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당대의 삼국-고려-조선 무장의 레벨에 대한 인식 역사

흥미있는 기록이 있어 나눕니다.

가끔 궁금한 점 중에 하나가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연 당대 자신들의 '무'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삼국-고려시대의 무장이나 무력과 조선대 (당대)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요? 후대이니 더 낫다고 평가할 수도, 혹은 문인들 특유의 자존심으로 (우월감) 그런거 필요없어는 아니었을까요.

이런 기록은 워낙 사적인 기록인지라 찾기가 힘든데, 오늘 이덕형(李德馨, 1561 ~ 1613년)의 16세기 문헌인 [죽창한화]를 읽다가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아래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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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한화(竹窓閑話)

국조(國朝)에는 보필을 잘한 어진 신하와 도덕이 있는 선비들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문치(文治)는 고려조보다 나았던 것 같으나, 무략(武略)은 삼국시대만 훨씬 못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장수는 원래 이름난 사람이 없는데, 그 중에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윤필상(尹弼商)이 건주위(建州衛)를 몰아낸 일이 족히 국위를 드날렸다고 하겠으나 이것도 옛날의 명장에 비교한다면 어린 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영결들이니 처지를 바꾸어 태어났다면 그 공업을 측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이긴 것이나,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힘껏 싸운 것은 당시에 그 공이 으뜸으로서 실로 중흥의 근본이 되었으니, 이름이 청사(靑史)에 드리워도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리에 분발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영남(嶺南)을 지켰고, 홍계남(洪季男)은 혼자서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호서(湖西)를 보전했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 이 밖에도 비록 반군을 치고 역적을 토벌해서 국가에 공이 있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지역 안의 일들이므로 장수의 반열에 놓고 함께 의논할 수가 없다. 

내가 일찍이 옥성(玉城) 장만(張晩)과 함께 우리나라 명장을 이야기 했는데, 장공이 말하기를,
 “2백 년 이래로 일찍이 큰 적을 막아낸 자가 없다. 이것은 대개 국가에서 장수 재목을 기르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태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무관(武官)의 자급을 전쟁으로 인한 공로로 따져서 올려 주지 않고, 군민(軍民)을 못살게 굴면서까지 군량을 모아 저축한 자를 등급을 뛰어넘어 가자시키니, 마침내 벼슬과 자급이 높아져서 뜻과 욕심이 이미 만족하고 보면, 자기 몸과 목숨을 돌아다 보고 아끼는 이외에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는가. 지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약해지건만 장수의 적격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했다. 

장공은 원훈(元勳)의 늙은 장수이니 반드시 높은 식견이 있을 것이니, 그 말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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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저자인 이덕형과 조선중기 문인인 장만(張晩, 1566~1629년)의 대화를 발췌한 것입니다. 여기보면 굵은체에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하지요. 즉, 우리 조선조는 국초부터 어진 선비는 많아서 문치는 전대인 고려조보다 낫지만, 무력은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보다도 훨씬 못하다라는 문맥입니다. 원문을 좀 볼까요?

此所以文治似優於麗朝。武略不及於三國遠矣將帥則元無著者
이것이 문치(文治)는 고려조보다 나았던 것 같으나, 무략(武略)은 삼국시대만 훨씬 못한 까닭이었다그리하여 장수는 원래 이름난 사람이 없다.
而比諸古之名將。此特兒戱耳。
이것도 (김종서나 윤필상도) 옛날의 명장에 비교한다면 어린 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저자인 한음 이덕형이 언급한 것이고, 대화상대인 장만선생은 이를 받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張公曰二百年來未曾有能禦大敵者蓋國家不知儲養將才之道
2백 년 이래로 일찍이 큰 적을 막아낸 자가 없다. 이것은 대개 국가에서 장수 재목을 기르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조선조가 시작된 1392년이래 200년이니 장만과 이덕형의 시대인 1600년대까지 큰 적을 감당할 만한 명장이 없다는 것인데, 이는 '시스템'의 부재란 것입니다. 무장의 공로를 '승리'로 따지지 않고, '군량의 양'으로 따지니 무관이란 자들이 용감히 나가 싸워 공을 올리려는 생각보다는 지역주민에게 군량을 착취해서 공로를 쌓는데 집중하니 무슨놈의 실력이 있겠냐는 것.

장만선생은 문과급제자이긴 했지만 문무를 완전히 갖췄던 분으로 누르하치의 침입에 대비하는 목책을 세우는 등, 계책이 굉장한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이야기하는 것이니 이덕형선생은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장면이지요.

이 시대가 임란 직후이니 자신들의 시대의 무장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지만, 권율과 이순신만은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음에도 조선조 전체 (조선전기까지의)의 무장들을 김종서까지 폄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무장들의 레벨에 대한 평가가 확실히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전시대인 고려당대 자신들의 무장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요? 다음은 이제현(李齊賢, 1288~1367년)의 [역옹패설]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역옹패설

경인년과 계사년 이후로 재상에 무인(武人) 많았다. 이의민(李義旼, ? ~ 1196년) 두경승(杜景升, ? ~ 1197년) 함께 중서성(中書省) 앉았는데 이의민이 두경승에게 자랑하기를, "아무가  용력을 자랑하기에 내가 한번 쳐서 넘어뜨리기를 이와 같이 하였소." 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흔들렸다. 


이의민에 두경승이 대답하기를, "어느 때의 일인데내가 맨주먹으로 힘껏 쥐고 휘두르니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하면서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이씨와 두씨 / 吾畏李與杜

높이 군림한  재상일세 / 屹然眞宰輔

재상의 지위는 삼사 년이지만 / 黃閣三四年

주먹 바람은 만고에 떨치리 / 拳風一萬古


여기 나오는 경인년은 고려 의종(毅宗) 24(1170년) 8월,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등이 난을 일으켜 문신(文臣) 대량 학살하고 집권한 무신의 난 말하며계사년은 고려 명종(明宗) 3(117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김보당(金甫當)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치고 전왕(前王) 복위(復位)시키려다 실패하고 포살(捕殺) 일과그해 10월에 이의민(李義旼) 전왕을 경주(慶州) 죽인 일을 합니다. 즉, 무인(武人)의 집권시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즉, 12세기의 일로 저자인 이제현으로부터 한두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의민과 두경승이라는 두 무장이 주먹으로 쳐서 그 두꺼운 건물의 서까래를 흔들고 (이의민), 아예 주먹으로 벽을 뚫어버리는 (두경승) 용력을 자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고려인들이 이 이야기를 보고 '재상의 지위는 3-4년이지만, 주먹바람은 만고에 떨치리'라고 평가하는 장면을 보면 당대 자신들의 무인들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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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의 무에 대한 태도는 국왕의 시기별 편차가 심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문>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다시한번 20세기초 국치를 맞게 되는 여러 이유중 하나가 되기도 하지요. 평화시대를 맞이하더라도 항시 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명심해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기록입니다 (아울러 교육에서도 이웃국들에 비해 체육을 등한시하고 머리운동만을 강조하는 것 역시 이런 역사적 맥락을 느끼게 하곤 합니다).



덧글

  • 존다리안 2018/08/23 20:08 #

    그나마 조선은 이순신이 있어서 체면치레 했다는 걸까요?

    하긴 고려조에는 척준경 외에도 인간흉기 천지였다니 저런 평가가 나올 수도 있을지도요.
  • 역사관심 2018/08/26 05:18 #

    임란의 타격과 트라우마의 결과와 문>>무 편향을 잘 알고 있는 지식층인지라 나온 인식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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