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시대 죽집 (粥肆)과 거리의 소고기굽는 내음 음식전통마

'죽'이라고 하면 우리의 전통식중의 하나라는 인식은 있지만, 사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은 최근에 생겨나고 보통은 집에서 손쉽게 만들어 먹는 가정식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사서 먹는 전통은 극히 최근 그러니까 '본죽'같은 프랜차이즈가 생기고 나서 혹은 20세기 이후 식당에서 파는 전복죽등 최근의 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 음식의 '판매역사'는 꽤 깁니다. 우선 [문화컨텐츠닷컴]의 '죽' 항목에는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1795)에 “서울 시녀들의 죽 파는 소리가 개 부르는 듯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죽을 파는 행상이 많았고, 죽이 매우 보편적인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의 원문을 한번 볼까요.

청장관전서
서해여언(西海旅言)
초5일(기미) 새벽에 출발하여 임진강을 건너 동파역(東坡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개성부(開城府)에서 자다

남문(南門) 안팎의 여염집과 저자는 서울의 서문(西門)과 맞먹을 정도였고, 시장 아낙네 죽[粥] 파는 소리는 개 부르는 소리와 같았으며, 동자(童子)들 담배 파는 소리는 우는 듯 처량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입니다.
市女賣粥聲。如呼狗。시장의 죽파는 여자소리가 개를 부르는 소리같고
童子賣烟聲。酸寒如啼。동자가 담배파는 소리는 우는 소리처럼 슬펐다.

18세기말 죽을 '판매'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지요. 개성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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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 (1795년)에 매우 비슷한 시기인 1783년의 기록을 보면 또다시 비슷한 모습이 등장하는데 일종의 범죄수사기록 및 판결문인 [심리록]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심리록 제10권 / 계묘년(1783) 2 ○ 충청도
공주(公州) 박복남(朴卜男)의 옥사

박복남이 생선을 사면서 값을 가지고 다투다가 이차봉(李次奉)이 꾸짖자 화가 나서 이차봉을 발로 찼는데, 3일 만에 죽었다.

[본도의 계사] 봉상(奉尙)이 소란을 일으킨 것인데 박복남이 대신 떠맡았습니다. 세 차례 때리고 발로 찬 것 또한 자백하였습니다.
[형조의 계사] 한 번 밀고 세 번 발로 찼는데, 상처가 명백합니다.
[판부] 죽을 파는 노파와 생선 장수들이 모두 명백한 증인이 되고, 닭을 삶아 죽을 끓인 것도 단안(斷案)이 되는데, 주범을 논한다면 사실상 먼저 범행을 했느냐 나중에 범행을 했느냐에 달려 있고 원척(原隻)을 묻는다면 또한 발길질을 한 번 했느냐 세 번 했느냐에 다름이 있으니, 봉상이 주범이 아니고 박복남이 원척이 된다는 것은 분변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복남이 아니라 박복남 살인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증인'들로 죽을 파는 할멈과 생선장수들이 등장하는군요.

泡嫗魚商。俱作明證
泡嫗 두부 또는 죽을 파는 노파.

이 당시 '죽'은 거의 여성들이 팔지 않았나 싶은데 그도 그럴 것이 후대에 또 다시 비슷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다음은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의 [임하필기]중 한 구절입니다.

임하필기 제27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늙은 할멈의 이상한 일
서문(西門) 밖의 소전교(焇廛橋) 곁에 어떤 노파 하나가 있었는데 죽을 파는 이였다
부분만 발췌한 것으로 소전교가 어디인지는 파악하기가 힘들군요. 어쨌든 서문밖 소전교에서 죽을 파는 노파가 있다라는 구절입니다. 이런 직업은 구한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1869년의 기록을 보면 아예 '죽만 팔아 생계를 책임'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각사등록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6년(1869)
[고성현(固城縣) 춘원면(春元面) 민변(民變)]

이윤여(李允汝) 저는 죽(粥)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당초의 일은 아예 들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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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가게

위의 기록들은 행상인이 다니면서 죽을 가지고 그때그때 파는 모습만이 떠오르지요. 하지만, 제대로 죽을 파는 '가게'는 어떨까요?

현재로썬 하나지만 '죽가게'라는 단어도 발견했습니다. 윤기 (尹愭, 1741∼1826년)의 [무명자집]에는 이런 기록이 등장합니다. 중간중간 생략하고 발췌한 것입니다.

무명자집 시고 제3책 / 시(詩)
성안의 새벽 풍경5수 〔城中曉景 五首〕

뎅뎅 울리는 서른세 번 파루 소리 / 歷歷鐘聲三十三
성문 막 열리고 수레 소리 시끄럽네 / 城門初闢閙行驂
돌아가는 나졸들 웃고 떠드는 소리 / 邏卒伴歸相笑語
오늘 밤은 못된 녀석 몇이나 잡았나 / 今宵捕得幾獃男

도성의 천만 가호가 모두 적막한데 / 萬戶千門盡寂然
이따금 저 멀리서 사람소리 들린다 / 時聞人語在深邊
부엌문 틈으로 등불 빛 내비치니 / 燈光斜透厨扉隙
주막엔 새 술 거르고 죽 집엔 죽이 끓네 / 酒肆新篘粥肆煎

이것은 18세기의 한양이 깨어나는 새벽시간을 묘사한 글로 마지막 문장을 보면 주막과 죽집이 등장하지요.
酒肆新篘 주사(주막)에선 새술을 거르고
粥肆煎 죽사(죽집)에선 죽을 졸인다.

여기보면 '사(肆)'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 글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조금 발췌해보면: 

...이 글에서는 이숭인의 글에 나오는 "茶房 다방'이라든가 임춘의 '茶店 다점"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분명 '차를 파는 가게'임을 알 수 있는데요. 사(肆)자는 '방자하다, ‘늘어놓다’란 뜻이 있지만 명사로는 마굿간 혹은 가게, 또는 ‘줄’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 사(肆)란 글자는 시장에 나란히 들어서 있는 물건을 진열해 놓고 파는 점포를 말하며, 각 점포에는 깃발을 매달아 물건 파는 가게임을 표시했습니다. 다음은 운종가에 있던 조선시대 서화사를 재현한 것입니다. 서화사, 즉 서화를 파는 가게란 뜻이지요.
조선시대 書畵(서화)

다른 기록이 더 나오면 좋겠지만 저 한구절로도 꽤 의미가 있어보이는데 왜냐하면 술을 파는 '주사'와 함께 언급되고 있기에 '가게'라는 것이 거의 명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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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그리고 고기굽는 거리

마지막으로 처음에 소개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중 죽을 파는 모습 못지 않게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청장관전서
서해여언(西海旅言)

...이어 천천히 큰길을 걷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집집마다 나오고, 등불 깜박이는 시장에서는 백정들이 소를 잡고 있었다. 선죽교(善竹橋)를 찾아 돌 위를 맴돌았으나 충신(忠臣)이 뿌린 피 흔적이 보이지 않기에 혼자서 석표(石標)만을 어루만지다가 돌아왔다.

仍緩踏大路。그대로 천천히 대로를 걷고 있으니
炙肉之臭。고기 굽는 냄새가
起於家家。집집마다 나는구나
市燈幽幽。시장의 등이 그윽한데
屠者之解牛。백정이 소를 해체하고 있다.


이덕무(李德懋, 1741~ 1793년)가 이 서해여언에 나오는 개경지방의 여행을 떠난 것이 그가 28세때, 즉 이 기록은 1769년경의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 당시 선죽교부근의 개경거리에서는 저녁때 집집마다 '고기를 굽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육류소비를 하고 있었음이 보이지요. 특히 바로 다음구절에서는 시장에서 소를 해체하고 있는 모습도 나옵니다.

이 기록을 보고나니 올해초에 읽었던 정말 재미있는 기사가 갑자기 떠오르더군요. 소가 귀해 안잡았고 잔칫날등 특별한 날에나 잡았을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상식선의)과는 달리 조선후기에 고기를 꽤 많이 소비했을 것이라는 새연구결과였습니다.

위의 [청장관전서]기록은 기사 첫머리의 아래의 [승정원일기]기록이 너무 실생활에서 생생히 잘 드러난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 "도성의 시전에서 각 고을의 시장, 거리의 가게까지 모두 합해 하루에 죽이는 것이 1천 마리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에 솟값은 날로 뛰어오르고 만들어내는 것은 날로 줄어든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조선 숙종 2년(1676) 1월 14일 생활상을 보면 당시 국가에서 도축하는 소는 하루에 1천 마리를 넘었다. 그런데 이날이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치른 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매일 1천여 마리의 소를 먹어 치웠다." -기사중.

특히 오늘 소개하는 기록에서도 '소를 해체'하는 모습이 보이지요 (돼지등이 아니라). 기사에는 이런 기록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제가(1750∼1805)는 "하루가 다 지나도 돼지고기는 팔리지 않고 남았다. 이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고기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라고 '북학의'(北學議)에서 적었다.- 기사중.

아무튼 오늘은 18세기 죽을 파는 여인들과 '죽가게'로 우리의 '죽을 사먹는 전통'이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것외에도 오래된 전통임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 '18세기 개성거리의 가정에서의 소고기 소비'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군요.


핑백

  • 까마구둥지 : 18세기 소고기는 일상의 반찬 (살벌한 고기소비) 2018-11-15 03:43:42 #

    ... 네老饞於此何由解 늘그막의 식탐이 이쯤에서 다 풀리겠냐만不效屠門對嚼人 푸줏간 앞에서 입맛만 다시는 사람 꼴은 되지 말아야지 [18세기 조선시대 죽집 (粥肆)과 거리의 소고기굽는 내음]이란 글에서 18세기이후, 더 정확하게는 1770년대경 조선민간의 소고기 소비량이 굉장했음을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시기의 ... more

덧글

  • 존다리안 2018/11/09 08:07 #

    왠지 소고기값이라 하니 먼 과거의 일 같지가 않군요.
  • 역사관심 2018/11/09 08:07 #

    ㅎ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 홍차도둑 2018/11/09 11:27 #

    오래된 전통시장 한켠에는 가끔가다 죽집이 있었던 걸 보아왔던 아재인지라...
    그러고보니 부산 온천장시장 안의 죽집은 잘 있으려나요...그집 단팥죽이나 다른 죽들이 맛있어서 온천장 인근의 여관에서 한잠 자고 다음날 아침에 거기서 즉 먹고 일보러 돌아다닌 기억이 많네요
  • 역사관심 2018/11/09 14:29 #

    오 이런 귀한 근대사적 정보를 항상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번 또 찾아보고 싶어지는...ㅎㅎ
  • 머글 2018/11/09 16:43 #

    저 기사에서 언급된 책을 직접 읽어 봤습니다만 조선시대 후기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연간 소 도축량이 38만 마리에서 39만 마리(하루
    천마리+ 명절 2~3만마리) 가 나오는게 흥미롭더라구요. 기록대로면 굉장히 흔하게 먹는 수준이기는 한데,
    1932년의 소도축량이 연간 22만두 정도인데 개인적으로는 저 양이 가능한가 좀 의문이었습니다.
  • 역사관심 2018/11/11 01:20 #

    김동진박사님의 [조선생태환경사]는 소장하고 있지만, 저 책은 없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생태사논고에서도 소의 폭발적인 증가에 대해 나오는데 (지금은 밖이라 찾아볼 수없지만), 꽤 논리적인 추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은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구한말의 극심한 피폐를 겪으면서 생겨난 조선시대전반에 대한 '편견'은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 냥이 2018/11/09 20:23 #

    울산에 중앙시장 주변에 죽골목이 하나 있죠. ( http://ulsannuri.tistory.com/m/4938 ) 죽골목에서 쓰는 집기는 현대식(스테인레스가 대부분이더군요.)이지만 대략적인 형태는 조선시대 죽가게하고 비슷할지도... 부산 깡통시장에도 죽 파는 카트가 있더군요.

    조선시대에도 돼지고기가 있었다니 신기하네요. 제주도는 집집마다 키웠다는 것 같던데 제주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어디서 키웠으려나 궁금합니다.
  • 역사관심 2018/11/11 01:39 #

    오 죽골목이 있군요! (찾아보니 부산에도 부전시장에 죽골목이 있더군요). 다만 항상 아쉬운것이 하드웨어적인 매력...아주 오래전 블로그 초창기에 쓴 글도 있습니다만. http://luckcrow.egloos.com/2123487

    조선시대에는 돼지는 거의 키우진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돼지라는 동물이 워낙 먹는비용에 비해 나오는 근수가 차이가 있어서 비경제적으로도 봤고, 또한 시대적으로 낮춰보는 경향도 강했지요. 초기기록에도 이런게 나오니...
    [태종실록] 17년(1417년) 윤 5월 80일조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조선 사신에게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라고 했다.”

    1922년의 기록에도 소가 148만 두, 돼지가 97만 두로 여전히 소가 많죠. 물어보신 점은 일반가정에서도 키우긴 합니다. 예를 들어 인조실록 (1625년)에서도 몇백마리를 일반가정에서 키우도록 분양하는 기록이 나오지요. 다만 조선시대 내내 소나 닭에 비해서 훨씬 인기가 없다가, 19세기부터는 냉면고명으로도 올리는등 소비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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