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17)- 2층상가와 1,300칸의 행랑- 운종가(雲從街)와 대시(大市)의 조선전기모습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약 1년 반만에 쓰는 대건축물시리즈입니다 (사라진 궁궐은 한 편 그 사이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문화컨텐츠닷컴]에 나오는 조선시대 거대한 시장거리인 "운종가"편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운종가(雲從街)의 위치는 대략 혜정교(광화문 우체국 동쪽)부터 철물교(종로 3가 입구)였으나, 태종 5년 (1396년) 규모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안국동으로부터 광교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이들 건물은 2층 목조기와집이었고 상층은 창고, 하층은 점포로 사용되었다. 또한 개별 시전은 여러 행랑이 연이어 있는 건물에서 영업을 했는데 이를 방(房)이라 하였다.

조선초기에 애초에는 1396년(태조 5)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중심 가로을 따라 상가나 관가, 창고 등으로 쓸 대규모의 행랑(行廊)을 짓던 1413년(태종 13)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 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행랑(상가)들 가운데 번성한 곳은 운종가(현 종로1가)와 종루, 광통교였으며, 육의전(인조때 만들어짐)도 이 일대에 있었다 한다. 
현재의 운종가 유적지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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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2층목조기와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적어도 실록을 모두 뒤져보아도 이에 해당하는 문헌기록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 유구연구로 밝혀진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정보에는 citation정보를 좀 적어주면 좋겠군요). 추후 발견되면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실록의 기록부터 연대순으로 살펴보지요.

문화컨텐츠닷컴의 정의에는 1396년 (태조 5)에 운종가를 규모를 확대했다고 나옵니다. 이는 확실한 것이 2년전인 1394년의 기록을 보면 '행랑'을 갖춘 큰 시장(대시)에 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이미 태조 3년에 운종가의 원형이 되는 대시전 행랑건축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8일 무인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시장의 행랑에 화재가 나다.
대시(大市, 큰 시장)의 행랑(行廊)에 화재가 일어났다.
○大市行廊火。

이렇게 불이 나고 20여일 후, 이번에는 폭풍으로 시장의 서쪽 행랑들이 무너져서 인마가 많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8일 무술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풍우가 쳐서 시장의 서쪽 행랑이 무너지고 사람과 말이 죽다
풍우(風雨)가 갑자기 오니 시장(市場) 가의 서쪽 행랑(行廊)이 무너지고, 사람들과 말들이 많이 죽었다.
○戊戌/風雨暴至, 巿邊西廊頹, 人馬多死。

여기서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행랑'기록. 행랑이 무너져 사람과 말이 죽었음은 이 건물들의 규모가 꽤 된다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특히 요즘 흔히 보이는 열린 구조의 행랑보다 '사람이 잘 수 있는' 벽체를 갖춘 구조물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 당시의 행랑건축은 이런 것들이 보통이었지요. 다음은 같은 시기인 1398년 궁궐의 행랑기록입니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중략.
이에 정안군은 민무구에게 명령하여 이숙번으로 하여금 병갑(兵甲)을 준비하여 본저(本邸)의 문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변고를 기다리게 하고는, 그제야 대궐에 나아가서 서쪽 행랑(行廊)에 들어가서 직숙(直宿)하였다
直宿 (번갈아 보초보며 잠) 중략.

방번이 안 행랑 방에 누웠다가, 마천목을 보고 일어나 앉아서 이 말을 다 듣고는 도로 들어가 누웠다. 
芳蕃臥內廊房, 見天牧起坐, 聞訖還臥

현재 강령전의 행랑방들처럼 행랑내에 '방'을 갖춘 건축구조였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경복궁 강령전 행랑

다음은 당시 시장에서 어떤 식으로 물품을 진열하는지가 나오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태조 3년 갑술(1394년,홍무 27)
1394년 1월18일 (무오)
경시서(京市署)에서 각 시장(市場)의 이름을 판자(板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아래에 아울러 그려서 각 처소에 걸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다.

즉 ‘포전 1방, 지전 1방’ 등으로 시장의 이름을 판자에 쓰고, 글을 모르는 구매자들을 위해 글대신 그림으로 품목을 그려넣어 진열합니다. 즉 호빵이 있으면 호빵 그림을 적어넣었다는 것인데...... 드라마등에서 이런 식으로 구현해도 재미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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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초 대시전 행랑의 규모

다음으로 이 행랑의 규모를 한번 볼까요. 1412년 태종대의 기록을 보면 시전좌우에 무려 800여칸의 행랑을 짓기 시작합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0일 을축 1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시전(市廛)의 좌우에 행랑 8백여 칸의 터를 닦다

비로소 시전(市廛)의 좌우 행랑(左右行廊) 8백여 간의 터를 닦았는데, 혜정교(惠政橋)에서 창덕궁(昌德宮) 동구(洞口)에 이르렀다. 외방의 유수(游手)025) 승도(僧徒)를 모아서 양식을 주어 역사시키고, 인하여 개천 도감(開川都監)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점고하여 살피고, 부역(赴役)한 군정 가운데 물고(物故)한 자가 11인이고, 병든 자가 2백여 인이라고 아뢰었다.
1770년 한양도에 나오는 운종가 행랑규모

당시 행랑건설에는 2,035명의 인부와 승려군 500명이 동원됩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5일 경오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개천 도감을 행랑 조성 도감으로 삼아 시전을 건설하다
개천 도감(開川都監)을 그대로 행랑 조성 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삼아 이날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다. 역도(役徒)는 2천 35인 안에 승군(僧軍)이 5백 명이었다.

당시 건축공사 약 2개월만에 중간평가가 나오는데 처음에는 힘든 역사로 생각했다가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장관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 태종이 여력이 있으면 종루양쪽으로도 행랑을 건축하면 좋겠다고 하자 '재목은 넉넉합니다'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전에도 살펴보았듯 원시림이 넘치던 시대답습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4월 3일 정사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행랑 조성 도감에 궁온을 하사하다
행랑 조성 도감(行廊造成都監)에 내온(內醞)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행랑(行廊)을 조성하는 일을 처음에는 모두 어렵다고 생각하였는데, 지어 놓고 보니 국가에 모양(模樣)이 있어 볼 만하다. 만일 남은 힘이 있으면 종루(鍾樓) 동서쪽에도 지었으면 좋겠다."하니,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대답하기를,
"재목은 넉넉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명년 가을과 겨울을 기다려서 조성하는 것이 좋겠다."

결국 시전 좌우에 수백칸 규모의 행랑이 완공됩니다. 창덕궁 문밖의 행랑에 만들었다는 조방(朝房)은 신하들이 조회를 기다리며 쉬던 방을 말합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5월 22일 을사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도성의 좌우편 행랑이 완성되다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 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당시 행랑구조가 트인 구조보다는 실내를 갖춘 구조가 많았음은 같은 해인 1412년 이런 기록을 보면 잘 드러나지요.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6월 13일 병인 1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사헌부에서 조영무를 탄핵하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여자의 일은 내가 심히 밝게 안다. 뽑히어 들어온 지 다섯 달 동안에 하루도 가까이 모신 일이 없고, 오래도록 행랑(行廊)에 있었는데, 궁중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미혹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가서 시집가라고 명하였다. 마침 거둥[行幸]을 만나서 다섯 달을 머물렀다. 나가서 있은 지 여러 달 만에 조영무가 취하였으니, 무슨 허물이 있는가? 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후궁(後宮) 6천을 놓아 보냈으니, 그 뜻이 모두 여승이 되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대간(臺諫)은 그 뜻을 자세히 진달하라."

長在行廊 행랑에서 오래 지내다

즉, 행랑에 있는 방에서 몇달씩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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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태종은 행랑에 흠뻑 빠졌는지 다시 무려 881칸을 더 짓습니다. 이번에는 경복궁의 남쪽에서 종묘까지 주욱 이어집니다. 남로에 세웠다는 5칸짜리 층루 (2층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6일 을묘 2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행랑 881칸을 세우고, 종루 이전, 군자고, 풍저창 건립후 다시 행랑의 역사를 시작하다

다시 행랑(行廊)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경복궁의 남쪽부터 종묘 앞까지 좌우 행랑이 모두 8백 81간(間)이고, 또 종묘의 남로(南路)에 층루(層樓) 5간을 세웠다. 또 청운교(靑雲橋)의 서종루(西鍾樓) 2층 5간을 순금사(巡禁司)의 남쪽, 광통교(廣通橋)의 북쪽에 옮기고, 또 용산강(龍山江)에 새로 군자고(軍資庫)를 지으며, 서강(西江)에 새로 풍저창(豐儲倉)을 지으니, 역정(役丁)이 2천 1백 41명, 승군(僧軍)이 5백 명이었다. 전 판사(判事) 이간(李暕) 등 22인이 그 역사를 감독하고,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지의정부사 이응(李膺),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이 그 일을 영솔하였다.

역시 같은 해 기록 (1413)을 보면 숙직하는 시설이 갖춰졌음을 알 수 있지요.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4월 5일 계축 2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순금사 대호군 최관의 건의로 각경 순관에 면전하는 법을 세우게 하다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 최관(崔關)이 상서(上書)하였는데, 글은 이러하였다.

"신은 순금사에 재임되어 행순(行巡)137) 의 법을 아는데 아직도 미진(未盡)함이 있습니다. 대개 행순은 평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여 범죄를 방지하는 소이입니다. 밤은 5경(五更)이 있고, 경은 5점(五點)으로 나누어 행순이 끊어질 적이 없어야 마땅한데, 오늘날 각경 순관(各更巡官)에 면전(面傳)138) 하는 법이 없음은 심히 불가합니다. 이제 국가가 승평(昇平)하여 염려하기에는 부족하나, 만일 변(變)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미치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이제부터 감순 총제(監巡摠制)로부터 각경 순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행랑(行廊)에서 숙직[直宿]하도록 하여, 초경(初更)의 순관은 2경(二更)에 면전(面傳)하고, 이같이 하여 전하기를 5경과 평명(平明)에까지 이르면, 감순 총제는 그 궐부(闕否)를 고찰한 뒤에 파하소서. 또 병조로 하여금 규찰하고 다스리게 하여 무우(無虞)할 때를 경계하소서."

竝須直宿行廊
행랑에서 직숙 (즉 보초)하며 지키다.

1413년 2월에 800여칸을 세웠는데, 그해 5월 총 1,360여칸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대규모 행랑이 완공됩니다. 오죽하면 "장행랑(長行廊)"이라고 표기하고 있지요.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5월 16일 갑오 2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장행랑 1천 3백 60간이 모두 완성되다

장행랑(長行廊)이 모두 이루어지니, 종루(鍾樓)로부터 서북은 경복궁(景福宮)에 이르고, 동북은 창덕궁(昌德宮)과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 이르며,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전후(前後)에 이르니, 이루어진 좌우의 행랑이 합계하여 1천 3백 60간이며, 역도(役徒)는 모두 대장(隊長)·대부(隊副), 군기감(軍器監) 별군(別軍), 각사(各司) 하전(下典)과 중[僧人]을 합계하여 2천 6백 41명이었다.

그 길이가 어느정도냐 하면 서쪽은 종루에서 경복궁으로 모두 이어지고, 동쪽은 창덕궁에서 종묘까지 이어지고, 남쪽은 숭례문까지 이어집니다. 확실한 선은 그릴 수 없지만, 지도에서 동그라미 친 부분들을 모두 연결하는 어마한 규모가 됩니다.

이중 운종가의 경우 분명 '시장'의 성격을 띤 행랑이지만, 나머지는 위에서 보이듯 신하들의 직숙소, 또는 아래와 같이 창고로 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기록들을 볼때 분명 개방형이 아닌 벽체형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5월 18일 경인 2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호조 판서 박신(朴信)이 강변(江邊)에 창름(倉廩)을 세우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신이 조운(漕運)이 바야흐로 이르는데 창름(倉廩)이 없다고 하여 강변에다 4,50간을 짓도록 청하니, 임금이 농삿일이 한창 바쁘므로 영선(營繕)하기에 적당치 않다고 하여, 행랑(行廊)에다 저장하라고 명하였다.

命貯於行廊 (행랑에 저장하라고 명령하다)

자 이정도만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랑이 15세기초 완성되었지요. 그런데, 태종은 완전히 행랑매니아가 되었습니다. 1414년, 또 다시 종루에서 숭례문, 그리고 다시 종묘에서 동대문을 잇는 행랑을 짓는 대역사를 벌입니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7월 21일 임진 1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도성에 행랑을 건축할 것을 명하다

도성(都城)의 좌우 행랑(左右行廊)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종루(鐘樓)에서 남대문(南大門)에 이르기까지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서 동대문(東大門)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行廊)을 짓고자 한다. 내가 이미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으니, 오히려 조성(造成)하기를 끝마쳐서 자손을 연익(燕翼)하겠다. 마땅히 충청도·강원도 양도의 연례로 작취(斫取)하는 재목(材木)을 가지고 짓도록 하라."

종루와 숭례문은 물론, 다시 종묘와 동대문(흥인지문)을 또 잇는 겁니다. 마치 요즘 지하철 노선늘리는 식...
이 행랑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당시 울창하던 지방의 깊은 숲에서 조달하는 목재로 모자라 민가를 파괴해서 충당하는 규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414년 9월의 기록.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9월 10일 경진 3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호조의 보고에 따라 행랑 건축 공사로 철거된 민호에 저화를 지급하다.

호조에서 아뢰었다.
"행랑(行廊)을 조성(造成)할 때 파괴한 민가(民家)가 모두 1천 4백 86간인데, 그중에 와가(瓦家) 1백 26간은 매 1간에 저화(楮貨) 20장을 주는 것이 마땅하므로 아울러 2천 5백 20장이며, 초가(草家) 1천 3백 60간은 매 1간에 10장을 주므로 아울러 1만 3천 6백 장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무려 1,486칸의 민가가 부서집니다. 그중 기와집이 약 10%에 달하는 126칸. 이걸 보면 당시 민가의 초가/기와집 비율도 추정해 볼 좋은 데이터같습니다. 이로부터 약 10년뒤인 세종대왕대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세워진 어마한 행랑에서 '세'를 거두어들여 조세에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20일 병술 3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호조에서 청한 가옥세 등을 전문으로 수납하는 조건
전에 행랑세(行廊稅)는 1간(間)마다 춘추 양등에 저화 1장씩을 수납하였습니다. 지금은 춘추 양 등에 각각 전 1백 20문을 수납하고,

1. 서울 안 집텃세를 전에는 8과(科)로 나누어서, 1과 집터가 30복(卜)이면 저화 10장을 수납하고, 3복이 넘을 때마다 1장을 더 수납하며, 3복이 못 되는 것은 8과에는 제외되며, 1복 이상 3복까지는 1장을 수납하고, 1복이 못 되는 것은 면세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세종대가 되면 이 행랑 시전이 자리를 잡아감이 보입니다. 특히 같은 업종은 서로 모이게 해서 요즘처럼 '** 거리'가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윤1월 29일 무술 3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신하들의 진언과 의정부 육조에서 의논한 것 중 시행할 만한 조건들을 취하게 하다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 최만리(崔萬里) 등이 말하기를,

"지금 공인(工人)과 상인(商人)이 민간에 흩어져 있어서 서로 이익을 다투기 때문에, 물가가 자꾸 뛰어 올라갑니다. 나라에서 이미 행랑(行廊) 을 세워 저자의 점방을 설치하였은즉, 지금부터는 공업의 종류를 분류하여 같은 종류끼리 모여 살게 하고, 경시서(京市署)에서 물가를 조정하며 위반하는 자는 철저히 징계하게 하옵소서."
특히 흥미로운 기록으로 1429년 이미 같은 품목끼리 배열된 거대시장거리에 당시의 일본을 본따 판자로 층루를 만들고 물건을 위에 두어 먼지가 묻지 않게 하자는 건의가 등장합니다.

세종 11년 기유(1429) (선덕4) 12월 3일(을해)

일본 상가(商街)의 제도는 시장 상인들이 각기 처마 아래에다 판자 층루(層樓)를 만들고 물건들을 그 위에 두니, 다만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이를 보고 살 수 있었으며, 시중(市中)의 음식물들을 귀천(貴賤)의 구별 없이 모두 사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시장은 건습(乾濕)할 것 없이 모든 어육(魚肉) 등의 식물들을 모두 진토(塵土) 위에 두고는 혹은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하오니, 비옵건대 운종가(雲從街) 좌우의 행랑(行廊)에서부터 동쪽 누문(樓門)에 이르기까지, 종루(鐘樓) 남쪽에서부터 광통교(廣通橋)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첨(補簷)을 달아내고, 그 아래에 물건들을 진열해 놓을 층루를 만들어, 어느 간(間)은 무슨 물건을 둔 곳이라고 죽 편액(扁額)을 달아서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소서.

또한 현재 모든 행랑시전에 '보첨'을 달자는 건의도 나옵니다. 즉, 이런 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서까래에 덧대서 비를 막는 구조가 보이시죠? 저런 것을 보첨이라 합니다.
운현궁의 보첨 (사진출처)

15세기중반, 저렇게 어마어마한 길이의 행랑가에 모두 보첨을 달았다면 정말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시설물이 들어섰으니 그 구조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정교해졌을 것입니다. 

최초로 공사가 완공된 1414년경에서 약 30여년이 지난 1446년 기록을 보면 어린 아이가 행랑에서 돌아다녀 그 아이를 찾기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기 힘든) 일이 나옵니다. 다만, 이 행랑은 박중림의 저택행랑으로 시전행랑은 아닙니다. 다만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당대의 행랑이 어떤 구조였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록이라 생각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2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수 집현전 교리 박팽년이 아버지 박중림의 무죄를 상서하였다

장명의 말한 바도 매우 어긋남이 많았습니다. 그 가까운 이웃의 공사(供辭)에도 천보를 본 연월(年月)이 또한 같지 않은 점이 많았습니다. 의금부로 옮겨서 국문한 이래로 중손은 말하기를, ‘내가 집에 있을 때에 이 아이가 행랑(行廊)에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인하여 그 모양을 보지 못하고, 죽산에 있을 때는, 일이 바빠 또한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고 합니다. 그러나, 집에 있을 때에 아이의 나이가 6세이므로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을 것인데, 비록 행랑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볼 수 있을 때가 없었겠습니까. 

此童在行廊, 因早暮不見其貌
雖在行廊, 豈無可見之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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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운종가와 도성의 장행랑 구조 건축물들은 임진왜란이후 (again...) 모두 자취를 감춥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규모는 이렇게 단 한두줄의 기록으로 세종지리지에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지리지 / 경도 한성부
큰 시장 [大市] 【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 종루(鍾樓) 【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 【대략 2천 27간이다. 】
운종가雲從街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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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라비안로즈 2018/06/16 22:14 #

    임진. 병자란들이 문제네요. ㅜㅜ
  • 역사관심 2018/06/20 01:02 #

    병자호란은 청군이 그냥 일직선으로 돌파한 전쟁이고 시간상으로도 고작 두달로 짧아서 파괴도 미미한 수준인데, 임진왜란-정유재란은 그야말로 7년간 국토가 전체적으로 한번 다 뒤집어진 정도였습니다. 주요사찰의 연대기를 보면 임란으로 인해 아예 전소되었거나 살아남은 것도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병화가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당대까지 잘 남아전하던 삼국-고려양식 문화도 거의 이때 다 사라졌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후 36년 강점기에 그나마 있던 것도. 한국전쟁도 있긴 하지만 임란에 비하면 애교수준).

    임란이후 조선은 거의 사상적, 문화적, 하드웨어적으로 강제개국을 다시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응가 2018/06/18 18:12 #

    확실히 태종은 치세동안 건축에 가장 공을 들인 왕인것 같습니다. 경회루, 종묘, 광통교에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흥천사 사리각도 그렇고....
    2층 건물들이 줄 지어서있는 한양의 모습은 근대 에도나 기온의 모습이 연상되네요..
  • 역사관심 2018/06/19 03:15 #

    생각해보니 사리각도 태종대였군요. 정말 태종과 건축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도 좋을 주제같습니다. 시전의 대부분이 단층인지 2층인지는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일단 문화컨텐츠측에서는 저렇게 설명해두고 있는데 어떤 출처를 근거로 하는지를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해도 저런 보첨을 단 행랑시전과 건물이 2000칸이 늘어선 모습은 지금의 전통건축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줄 것 같습니다.
  • 소심한 펭귄 2018/06/19 16:40 #

    역사관심님 만큼이나 저도 오랜만에 댓글을 다는 것 같습니다. ^^
    전근대 시전이나 상업의 개괄은 카이스트의 고동환교수님이 국내 권위자이신데
    최근에는 조선시대 얼음 유통과 관련하여 생활수준을 밀접하게 연관 시켜 설명한 논문이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물론 따로 찬이 없어도 관심님의 게시물이
    치밀하고 유용하다라는 것은 말이 불필요 하고요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인용하신 일본의 시전을 본 따는것은 당시 존재론적 한계로서 개인이 남긴 많은 기록이
    그러하듯 논지의 강화와 소략한 인식의 한계상 과거 역사 전체를 더욱 폭넓게 전야할수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많은 부분이 오류로서 발견되는 양상이 아닐수 없을 것 입니다.

    예를들어 소위 실학과 식민지경험의 결합과 그에 대한 작용으로서 소위
    조선의 못난 부분을 지적한 문구가(당대 현실 불만적 감정을 포함한)
    확대 재생산 되는 매커니즘과 전체 기록중
    극소수를 점하는 게중 하나인 위의 박서생의 일본후기가 그러한데

    .1수차부분(횡력과 종력 수차의 상이한 발달과 그 이유로서의 문중양교수님의 하방계수
    그리고 이미 태조 관리지침에 중요한 고과중 하나가 뽕나무를 심어 양잠의 권장과 수차의 설치규정)
    2.화폐의 사용(상당한 일반론)
    3.가게의 개선

    이밖에

    배의 못사용(최근에 발굴된 고려시대의 마도 4호선에서 피삭과 장삭 그리고 철정을 결합한
    개량형 배로서의 기능이 명확해 지고)

    조선후기 수레에 대한 사용부터 등등 서유구까지의 이러한 당대 현실인식은
    직설적 표현으로 하면 상당히 가소로운 사고력이 아닐수 없지 않을까 합니다.
    즉 전근대 그것도 중세말기 개인의 의견과 식견 그리고 견문이 글로서 표현되고
    그것이 과연 당대 현실 인식과 얼마나 부합하는 가를 오늘날 상당히 믿기 부담스러운
    그것이이죠

    관련해서 글을 몇개 작성해 놓은게 있는데 시간 나시면 봐주시길. ^^


    https://blog.naver.com/ssfskfksfk35050/221019258158


    https://blog.naver.com/ssfskfksfk35050/221019786808


  • 역사관심 2018/06/22 05:02 #

    오랜만입니다. 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네 말씀대로 저런 기록들은 당연히 개인의 시점이니 참고해서 읽어야겠습니다. 그런면에서는 고려도경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지요. 아주 넓게 보자면 역사적 기록물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도 하구요.
  • 무식한 둘리 2018/06/22 21:59 #

    조선조의 거대한 운종가의 모습이 이 허구의 반도조선에서의 일이라고 보신다면 오류일것입니다. 정조대왕이 홍재전서에서 우리조선의 강역은 사방 6천리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1492년 성종조 이인석이 벼슬길이 막혀 상언하다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당시 도성에 일백만호가 살고 나라의 인구가 만만(1억)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코 이 반도의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조선조의 회화는 절대 이 땅의 유적지와 전혀 일치하지 않음과 구한말 외국인의 기행문이 이 반도와 일치하지 않음이 이를 증명하는거 같습니다...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일것입니다..
    내용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18/06/23 03:23 #

    댓글 감사합니다. 다만, 본 블로그는 대륙**설에 대해 관심이 없고 동의하지 않는 바이니 추후 그러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492년 기록은 확실히 비유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 한라온 2020/05/27 23:37 #

    제가 항상 저 한양도에서 의문점이 드는 것이, 광통교 양 옆으로도 행랑이 늘어서 있는 것입니다. 다리 위에 행랑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이 않는데 저렇게 그려 놨더군요.
    (만약 저 그림대로면 조선의 리알토 다리네요.)
  • 역사관심 2020/06/01 01:48 #

    그 부분은 놓쳤는데 정말 그렇네요. 일단은 그냥 대강 그렸다고 보는 편이 안전하겠지만, 실제로 행랑을 두른 다리가 있었다면 엄청났을듯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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