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후기 나무기둥의 수요와 굵기가 줄어듬을 보여주는 기사들.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그간 한국전통건축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막연한 추측으로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대규모 건축에 필요한 굵은 나무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들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신화시대에 가까운 야생의 땅, 조선의 숲과 땅 모습 변화 (2편)에서 김동진박사의 실증적인 연구결과를 보여주고 있어 매우 의미가 있었지요. 다음의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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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등, 원시림의 바로미터

대부등은 조선시대 건축용 목재 중 가장 큰 것으로 매우 굵은 아름드리나무 또는 그런 나무로 만든 목재를 가리킨다 (최소 200~200년 수령). 조선이 건국되고 발전하던 15~17세기에는 고려시대정도로 소나무 건축재 (40~73%)가 사용되었다. 참나무 (14%)와 느티나무 (9%)는 고려시대에 비해 사용량이 크게 줄었다. 18~2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건축재의 대부분이 소나무(89~92%)로 충당되었으며, 참나무와 전나무가 나머지 대부분을 담당했다. 18~19세기 목재사용에서 특징적인 것이 전나무다. 15~17세기에 겨우 2%가량이던 전나무의 사용량이 이 시기에는 5%가량으로 늘었다. 건축물 목재에 대한 최근의 분석결과 전나무의 주된 쓰임새는 이전시기에 느티나무나 소나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부등이었다. 더 이상 느티나무와 소나무 숲에서 큰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등은 건물의 격을 결정하는 목재였기 때문에 적어도 200~300년가량 자란 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원시림과 유사한 것으로, 대부등의 크기는 건축을 축조할 당대 원시림의 상태를 반영한다. 그림 3-4는 현존하는 32종의 [영건도감의궤]에서 17~19세기 궁궐 공사에 상요된 대부등의 크기와 공급지의 변화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대부등에 사용한 목재의 크기는 나무 지름의 크기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의궤를 보면 대부등의 크기가 17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점점 가늘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에 보수된 영년전의 경우 대부등으로 만든 큰 기둥은 끝지름이 2.4척이었다. 그러나 18세기말에 지어진 팔달문과 인정전,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근정전의 기둥에는 끝지름이 1.8~1.9척의 대부등이 사용되었다. 2세기가 지나는 동안 약 22센티의 지름이 줄어든 것이다. 대부등이 각 시기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재목이라고 볼 때, 원시림이라 할 지라도 숲의 임목성장조건이 열악한 곳의 나무 혹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나무를 이른 시기에 재목으로 사용한 결과일 것이다.
17~19세기 조선궁궐건축의 대부등 굵기 축소경향

즉, 건축의 주요자재 (예: 대들보)등으로 쓰이는 대부등의 굵기가 17세기후반에서 200년간 점차 크게 줄어든 것입니다. 대부등은 보통 200-300년 된 자재이므로 원시림에서 구할 수 있던 것인데, 이 규모의 축소는 원시림의 축소 (화전과 소빙기등)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필자의 의견이지만 아마도 9세기 이전 활엽수림에서 구할 수 있었던 풍부한 원시림의 거대목재는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예: 7세기 황룡사 중금당, 목탑 등).

예를 들면 송나라사신인 서긍이 고려에 와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적은 1123년의 기록인 [고려도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초(樵, 나무할 초)
나무꾼은 원래 전담하는 업이 없고 다만 일의 틈이 있으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밖의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에 의해 사위가 있다 하여 나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주: 성밑 10리).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거대한 나무가 많아 푸른 그늘이 사랑할 만하다. 사신이 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나 배에 오르더라도 다 공급을 맡은 자가 있어 때고 끓이는 나무를 대어주는데, 어깨에 메는 것은 잘하지 못하고 등에 지고 다닌다.

故其中多巨木合抱
따라서 그중에는 아름드리 거목이 많다.

송나라인인 그가 보기에도 거목이 많았던 것이 고려의 숲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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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직접 다음의 기록을 발견, 꽤 위의 논지와 밀접해 보이는 지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임진왜란 종전후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인 1619년, 광해군 11년의 기록입니다.

광해군 11년 기미(1619) 8월 12일(임술)
신궐 도감이 홍수로 떠내려 오는 재목의 습득을 아뢰다

신궐 도감이 아뢰기를,
“금년에는 큰 홍수로 국가와 개인의 목재가 떠내려가는 우환이 있었기 때문에 부장(部長) 이붕(李鵬)을 양천(陽川)ㆍ김포(金浦)로 보내 일일이 건지게 하였습니다. 지금에 김포 현령 민응회(悶應恢)의 장계를 보니, 재목(材木) 91조(條), 누주(樓柱) 10조, 소부등(小不等) 8조, 대연(大椽) 16개, 대토목(大吐木) 1조, 중연(中椽) 4백 개가 떠내려가는 것을 건졌는데, 인제(麟蹄)에 사는 박응춘(朴應春)이라는 자가 자기 물건이라고 하였답니다. 사실 정확히 누구의 물건인지는 모르더라도 혹시라도 주인이 있으면 역시 값을 주고 사다 써야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주인이 있으면 빠짐없이 값을 주어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속히 경덕궁으로 실어다 쓰라. 앞으로 떠내려오는 재목들도 모두 건져내어 쓰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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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을 보면 당시 무려 400여개의 나무기둥및 재목이 김포지역의 홍수로 떠내려가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재목들이 강원도 인제에 사는 박응춘이라는 사람의 목재였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 목재들을 값을 쳐주고 현재는 경희궁이 된 (영조대부터) 당시 경덕궁의 창건에 가져다 쓰게 합니다. 현재의 경희궁 (당시 경덕궁)은 광해군이 1617년부터 착수해 1623년까지 짓습니다. 따라서 이 1619년의 기록은 당시 궁궐목재가 얼마나 부족해지고 있었는지를 유추해 볼수 있는 참고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홍수로 인제에서 김포까지 떠내려가던 개인소유 목재까지 급하게 가져다 쓸 정도이니). 더군다나 앞으로도 이런 떠내려온 목재는 모두 건져쓰라고까지 교지합니다.

당시 목재의 단위로 보이는 '條(조)'가 현재단위로 어떤 의미인지 확실치 않지만 "樓柱十條" (누각기둥 10조)등 연구해 볼만한 기록이라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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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로부터 30년후인 인조대 1649년의 기사입니다.

인조 27년 기축(1649) 2월 15일(갑진) 아침에 비 오고 해 질 녘에 맑음
27-02-15[05] 재목의 일을 대신에게 수의한 결과를 보고하고 재결해 줄 것을 청하는 공조의 계
공조가 아뢰기를,

종당에는 그들이 현신하도록 독려하여 조사하여 다스려야 하겠으나, 다만 재목의 공급이 끊긴 상태가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고 각사가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상황은 위에 진술한 바와 같습니다. 더구나 누주(樓柱)와 판자(板子)는 공안(貢案)과 관련이 없고 그들이 개인적으로 사서 진배하는 것인데 해조에서는 또한 값을 지급하지 않으니,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용서해 줄 만하고 때에 따라 변통하는 것은 부득이한 점이 있습니다. 중략.

여기보면 17세기중반 당시 '재목의 공급이 이처럼 심하게 끊긴 역사가 없다'라는 식의 문맥이 나오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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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장 직접적인 기록이 더 후대인 18세기중엽에 나옵니다.

가례도감의궤 영조정순왕후
별공작 의궤(別工作儀軌) 건륭 24년 기묘(1759, 영조35) 6월 일 / 수본질(手本秩) 
기묘 6월 일
대내에 들일 안반[案板]과 도마(刀馬)에 사용하기 위해 누주(樓柱)를 켜서 재어 보니 1닢의 너비가 1자 4, 5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판을 붙여서 만들어야 하겠으니 살펴서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품의한 대로 하되 각별히 잘 만들도록 하라고 수결함.

이는 1759년 영조대의 기록으로 여기보면 '대내' 즉 궁궐에서 쓸 "案板" (안판) 즉 널빤지와 도마를 쓰기위해서 원래 누각의 기둥용으로 가져온 '누주(樓柱)'를 잘라보니 그 너비가 1자 4,5치, 즉 42센티미터에서 45센티미터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너비로는 안판용으로 쓸수가 없어 부득이 판을 이어서 넓게 만들어야겠다는 건의를 올리는 장면입니다.

물론 여기나오는 '누각기둥용 목재'가 대규모 건축용인지 소규모용인지는 명확치 않고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문맥은 김동진박사의 다음 주장과 매우 흡사한 기록이라 사료됩니다. 궁궐내의 기둥용목재의 너비가 도마로도 쓸수 없으리라고는 당시 신하도 예상치 못한 느낌이 강하지요.

"의궤를 보면 대부등의 크기가 17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점점 가늘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에 보수된 영년전의 경우 대부등으로 만든 큰 기둥은 끝지름이 2.4척이었다. 그러나 18세기말에 지어진 팔달문과 인정전,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근정전의 기둥에는 끝지름이 1.8~1.9척의 대부등이 사용되었다. 2세기가 지나는 동안 약 22센티의 지름이 줄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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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들은 단편적인 정보들이나 한국건축사의 문맥에서 꽤 살펴볼만한 기록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실록이나 의궤에 이보다 전대의 기록으로 함께 살필 수 있는 기록이 추가로 발견되면 추후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 2018/06/05 10:2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6/07 04:4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無碍子 2018/06/05 22:13 #

    저 그래프는 지름이아닌 길이로 오인하기쉽게만들었습니다.

    안반은 매우 큰 도마라고보시면됩니다. 떡을치거나 국수를 늘일때 씁니다. 우리집에도 두자폭의안반이있었는데요. 궁에서 구하려면 못구했겠습니까.

    재목의굵기가 줄어든건 왕권이랄까 아니면의지랄까. 가오보다 실용 그런걸로봐야될거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8/06/07 04:41 #

    네, 저 역시 그렇게 오해하기 쉽다고 느꼈습니다 (김동진 선생의 논고에 나오는 것이라 수정은 안되네요.)

    안반부분은 물론 말씀하신대로 해석도 가능하고, 소개한 논지로도 참고할 만 하다고 사료되어 소개해보았습니다. 그냥 안반기록이면 그다지 들여다볼 소재는 아닌데 '누주(기둥)'부분이 연관된지라 생각해 볼 만한 듯 합니다. ^^
  • M i d s e n 2018/06/12 22:04 #

    개인적으로 조선 후기 건축은 기둥 굵기에 비해 상부구조물이 너무 무거워서 기둥이 부러질거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이게 긴장감도 주고 웅장하기도한 묘미이긴 하지만 마음이 편한건 차라리 고려시대 주심포같아요
  • 역사관심 2018/06/13 03:30 #

    ㅎㅎ 동감입니다. 뭔가 잔뜩 짊어진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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