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난신 타파역사의 흥미로운 흐름 (시대별 분위기) 설화 야담 지괴류

우리의 괴담, 기담, 요괴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따로 카테고리를 두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발굴한 지 몇년째입니다.  그런데, 종종 성리학의 이데올로기화로 조선후기가 되면 이런 기담류도 필터링되거나 사라지거나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이것이 20세기 현대한국의 분위기로 이어졌음을 몇번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필자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하는 사자성어(?)가 있으니 바로...

"괴.력.난.신" 입니다. 많이들 들어본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이 표현의 원전은 공자의 언행이 담긴 [논어] 중 술이편(述而篇)에 실려 있으니 다음의 구절입니다. "子不語怪力亂神", 즉 "자(공자선생)는 괴이한 것, 폭력적인 것, 반란, 귀신을 말하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라는 뜻이지요.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지만, 괴력난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유교국가를 국가의 이상향으로 삼은 조선, 특히 16세기 이후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이 단어가 거의 '캐치프레이즈'로 되었음을 현대의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괴력난신'이라는 단어는 시대별로 항상 이런 느낌으로 쓰였을까요? 또한 실제로 이 단어가 조선후기가 되어서 더욱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문헌기록을 통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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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까지의 주요문헌기록

기록은 연대순입니다. 우선 [국조보감]에 나오는 1411년의 기록입니다.

1411년

국조보감 제4권 / 태종조 2 11년(신묘, 1411년)

○ 예조가 원회악장(元會樂章)의 차례를 올리면서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을 첫머리를 삼았다. 상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몽금척과 수보록은 꿈얘기와 도참설인데 어찌 악장의 첫머리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하니, 

우부대언 조말생이 아뢰기를, 
“기린(麒麟)이 태어나는 것도 개나 양과 다르며,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도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후직(后稷)이 태어난 것을 찬미하는 자는, ‘상제의 발자국을 밟고 느낌을 받았다.’ 하고, 설(契)이 태어난 것을 찬미하는 자는, ‘하늘이 현조(玄鳥)에게 명하여 내려와서 상(商)을 낳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수보록과 몽금척은 사실 태조가 천명을 받은 명부(命符)인 것이니 악장(樂章)의 첫머리로 삼아도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영의정부사 하륜도 아뢰기를,
“보록에 관한 말은 신도 들은 적이 있는데, 개국하기 이전에 승려가 얻은 것이라고 하니, 허망한 말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공자가 비록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촉인(蜀人) 동오경(董五經)의 말을 선유가 역시 말을 하였고, 청청천리초(靑靑千里草)는 동탁(董卓)을 지칭한 것인데 주자(朱子)가 감흥시(感興詩)에 붙였으니, 참설(讖說)을 옛사람이 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흥기하는 문제는 천명과 인심에 달려 있었다. 어찌 부명(符命) 도참(圖讖)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근천정(覲天庭)과 수명명(受明命)의 곡을 악장의 첫머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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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꽤나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태종이 '몽금척과 수보록'이라는 곡을 예조에서 첫 악장으로 연주하는 것을 '허황된 도참설'인데 어찌 넣느냐라고 문제삼습니다. 여기서 몽금척이란 건국 초기인 태조대에 정도전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곡입니다 (정도전은 슈퍼맨...). 

그런데 이 내용이 기이합니다. 즉,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 꿈에 신령이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덕망도 지식도 있어 백성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라면서 금척(金尺)을 주었다는 내용이라 완전히 도가적인 이야기입니다.
몽금척 중 부분


다음으로 수보록 (受寶籙) 역시 조선초기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악장으로 1393년에 만듭니다. [악학궤범]에 악보와 가사가 완전히 전하는데, 그 내용이 역시 기담에 가깝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에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석벽을 탐험하는 중, 장차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리라는 글이 적힌 기이한 책(異書 이서)를 얻어 바쳤다는 것이 가사의 내용인 것이지요. 

이 곡은 추후 무악(舞樂, 즉 댄스곡)으로 편곡되기도 하는데, 그 이서(異書)가 들어맞은 일을 찬양하는 내용의 악장을 지어올려 그 뒤 궁중무용이 덧붙여집니다. 그 대열이 아래그림.
수보록 회무도

유학자인 정도전이 이런 식의 내용을 지어 바쳤다는 것도 조선후기와는 분위기가 다르지만, 이 대화는 매우 흥미롭지요. 우선 태종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몽금척과 수보록은 꿈얘기와 도참설인데 어찌 악장의 첫머리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당시를 대표하는 문신인 조말생이 이런 답변을 합니다. “기린(麒麟)이 태어나는 것도 개나 양과 다르며,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도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보록과 몽금척은 사실 태조가 천명을 받은 명부(命符)인 것이니 악장(樂章)의 첫머리로 삼아도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유학을 고려에 들여온 장본인인 이색의 수제자중 한 명이었던 하륜이 거듭니다. “보록에 관한 말은 신도 들은 적이 있는데, 개국하기 이전에 승려가 얻은 것이라고 하니, 허망한 말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공자가 비록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참설(讖說)을 옛사람이 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태종은 이 둘에게 설득되어 수보록과 몽금척을 악장첫머리에 넣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영정조대에는 이런 분위기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거의 동시기이자 약간 후대인 [삼탄집]에도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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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중반 (삼탄집, 저자: 이승소, 1422~1484년)

[삼탄집(三灘集)]은 조선 초기인 세종에서 성종 대에 이르는 동안 유명한 문인인 삼탄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시문집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탄집
성후가 나에게 말하기를, 괴력난신(怪力亂神)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지 않았던 바이다. 후세 사람들이 장차 이것을 보고 나를 비난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성인의 글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어찌할까?”

하였다. 이에 내가 대답하기를,

“《주역(周易)》에는 용도(龍圖)가 실려 있고, 《서경(書經)》에는 귀문(龜文)이 실려 있고, 《시경(詩經)》에는 〈현조(玄鳥)〉와 무민(武敏)을 노래하였고, 예(禮)를 기록하는 자는 사령(四靈)의 영험을 기록하였고, 역사서를 쓴 사람은 육익(六鷁)이 나는 것을 썼는데, 성인께서 경전(經典)을 편찬할 때 이들을 모두 그대로 두고 없애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어찌 이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천하의 이치는 한이 없고 사물의 변화도 이와 더불어 한이 없으니, 한 가지만 가지고 고집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육경(六經)의 내용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서 궁벽한 것을 찾으며 괴이한 짓을 행하는 말에 의혹될까 염려하신 것이다.

만일 먼저 육경의 도리에 밝아서 학문이 이미 정대고명(正大高明)한 경지에 나아갔다면, 비록 길거리의 얘기와 뒷골목의 말같이 아주 저속한 것이라도 모두 이치가 담겨 있어서 반드시 나를 일깨워 주는 도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한가하고 울적할 즈음에 이것을 얻어서 읽으면 옛사람과 함께 한자리에 앉아 담소하면서 희학하는 것과 같아서 무료하고 불평스러운 기분이 얼음 녹듯이 확 풀려 족히 흉회를 깨끗이 씻어 맑아지게 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한번 팽팽하게 당겼다가 한번 늦추어 주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 패관(稗官)이란 관직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이며, 소설가 역시 후세에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성후가 그렇겠다고 하였다. 이에 이를 인하여 그대로 써서 성후에게 준다.

이 이야기는 '신태평광기의 서'라는 글에 대한 것으로 이 글은 동시대 세종대의 문인인 성임(成任, 1421~ 1484년)이 지은 것입니다. 실은 여기 등장하는 '성후'가 바로 이 '성임'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이승소와 성임의 대화가 됩니다. 성임, 이 양반은 아예 중국의 지괴류의 대표문헌대작인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모방하여 고금의 이문(異聞)을 수집하는 일을 한 분인데, 그 첫머리가 이렇게 됩니다.

"유학자가 성리(性理)의 근원을 밝히고 고금의 변천에 통달하여, 자신의 몸을 닦아 천하와 국가에 실시할 수 있는 것은 경전과 역사서뿐이다. 이것을 내버려 두고서 다른 것에서 구한다면, 곧 우리의 도를 버리고 이단(異端)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는 무궁하고 사물의 변화 역시 그와 더불어 무궁하다. 그러므로 경전과 역사서 이외에 또 백가(百家)와 여러 학술의 유파가 있어서, 각기 자신들의 소견에 따라서 학설을 세우고 책을 저술하였다. 이것들이 비록 모두 성인의 경전과 합치되지는 않으나, 반드시 일단의 볼만한 것이 없지는 아니하여서, 오히려 견문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기에 충분하며, 도가 지극히 커서 어느 곳에나 있다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유학자가 폐해서는 안 되는 바이다. 이것이 바로 《태평광기(太平廣記)》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매우 흥미롭지요. 유학자가 파고 들 책은 경전이지만, 천하의 이치가 신묘하고 무궁하므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또 공자나 맹자와는 달라도, 견문을 넓혀줄 것이며 도는 지극히 커서 여러 곳에 있을 수 있고 유학자라 해서 이런 글들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본 유학자로 보자면 '파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삼탄집에 실린 대화에서도 이 주장이 그대로 보이는데, 성임이 친구인 이승소에게 "태평광기같은 지괴류 책을 요약해서 낸 걸 유학자가 이런 일을 한다고 비난하지 않을까?"라고 걱정하자, 이승소가 "공자 맹자등도 당대에 이런 글들을 없애지 않았다. 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고 천하의 이치는 끝이 없으므로 한가지 (유학)만 가지고 이를 논할 수는 없다 (놀라운...). 유학자들은 물론 유학경전들을 밝게 먼저 알아야 하지만, 시장이나 뒷골목 이야기도 알아야한다. 또한 울적한 기분이 들때 이런 지괴류 이야기를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니 분명 좋은 일이다. 예로부터 소설등이 남아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라는 답변을 합니다.

확실히 지괴류 저서에 대해 포용적인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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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후반 (추강집(秋江集), 저자: 남효온(南孝溫, 1454~1492년)

다음은 조금 더 후대지만 역시 15세기중후반의 글입니다.

추강집 / 논(論)
귀신론(鬼神論)

혹자(或者)가 효온(孝溫)에게 묻기를 “귀신은 천지간에 아득하고 황홀하여 있으면서도 없는 듯하며 실(實)하면서도 허(虛)한 듯하며 바라보면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에 있으며 여기를 가리키면 저기에 있으니, 그대는 한번 나를 위해 밝혀보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이렇게 응답하였다.
“귀신의 이치가 깊은지라 공자가 말하지 않은 것이고 (괴력난신), 자로(子路)가 듣지 못한 것이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겨우 말한 것이거늘 나처럼 변변찮은 말학(末學)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르는 것을 알려면 돌아가는 것을 알지 않을 수 없고, 삶을 알려면 죽음을 알지 않을 수 없으니, 마음 가운데서 구하고 사물에 나아가 상고한다면 이 이치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귀신의 모습이 크고 작다거나 희고 검다거나 하여 구별할 만한 형상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천지가 천지가 된 까닭과 인물이 인물이 된 까닭은 귀신 때문이니, 애당초 구별할 만한 형체가 없다. 크고 작은 것도 하나의 귀신이고, 검고 흰 것도 하나의 이치이다. 교제(郊祭)를 지내면서 정성을 다하면 천신(天神)이 저절로 이르고, 사당에 제사 지내면서 정성을 다하면 인귀(人鬼)가 저절로 흠향하는 것이다. 산천(山川)ㆍ사직(社稷)ㆍ오사ㆍ팔사(八蜡)의 귀신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중용》에 ‘정성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구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은 형상이 없고 기만 있는가?”
“담연(淡然)한 가운데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 법이니, 애당초 어찌 기가 있겠는가. 이일 따름이다. 다만 제사 지내는 사람이 정성으로써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 정직하게 하고, 강신주(降神酒)를 부어 어둡고 말없는 속에서 찾으면 그 물(物)이 있게 되나니, 이것이 곧 기인 것이다.”

남효온 (1454~ 1492년)이 지은 [추강집]에는 남효온이 어떤 이가 '귀신'에 대해 묻자 대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보면 귀신의 이치가 '깊어서' 공자가 말하지 않았다 (괴력난신)이라는 대답과 함께 귀신의 형체와 내용에 대해 그냥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나름의 성찰에 입각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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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다음은 16세기로 넘어갑니다. 필자가 찾아낸 수많은 요괴류가 있던 시대이지요 (16세기 조선요괴 일부- 태그). 이 시기가 되면 슬슬 괴력난신이 이데올로기화되는 모습과 아직은 Flexible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혼재된 것이 보이지요.

금계집 외집 
잡저(雜著)
도원에 대한 논변〔桃源辨〕

아, 세교(世敎)가 분명하지 밝지 않으니 이설(異說)이 따라 일어난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허무한 가르침이 앞에서 창도(唱導)하고,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우원하고 괴상한 무리들이 뒤에서 부화뇌동하니, 삼신산(三神山)과 십주(十洲), 고야(姑射)와 마고(麻姑) 같은 황당한 말과 우언(寓語)은 사람의 귀를 쫑긋 놀라게 하지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 말하는데 불과하다. 

오유자(烏有子)에 관한 이야기는 창시한 사람은 없고 한 사람만 있으니 귀먹고 눈먼 후인들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체로 죽고 사는 것은 정상적인 이치이다. 낮과 밤이 필연적인 것과 같으니 과연 세상을 초탈하여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본 자가 있는가? 경사(經史) 이외에 괴이한 일을 기록한 책은 기괴한 사실을 파헤쳐 세상을 미혹시키는데 힘쓸 뿐이니 과연 사실을 모아 믿을 만한 것을 전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는 괴인한 것과 귀신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맹자는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황준량 (黃俊良, 1517~1563년) [금계집]을 통해 노자와 장자의 도가류 이야기를 허황된 것이라 규정하고 세상을 미혹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요즘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유학자의 목소리가 거의 처음 나옵니다. 

조금 더 후대인 이식(李植, 1584~ 1647년)의 [택당집]에는 매우 자세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거꾸로 보자면 황준량이나 이식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이 시대까지도 민간에 도가적 괴담, 기담류가 매우 풍부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속'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지요.

택당집

연사(演史 역사 소설을 말함)의 형식으로 지어진 것들은 처음부터 아이들 장난과 같아서 그 문자를 보더라도 비속(卑俗)하기만 하니, 진정한 역사를 어지럽힐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일단 오랜 세월 속에 유전(流傳)되어 오고, 그리하여 진짜 사실과 가짜 이야기들이 뒤섞여서 병행되어 오는 동안, 거기에 실린 말들이 꽤나 유서(類書)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문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또한 자세히 살피지도 않은 채 혼용(混用)하는 경우도 있다 하겠다.

위에서 말한 근거가 되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바로 16세기 당시 '삼국지연의'만 사람들이 봐서 진수의 진짜 '삼국지'가 묻혀버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진시황제가 했듯 이런 책들을 금단해야하는게 아닌가까지 가고 있지요 (이데올로기화).

예컨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로 말하면 마반(馬班)에 버금가는 사서(史書)라고 할 것인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은폐된 나머지 사람들이 더 이상 보지 않는 책이 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는 역대(歷代)에 걸쳐서 각 시대마다 연의(演義)가 나와 있는데, 심지어는 황조(皇朝)가 개국(開國)하면서 만든 성전(盛典)에도 연의에 나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채용해서 부연(敷衍)한 기록이 실릴 정도였으니, 진(秦) 나라 시대에 책을 불태웠던 것처럼 국가에서 통렬히 금단(禁斷)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호지도 비판합니다. 도둑들이 실제로 보는 책이라고... 홍길동전도 허균이 수호전을 보고 만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 시기가 되면 15세기의 문신들과 달리 '실증적'으로 괴담, 설화등을 분석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바로 아래가 그런 모습입니다. 

고서(古書)를 보면 괴이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고 문장이 또 유달리 기이하기만 한데, 그것들 역시 멀리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초사(楚辭)》나 《산해경(山海經)》 등의 책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우순(虞舜)이 창오(蒼梧)에서 붕어(崩御)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또한 비판한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초사》는 조금쯤 의거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에 구의(九疑)에다 사당을 세우고서 그 이야기를 천고토록 전해 오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두 여인의 반죽(斑竹) 등에 대한 설은 모두가 근거 없는 허탄(虛誕)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순 임금이 유묘(有苗)를 몸소 정벌하는 과정에서 동정(洞庭)에까지 이르렀을 것이고, 교화를 받은 그 땅의 만이(蠻夷)들이 순 임금을 추모하여 제사를 올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을 것인데, 초(楚) 나라 땅의 풍속이 워낙 황당하고 허탄했기 때문에, 순 임금이 붕어하던 해에 실제로 형초(荊楚) 땅에 있었다고 그냥 말해 버린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근사(近似)한 자취가 그래도 있었던 만큼, 내용을 부풀려서 꾸미기도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이런 식의 분석을 이어나가지요.

내가 일찍이 하나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즉 영남(嶺南) 땅 계주(桂州)에 한 고조(漢高祖)의 사당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앞으로 흐르는 큰 냇물의 본래 이름이 유계천(流桂川)이었는데, 그것은 양쪽 언덕에 모두 계수나무가 서 있어서 꽃잎이 온통 물속으로 떨어져 함께 뒤섞인 채 흘러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유계(劉季 한 고조 유방(劉邦))라는 이름과 그 냇물의 이름을 착각하고는 사당을 세우기까지 한 것이니, 남방의 음사(淫祠 미신에 근거해서 세운 사당)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종류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니 구의에 사당을 세운 것쯤이야 괴이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이 칠석(七夕)에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난다는 이야기를 비판하며 지은 글을 보면, 그 주장과 논리가 매우 정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괴이한 이야기들로 말하면 비단 견우와 직녀의 일뿐만이 아니다. 가령 달 속에 항아(姮娥)와 계수나무와 옥토끼가 있고, 해 속에 금까마귀[金烏]가 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 경전(經傳) 속에까지 버젓이 끼어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나는 평소에 잡서(雜書)는 아예 보지 않을 뿐더러 글을 지을 때에도 가능한 한 위조된 설들은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수나무나 옥토끼 같은 문자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써서 집어넣고 있으니, 하물며 다른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성리학이 이데올로기화되어가는 조짐이 조금씩 16세기가 되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漢) 나라 이후에도 허탄(虛誕)한 이야기를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가령 숭산(嵩山)에서 만세 소리가 세 번 들렸다는 이야기는 본래 방사(方士)가 무제(武帝)를 기만하기 위해서 꾸며낸 것인데, 지금 조정에서 의례(儀禮)의 큰 절목(節目)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태평광기에 대한 의견도 100년전과는 판이합니다.

잡가(雜家)의 소설(小說) 가운데 《태평광기(太平廣記)》와 같은 종류를 읽다 보면, 그 사이에 남녀에 관한 풍요(風謠)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그래도 관상(觀賞)하면서 채택할 만하다고도 하겠다. 또 그 밖에 황당하고 괴기한 이야기들도 그런대로 한가한 시간을 때우고 졸음을 방지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이야기들이야 독자들을 진짜 사실과 혼동시킬 염려는 없다고 하겠으나, 그래도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런 책들을 읽느라고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문단을 보면 이식 본인이 워낙 이런 류의 잡저나 잡기를 싫어하던 인물이라 이렇게 엄격한 사견이 있었을 가능성이 다음에 나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약한 데다가 외진 시골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책을 널리 구해서 보지도 못했고 글을 제대로 숙독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오직 경전(經傳)과 선유(先儒)의 의리에 관한 설을 대략 연구하는 한편,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정사(正史)를 통해 우주 사이의 의리와 시비라든가 정치의 득실에 대해서 빠짐없이 한 번 열람해 봄으로써, 이 세상에 나와 나름대로 품은 큰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잡서(雜書)를 일절 보지 않았음은 물론 평상시에도 장기나 바둑 같은 잡기(雜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6세기는 이런 저런 의견들이 혼재되어 있었고, 아직 괴담- 기담류가 힘을 발휘하던 시대 (필자가 발견한 수많은 기담류만 보아도)였음은 아래에 분명히 나옵니다. 즉, 이런 '괴력난신'의 이데올로기화는 임진왜란이후인 17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일어났음을 아래 굵은 체에서 느낄 수 있지요.

하지만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비롯해서 정주(程朱)의 전서(全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남독(濫讀)하며 그냥 훑어본 것일 뿐이라서 기억 속에 남아 있질 않았으며, 나이 40이 지난 이후에는 또 도시(都市) 속에서 정신없이 지내느라 마침내는 완전히 손에서 책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후생(後生)들을 보면, 비록 내가 공부한 것처럼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바둑과 장기를 취미로 삼는 이외에 또 잡서 보기를 좋아하고 있으니, 성현의 글을 공부할 틈이 어디 있기나 하겠는가.  중략.

즉 16세기에는 소개해드린 황준량이나 이식처럼 슬슬 도가적 이야기, 괴담, 설화, 기담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해서 비판'하는 소수의 유학자도 등장하지만, 아직 민간과 대부분의 지식층이 이런 류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마음껏 즐기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그 유명한 전우치라든가 남사고같은 도술가가 등장하던 시대니까요. 다만 15세기처럼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인정하는 시대는 아닌 듯 합니다.

자 이제 17세기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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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사실 17세기문헌에서는 괴력난신에 관계된 직접적인 기록은 이익(李瀷, 1681~1763년)의 [성호전집]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성호전집 제1권 / 시(詩)
도원행(桃源行)

군자는 평상의 것만 말하고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나니 / 君子語常不語怪
만 가지 거짓이 어찌 한 가지 진실을 현혹할 수 있으랴 / 萬僞何能眩一眞
한공이 이미 스스로 황당한 일로 치부했건만 / 韓公已自付荒唐
그래도 오히려 도원의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말하누나 / 猶爲桃源說津津

이익은 임진왜란 직후를 전성기로 살아간 인물입니다. 이 글에서 그는 묘한 입장을 보여주는데 '도원행'이라는 무릉도원 (도교 이상향)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군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으며 진실은 하나(유가)지만, 그래도 도원의 이야기는 세상에서는 흥미진진하게 말한다라는 지식층과 일반계층이 따로 노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시대까지도 아직 도가적 이야기는 많이 살아있었고 필자가 아래 글들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필자가 만든  16-17세기 남산북쪽 요괴지도

다만, 이 17세기는 도가적 기담, 요괴류 괴담등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던 시대입니다. 18세기가 되면 각종문헌에서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눈에 띄게 사라집니다. 설화나 기담도 '유교적 필터링'을 거쳐 그 가치에 부합하는 이야기만 (효, 충, 우애 등)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화집이 20세기초부터 현대한국사회의 주류 설화담론이 된 감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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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제 이미 우리의 전통프레임과 많은 부분 일치하는 18세기입니다. 실학자(이 단어는 좋아하지 않지만)로 유명한 안정복(安鼎福, 1712~ 1791년)의 [순암집]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순암집(順菴集)

《진서(晉書)》에 보면, 왕탄지(王坦之)가 중 축법사(竺法師)와 신분을 초월한 친구였는데 늘 천당과 지옥에 대한 의심이 있어 먼저 죽은 자가 와서 알려 주기로 서로 약속을 했던 바, 하루는 축법사가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이미 죽었는데, 지옥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고 다만 해야 할 일은 도덕을 부지런히 닦아 하늘로 오르는 일이오.” 하더라고 했네. 그렇다면 지옥이 없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지옥)이 있고 없고를 굳이 따질 것 없이, “성인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괴(怪)란 드물게 있는 일을 말하고, 신(神)은 무형의 물체를 말한 것으로 드물게 있는 일이나 무형의 물체를 계속 말하게 되면 그 폐단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성인이 그래서 말씀하지 않았던 것일세. 그리고 우리 유자들이 상제를 섬기는 도리로 말하면 상제가 내려 주신 성품, 하늘이 명하신 성품, 그 모두가 다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서 나의 고유의 것이 아닌가.

위의 글에서 보시다시피 이 시기는 이미 괴력난신은 아무런 효용이 없는 타파해야하는 악질적인 대상입니다. 다음의 글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년 1월 25일)의 것으로 이때가 되면 민간의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찰의 설화적 성격이 강한 [사적기]까지 비판하고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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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3권 /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사적기(事蹟記)

이때 거제도 바다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모를 큰 배가 떠 있고 그 안에는 팔만대장경이 가득하게 실려 있었는데, 모두 금은으로 된 글자이었다. 왕은 온 나라 안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거인과 함께 섬에 가서 간행하고 합주 해인사로 옮기어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해인사는 바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선생(李先生 저자 이덕무(李德懋) 자신을 가리킨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부자(夫子 공자(孔子))는 일찍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으니 군자가 어찌 괴이한 것을 말할 수 있으랴? 말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거든 하물며 서책에 올리는 것이겠는가?”

장화(張華)의《박물지(博物志)》, 간보(干寶)의《수신기(搜神記)》, 왕자년(王子年 자년은 왕 가(王嘉)의 자)의《습유기(拾遺記)》, 단성식(段成式)의《유양잡조(酉陽雜組)》, 소식(蘇軾)의《구지필기(仇池筆記)》 등이 나오면서 괴이한 것을 말한 것이 많이 나왔으니, 이것은 기록 으로 허탄한 데에 빠진 것인데 따라 믿은 것이다. 지금 내가 팔만대장경을 기(記)하는 것은 허황되게 속이는 것을 꾸짖어 유괴(幽怪 어두워 나타나지 않는 괴이한 것)를 말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려는 것이다.

즉,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연유에 거제도와 관련된 이런 설화가 있는데 이따위 글은 공자의 괴력난신에 따라 도저히 '해인사 팔만대장경 사적기'에 실어선 안된다라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지요. 15세기초 하륜이나 조말생 선생과 이덕무가 같은 유학자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엄청 싸웠을 듯...

같은 시기 유학자인 위백규(魏伯珪, 1727~1798년)의 존재집에도 주목할 기록이 나옵니다.

존재집
도가(道家)에서는 옥경(玉京)이나 월궁(月宮)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지부(地府 저승)나 용궁(龍宮)을 말한다. 당나라 이래로 그런 말이 점차 사실인 것처럼 되어 왔으나, 진실인지 허망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오직 정자와 주자의 말이 정론이겠지만, 역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서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설사 그들의 말이 정말 그런 일이 있어도, 세속 풍습이 괴이한 것을 좋아하고 또 게다가 장생(長生)과 화복(禍福)에 대한 욕구가 있어서 군자가 앞서 이끌면 온 세상 사람이 파도처럼 달려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성인(聖人)이 괴이한 일과 신령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즉, 이제는 여염거리에서 떠도는 [태평광기]류나 [삼국지연의]같은 소설뿐 아니라, 아예 도가 불가등에서나 등장하는 용궁같은 아이템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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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초반

그리고 19세기 초반이 되면 본격적으로 '무당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나옵니다.

협리한화 조목 〔峽裏閒話 六十五〕
괴력난신(怪力亂神)은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며,제(齊)나라 동쪽 야인(野人)의 말은 맹자께서 취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설은 괴력난신이나 동쪽 제나라 야인의 말보다도 더 지나친 것으로, 단지 무당들이 사람들을 우롱하며 재물을 탈취하는 거짓 언설일 뿐이니, 어찌 세상에 전할 만한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허무맹랑한 것을 좋아하는 세상 사람 중에는 신기해하며 정말로 믿는 사람도 있으니, 이는 무슨 이유인가.

윤기(尹愭, 1741~1826년)의 [협리한화]에 나오는 것으로 이 책은 1815년 저자가 75세 때 처가인 경기도 양근(楊根)의 산골로 이사한 뒤에 지은 것입니다. 이 윤기의 말은 그대로 20세기 현대한국에서 무당이나 기담류를 바라보는 시각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도가류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각과는 꽤 다른 시각이 되어 있지요 (그들에게는 도가적 이야기나 본격괴담등을 흥부이야기처럼 전통문화로 바라볼 뿐 우리식의 실증적 '네거티브한 시선'자체가 그다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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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상으로 여말선초부터 19세기초에 이르는 몇몇 문헌기록을 통해 '괴력난신'이라는 공자의 구절이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이해되고 교조화되어왔는지를 간략히 살펴봤습니다.

아마도 모르면 모르지만 18세기의 위백규나 윤기는 경복궁 대문의 '거구귀'를 통해 과거에 급제한 조선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신숙주(申叔舟, 1417~1475년)와는 정신세계가 완연히 달랐을 것입니다. 


대동기문
신숙주(1417-1475)의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그 이듬해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중략. 

신숙주가 젊었을 적에 경복궁 정시에 응시하러 갔는데 이른 새벽에 커다란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대궐 문 앞에 있어서 모든 응시생들이 다 그 입을 통해 들어갔다. 이때 신숙주는 눈을 부릅뜨고 당당히 서서 그 괴물을 응시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 하나가 신숙주의 옷소매를 잡고 물었다.

"공은 저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을 보았소? 그것은 내가 조화로써 만들어낸 괴물이니 공은 잘 간직하시오"

신숙주는 그 괴물과 함께 집에 돌아왔는데, 그 괴물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신숙주가 앉으나 누우나 항상 함께 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그에게 자기의 밥을 나누어주면 씹는 소리는 들렸지만 밥그릇은 줄지 않았다. 그 괴물은 신숙주의 집안에 일어날 모든 일과 과거의 합격 여부를 신숙주에게 미리 다 알려주었다. 신숙주가 사신으로 일본에 갈 적에 이 괴물을 시켜서 먼저 뱃길의 깊고 얕음과 거리를 알아 오도록 시켰기 때문에 신숙주는 먼 뱃길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신숙주는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겨 부탁하였다.

"내가 죽더라도 이 괴물에게 따로 제사를 차려 주어라"

그 자손들은 신숙주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의 제삿날이면 반드시 따로 한 상을 차려서 괴물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신숙주 생시에 세조는 늘 말하였다. "환공과 관중, 한고조와 장량,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나와 숙주의 관계와 같다". 세조 3년에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충이다. 성종묘에 배향하였다.

이런 인물들을 단순히 '유학자'라는 프레임으로 묶어서 봐야 하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덧글

  • 응가 2018/06/23 20:43 #

    이런 글을 보니 구한말에도 명성황후와 엄귀비가 무속을 숭상해 궐내에서도 굿판이 벌어진 이유를 알법도 합니다.
    무속도 자세히 알아보니 체계가 잘 잡힌 그야말로 '종교'더군요. 그리고 신기한 점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임경업장군은 서해바다, 연평도 앞바다의 수호신으로 황해도, 인천지방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고 사도세자는 뒤주대왕이라 하여 집안의 평화를 책임지는 신으로 모셔지더라구요.
  • 역사관심 2018/06/26 04:48 #

    그런 일이 또 있었군요. 무속은 알아보고 싶어도 뭔가 '무서워서' 자꾸 꺼려져요;;; 굉장한 컨텐츠가 있을거란 생각은 늘 합니다만. 이렇게 알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앞서나가는 아이스크림 2021/07/27 13:01 #

    근데 조선후기 민간에서 온갖 흉흉한 소문이 많이 돌고(을사늑약전에 용머리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기록되어 있고)서민들이 즐겨보는 고전소설에서도 비현실적인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 민간에서는 많이 괴력난신적인 얘기가 성행한것 같은데요.
  • 역사관심 2021/07/28 06:04 #

    네, 민간에서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겠지요. 다만, 상류사회에서 배척하던 분위기였던지라 조선전기에 비해 문헌기록으로 남은 양이 턱없이 부족해집니다. 더군다나 이웃국과 비교하면 중기를 기점으로 회화작품들이 많아지는데 비해 우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지요. 기록을 남기는 계층에서 향유하던 분위기가 사라져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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