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건축은 언제까지 현전했나? 네 가지 문헌기록들.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현재 우리에게는 삼국시대는 커녕 고려시대의 건축물도 거의 현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비슷한 길이의 역사를 가진 국가들은 우리와 사정이 다르지요. 7세기, 10세기, 12세기 건축물들도 전하는 것이 꽤 많습니다. 그럼 왜 언제 우리의 고대 건축들은 이렇게 대규모로 사라졌을까요?

필자가 지난 10년여간 살펴본 바로는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사건은 역시 16세기말 1592~1598년의 임진왜란입니다. 고대-중세 대규모 건축중 이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건축은 거의 없을 정도로 깊은 산중의 사찰들까지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시기입니다.

우리의 고대건축은 과연 언제 사라졌나라는 질문은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고대건축은 언제까지 현전했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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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기록
1) 12, 15, 16세기초 복령사 (福靈寺) 전각들에 대한 기록들

오늘은 필자가 발견했던 네 개의 기록들을 모아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오래전 사라진 신라고찰 복령사 기록인데, 흔치 않은 '신라대 건축의 조선시대 기록'이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꽤 흥미를 끌만 합니다. 필자가 소개했던 (연대별로) 12세기 김극기의 싯구와, 1477년의 성현의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이 알려진 1502년 박은의 싯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모두 불전 관련 부분만 발췌):

복령사- 김극기 (12세기)
넓고 넓은 큰 현묘한 고향에, 
높고 높은 불당[虛白堂] 있는 것이
달빛 아래 청정한 모습 장엄하고, 
무지개 채색 원광(圓光)이 빛나누나

복령사 벽에 있는 시에 차운함 - 성현成俔 (1477년)
절집의 문을 여니 
갑자기 우뚝하게 황금을 입힌 동인 (동불)이 서있고
누각들은 높이 솟아
크고 작은 푸른 나무들을 압도하고 있네

복령사- 朴誾(박은) (1502년)
伽藍却是新羅舊 가람은 실로(도리어) 신라시대 옛 건물 
千佛皆從西竺來 천불상은 다 축국에서 가져온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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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포스팅에서 마지막 박은의 시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드린바 있는데요.

박은은 우선 조선전기인 1479~ 1504년의 인물입니다. 그가 이 시를 지었을 때가 24세때로 (즉 1502년) 대강 연대로 짐작해 적어도 15세기초까지 신라의 건축물이 당대의 복령사에 남아 있었음을 추정해 볼수 있습니다. 즉, 최소 당시까지 이미 500-600년이상 된 건물들이었겠죠. 물론, 박은이 건축전문가도 아니지만 당시 조선의 연대추정능력을 믿는 다는 가정을 하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사실 15세기에 박은이 보았던 이 건물이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불전'인지, 아니면 '창건년대가 신라'이고 그 후 중건된 건물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었습니다 (복령사는 1309년 일부 중건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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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라고찰 단속사의 건물들의 15세기후반기록

이 기록은 신라후기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초기의 문집내용을 담은 [속 동문선]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일종의 기행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문인들과 명사들의 글이 담긴 전집성격의 저작입니다. 위의 기록은 조선전기 김일손(金馹孫, 1464 ~ 1498년)이라는 사람의 글로 '두류산', 즉 현재의 지리산을 탐방한 글이 됩니다. 

이 김일손이 지리산을 기행하고 쓴 '속두류록'중 발췌한 부분인데 여기 신라시대의 사찰로 보이는 고찰(당시에도 고찰)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단속사(斷俗寺)입니다. 단속사는 최소 763년에 지어진 고찰로 김일손이 이 사찰을 들른 시점에서 이미 700년이 지난 고찰입니다. 이 단속사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라최고의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보존되어 있었기도 합니다.

남아있었다면 여러모로 고대-중세 산중사찰의 면모를 전해줬을 단속사는 역시 조선후기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1999년 발굴은 되었지만 민가가 들어선 사역은 아직도 미지의 구역입니다. 하지만 김일손 선생이 여행했던 15세기 중엽에는 오래되어 허물어지는 건물도 있었지만 신라시대-고려시대의 건축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단서중 하나가 이 두 부분.

문에 들어서니 옛 불전(佛殿)이 있는데 구조가 심히 완박하고, 벽에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사는 중이 말하기를, “신라 신하 유순(柳純)이란 자가 국록을 사양하고 몸을 바쳐 이 절을 창설하자 단속(斷俗)이라 이름을 짓고, 제 임금의 상(像)을 그린 판기(板記)가 남아 있다.” 한다. 

내가 낮게 여겨 살펴보지 않고 행랑을 따라 걸어서 장옥(長屋) 아래로 행하여 50보를 나가니 누(樓)가 있는데, 제작이 매우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오히려 올라 구경할 만하였다. 

즉, 고불전 (옛불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완박'하다는 표현은 번역자의 해석으로 정확하게는 다음의 한자입니다.

礱 갈 롱 (갈다 찧다) 斵 깎을 착 

즉, 옛불전이 깎여있다라는 뜻으로 고건축물이 세월에 깎여나간 모습이 됩니다. 또한, 승려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벽화라는 부분에서 조선시대보다는 최소 고려시대의 벽화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로 "행랑을 따라 긴 건물(장옥)아래로 나가니 '루'가 있는데 제작이 아주 오래되어 대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다"라는 부분입니다. 예전에도 몇번 다루었지만 사찰에 행랑이 있던 구조는 역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더 유행했던 양식입니다. 또한 누각이 대들보/기둥이 매우 오래되어 삭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어 조선전기에도 이미 '고건축'이 많았던 사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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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세기말~ 15세기중반의 경주의 웅장한 모습 (백률사에서 바라본)

비슷한 시기 (즉, 여몽전쟁이전)에 해당하는 기록이 더 있습니다. 바로 당시 경주에 있던 '백률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시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15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의 기록이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慶尙道) 백률사(栢栗寺) 
금강산(金剛山)에 있다. 전단(栴檀)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새벽에 작은 누(樓) 머리에 일어나서, 발[箔]을 걷고 하늘을 쳐다본다. 누(누각) 아래는 곧 계림이니, 기괴한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고. 늙은 나무에 연기가 부슬부슬, 일만호(一萬戶)에 비꼈네. 흰 구름은 동쪽 산에 날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달린다. 우뚝 솟은 황금절들, 서로 바라뵈며 아침 햇빛 따사롭구나. 반월성(半月城) 가운데 빽빽하게 서 있는, 꽃과 대[竹] 이제는 주인이 가고 없네.  중략.

정지상 (鄭知常 ; ?~1135년)은 11세기에서 12세기초의 인물입니다. 이 기록이 고려대의 백률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데, 여기 보면 새벽에 누각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바로 곧 "계림" (즉 경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괴한 것들이 전경에 가득하고, 일만호의 수많은 가택들과, 동쪽으로는 산이 서쪽으로는 '포구'가 있어 물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구절로 또한 '황금절'들이 우뚝우뚝 서로 바라보며 서있다고 되어 있어 11세기말-12세기초 당시의 경주의 핵심지역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곳이 핵심지역임은 추후 설명하지요. 또한 고려시대답게 사찰과 '차'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도 등장합니다. 위의 구절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그의 시의 일부를 인용했던 것이고 정지상의 시의 전체중 의미깊은 구절을 살펴볼까요.

백률사 전각에서

새벽에 일어나 다락맡 발을 걷고 하늘을 바라보니, 
다락 밑이 곧 계림이라. 기이하고 괴이함을 헤아릴 수 없구나. 
싱싱한 나무 뿜는 기운 골마다 자욱하고 거리는 바둑판 같도다.

흰 구름 동산에 날고 푸른 물 서쪽 개로 달리도다.
우뚝우뚝 황금 절집 해돋는 아침에 서로 바라보며
월성 안에 삼삼히 벌려진 꽃들과 대나무 이제는 주인 없어. 
중략.

여기 아주 중요한 팁이 두가지 등장합니다 '거리가 바둑판같도다'라고 경주시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 우리가 요즘 흔히 상상하는 바둑판으로 계획된 경주시가지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11세기말) 월성내에 지금과 달리 대나무와 꽃들이 만발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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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집에 다음대의 인물인 '전사경'과 '박효수'의 백률사와 경주시내에 대한 묘사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음을 보시죠.

 전사경(全思敬)의 서루기(西樓記)에, 계림(鷄林)에 있는 누관(樓觀)들 가운데에서 백률사의 누가 가장 훌륭하다. 선유(先儒) 정지상(鄭知常)의 무리가 시를 지어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절을 창시한 연월(年月)은 고증할 길이 없으나 쇠잔하고 황폐함이 이미 심하여 경치와는 서로 걸맞지 않는다. 영평군(鈴平君) 상국(相國) 윤승순(尹承順)이 부윤이 되어 온지 2년 만에 왜구가 물러가자 군사들은 오랫동안 한가하였다. 

절의 주지 견해(見海)와 부(府)의 판관(判官) 심우경(沈于慶)과 함께 중수할 것을 계획하고,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김정미(金精美)와 안일(安逸) 김군자(金君子)에게 명하여 수졸(戍卒)을 거느리고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일의 향배(向背)와 더하고 줄이는 것을 적절히 조절한 것은 모두 윤공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등림(登臨)하고 관람(觀覽)하기 좋은 것이 옛날보다 배나 더하였다. 이 절은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어 왕실의 복을 비는 곳이며 사대부들이 항상 왕래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신라 고도의 웅장한 풍경과 멀리 트인 조망이 모두 이 누에 모여 있다.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가 아니면 누가 퇴폐된 낡은 건물을 헐어버리고 화려한 새집을 지어서 사방의 유람객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겠는가. 불전(佛殿)을 수리하여서 부처에게 복을 바라는 것 따위는 윤공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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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경은 고려말 (14세기)의 인물로, 이 분이 쓴 '서루기'라는 책에 계림 (아마도 경주를 표현한 듯)에 있는 누관중 백률사의 누각이 가장 훌륭하다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지요. 글중 나오는 백률사의 '중수'는 1377년의 일입니다. 따라서 14세기에 신라시내를 내려다보는 좋은 위치로 백률사가 선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몽골침입이후의 기록으로 '신라고도의 웅장한 풍경'이 이때에도 어느정도 남아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비슷한 시기의 박효수 부분은 더 자세히 14세기당대의 경주시내 모습을 보여줍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내 걸음이 아름다운 시절에 미치니, 봄 산에 두견새 소리 들리네. 붉은 깃발이 돌아가는 길 인도하니, 옛 풍속의 예절이 남아 있구나. 푸른 솔 그늘에서 길 비키라 소리치고, 종(鍾)을 두드려서 구름 속의 사찰문을 연다. 보타산(補陀山)에 오른 것 같은데, 불전(佛殿)이 은포(銀浦) 스쳤었네. 흰 꽃이 사계절 항상 피어 있어, 향기가 언제나 봄날 같구나. 거주하는 스님 오직 두세 사람, 누가 향화(香火)의 주인(主)인고. 

멀리 조망하려고 서루(西樓)에 오르니, 처마와 기둥(도리)이 날고 춤추는 듯. 남쪽 트인 곳에 반듯한 거리마다 집과 절이 늘어섰네.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이라 금찰(황금절집 金刹)들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세어보니 열에 아홉은 되는 듯. 성적(聖跡)이 세속에 섞여 있어서, 지나가는 길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도다. 제일가는 큰 저택과 구슬로 된 궁궐들이, 전란(몽고병란 戰亂) 뒤엔 돌밭을 이루었구나. 법당 안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있으니, 묘한 조화가 비할 데 없다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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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수는 14세기초, 즉 고려말기의 문인입니다. 이 분이 백률사에 있던 전망좋은 누각으로 유명하던 '서루'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반듯하게 계획된 거리마다 인가가 조밀하고, 금찰(금색사찰)들이 즐비한데, 인가사이에 '열에 아홉'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주택사이에 절들이 즐비해서 (성적이 세속에 섞여), 지나가는 관광객(손님)들이 구경하기 바쁘다고 묘사되고 있지요. 

아주 중요한 구절이 그다음에 나오는데 "큰 저택과 구슬로 된 궁궐들이, 전란(戰亂) 뒤엔 돌밭을 이루었구나"라는 구절로 보아, 여몽전쟁 이후 망가진 모습이 사찰들과 달리 황페해진 일부 대건축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14세기초중반 인물인 그 정인지(鄭麟趾, 1396~ 1478년)가 기문에서 당시 경주에 대해 다음의 표현을 씁니다.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다.繁華佳麗甲於南方

가장 후대의 기록으로 그 매월당 김시습이 1465년부터 7년간을 경주 남산에 거주하면서 지은 시중 백률사에 대한 시를 두 편 남겼습니다. 즉 오늘 소개한 글중 가장 후대에 속하는 15세기후반의 기록입니다. 역시 비슷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백률사 누각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느릅나무 높고 낮게 흰 안개를 뿜는데
인가와 절집이 이웃하여 잇대 있구나.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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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5세기초 연복사 중창기에 나오는 당대 개성묘사

마지막으로 가장 의미있는 기록은 바로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의 [연복사탑중창기]에 등장합니다. 참고로 권근은 당대 수십미터 높이의 5층전각인 연복사 5층목탑에 꼭대기층에 올라 시를 읊은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가 쓴 이 기문에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등장합니다. 한번 볼까요.

권근

부처의 도는 자비와 희사를 덕으로 하고, 인과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을 징험으로 삼는다. 부처의 말은 지극히 크고 넓어 번역되어 중국에 전해지고, 사해에 파급되어 천년을 끊임없이 이어 왔다. 오래될수록 더욱 성하여 위로는 왕공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필부의 어리석은 자에 이르기까지 복리를 희구하여, 높여 신앙하지 않는 이가 없다. 사원과 탑과 사당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 나라는 신라의 말기로부터 부처를 받들어 섬김이 더욱 삼가하였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고려는 왕씨가 나라를 통합하던 당초부터 신라의 정책을 그냥 사용하고 고치지 아니하여, 신비한 도움이 있기를 기원하여 중앙과 지방에 절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소위 돕는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의 시가의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당사이다. 방언에 당과 대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당사는 또한 대사라고도 부른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칸이 넘는다. 안에 3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을 팠으며 그 남쪽에 또 5층의 탑을 세워서 풍수설에 맞추었다. 그 풍수설은 옛 서적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덧붙이지 않는다. 

왕씨가 나라를 향유한 5백년 동안에는 여러 번 전란과 변고를 겪어서 이 절의 흥폐도 한두 번만이 아니었으니, 이 탑이 파괴된 것이 정확하게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조성하려 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뒤에 광승 장원심이라는 자가 있어서 권력 있는 자와 귀한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여 재목을 베곤 하였으나 마침내는 이루지 못하였다. 공양군이 장수와 재상의 힘을 입어 조종의 왕업을 회복하고 즉위한 뒤부터는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쓰더니 이에 중 천규 등에게 명하여 공인과 장인을 모집하여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신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였으니 옛터를 파헤치고 나무와 돌을 메워서 그 기초부터 견고하게 하였다. 겨울가지 가로 세로 여섯 칸을 세우니 크고도 넓었다. 여러 번 걸쳐서 5층에 이르고 평평한 돌로 지붕을 덮었다. 장차 준공하려 하는데 헌신의 간언이 있어서 중지하려 하였다. 그 때 우리 주상 전하(이성계)께서는 모든 조정의 관원을 통솔하는 지위에 계시면서 공사의 준공을 청하였다. 오래지 않아 공양왕이 임금의 도를 실추하고 스스로 손위하니 대명이 전하에게 모이었다. 중략.

이에 공사를 더욱 부지런하게 독려하여 드디어 공사의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실로 임신년 12월이었다. 계유년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집의 아름답고 훌륭함이 구름 밖에 날아가는 것 같고, 새가 하늘에 비상하는 것 같다. 황금빛과 푸른 색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반공중에 번쩍인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모셨으니, 아래에는 비로자나의 초상을 안치하니, 국가를 복되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길이 만세에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4월에 문수회를 열고 낙성식을 올렸다. 임금이 신 권근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적으라고 하였다. 신은 요사이 삼가 중의 말을 들이니, 탑을 세우는 것은 공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층의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공덕의 높고 낮은 것을 밝히는 것인데 5층 이상은 불탑으로 그가 말하는 공덕보응의 설은 지극히 크고 넓다. 

그런 까닭에 아육왕 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높이 존숭하여 탑을 끊임없이 세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나라 때에 달마가 무제의 절을 짓고 탑을 짓는 일을 물은 것에 대한 대답에는 한 조각의 공덕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제가 마음은 닦지 않고 재력만 소비하였기 때문에 한 발언인 것이다. 지금 연복사의 탑 건립에 재물이 민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력은 농민을 번거롭게 한 것이 아니니 그것이 공덕됨을 어찌 쉽게 헤아려 계산할 수 있겠는가. 공덕이 이미 아름다우니 응보는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인심과 천명이 경사를 함께 하며, 그윽함과 밝음이 함께 힘입어서, 복리와 은택을 영원 무궁하게 미루어 주고 큰 행복을 끝이 없도록 이어서, 나라와 더불어 아름답고 만세에 이르도록 더욱 견고할 것을 진실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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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중후반 부분은 바로 무너진 5층거탑이던 개성 연복사 5층 대목탑(대전각)을 재건한 중창기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이 주제가 아니라 바로 전반부, 즉 당대 14세기말 15세기초 (여말선초)의 '개경'모습에 대한 묘사부분입니다.

寺院塔廟之設。巍嶪相望。彌天之下。吾東方自新羅氏之季。奉事尤謹。城中僧廬多於民屋。其殿宇之宏壯峻特者。至于今尙存。一時崇奉之至。可想見矣。高麗王氏統合之初。率用無替。以資密佑。迺於中外。多置寺社。所謂裨補是已。

사원과 탑과 사당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 나라는 신라의 말기로부터 부처를 받들어 섬김이 더욱 삼가하였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고려는 왕씨가 나라를 통합하던 당초부터 신라의 정책을 그냥 사용하고 고치지 아니하여, 신비한 도움이 있기를 기원하여 중앙과 지방에 절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소위 돕는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상상하던 통일신라대 (혹은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문화종교적 연속성이 그대로 보입니다. 즉, 당대 개성에는 이미 신라의 사찰과 탑, 전각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대규모 건축물들은 지금까지 (즉 15세기 여말선초)그대로 남아 있었다라는 것이 보입니다. 

원문을 다시 볼까요.

其殿宇之宏壯峻特者 그 전각중 거대하고 웅장하고 높고 특별한 것들은
至于今尙存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一時崇奉之至           그래서 당시(신라) 높이고 받드는 일이 얼마나 깊었는지 
可想見矣                  가히 상상해 볼수 있구나.

이 구절은 특히 조선시대가 후기로 넘어가면서 잘 나오지 않는 표현인 '규모의 건축'에 대한 확실한 표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라는 표현은 간단히 말해 '이렇게 대단한 건축들을 만들 정도로 불교적 신앙심이 대단했다'라는 것이며 즉 당대까지 현전하던 건축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게 만드는 묘사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전대(신라, 삼국)의 대건축물들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거기에 오히려 더 많은 사찰을 더 지었다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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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이상으로 필자가 발견한 문헌에 등장하는 신라시대 건축들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예전에 소개한 글중 정보에 조금 설명을 덧붙인 부분과 새로 발견한 기록까지 포함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기록들은 대부분 여말선초, 즉 12세기~15세기,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혹은 전기까지의 기록들입니다. 확실히 불교라는 강력한 정신적 아이덴티티를 공유하던 삼국-통일신라-고려대까지는 건축사적 연속성 역시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유지되던 우리의 고대-중세 건축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그 이후 성리학의 교조화를 거치면서 한꺼번에 혹은 점차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정보가 앞으로 관련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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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응가 2018/06/26 18:46 #

    일본같은 경우 유물, 유적이 잘 보존된 경우가 많으니 부럽더군요.... 하지만 일본같은 경우에도 워낙 전쟁이 잦은지라 재건된 문화재가 한둘이 아니긴 한데 조선같은 경우는 불교의 쇠퇴와 목재수급이 어려워져 목탑같은 대형 건물이 점차 사라진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건축방식과 장식성이 더해져 공포나 화반, 낙양각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되는 방식으로 진화 되는데 일본같은 경우는 중세의 건축양식에서 크게 벚어나지 못했다 라는 글도 어디서 읽어본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8/06/27 01:28 #

    확실히 아직은 희미하지만, 위의 문헌기록 포함 '건축문화'자체에 대한 철학도 바뀌어 감이 보이고, 말씀대로 기후변화, 화전개발등으로 인한 대형목재수급의 난이도증가등으로 200-300년만에 많은 부분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장식성증가에 대한 비교부분은 제 기억에는 김동국 선생의 한중일 건축비교 저서에 나오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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