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인식과 대상 (메를로 퐁티) 독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조광제, 이학사) 중 일부.

메를로-퐁티는 그 길을 우선 지각해서 지각작용이 존재한다는 확실성과 지각되는 외부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확실성을 도무지 분리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서 얻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지각작용이 이뤄졌다면 동시에 확실하게 지각되는 외부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각작용이 존재한다는 것 혹은 지각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 대상인 지각되는 외부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다는 것(데카르트 코기토)은 원리상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의식작용의 확실한 현존만을 고집하고 의식작용이 아닌 의식 대상의 확실한 현존을 부정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순수한 의식작용만의 영역을 따로 떼내어 그것만의 절대적인 영역을 구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이다. 붉은 것을 보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붉은 것을 보는 것이다. 어떻게 지각하는 존재자의 확실성과 바깥의 그 상대방의 확실성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나의 봄 (ma vision)에 있어서, 소위 나의 봄이 가시적인 것에 지시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보이는 것에 지시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만약 내가 사물의 현전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면, 이 의심은 봄 자체에 대한 의심이 된다. 만약 거기에 붉은 것이나 푸른 것이 없다면, 나는 그것들을 실제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작동하고 있는 실제의 봄은 보고자 하는 나의 의도들과 보이는 것간의 일치인데, 만약 붉은 것이나 푸른 것이 없다면, 나는 이 일치가 그 순간에 산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메를로-퐁티)

여러분은 오히려 데카르트의 생각이 메를로-퐁티의 생각보다 더 맞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 알고 보면 착각이고 환시일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메를로-퐁티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아주 간명하게 반박을 펼칩니다. 착각과 환시를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것이 착각이고 환시라는 것을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그는 묻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대로 된 지각, 즉 제대로 된 봄을 통해서 알게된다는 것이 그의 입론입니다. 즉, 엉터리로 본 사태를 놓서 엉터리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제대로 본 지각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지금하고 있는 지각이 불완전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인식적으로 무가치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충분하고 완전한 봄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봄이 철저히 봄의 사유(생각의 구조)라면, 보이는 사물자체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선험적 관념론은 [알고 보면] 절대적 실재론이다. 세계가 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구성작용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본질적인 윤곽과 구조들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될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단지 관념상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현존하는 세계가 드러남이 없이는, 구성작업의 종착점에서 그저 추상적인 구축물을 가질 뿐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실제로 보지 않고서는 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상에 입각한 메를로-퐁티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볼 때에는 그저 관념상의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가 드러나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데카르트는 그에 비해 봄에 대한 사유를 실제로 봄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도 성립될 수 있다는 양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사물들의 현존은 의심할 수 있는데 봄에 대한 사유만큼은 도무지 의심할 수 없다고 할 때, 봄에 대한 사유란 기실 실제적인 봄을 무시한 것으로서 그저 "가장된 봄" 내지는 "봄에 대한 인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요컨데 데카르트는 봄에 대한 사유를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메를로-퐁티가 적극적으로 간취해내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의식이고, 새로운 방식의 코기토입니다. 의식이란 의식에 대한 의식, 즉 내재적인 의식이 아니고, 그렇다고 구성하는 선험적 의식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코기토 역시 심리적인 내재성이 아니고, 선험적인 내재성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의식은 현존하는 사물들, 즉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의식이고, 코기토 역시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와 동시에 접촉하는 것 자체라는 것입니다. 

사물을 자기가 구성해서 바깥으로 내던져, 즉 추월시켜 그곳을 향해 제 스스로 능동적으로 지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의식의 구성적인 능동적 초월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는 봄의 의식은 봄을 실행하는 것 자체라고 말합니다. 간단합니다. 우리는 여기 뭇 사물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내가 여기 사물들을 보고 있다고 인식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봄의 의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음을 인식하는 의식은 봄의 의식을 근거로 해서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내가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은 반성적이지만, 봄의 의식자체는 반성적인 것이 아니지요. 즉 봄을 실행하는 것 자체가 봄의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봄의 의식이 그야말로 체화된 의식이라는 이야기지요. 이 의식에는 당연히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이란 것도 근본적으로는 체화된 의식 상태에서 이미 확립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보긴 보는데 누가 봅니까? 당연히 내가 봅니다. 그런 점에서 봄은 나의 내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긴 보이는데 실제로 무엇이 보입니까? 보는 내가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보이는 사물이 보입니다. 그때 보이는 나는 보이는 사물의 영역에 귀속됩니다. 봄은 적어도 항상 보이는 사물에 철저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를 메를로-퐁티는 '붙들림' 혹은 '사물 속으로 달아남'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입니다. 여기서 그는 봄의 의식은 바로 이러한 초월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엑스터시, 즉 탈자라고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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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공감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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