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반박 문헌기록 추가 (1337년 이곡선생과 揭以忠의 대화) 역사

이곡(李穀, 1298~ 1351년)의 [가정집]에는 현재의 동북공정을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문헌기록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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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9권 / 서(序) 
게 이문(揭理問)을 전송한 시의 서문

법(法)이란 정치를 행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인(人)과 법을 병행해서 쓴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정치라고 할 것이다. 성조(聖朝)가 흥기할 적에는 법을 제정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원신격(至元新格), 원의 법령》이 나오고 《지치통제(至治通制), 원의 법령》가 만들어진 뒤에야 관리들이 적용할 법 규정을 갖게 되고 백성들이 피해야 할 조목을 알게 되었다.

우강(盱江) 게이충(揭以忠 게혜사(揭傒斯)의 동생)은 세상에 저명한 유가(儒家)로서 문장과 기예에 통효(通曉)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형명학(刑名學) 방면에 능한 면모를 보였다. 정동성(征東省)의 선(先) 승상(丞相)께서 일찍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는 그를 천거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지원 정축년(1337, 충숙왕 복위 6)에 본성(本省)의 이문(理問)에 제수되었는데, 그때에 나도 막관(幕官)에 조용되어 같은 날 부임하게 되었다.

게군(揭君)이 나에게 말하기를, “정령이 나오는 문이 많으면, 백성이 피곤해져서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현재 사해가 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중국 조정의 법을 동국(東國)에서는 행하지 않는 것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는 옛날 삼한의 땅으로, 풍기(風氣)와 언어가 중국과 같지 않다. 그리고 의관과 전례에 대한 하나의 법을 독자적으로 행해 왔는데, 진(秦)ㆍ한(漢) 이래로 중국의 어느 나라도 신하로 삼지 못하였다. 지금 성조(聖朝)의 시대에 있어서도 친분으로 말하면 구생(舅甥)의 관계요 은혜로 말하면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아서, 민사(民社)와 형정을 모두 예전대로 행하게 하고, 중국 관리의 다스림〔吏治〕이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고려라는 하나의 국가의 명령과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는 하나의 성(省)의 권한을 총괄하여 전결(專決)하고 있기 때문에 국왕 승상(國王丞相)이라고 일컫는 것이니, 사적으로 총애하는 그 은혜와 중하게 위임한 그 부탁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근래에 국가의 법이 점차 느슨해지고 백성의 풍속이 갈수록 경박해진 탓으로, 자기들끼리 변란을 일으키고는 다투어 위에 고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지치통제》의 법을 집행하려는 정동성 관리의 입장에서는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의 땅 아님이 없다.’고 하고, 옛 법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고려국 신하의 입장에서는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 )께서 토풍(土風)을 바꾸지 말라고 분부하셨다.’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의 옛 법을 쓰지 말고 중국의 새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가벼운 고려의 옛 법을 적용해야지 무거운 중국의 새 법을 쓰면 안 된다고 하기도 하는데, 모두 그 주장에 근거가 있어서 어느 한쪽을 따를 수가 없는 형편이다. 중국 조정의 법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니, 

게군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지만 나도 이미 위임받은 직분이 있으니, 오직 법을 받들어 행할 따름이다.” 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보니 조리(條理)가 제대로 밝혀지고 청알(請謁)이 행해지지 않는 가운데 관리는 사정(私情)을 끊고 백성은 공정함에 심복하였다. 요컨대 조정의 대체를 잃지 않으면서 본국의 구속(舊俗)도 동요시키지 않았으니, 인(人)과 법(法)을 병행하여 쓰는 것을 나는 게군에게서 볼 수 있었다.

금년 겨울에 게군이 임기도 만료된 데다가 늙으신 어버이 생각도 간절해져서 호연(浩然)히 돌아갈 뜻을 굳혔다. 이에 게군을 아는 자들이 모두 전송하는 시가 있어야 한다면서 나에게 그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앞의 말을 써서 그에게 떠나는 선물로 주는 한편 다시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게군의 형님인 집현공(集賢公)은 이 시대의 유종(儒宗)으로서 명성이 해내(海內)에 알려진 분인데, 나도 영광스럽게 그 문하에 출입하였다. 그런데 동쪽으로 돌아오던 날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는 밤낮으로 잊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내가 공의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게군이 돌아가서 나를 대신하여 감사의 뜻을 전해 준다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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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본문에 나오다시피 1337년 게이충(揭以忠)이라는 원의 사신과 이곡선생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 기록은 학계에서는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주요논점이 보통 고려와 원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고, 오늘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미비합니다. 

게이충이 말하길 '지금 원나라에 의해 세계가 한 나라가 되었는데 어찌 법령을 통일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쓰는가'라고 하자,  
揭君謂余曰。政出多門。民不堪命。方今四海一家。何中朝之法不行于東國乎。

이곡이 대답합니다.
高麗古三韓地。風氣言語不同華夏。而衣冠典禮自爲一法。秦漢以降。未能臣之也。
고려는 삼한이다. 풍기와 언어가 중화와 같지 않으며, 의관과 전례를 스스로(독자적으로) 하나로 통일해 사용했다. 진나라와 한나라이래로 신하였던 적이 없다.
즉, 고려는 삼한(당연히 삼국시대를 뜻합니다)이래로 풍습과 언어가 중국과 달랐고, 법제도도 독자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진(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와 한(漢, 기원전 206년 ~ 220년)이래로 중화의 신하였던 적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90년대이후 중국일부에서 주장하는 고구려의 당 지방국가설을 완전히 반박하는 14세기의 문헌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때 원의 신하인 게이충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君曰。然。吾旣有所受。惟知奉法而已。
군(게이충)이 말하길 '과연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받은 명이 있어, 법을 받들어 따를 뿐이다'.

즉, 즉 본인은 '삼한(삼국)'시대의 독자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지요. 예전에는 그렇더라도 현재 (고려말기)의 고려와 원은 이렇게 가야한다는 명을 받았을 뿐이라는 항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록은 1337년의 기록으로 고구려당대의 기록은 아닙니다. 또한 당대의 외교적 정치적 주장 (학술적근거가 아닌)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중세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이 당시에도 삼한일통과 무엇보다 중국측의 (중화가 아닌 원이긴 하지만) 삼국시대에 대한 당대 양국 지식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하고 무시못할 사료이기도 합니다.

삼국시대의 당대기록이 더 나와준다면 좋겠지만 (중국측 문헌이라도), 그와 그리 멀지 않은 고려대의 수많은 문헌기록들 (특히 중국측 인사들의 발언기록들)을 보면 현재의 동북공정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말 그대로 얼마나 '현재의 정치'적 관점일 뿐이라는 것인지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덧글

  • 남중생 2018/09/16 04:07 #

    흥미롭네요. 고려시대의 역사관을 보여주는군요.
  • 역사관심 2018/09/16 09:46 #

    네, 이외에도 비슷한 당대 문헌기록이 종종 발견되고 있습니다.
  •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9/16 08:18 #

    이곡이 말하는 고려는 당시에 고려란 국호를 쓰던 왕씨고려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왕씨고려는 삼한을 일통한 신라에서 나왔으니 예맥에서 나온 고려와 이곡의 이야기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예맥에서 나온 고려도 삼한처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보기는 어렵죠. 요동사 또는 요흑사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 역사관심 2018/09/16 09:47 #

    당연히 이곡이 말한 고려는 '고려'를 말하지만 그 문장에서 말한 삼한이라함은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댓글말미의 말씀은 이 글과는 관계없는 다른 주장이구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만 이는 모두 다를 수 있으니 그렇게 알겠습니다).
  •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9/16 10:31 #

    삼국지에는 삼한과 고구려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후 삼한은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가라)로 재편되었다가 임나가 백제와 신라에 의해 분할되어 흡수되면서 삼한은 예맥에서 나온 고려를 포함하는 지칭으로 변한 것입니다. 신라가 통일한 삼한에도 고려는 거의 빠져있습니다. 발해와 당나라에 흡수된 부분이 훨씬 많죠. 그래서 발해는 고려 계승국을 자처합니다.
  • 역사관심 2018/09/16 10:38 #

    말씀드렸듯 이 주장은 본포스팅과 별개의 주제입니다. 말씀하신 것도 하나의 설일뿐입니다.여기까지만 답하고 줄이겠습니다.
  • 다문제일 2018/09/22 07:30 #

    지금 절망에 빠져 계실 분이 어떻게 믿고 싶던지 간에 7세기 이후 '삼한'은 중국[隋書, 636]에서든 일본[日本書紀, 720]에서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이 되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9/22 08:56 #

    다문제일주의//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중국은 고려를 요동으로도 인식했고 고려도 스스로 요동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 다문제일 2018/09/22 16:42 #

    맞습니다라고요 언제는 고구려는 삼한이 아니라면서요 ㅎ 고구려가 요동을 자칭하기도 했느니 하는 건 전근대 중국인이 삼한=삼국 때부터 한국--당시 용어로는 '해동'--을 중화 세계와 구분되는 별개의 지역으로 인식했다는 '본 포스팅 주제와 별개의 문제'죠.

    하긴 뭐 본인도 상관없는 거 아시겠지만, 고구려의 고 자만 나왔다 하면 글 내용과 상관없이 꼭 줄줄 늘어놔야 마음이 좀 놓일 거 같은 썰들을 늘 가슴 가득 품고 계시니 이해는 합니다.
  •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9/22 17:25 #

    고려는 삼한이 아니죠.
    광개토왕비에도 잡아온 한인과 예인을 어쩌고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고려의 풍속에 관한 기록을 보면 초기와 후기가 전혀 다릅니다.
    평양천도 전후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전후를 예맥고려와 낙랑고려로 구분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 다문제일 2018/09/22 17:38 #

    맞습니다라고 하더니 또 가슴에 늘 품고 있는 '그 생각'이 떠올라 아차차 싶으셨나 보네요

    낙랑 고려? 망상은 혼자서나 실컷 하시고 중국인이 고려의 전신인 삼한=삼국을 중화 세계의 일부로 보지 않았다는 본 포스팅 주제에 대해 다른 할 말 없으시면 지나가 주시죠
  •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9/22 17:52 #

    그런 기록이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고려가 삼한이 아니라는 기록은 훨씬 더 많죠.
    http://qindex.info/d.php?c=2605
    중국에서 고려왕을 책봉할 때 요동군공 고려왕 또는 요동왕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서기에도 고려인과 한인을 구별해서 기록한 부분이 많습니다.
  • 다문제일 2018/09/22 18:01 #

    예 지금은 '그런 기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구려와 별개로 기록된 마진변 삼한이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아우르는 이름이었던 삼한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라고요.

    고구려를 요동이라 칭한 거랑 여기서 말하는 삼한은 삼국을 가리키는 거니까 중국인들도 고구려를 자신과 구분된 세계로 본 게 맞다는 포스트 내용이랑은 또 뭔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리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렇지 뭘 그렇게 아둥바둥대시는지? 그러면 누가 돈이라도 주나요.
  • 다문제일 2018/09/22 18:03 #

    고구려는 삼한이 아니라 어쩌고 저쩌고 고구려는 요동 어쩌고 저쩌고 또 같은 말 반복할 거면 제발 그냥 좀 지나가 주기길.

    병세가 10년 전에 봤을 때 비해서 조금도 약해진 거 같지 않아서 보기 딱합니다.
  • 다문제일 2018/09/22 07:39 #

    놀랍도록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를 당연시했던 유학자가, 주자학적 명분론이 어느 정도 정착된 고려 말에 "우리가 지금이나 숙이고 사는 거지 언제 니들 신하였다고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며 중국인 앞에서 스스럼없이 말하고, 그걸 또 그 중국인이 인정했다니 말이죠.

    원에 복속되기 전에도 고려는 송 요 금에게 책봉을 받고 그들의 연호를 썼으며 심지어 비문에도 有宋 高麗國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음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이곡 생각에 그런 것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거였나 봅니다. 하긴 인종 때는 금을 사대하기로 결정한 다음에도 신하들이 하도 오랑캐 새끼니 어쩌니 해대니까 왕이 "그래도 명색이 상국인데, 아 이건 좀..." 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니까요.

    고려 문인들이 '기자 동래'를 강조한 것도 문화적 자부심의 표현이지 그 이래로 중화 세계의 일부가 됐다는 의식의 발로는 아니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거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8/09/23 01:39 #

    네, 사실 고려중후반 문헌들에 삼한을 포함, 특히 중국쪽 사신들이 고구려와 고려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들에 꽤 주목할 구절들이 많이 보입니다. 중화와 소중화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을 탐구하고 있는 중인데 언젠가 한번 따로 다뤄볼 생각도 있습니다.
  • 反영웅 2018/09/23 09:02 #

    빨리 평양쪽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발굴해야 고구려 금석문이나 벽화, 묵서라도 더 나올텐데 언제나 가능할런지 암담합니다.
  • 역사관심 2018/09/24 22:58 #

    그러게 말입니다. 최근 만월대공동발굴이 재개되긴 해서 좋긴 한데, 여론을 보면 10여년전 1차때와 달리 많이 식었더군요. 역시 정치적인 문제와 긴밀한 문제인지라... 북한이 말로만 하지말고 제대로 일처리를 해가는 모습을 보이면 이런 부분도 연계되서 좋아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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