門戟은 모두 귀신 얼굴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고려시대 귀신/도깨비 모습) 역사전통마

일부에선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시대의 귀면와들은 '귀면'이 아니라 아마 '용의 얼굴'일 것이다. 이 대담한 추정(가설도 아닌 추정에 불과)은 종종 '한국의 도깨비는 뿔이 없다'라는 담론에 연결되면서 저 기와의 얼굴들은 '귀매나 도깨비'가 아닌 '용'일 것이므로 따라서 저 뿔들은 한국의 도깨비담론에선 제외되어야 한다는 억측 (필자판단)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버젓이 이런 기록이 있음에도 말이지요 (예전 포스팅글에서 발췌).

"결정적으로 '귀와'(鬼瓦, 즉 귀신의 기와)라는 말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조선 후기도 아닌 중기에 권별 (權鼈, 1589~1671)이 지은 [해동잡록 (海東雜錄)] "정창손 공의 집안에 대낮에 아무도 없는데 돌이 날아드는 요귀의 장난이 일어나자, 지붕에 있던 귀와(鬼瓦)를 불태워 버리자 그런 일이 없어졌다." 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입니다: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효중(孝仲)이고, 갑손의 아우다. 과거에 두 번 장원급제하였으며, 우리 세조를 도와서 좌익공신(左翼功臣)에 들었고, 또 좌리공신(佐理功臣)에도 들었으며, 세 번 수상이 되었으나, 집안살림에 관심이 없었으며, 충정(忠貞)이라 시호하였다. 정창손이 정승 노릇을 30년 하였고, 거의 90세까지 살았는데 하루는 집에 귀신의 요사(妖邪)가 갑자기 일어나서 대낮에 돌을 던지기를 그치지 않아 온 조정이 모두 아주 괴상히 여겼는데, 공이 귀와[鬼瓦 지붕마루의 양 쪽 끝에 귀신 모양으로 만들어 올리는 기와]를 불태워 죽여 물리치니 그 요사함이 그치고, 공도 건강하여 병이 없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원문에도 분명히 '귀와'이므로 한글해석이 아닙니다:
昌孫爲相三十年。年幾九十。一日家有鬼妖忽作。白晝投石不已。擧朝大怪之。公燒殺鬼瓦以禳之。其妖遂息。公亦康强無恙

그런데 이 기록은 사실 권근이 더 전대인 15세기 이륙(李陸, 1438~98)이 쓴 [청파극담 (靑坡劇談)]에 나오는 기담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야기의 연대는 여기서 더 올라가는 데 그 이유는 이 기담의 주인공이 정창손(鄭昌孫 1402~ 1487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조선전기부터 귀면와라는 명칭과 그 내용에 '귀매'가 포함되어 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귀신얼굴의 귀와를 없애자 귀신이 없어졌다는 내용으로 보아). 물론 조선시대의 귀면와는 이미 삼국의 괴기스러움이 사라진 상태가 되지만, 전대부터 내려오던 이런 종류의 기와 문양중 적어도 많은 숫자가 예전부터 통칭 귀매나 도깨비류의 얼굴임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학자들이 이 기와들을 자신들의 식으로 '귀면와'라 이름붙여서 우리가 혼란스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도 사실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훨씬 이전 우리 조상들도 이 기와들을 '귀와'라 불렀다는 명확한 문헌기록입니다. 

아무런 근거없이 고대에는 건물이 모두 목조였으므로 항상 화재의 위험이 있었는데 물속에 사는 용의 얼굴을 기와로 만들어 붙여놓아 불의 기운을 제압하려 했다는 믿음을 반영했다라는 식의 '상상가설'보다 명확한 문헌기록을 먼저 보는 태도가 옳다 생각합니다.

========

고려시대 창 문양에 새겨진 귀면(귀신얼굴)

그런데 [고려사]에서 이런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고려사 > 권72 > 지 권제26 > 여복1(輿服 一) > 의위 > 조회 의장 > 
1047년 7월 미상(음)

문하성에서 극의 문양에 대해서 건의하다
文宗元年七月 門下省奏, “謹按前典, 戟之爲制, 如槍兩歧, 施刃其端. 魏武帝門戟, 用蝦蟆頭, 以懸旛旒長一丈二尺, 雜以靑黃. 今宮殿及太廟門戟, 皆作鬼面, 實無所據, 乞依古制, 改畫爲蝦蟆頭.” 從之.

문종(文宗) 원년(1047) 7월 문하성(門下省)에서 아뢰기를, “삼가 예전의 전적(典籍)을 살펴보니 극(戟)의 제도로 삼은 것은 창(槍)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칼날이 그 끝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위(魏) 무제(武帝)의 문극(門戟)은 청개구리 머리 모양을 사용하여 깃발을 매달았는데 길이가 1장(丈) 2척(尺)으로 청색과 황색을 섞었습니다. 지금 궁전(宮殿) 및 태묘(太廟)의 문극은 모두 귀신 얼굴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니, 청컨대 고제(古制)에 의거하여 모두 청개구리 머리를 그려 넣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이 기록은 1047년의 것으로 여기 보면 당시까지의 고려시대 문극(門戟)의 문양이 모두 '귀신얼굴'인데 이걸 위 무제의 법도를 따라 개구리 머리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원문을 다시 볼까요?

皆作鬼面 모두 귀신얼굴로 만들다.

여기서 문극(門戟)이라는 것은 두 갈래로 갈라진 창(무기)을 말합니다. 즉, 11세기중반까지의 고려시대 무기류에는 '귀면'을 그려넣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쌍갈래 창의 실물을 볼 수 있으면 너무 좋겠습니다만 현재까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필자가 작년경 소개한 한 점의 현재는 사라진 고려시대 무기류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월부 (月斧, 도끼)입니다. 

이것이 예전에 소개한 경북 문경소재 봉암사에 1959년까지 현전하고 있었던 고려시대 도끼 (月斧)입니다. 소개당시 '뿔이 달린 고려시대 귀매류'로 알려드렸지요 (포스넘치는 고려도끼 (월부) 뿔도깨비상, 그리고 그 용도). 생김새는 전체에 고려시대의 도깨비나 괴수의 측면을 새겨 넣었는데, '뿔'이 선명하게 보이지요.
봉암사 전(傳) 고려 월부(月斧) - 1959년 행방불명 (날카로운 뿔이 보입니다)


문경 봉암사는 신라 말의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정진대사(靜眞大師)에 의해 고려 태조대에 (935년) 다시 중창됩니다. 따라서 10세기~13세기경 가장 사세가 웅장하던 사찰이지요 (임란때 전소). 그렇다면 이 월부는 10세기~13세기경의 것으로 대강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고려시대 문극 (창류 무기)'에 귀면을 모두 새겨넣었던 1047년 (11세기중반)으로부터 그리 먼 물건이 아닙니다. 

1047년의 이 기록은 통일신라(668~935년)까지 활발하게 제작되던 '귀면와'의 얼굴이 말 그대로 '귀신'(도깨비)이지 '용'같은 것이 아닐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보충해주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리고, '뿔 도깨비' 혹은 '뿔 귀신'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인식이 유래가 깊고 귀면와나 이런 무기류의 무서운 얼굴들이 용이나 소등이 아닌 '귀신의 얼굴'을 묘사한 것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문헌기록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 귀면와 (8-9세기)



덧글

  • 열혈작가 2018/10/23 11:32 #

    용을 상징한다면 한자를 귀라고 하지 않고 용이라고 썼을건데 왜 항상 용의 얼굴일 것이란 주장이 나오는지 의아하네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학자들은 외국의 학자들이라기보다는 그냥 캠퍼스의 정치꾼으로 보는 입장이라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계랍시고 펼치는 주장들 보면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도 정말 한심스럽고 그다지 귀담아 듣고 싶지 않은 것들 투성이라서요.
  • 역사관심 2018/10/24 03:50 #

    의외로 상상력을 발휘한 인문학가설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학의 경우 심각하게 추상적인 가설이 많은데 지양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 이선생 2018/10/24 22:10 #

    맞습니다! 용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더군요.
    하지만 역시 찾아보면 이렇게 다 증거가 나오는 군요 역시 한국 도깨비는 뿔이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8/10/25 06:25 #

    유물 한 두점으로 한 추정이라 가설단계에 머무는 정도의 글입니다. 다만, 이런 최소한의 문헌기록이나 유물없이 대담하게 (너무나) 상상이나 주관성을 너무 많이 대입시켜 마치 그것이 정설처럼 퍼지는 현재의 일부 한국학 분야의 가설들은 동의가 되질 않네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도깨비는 그 정의부터 명확히 하는게 우선, 그리고 만약 한국적 요괴의 광의의 범주를 거의 포함하는 정의를 내린다면 뿔이 있는 경우도 없는 경우도 다양하게 있을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9 대표이글루_음악

2018 대표이글루_history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2014 대표이글루

마우스오른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