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학을 애완동물로 기른건 김홍도시대 훨씬 이전부터... 역사

2012년에 꽤나 흥미를 돋구었던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에는 '학'을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이야기였지요.

다음의 기사가 그것인데 주요부분을 발췌합니다.

김홍도의 그림 근거 주장

조선시대에는 두루미가 선비들의 애완동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생물자원관은 18일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김홍도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라는 그림을 통해 현재는 멸종위기종인 두루미가 집 안 뜰에서 애완동물처럼 길러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그림에는 두루미 두 마리가 나란히 마당을 걷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몸은 흰색이고 날개 끝부분은 검은색인 이 두루미는 사람이 옆에 지나가는데도 놀라는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두루미는 사람을 경계하는 동물인데도 사람과 함께 한집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두루미는 겨울에 한국에 들르는 철새다. 두루미는 전통적으로 선비의 고고함, 장수, 부부애, 평화를 상징한다.
김홍도- 삼공불환도 중 (학 두마리가 보이지요)

국립생물자원관 전시교육과 김태우 연구사는 “두루미가 선비의 고고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두루미를 애완동물로 키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야생동물인 두루미를 기르기 위해 선비들이 두루미의 깃털을 잘라내 집에 놓고 못 날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며 “깃털이 다시 돋아나 하늘로 날아가버릴 때까지 몇 년간 두루미를 집에서 기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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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의 이 기사를 보면 몇가지 포인트가 보이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조선후기 김홍도의 삼공불환도로 학을 키웠음을 추정
- 두루미(학)는 사람을 경계하는 동물인데도 집에서 키웠던 것 같음
- 깃털이 다시 돋아나 날아가버릴때까지 몇년씩 키웠던 것 같음

그런데 실은 학은 김홍도(金弘道, 1745~ 1806년)대 훨씬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애완겸 관상동물이었음이 문헌기록으로 보입니다.
김홍도 [취후간화]중 애완용 학 (다만 이 그림은 중국인물인 임포를 배경으로 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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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도 길렀다

우선 11세기의 기록인 고려사 1039년의 기록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1038년 12월 21일(음) 계미(癸未), 1039년 1월 18일(양)
동지의 진기한 짐승들을 놓아주다

癸未 內史門下省言, “東池白鶴·鵝鴨·山羊之類, 日飼稻梁, 爲費多矣.前典云, ‘犬馬, 非其土性, 不畜, 珍禽奇獸, 不育于國’ 又云, ‘鳥獸昆虫, 各遂其性’ 盖不以玩好, 傷物性也. 乞放海島.” 從之.

계미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서 말하기를, “동지(東池)의 백학(白鶴), 거위와 오리, 산양들에게 날마다 먹이는 곡식의 비용이 많이 듭니다. 옛 문헌[前典]에 이르기를, ‘개와 말은 토성(土性)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기한 길짐승과 날짐승은 도읍에서 기르지 말라.’라고 하였고, 또 ‘새와 짐승, 곤충은 각각 자기의 본성에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애완용으로 길러 동물의 본성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바다 섬에 놓아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여기나오는 '내사문하성'은 고려시대 최고 중앙의정관청인 중서문하성의 전신으로 고려초기에는 내의성(內議省)이었다가 982년(성종 1) 내사문하성이라 고치고, 이것을 1061년(문종 15)에 중서문하성이라 고쳤습니다. 이 기록은 1038년이니 '내사문하성'이 맞지요.

이 내사문하성에서 건의하기를 개성의 만월대(고려정궁, 가칭) 동쪽에 있던 큰 호수인 동지(東池)에 흰 학과 거위, 오리, 산양들을 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97년에 조성된 동지는 구령각지 (龜齡閣池)라고도 하고, 1352년 공민왕 원년에 사라집니다. 이 곳을 필자가 왜 '연못'이라고 하지 않고 '호수'급이라고 썼느냐하면 기록에 왜선을 잡아다가 관람용으로 띄웠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륙선이 아닌 항해용선박을 띄울정도면 호수급이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이런 '애완용동물 (반려동물과는 다른 의미)'를 당시에도 '玩好' (완호)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놀다/사랑하다 완'자는 애완의 완과도 같은 글자입니다. 이 '완호'라는 글자는 1188년 '호랑이, 곰, 표범가죽같은 애호품'이라고도 표현이 나와 고려대당시 '애완용 동물'이나 '애호품'이라는 단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애완용으로 숭상하지 말고  동물의 본성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盖不以玩好, 傷物性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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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동물이 아니었던 학

서두의 기사에서 현재는 멸종위기인 학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하지만, 고려~조선후기까지 학은 그냥 우리 주변에 흔히 보던 새였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고려대에 얼마나 학이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958년 5월 미상(음)
검은 학이 함덕전에 모여들다
광종 9년(958) 5월 검은 학이 함덕전(含德殿)에 모여들었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958년 검은 학들이 함덕전이라는 궁궐(추정)에 모여든 것을 써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함덕전이라는 전각은 정확히 어디인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만월대에도 없는 전각이름입니다.

1128년 7월 을유 (인종 6년)
학(두루미) 수천 마리가 성안과 궁궐을 배회하다
학 수천 마리가 동쪽으로부터 와서 성 안 시가지와 궁궐[宮禁] 안을 빙빙 돌며 날아 다녔다.

1128년에는 학(두루미는 동의어) 수천마리가 나성안과 고려궁궐내부를 돌아다녔다는 기록.

1180년 2월 15일(음) 정유(丁酉), 1180년 3월 12일(양)
학이 광화문 망새에 둥지를 틀다
명종 10년(1180) 2월 정유 학이 광화문(廣化門) 치미(鴟尾)에 둥지를 틀었다.
十年二月丁酉 有鶴, 巢于廣化門鴟尾.

마지막으로는 학이 고려시대 광화문(廣化門)의 치미에 둥지를 틀었다라는 기록인데, 이를 보면 시내중심부까지 와서 마치 제비처럼 학이 둥지를 틀만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참고로 여기 나오는 광화문은 우리가 친숙한 그것이 아니라 개성에 있던 문을 말합니다.
이 기록이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운 점은 당시 고려대 건축을 간접적으로 다시 느낄 수 있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보면 
巢于廣化門鴟尾.
새집을 광화문 치미에 짓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廣化門鴟尾" 즉 당시 광화문에 '치미'가 있었다는 명확한 기록으로 예전에 살펴본 만월대의 중궁인 '회경전'의 치미기록 (1226년- 왕비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이위가, 누런 큰 기를 그 집 중문에 세웠는데 깃발이 바람에 날려 선경전(宣慶殿) 치미(鴟尾)쪽으로 휘날리는 꿈을 꾸었다)이나 별궁인 연경궁 천성전(天成殿)이나 수창궁의 치미기록등과 어우러져 당대 왠만한 주요거대건축에는 모두 '치미'를 설치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으로 생각됩니다.

동그라미가 보이시죠? 이런 걸 치미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사라집니다).
고려시대청동거울중 복층건축


애완용 학이 새끼를 쳤다

필자가 찾아본 기록중 조선시대 문헌으로 가장 오랜 기록은 일단 조선전기의 인물인 심수경(沈守慶, 1516~ 1599년)의 [견한잡록]의 기록입니다.

견한잡록(遣閑雜錄)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껄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

배경은 16세기로 김홍도보다 200년 앞선 신대입니다. 이 글을 보면 당시에도 흔히 학을 기르고 있었음이 보입니다. 그런데 심수경은 비록 1516년생이지만, 기록을 보면 '무자년과 기축년에' 연정에서 학을 길렀다고 되어 있어, 새끼가 태어난 것이 1588년과 1589년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產鶴卵育也。人家畜鶴。而多未有產雛者。產雛是奇事耳
학을 한 쌍 길렀는데,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鶴雛蹁躚
학의 병아리(새끼)가 비틀거리며 춤추고 있다.

특히, 학을 기른다는 것을 특이하게 여기지 않고 꽤 흔한 일로 보고 있는 문맥이라 흥미롭지요. 다만 여기서 특별한 점은 '새끼를 쳤다'는 것. 보통은 새끼부터 기르지는 못하고 잡아와서 기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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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동시대인물인 허목(許穆, 1595년~1682년 4월 27일)의 [기언]에는 아예 학기르기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기언(記言)
학기르기(養鶴)
용주옹(龍洲翁)이 내게 학 한 마리를 보내와 정원에 기르고 있다. 학들이 떼 지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면 목을 쳐들고 우는데, 그 소리가 매우 멀리까지 들린다. 하루는 학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한참 동안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며 떠나지 않았으니, 동류(同類)는 서로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할 만하다. 기유년(1669, 현종10) 중하(仲夏)에 쓰다.

여기보면 허목이 74세때 쓴 글임을 알 수 있는데, 선비끼리 선물도 주고 받는 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문인인 조경(趙絅, 1586~ 1669년)의 [용주유고]에도 거의 동시대인 1663년 학을 기른 기록이 등장합니다.

용주유고/ 칠언절구(七言絶句) 
계묘년(1663, 현종4) 
7월 5일에 기르던 학이 날개를 펴더니 홀연히 구름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癸卯孟秋五日豢鶴翅長忽沖雲霄而去〕

삼 년간 작은 정원에서 어린 학 길렀는데 / 雛鶴三年養小園
흰 몸과 붉은 정수리가 송문에 어른거렸네 / 皓衣丹頂映松門
하루아침에 회오리바람 일으켜 날아가니 / 一朝羊角摶風去
고산의 옛 주인 은혜가 그리웠던 게지 / 豈憶孤山舊主恩

여기 보면 또 다시 '사냥으로 잡아온 성인개체'가 아니라 '새끼 학'을 키운 이야기가 나오지요. 
雛鶴 병아리 추, 두루미 학

즉 새끼학을 3년간 키웠는데 이 놈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렸다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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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기록으로는 다음세대지만 역시 김홍도보다 약 2세대 더 전대인 윤증(尹拯, 1629 ~ 1714년)의 [명재유고]가 있습니다.

명재유고(明齋遺稿)
제용감 정(濟用監正) 신공(申公) 행장

나의 중부 동토공(童土公)은 공과 친구이다. 중략. 평소에는 교유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티끌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방을 청소하였다. 왼쪽에는 그림을 오른쪽에는 책을 두고, 소나무와 학을 길렀다.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밤이면 시를 읊조리며 스스로 즐겼다. 평소에 산수를 좋아하여 비록 성시(城市)에 거처하더라도 취향이 일찍이 산림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풍악(楓嶽) 등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

여기나오는 동토공은 윤순거(尹舜擧, 1596 ~ 1668년)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학을 길렀음을 보여줍니다. 윤순거가 1596년생이고 위의 허목은 1595년생이니 거의 동갑이지요. 

栽松養鶴。소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다.

윤증(尹拯, 1629 ~ 1714년)과 동갑내기 문인인 남구만(南九萬, 1629년 ~ 1711년)의 [약천집]에도 애완용 학은 등장합니다.

약천집 가승(家乘) 
소쇄당 기(瀟洒堂記)

우리 8대 조고(祖考)인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에게 아우가 있었으니, 직제학을 지낸 휘 간(簡)으로 세조조(世祖朝)에 청렴과 지조로 그 이름이 국사(國史)에 기재되어 있다. 중략.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마침내 아산에 살게 되었다.

6대를 전하여 후손에 두훤(斗烜)이 있었으니, 젊어서부터 높은 뜻이 있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고요함과 편안함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초당 세 칸을 뒤의 냇가에 지으니, 남기 빛이 처마에 들어오고 물소리가 뜰을 맴돌며, 흰 모래가 비단처럼 깔려 있고 푸른 버드나무가 장막처럼 이어져 있었다. 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집 앞에 비스듬히 누워 있고, 대나무 창문과 가시나무 사립문이 규룡(虯龍)이 서리고 꿈틀거리는 사이로 은은히 비추었으며, 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언덕을 쌓아 학을 길렀다. 주인이 여기에 아침저녁으로 머물러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겨, 일찍이 명예와 이익을 사모하는 일이 없었다. 

여기 나오는 남구만의 선조로 보이는 두훤(斗烜)이란 사람의 정확한 생몰년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적어도 17세기초에 태어난 남구만의 선조이므로 최소 15-16세기나 그 전대의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분 역시 못을 파고 연꽃으로 꾸민 정원에 학을 길렀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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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대장이 부러뜨린 관상용 학 날개

위의 기록들은 최소 16~17세기의 선비들이 매우 흔하게 학을 선물로 주고받고 새끼로 분양받거나 알을 부화시켜가면서까지 키웠을 알 수 있습니다. 17세기의 것으로 하나 더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3월 15일(을축) 비가 옴

 이광좌가 아뢰기를,
장붕익은 수찬 장차주(張次周)의 손자로 붓을 던지고 무인이 되었는데, 풍채며 기골이 당하 무변(堂下武弁) 가운데 제일입니다. 다만 국량이 몹시 좁아 술이나 성질에 휩쓸리는 편입니다. 권상유(權尙游)가 전라 감사일 때 장붕익이 전주 영장(全州營將)이었는데, 권상유는 장붕익을 몹시 후하게 대우하였습니다. 그런데 장붕익이 술을 마시고서 감사에게 말을 함부로 하여 권상유가 체례상(體例上)의 일로 책망하니, 장붕익은 인사도 않고 일어나 나가면서 마당에 내려와 감사가 기르던 학을 발로 차 어깨를 부러뜨리고 갔다 합니다. 때문에 신이 감사가 되었을 때 고과를 하고(下考)에다 매기고서 파출시켰던 것인데, 그 뒤 지금의 죄에 빠져 사람들의 기대를 크게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기록은 승정원일기중 1728년 것이지만, 여기보면 영조대의 폭력집단인 '검계'검거의 일등공신인 포도대장 장붕익(張鵬翼, 1646년∼1735년)이 당시 전라감사로 있던 권상유(權相游, 1656~ 1724년)이 키우던 학을 발로 차서 학의 어깨(날개윗쪽이겠죠)를 부러뜨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역시 위의 1600년대후반과 일치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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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을 잡아 길들이는 법

그럼 17세기 이후에는 이 풍습이 사라졌을까요?

그럴리가 없지요. 서두에서 2012년의 기사는 바로 이 시기의 인물인 '김홍도'의 그림으로 쓴 것입니다. 김홍도(1745년생)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서유구(徐有榘, 1764 ~ 1845년) 기록이 그것으로, 여기에는 정말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겸재 정선 [초당춘수] 1750년경

심사정 [고사은거] 1707년 


2010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실물이 발견된 서유구(徐有榘, 1764 ~ 1845년)의 [금화경독기]에는 이런 흥미로운 기록이 전합니다.

금화경독기 중

지금 황해도 연안과 강령등지에서 학을 길들이는 방법은 이렇다. 매년 가을이나 겨울들판에 나락이 떨어져 있을 무렵이 되면 학이 밭에 많이 모여든다. 마을사람들은 비단실을 꼬아 올가미를 만들고 말뚝에 매고는 학이 오는 곳을 파악해 땅에 말뚝을 묻는데 십여걸을을 잇대어 놓는다. 학학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가 한 사람이 털벙거지를 쓰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취한 사람이 비틀대듯 천천히 학에 접근한다. 

그러면 학 또한 천천히 걸어서 피하는데, 올가미 안에 발이 들어가는 걸 보면 그때 급하게 학을 쫓는다. 학이 놀라 날려고 하면 발이 올가미에 걸리고 만다. 이를 급히 덥치는데 솜을 댄 두꺼운 옷소매로 그 부리를 뒤집어 씌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쪼기 때문이다. 잡아와서는 그 깃촉을 잘라 날아가버리지 못하게 하고 뜰 가운데 며칠을 두고 배를 굶게하고 지치기를 기다려 조금씩 익은 음식을 준다. 이렇게 몇 달을 먹이면 마침내 (학을) 길들여 기를 수 있다.

보시다시피 이 저서에는 18세기 당시 어디서 (황해도) 언제 (늦가을,겨울) 어떻게 (비단실+올가미+털벙거지 인간) 야생학을 잡아 어떻게 길들이는지 (깃촛을 자르고, 굶겼다 먹이를 줘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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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김홍도의 그림은 단순한 풍자화나 중국의 고화를 본뜬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선배들이나 당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문인들의 모습을 그렸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대는 멀리는 고려대중기, 아무리 줄잡아도 최소 1588년 이전 즉 조선전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습니다.



덧글

  • 라비안로즈 2018/08/25 18:16 #

    별걸 다 길렀군요....
    근데 옛사람이 보기엔 지금 햄스터및 애완용 쥐 기르는 사람보고도 한소리 할듯해요 ㅋㅋㅋㅋ 기를게 없어서 쥐를 기르냐고..
  • 역사관심 2018/08/26 00:36 #

    학을 고고함의 상징으로 본 것 같아요. 선비정신에 부합되는 동물로 길렀달까... 중인이하에서 많이 기른 기록은 없으니...(또 모르죠, 워낙 민가의 기록은 남아있는 것 자체가 없으니;).

    말씀대로입니다- 그냥 '거대쥐'로 보겠죠.특히나 콧구멍 벌럼벌럼거리고 부산스러운거 보면서 완전 선비취향의 반대니..거의 안티될듯 ㅋㅋ
  • 응가 2018/08/27 12:58 #

    단정학인지, 재두루미인지 흑두루미인지, 황새, 백로, 왜가리같은 비슷한 새들이 많은데 철새라면 두루미종류가 맞고 텃새라면 아닙니다.
  • 역사관심 2018/08/28 23:57 #

    아 그렇군요. 기록에서는 모두 '학'자만 되어 있어 분류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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