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아버지와 어린 딸의 스킨쉽 (쇄미록을 통해). 역사

[16세기 조선중기까지 딸아이에 대한 사랑]이란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이 글의 근본적인 주제는 우리의 '양반'하면 떠오르는 자식에 엄격하고 남녀차별은 물론 스킨쉽같은 것은 꿈도 못꾸는 '어험 어딜 남녀가 유별하거늘!'의 이미지는 실상 17세기중반이후부터 강화된 스테레오 타입일뿐, 조선전기까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역시 조선전기~중기를 살아간 임진왜란당시의 선비였던 오희문(吳希文, 1539∼1613년)의 [쇄미록(瑣尾錄)]에서 일맥상통하는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 소개하고자 합니다. 쇄미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일기입니다. 

위의 링크글에서 필자는 조선전기까지의 아버지들은 어린 딸은 물론 다큰 시집간 딸들도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죽으면 정신이 훼손될 정도로 사랑했던 모습들을 소개했습니다. 특히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배를 타고 가는 내내 가슴에 껴안고 가고 하는 '스킨쉽'도 지금의 양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이 무색하게 자주 나옴을 볼 수 있었지요.

이 쇄미록에도 그러한 모습이 너무나 극명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첫기록.

쇄미록
1592년 임진년 7월 3일,
막내 딸 단아(端兒)는 분을 바르고 깨끗이 단장했는데 末女端兒 塗粉淨粧
내가 무릎 위에 안고 앉아 그 볼을 만졌다 吾卽抱坐膝上 俯撫其腮

이 기록을 보면 막내딸 '단아(端兒)'라는 아이를 무릅위에 앉혀서 볼을 만져주면서 귀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역시 아버지와 어린딸사이의 스스럼없는 스킨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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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막내딸이 5년뒤 병으로 사망합니다.

쇄미록
딸 단아가 1597년 2월 1일 이른 아침 병으로 죽었다

지난해 9월 20일에 졸지에 병을 얻어 여러 달 고생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아주 가버리게 되었다. 애통한 마음이 더욱 지극하여 가슴과 창자가 찢어지는 것 같다. 평상시에는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아하며 총명함이 남달랐다. 어린 나이지만 사리의 경중과 시비를 알고 또한 문자에도 능했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형제를 우해하는 것이 또한 천성에서 나왔다. 항상 입고 먹는 의복이나 음식이라도 반드시 남의 뒤에 했고, 자기가 입는 옷이 제 형보다 조금이라도 좋으면 곧 바꿔 입었다. 천성이 이와 같아 우리 내외는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오랫동안 내 이불속에서 자다가 지난해부터 비로소 혼자 자게 되었다. 

내가 외출했다 돌아오면 문득 나와 맞아주며 띠를 풀고 옷을 벗는 수고를 해주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일도 없겠구나.  애통한 마음을 어찌하리오. 병세가 몹시 중해도 오직 조그만 희망은 있었던 터인데, 여행 중에 오래 체류하다가 이에 이르러 구원하지 못했다. 이것도 천명이고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가장 애통한 일은 객지에 있기 때문에 의약을 다 써버린 것이니, 오직 천명만 기다리고 사람이 할 일을 다하지 못했으니 더욱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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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면 놀라운 모습이 나옵니다. 아이를 마치 요즘처럼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끼고 자는 겁니다. 1596년까지 그렇게 자다가 비로소 독립해서 재웠다는 이야기... 양반부부가 막내딸이라고 너무 예뻐하면서 어린이가 되도록 함께 이불덥고 자는 모습. 16세기에. 또한 마치 최근까지 흔히 볼 수 있던 막내딸이 퇴근하신 아버지의 상의를 받아드리고 하는 모습까지 등장합니다.

그리고 16세기 여성의 문맹률 연구에 더할 한 토막. "사리와 시비를 알고 또한 문자에도 능했다".

이렇게 사랑하던 딸이 죽었으니 창자가 찢어지는 것같은 고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이것이 1590년대의 선비와 막내딸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블로그를 계속 봐온 분들은 조금 공감하실듯 한데 참 여러방면에서 16세기전후로 조선이라는 사회는 문화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분위기가 많이 다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추후 위의 링크글에 첨가해보겠습니다.


덧글

  • 진냥 2018/10/11 14:07 #

    얼마 전에 [모란정환혼기]를 읽었는데, 그토록 성리학꼴통이던 명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두여랑의 아버지 두보가 딸이 사도온이나 반소 같은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친 여류 문인이 되길 바라여 글공부를 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소설이라 가능한 현실왜곡인지, 실제 명나라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반영했는지 궁금했습니다.
  • 역사관심 2018/10/12 09:24 #

    명대 소설은 잘 모르는데 흥미가 돋네요 ^^ 요즘 여러 연구를 보면 조선시대의 여성문맹률은 최소 양반가에서는 일반적 인식보다 낮았음은 분명한 사실같습니다.
  • 응가 2018/10/11 22:23 #

    구한말에는 남존여비사상이 강했지만 고종황제도 대단한 딸바보죠.
    덕혜옹주가 태어났을때 조선조를 통틀어 왕녀가, 그것도 심지어 서녀의 탄생이 이렇게 환영받은적이 없었다 하더라고요.민간에서도 삼칠일 동안은 출입을 금하는데 고종은 3일만에 종친들을 불러모아 문안을 드리게 하고 일주일째 되는 날에는 외척들의 알현이 있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는 집의 막내딸....)
    무릎위에 앉혀놓고 손을 만지며 이 아이의 손을 만져봐라하고 상궁들에게 말하면 상궁들은 '어떻게 아기씨의 손을 만지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고개를 들어 아이를 봐라 하고, 침전으로 데려오고.
    다만 망국의 황제와 황녀의 말로는 너무 안타깝고 비참하게 끝났네요...
  • 역사관심 2018/10/12 09:25 #

    덕혜옹주가 예쁨을 받았음은 알고 있었는데 이런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처음 듣습니다. 정말 구한말의 우리왕조를 생각하면 T.T
  • 응가 2018/10/12 18:50 #

    아내도 잃고 아들만 셋 있는데 한 명은 골골대고(순종) 한 명은 질풍노도의 길을 걷고 있고(의친왕) 다른 하나는 외국으로 가 버렸는데(영친왕) 나이 60들어 귀여운, 그것도 꽤나 아름다운 미모(예쁘게 찍힌 사진도 있고 못생기게 찍힌 사진도 있지만 유년기에는 대체로 고운 편이죠.)를 지닌 딸 하나를 얻으니 얼마나 기뻣겠어요.
    다만 고종생전의 총애가 조선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일본왕실의 관심(이라 쓰고 이용)때문에 일반 가정주부만도 못한 일생을 보내게 되었지요.....
    고종이 빨리 죽지 않고 양귀인의 장례문제 그리고 일본으로 어린나이에 가지만 않았으면 정신분열증은 발발하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8/10/14 00:01 #

    정말 그렇겠네요. 감정이입이 확 됩니다 ^^ 정말 지금도 그렇지만 유명인(?)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건 정말 피곤할 것 같아요. 제 스타일상으로는...(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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