判官)이 징옥의 숙소(宿所) 조정판(藻井版) 위에 장사(壯士)를 잠복시켜 놓았다가,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장검(長劍)을 갖고 뛰어내려가 그를 내리치게 하였다. 

이리하여 징옥의 오른팔이 떨어졌는데, 징옥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장사가 들고 있는 장검을 빼앗아 들고 장사를 베어 죽이고 나서 벌거벗은 몸으로 나는 듯이 뛰어나가 왼손으로 수십 명을 쳐죽이고는 마침내 난전(亂箭)에 맞아 죽었다. 이때 그는 24세였다.”하였다. 그렇다면 징옥의 용력과 재기(才氣)는 항우(項羽)에 뒤지지 않는다 하겠다. 지금 《설림》을 대략 초(鈔)하여 번거로운 것은 제거하고 요점만 간추려서 이렇게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이염(李爓, 1515~1548년)의 [서정록 유편]을 보면 그가 초반 여진족 정벌시 어떤 방식을 썼는지가 보이는데, '부거책' 즉 목책을 써서 수비를 견고히 했음이 나옵니다. 

이징옥(李澄玉)은 양산(梁山) 사람으로서 무용이 남달리 뛰어났다. 처음 부거책(富居柵) 목책을 성처럼 두른 것)을 지키면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위엄과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에 떨쳤다. 육진(六鎭)을 설립한 뒤에 더욱 공이 있어서 김종서(金宗瑞)가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 당시 목책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이 최근 밝혀지고 있지요.

조선초 (1481년 완성, 1530년 증보)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平安道) 벽동군(碧潼郡)

동쪽은 이산군(理山郡) 경계까지 1백 45리, 북쪽은 이산군 경계까지 91리, 남쪽은 창성부(昌城府) 경계까지 77리, 서쪽은 창성부 경계까지 7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3백 8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여진족이 살던 임토(林土)와 벽단(碧團)의 땅이다. 고려 공민왕 6년에 이성 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시켜 쳐서 도망가게 하고, 임토를 고쳐 음동(陰潼)으로 하여 벽단에 예속시키고, 남쪽 경계의 민가를 뽑아 그것에 채웠다. 본조 태종 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세조 때 진(鎭)을 설치했다.

오음회목책(吾音會木柵) 군 동쪽 80리에 있는데 둘레가 6백 26척, 높이가 12척이다. 
오농괴목책(於農怪木柵) 군 동쪽 50리에 있는데 둘레는 6백 12척, 높이는 12척이다. 성안에 샘이 하나 있다. 
다대동목책(多大洞木柵)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둘레는 8백 30척이고 높이는 12척이다. 

186~246미터급의 너비와 3.7미터급의 높이를 가진 목책들이 북방에 주욱 늘어선 시대인 것입니다.
또한 이 문헌에는 그가 어떤 식으로 황제자리를 노렸는지가 좀 더 자세히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계유년 사변으로 김종서 등이 모두 죽고 광묘(光廟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았을 때는 이징옥이 함길도(咸吉道) 절제사(節制使)로 있었는데, 광묘가 은밀히 박호문(朴好問)을 시켜 날랜 말로 달려가서 이징옥의 대행을 하게 하고 이징옥은 조정에 돌아오게 하였다. 이징옥이 대행시키고 하루 지난 후에 문득 생각하니, “절제사도 중임인데 박호문이 아무 소리 없이 와서 대행하는 것은 무슨 곡절이 있다.” 하고, 충갑(衷甲 평복 속에 갑옷을 입음)으로 박호문의 영에 달려가서 의논할 일이 있다 하고서, 불러내어 박호문을 격살하고 군마를 정비하였으며, 또 글을 야인(野人)에게 보내서 자칭 대금 황제(大金皇帝)라 하고, 장차 오국성(五國城)에 도읍을 정한다고 하니 야인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징옥이 관속(官屬)을 설치하고, 기일을 정하여 월강(越江)하려고 종성(鍾城)에 이르니, 마침 날이 저물었다. 판관(判官) 정종(鄭悰)이 밤에 이징옥을 죽이고자 진언(進言)하기를, “밤에 행군(行軍)하는 것은 부오(部伍)가 서로 흩어질까 두려우니, 날이 새기를 기다림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이징옥이 “옳다.” 하고, 행진을 멈추고 의자에 의지하여 어렴풋이 잠들려고 할 때에 그의 아들이 의자 밑에 엎드렸다가 문득 이징옥에게 고(告)하기를, “꿈에 아버지의 뇌혈(腦血)이 의자 다리에 흘러내린 것을 보았나이다.” 하니, 이징옥이 주문을 외며 말하기를, “좋은 징조다.”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종이 사사(死士)를 거느리고 돌입하였다. 이징옥이 높은 담을 뛰어넘어 민가에 숨어 있었는데, 정종이 따라가서 잡아 죽이니 대개 그 방비하지 않고 있는 것을 습격한 것이었다. 《서정록 유편(西征錄類編)》

즉, 미리 자신의 인덕과 용맹함으로 굴복시켜둔 여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미 자신을 대금황제라고 칭하고 '오국성' 즉 만주의 '헤이룽장 하얼빈 시'에 도읍을 정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으라라고 알려둔 것입니다 (오국성위치 비정은 여러 설이 있는데 일단 두가지로 헤이룽장과 집안시를 표기해 봅니다).
이징옥이 수도로 삼으려 했던 만주의 오국성(五國城, 추정)

조선초의 이성계와 여진족의 관계라든가 이징옥의 이런 일들을 보면, 확실히 여말선초때까지만 해도 한반도 두만강 건너 최소 남만주지역까지는 국토는 아니지만 우리의 활발한 활동영역이었고 또한 북방민족들과의 매우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어 생경하면서도 흥미롭곤 합니다.

아무튼 2015년 뮤지컬외에는 아직까지 매체에서 이징옥을 주인공으로 하는 컨텐츠는 활발하게 소비되지 않고 있는데 언젠가 척준경과 더불어 '정치'보다 '무인'으로써의 그들의 활동에 촛점을 맞춘 매력적인 작품들이 탄생하길 기다립니다.



덧글

  • Nocchi 2018/05/30 06:10 #

    잘 읽었습니다
    이징옥이 역사상 흔하디 흔한 난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 가 아니라 뛰어난 무인 중 한명 이었군요
    패자도 나름 스토리를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은 데 이러한 사람이 거의 푸대접 인 이유가 문득 궁금해 집니다
  • 역사관심 2018/05/31 03:07 #

    아래 댓글에도 남겼지만 아주 최근들어 관련지역에서 조금씩 조명을 받는 듯 합니다. 사실 '무인사'에 대한 소홀함은 우리 사회에 근원적인 면이 아직도 조선시대부터 흘러오고 있어 하루이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체육과목등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연결되는 주제...). 컨텐츠면에서라도 빨리 재조명해야 할 듯 하네요.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5/30 11:45 #

    역시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죠.
    그런데 오국성의 위치는 잘못된 거 같습니다.
    오국성은 송나라 휘종이 금나라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죽은 곳으로 지금의 회령입니다.
    금나라의 옛 도읍 완안부는 지금의 하얼빈으로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서쪽에 있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8/05/31 04:14 #

    맞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컨텐츠로서 가능성이 듬뿍 있는데 많이 쓰이지 않아 아쉽습니다.

    사실 오국성 이부분은 여러 설이 있는데 확실하게 공식적으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설은 아직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정황상 아직은 함북 회령설을 그다지 믿지 않는 편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 http://gil092003.egloos.com/9566858
    글의 주제와 그다지 상관없는 부분이라 본문에서는 대체로 보다 많은 자료들이 말하고 있는 하얼빈 이란현 근방 오국성을 근거로 작성해보았습니다만, 또 다른 대체설인 집안시 설도 추가했습니다. 다만, 2011년의 위치비정논문이 흥미로워서 회령시를 추후 한번 제대로 발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 (만약 북송 휘종의 무덤이 나온다면 정말 대단하겠지요).
  • 미군철수 없으면 반역 2018/05/31 10:59 #

    아 그렇군요.
    오국성이 회령이라는 주장은 한국 내에서 회자되던 것일 뿐이고 송화강과 목단강이 만나는 저 지도의 위치가 중국에서 일반화된 인식이군요.
    휘종을 유폐시키기에 좋은 곳으로 보입니다.
    한국인이 여진의 틈으로 들어가 지도자가 되는 사례는 아골타의 선조와 이성계의 선조가 있죠.
    이징옥이 성공했다면 후금은 누르하치가 아니라 이징옥이 세운 것으로 역사에 남았겠습니다. 그랬다면 세조를 죽이고 한국을 병합했을 겁니다.
  • 역사관심 2018/05/31 12:35 #

    네 세가지 정도의 비정이 있는데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 역사가 어떤 사건이나 인물로 흘러가느냐, 흐름에 귀합되느냐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둘 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 라라 2018/05/30 23:04 #

    24세면 아들이 몇세인가요?

    뮤지컬 이름이 뭔지요?
  • 역사관심 2018/05/31 03:05 #

    다른 아들이 몇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막내 이연원이 당시 6-7세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13-14세에 혼인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당시 그의 부인은 벽진이씨(碧珍李氏)이며 슬하에 이미 3남 1녀가 있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남자 평균 15세면 혼인을 했으니 충분히 가능했지요. 세종실록』의 1427년 9월 17일조에 의하면, 예조에서 "혼인의 연한을 정하지 않은 까닭에 세간에서 혼인을 서둘지 않아 시기를 잃게까지 된다. 이는 다만 음양(陰陽)의 화합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혹은 남에게 몸을 더럽히게까지 되어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여성들은 나이 14세에서 20세 안에 혼인하도록 하고, 이유 없이 이 기한 내에 혼인하지 않으면 혼주(婚主)를 처벌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여자나 남자가 15세이전에 조혼을 해서 문제니 이를 14-20세로 바꾸자는 이야기지요.

    뮤지컬의 이름은 [잃어버린 별]입니다- 링크.http://www.ysnewspar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8
  • 빛의제일 2018/05/31 21:01 #

    '이징옥의 난'으로만 기억한 것이 죄송하여 고개가 숙여지는 내용입니다.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 역사관심 2018/06/02 05:29 #

    흥미롭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 열혈작가 2018/06/01 12:07 #

    다른 글에서 짧게 언급된 걸 본 적 있는데 자세한 내용을 보니 무시무시한 분이셨네요. 멧돼지를 발로 차서 집으로 ㄷㄷ 호랑이를 취미로 죽이는 게 이해가 가는 급입니다.조선시대만 해도 기존의 컨텐츠에는 문에만 치우쳐 무가 나약한 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관심이 없어서 혹은 알지 못해서 전해오는 기록들조차 외면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요.

    조선시대의 실존했던 무장들 혹은 야사에 기록된 이야기들만 제대로 발굴해도 지금껏 알려진 조선과 전혀 다른 조선으로 역사를 풍부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임진왜란 사료에 일본군을 거꾸로 들고 다른 적들 10여명을 패 죽인 장사의 기록이 나와있던데 보면서 정말 놀랍더군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패 죽일 정도면 얼마나 힘과 체력이 뛰어나단건지 가늠이 안 가던데 아마 이러한 이야기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단지 일반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을 뿐이죠. 이러한 인물들이야말로 오늘날 계속 발굴하고 알려져야 역사의 컨텐츠가 훨씬 강화되고 국가 이미지에 문화 컨텐츠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미야모토 무사시, 사무라이, 닌자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요.
  • 역사관심 2018/06/02 05:32 #

    후대에 '장사의 이미지'에서 빠지지 않았던 분같습니다. 본문에는 쓰지 않았지만 이미 1926년 [개벽]에서도 우리나라의 대표 역사(장사)로 이징옥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고사를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무'에 대한 무관심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조금씩 지양되면 합니다. 워낙 문화컨텐츠에서 쓰일 수 있는 곳이 '문'보다는 솔직하게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문헌을 들여다보면 분명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많은 인물과 이야기들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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