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생림 전멸의 정확한 시기- 화전(火田) 추가기록 역사전통마

몇 주전 17세기전후의 조선의 숲과 야생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김홍도나 신윤복의 18세기 그림에서 보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음을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우선 당시 소개해드린 김동진박사의 이 표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이 표는 한반도전체의 임목축적량을 계산한 것으로 17~19세기의 기록은 "?"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에서 1910년사이 무려 15배가량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지요. 대체 저 기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김동진박사는 천방의 개발과 화전의 피해때문으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17~19세기는 긴 시간입니다. 저 기간 조금씩 줄어든 것인지, 15세기처럼 유지되다가 단기간 사라진 것인지 한번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김홍도 산수화 (18세기)

오늘은 필자가 추가로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조금 과감하게 어느 시기에 이 피해가 발생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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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포스팅글에서 오늘 글과 관련된 아주 일부만 발췌해 보지요.

대전환, 천방에서 화전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천방과 화전에 대해 논의한 기록을 통계적으로 정리한 표는 15~16세기 천방중심의 농업개발이 17세기 이후 화전중심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준다. 중략. 16세기까지 천방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넓은 무너미땅이 경작지로 바뀌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산지가 많은 지역의 경우 화전개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평전이 적고, 산위나 중턱에 자리잡은 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중략. 전국의 산림지대에서 화전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양란을 거치면서 약화된 국가의 통제력은 중앙의 권세가, 지방의 요호(부호)와 부민층(부유한 백성)을 '경국대전'에서 금지대상으로 삼았던 산허리 이상의 땅으로 이끌었다. 중략.

효종 4년 (1653년, 17세기중반) 이시방은 화전을 '산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해 이민서는 아무리 깊은 산골짜기라도 화전이 없는 곳이 없으며 "높은 산의 울창한 숲을 멋대로 불질러 태우는 바람에 100년이상 기른 것들이 한번에 소진되고, 산은 벌거숭이가 된다"고 했다. 현종 1년 1660년이 되면 "크고 작은 산골짜기 중 7~8할은 화전이 되었다"라고 보고할 정도가 된다.

즉, 평지의 무너미 옥토개발이 16세기이후 본격화되면서 더 넓은 경작지개발을 위해 7할 이상이 산림인 국토특성상 '화전(불로 나무를 태워 경작지를 개발하는 방식)'이 17세기부터 활성화, 전국의 산이 태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의 짐승이 들끓던 굵은 몸통의 활엽수림이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점은 이 화전이 시작된 17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 (1600년대)가 한반도에도 소빙하기가 찾아온 시점이지요. 활엽수가 침엽수림으로 교체되고, 중층건축이 사라지고 온돌난방이 전면화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17~18세기, 화전이 된 숲

17세기이후 18세기무렵, 화전의 불길은 빠른 시간에 넓은 숲을 훼손하고 화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을 정조 20년 (1796년) 순릉직장 소주중 (1753~1802년)은 "우리나라는 본래 산에 의지해 세운 나라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온 산이 모두 화전으로 일구어져 벌거숭이가 되어 전혀 산의 형세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숲의 조선이 화전개간을 통해 벌거숭이 조선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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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火田) 추가기록

오늘은 김동진의 저서와 논고에 나오는 많은 자료외에 필자가 개인적으로 찾아낸 또 다른 극심한 화전의 피해 (즉, 그 전후의 조선 삼림상태)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문헌정보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첫번째 문헌기록으로 17세기의 인물인 백호(白湖) 윤휴(尹鐫, 1617 ~1680년)의 문집인 [백호전서]를 살펴보지요.

백호전서 소차(疏箚)
상전을 사양한 차자[辭賞典箚] 기미년 1월 22일

그리고 요즈음 신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조보(朝報)를 받아 보건대, 산중 백성들의 화전(火田)의 금령(禁令)을 해제하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니, 신은 이에 대해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은 왕자(王者)의 천부(天府)이고 구름과 비가 발생하는 곳이며, 재용(材用)이 생산되는 곳이고 보장(寶藏)이 형성되는 곳이며, 금수(禽獸)가 번식하는 곳이고 백성들이 산 이를 봉양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물자를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리하여 옛날의 왕자(王者)는 반드시 금지하는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고, 또한 명산 대천(名山大川)을 봉지(封地)로 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데에는 의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떠돌이 백성들과 죄를 지은 무리들이 금령을 어기고 부역을 회피하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산림(山林)을 태워버리고 불을 지르고 나무를 베어 곳곳에 취락(聚落)을 이루어 도둑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산림이 벌거숭이가 되고 짐승들이 도망갔으며, 보고(寶庫)가 날로 소모되고 국가의 경비가 날로 위축되며, 평민들만이 고난을 겪고 간악한 무리들이 우글거리니, 오늘날 국가의 해독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윤휴가 사망하기 일년전인 기미년 즉 1679년의 기록입니다. 17세기후반이지요. 이 기록을 보면 당시 국왕인 '숙종'이 화전을 금지하는 명을 거두어들여서 이를 걱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윤휴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이 화전을 금지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할만큼 그 병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을 읽어보면 김동진 박사의 이 구절이 명백한 사실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전국의 산림지대에서 화전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이시기, 즉 1650~70년대 아직까지는 원시림을 많이 유지하던 조선림이 본격적으로 망가져감이 드러납니다.

17세기 중엽 유형원 (1622~1673년)에게 산림천택이란 "유민이 역을 피해 도망하는 곳", "재목을 기르고 금수가 자라는 곳"이었다 (반계수록(磻溪隨錄, 1670년)). 국가의 지배력이 한정적으로 미치는 산림천택은 17세기 중엽까지도 여전히 원시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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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번째 기록은 이미 화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시대인 18세기의 기록입니다. 유수원柳壽垣(1694~1755)의 [우서(迂書)]의 기록으로, 이 저서는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40세 전후 시절(영조 5∼13)에 편찬한 책이므로 1730년대 즉 18세기초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약 50년만에 이미 전국토가 화마를 입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서(迂書)
 
우서 제8권
상판(商販)의 사리와 액세(額稅)의 규제를 논의함

【문】: 그대가 화전(火田)을 금단하도록 논의한 것은 재목을 크게 길러 기와집을 쉽게 지을 수 있게 해서 민호(民戶)를 번성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가.

【답】: 이것이 금단하고자 하는 뜻의 한 가지 생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큰 뜻이 어찌 이에서 그치겠는가. 우리나라는 본래 산(山)을 의지하여 나라를 세운 땅인데, 돌아보면 지금 온 나라의 골짜기가 모두 화경(火耕)을 입어 앙상하고 민둥민둥해서 전혀 산 같은 모양이 없다. 산의 수목(樹木)은 사람에게 비하자면 모발(毛髮)과 의복(衣服)인데, 어찌 모발을 깎고 옷을 벗고도 능히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수목이 없으면 산등성이가 깨지고 무너져서 천원(泉源)을 넉넉하게 적셔주지 못하기 때문에 큰 시내나 작은 개울이 거의 마르고 끊어져서 물을 저축할 근원이 점점 적어지고 관개(灌漑)의 공로(功勞)가 드물어지게 된다. 산의 수천(水泉)은 사람에 비하자면 진액(津液 몸 안에서 생겨나는 침과 같은 액체(液體))과 영혈(榮血 몸을 윤택하게 하는 혈액(血液)) 같은 것이다. 어찌 진액이 메마르고 피가 모자라는데도 능히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산이 헐벗고 물이 마르면 백성이 궁하여져 저절로 죽게 될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節次)이며 필연적인 이치인 것이다. 

《좌전(左傳)》에 말하지 않았는가. ‘가죽[皮]이 없으니 털[毛]이 어디에 붙겠느냐.’고. 수목은 산천에 있어 곧 그 가죽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산천의 가죽이 말끔히 벗겨졌으니, 백성들이 장차 어디에 붙어서 살겠는가. 이제 만약 화전(火田)을 엄금한다면, 몇 년이 못되어 산이 모두 울창하게 되고 물이 사방에서 솟구칠 것이니, 물을 끌어 관개(灌漑)하기에 부족할 염려가 없고 집을 짓기에 모자랄 걱정이 없을 것이며, 산천의 기상(氣像)이나 인민의 생리(生理)가 저절로 달라져서 금방 풍후(豐厚)하게 되고, 다시는 쓸쓸하고 초라하다는 한탄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일을 이룩하여 보고자 한다면, 이 일이 곧 제일 시급하고도 가장 절실한 것이리라.

【문】: 산림(山林)을 키우고 민산(民産)을 마련하는 이야기가 어찌 그리도 우원(迂遠)한가.

【답】: 길어야 몇 년이면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우원하다고 하는가. 그대처럼 생각한다면 1백년 동안 적덕(積德)하여야 예악(禮樂)이 흥하게 될 것이라는 교훈(敎訓) 역시 오활(迂闊)하다 하여 믿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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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문답법으로 저자가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건축사에서 참고할만한 기록이 첫 질문에 등장합니다. 즉 "화전을 금지하는 것이 대형목재를 크게 만들어 기와집 자재를 만드는 것"때문인가라고 묻고 있지요.

그러자 답변이 "그것도 맞다. 그리고 또 다른 뜻도 있다- 즉 자연재해방지"라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우리 건축사에서 '대형목재와 화전, 그리고 건축자재'를 다룬 귀한 기록이라 할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해석하자면 18세기 이전의 목재규모와 당시 줄어든 크기의 기둥들에 대한 간접적인 분석으로도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답변의 두번째 문단을 보면 "돌아보면 지금 온 골짜기가 모두 화경(화재)를 입어 민둥민둥해서 전혀 산이 아니다." "산척의 가죽이 말끔히 벗겨졌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1730년 당시 우리 산림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알 수 있지요.

한반도 임목축적량의 변화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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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동진박사님의 글을 읽기 전까지 한국야생림과 수종변화의 가장 큰 원인을 개인적으로는 소빙기의 도래로 보고 있었습니다. 즉, 활엽수림에서 침엽수로 급격히 바뀌어간 온도변화가 우리의 대형목재를 없앤 원인으로 보고 있었지요.

하지만, 처음에 링크를 건 포스팅 시리즈와 더불어 찾아본 문헌사료들 덕분에 '화전'이 적어도 목재수종의 변화는 모르지만 야생림과 조선중기까지 존속하던 수많은 수백년된 대형목재의 전멸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록을 살펴보건데 아마도 ?표로 되어 있는 저 시기 중에서도 중간 부분, 즉 17세기후반에서 18세기초에 아마도 저 도표가 확 줄어들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660년대~1730년대). 또한 이 분석은 한국건축사에도 도움이 되는 관련이 있는 정보라 감히 짐작합니다.


덧글

  • 함부르거 2018/08/08 09:46 #

    역시 자연파괴의 제일원인은 인간이죠. -_-;;;; 옛 사람들도 산림의 효능을 저리 정확하게 알고 있었는데도 파괴를 막지 못한 점은 참 아쉽습니다. 17세기 이후로 일본에 국력이 뒤쳐지게 된 원인 중 하나도 저 산림파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역사관심 2018/08/09 22:54 #

    말씀하신 주제는 꽤 흥미로운데 아직 연구는 미진한 감이 있는 듯 합니다. 정말 누군가 한번 제대로 연구해주면 좋겠어요.
  • 까마귀옹 2018/08/08 10:37 #

    마침 저 시기가 경신대기근 때와 겹치는군요. 물론 경신대기근 자체는 단기적인 기상이변과 병충해 등이 더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조선 후기의 농업 생산량과 산림 훼손의 연결을 연구하면 뭔가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말이죠.
  • 듀란달 2018/08/08 12:11 #

    동의합니다. 저도 시간대를 보고 경신대기근과 겹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 역사관심 2018/08/09 22:55 #

    생각치못한 부분인데 완벽하게 일치하네요.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화전민이 급증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진주여 2018/08/08 12:15 #

    흥미로운글 잘읽었습니다.
    식목일이나 녹화사업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저 시대때는 정말 나무가 부족했었나보군요
  • 역사관심 2018/08/09 22:56 #

    거꾸로 말해 식목일을 하게 된 이유의 근원이 아마도 저 시기였을 것 같습니다. 저 시기가 없었다면 식목일이 필요한 민둥산은 원천적으로 없었을지도...
  • 존다리안 2018/08/08 12:38 #

    하여간 환경파괴는 예나 지금이나... ㅜㅜ
    이스터섬도 한때는 숲이 울창했다지요? 그런데 모아이 마구잡이로 세우는 바람에....
  • 역사관심 2018/08/09 22:57 #

    지금 꽤나 울창한 우리산들인데, 저 그래프를 보면 15세기무렵은 어땠을지 상상도 안갑니다 ㅎㅎ 그런데 그런 자연이 파괴되는 속도는 ㅎㄷㄷ 하죠..
  • 천하귀남 2018/08/08 17:55 #

    환경파괴도 있지만 환경이 파괴되거나 말거나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을 만든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해당시기의 소빙기 문제로 사람들이 화전과 도벌에 몰려든 것도 이유아닌가 합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지방행정이 무너져 권력있는쪽이 토지수탈을 하고 이탈한 농민이 화전/도벌을 하는데 이걸 막을 행정력도 없고 오히려 뇌물이나 세금충당을 위해 넘어가는 상황이 된것이 제일 크겠지요.
  • 역사관심 2018/08/09 22:59 #

    맞습니다. 화전민이 급증하게 된 사회적인 요인이 분명하게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당시 세계의 주요국가들의 경제력이 급증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니...이미 저 시기부터 19세기말의 치욕은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 응가 2018/08/08 19:59 #

    지금까지 원시림이 남아있는 함경도 고원지방과 평안북도 산간지방과 달리 확실히 인구밀도가 높은 삼남지방과 평안남도, 경기도, 황해도지방의 산림황폐화가 심했을것 같네요.
  • 역사관심 2018/08/09 23:00 #

    관련연구가 그정도까지는 아직 없을 듯한데, 매우 유용한 흥미로운 주제같습니다.
  • 漁夫 2018/08/08 23:54 #

    그나마 지금 대한민국만이라도 전세계적인 산림 녹화 성공 사례라 다행이긴 합니다.
  • 역사관심 2018/08/09 23:00 #

    위의 댓글에도 달았지만 지금이 이정도인데 15세기에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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