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소고기는 일상의 반찬 (부제: 살벌한 고기소비) 음식전통마

이 그림은 성협(成夾, ?~?)의 풍속화집 중 ‘고기굽기' (19세기)라는 작품입니다.

성협(成夾) 고기굽기 (19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트로격으로 그림에 나오는 싯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杯箸錯陳集四隣 술잔과 젓가락 늘어놓고 온 동네 사람과 모인 자리
香蘑肉膊上頭珍 버섯과 고기가 정말 맛나네
老饞於此何由解 늘그막의 식탐이 이쯤에서 다 풀리겠냐만
不效屠門對嚼人 푸줏간 앞에서 입맛만 다시는 사람 꼴은 되지 말아야지


[18세기 조선시대 죽집 (粥肆)과 거리의 소고기굽는 내음]이란 글에서 18세기이후, 더 정확하게는 1770년대경 조선민간의 소고기 소비량이 굉장했음을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시기의 문헌기록을 통해 좀 더 이 토픽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순서는 연대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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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일성록]에는 이런 기록이 등장합니다. 

일성록
정조 원년 정유(1777) 9월 7일(기사)

“윤태연이 기거하는 곳은 어떠하던가?”
하니, 신응주가 아뢰기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한 집은 그가 처음에 기숙하던 식주인(食主人) 집인데, 위리안치한 뒤에는 곧 쫓아내고 그의 종인(從人) 가금(可金)이라는 자와 두 여종만이 동거하였는바, 늘 소를 잡아먹었다 합니다. 신도 곳간에 곡식을 쌓아두고 부엌에 고기를 달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위리안치'란 중죄인을 유배시켜 가택연금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윤태연이라는 자가 자택감금 유배형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윤태연(尹泰淵, 1709∼1777년)은 18세기 무신출신으로는 드물게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청탁으로 파면된 인물입니다. 1762년(영조 38년)에 우포도대장이 되어. 영조의 신임을 받았으나 군무에 소홀하는 등 여러 죄로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현(機張縣)에 유배됩니다. 

즉, 여기 나오는 배경은 1777년 경남 동래 기장이 됩니다. 기장은 당시 '기장현'으로 군사요충지로 창고도 있었습니다만, 당시로써는 촌구석에 가까운 곳이었지요.
이 곳의 한 시골집에 유배된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윤태연은 이곳에서 "그의 종인(從人) 가금(可金)이라는 자와 두 여종만이 동거하였는바, 늘 소를 잡아먹었다 합니다. 신도 곳간에 곡식을 쌓아두고 부엌에 고기를 달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소고기를 잘 드시면서 지낸 겁니다.

이 말은 단순히 그가 죄를 지었다라는 것을 떠나 당시 유배당한 죄인이 소고기를 얼마나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도축을 함부로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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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정조실록은 당시 도축의 급증은 소의 증가율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조 17년 계축(1793년) 9월 11일(신축)
17-09-11[17] 대사간 임제원(林濟遠)이 상소한 데 대해 비답을 내리고, 이어 우금(牛禁)과 전정(田政)에 대해 여러 도에 신칙하였다.

○ 상소의 대략에,
“올가을 삼남 지방의 농사는 마치 기약이나 한 듯이 비가 내리고 햇볕이 쬐어 파종과 김매는 시기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말하면 근래에 드문 풍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논이 있어도 모를 내지 못한 경우가 많고 모를 내기는 했으나 너무 늦게 낸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는 기근과 역병으로 인력이 미치지 못한 때문이지만 실은 논밭을 가는 소가 매우 귀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합니다. 농가의 쓸모 있는 물건으로는 소를 근본으로 여기는데 축산이 점차 그전처럼 번성하지 못하고 소를 마구 도살하는 일이 근년에 와서 매우 심해졌습니다. 

이름 있는 고을이나 큰 도회지에서 반례(泮隷)들이 푸줏간을 설치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피폐한 마을에서도 완악한 백성들이 소를 잡아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심지어 네거리에서도 가게를 벌여 놓고 판매를 일삼아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폐단을 논한다면 호서와 호남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열 집이 사는 마을에서 소 한 마리도 볼 수 없으며 소 한 마리의 값이 거의 100금(金)이나 됩니다. 

이 기록을 보면 '축산이 점차 그전처럼 번성하지 못하고'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즉 1793년이전에는 역설적으로 축산이 더 잘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18세기말이 되면 축산율은 점차 줄어드는데 도살률은 급증합니다. 

조금만 큰 마을이상의 사람사는 곳이면 푸줏간이 모두 있었고, 푸줏간이 없는 작은 마을조차 소를 쉽게 잡습니다. 사거리에는 "가게를 벌여놓고 소를 산더미처럼 판매"한다는 표현이 나오지요. 원문을 볼까요.

通衢列肆之間 내왕하는 사거리마다 사()을 벌여놓고 판매하는데
販鬻爲事有肉如坻 그 고기의 양이 강가의 넓은 모래벌판같다.

잠깐, 여기 익숙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바로 肆 (사)라는 글자. 위의 이전글 (링크글)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윤기 (尹愭, 1741∼1826년)의 [무명자집]에는 이런 기록이 등장합니다. 

성안의 새벽 풍경5수 〔城中曉景 五首〕

도성의 천만 가호가 모두 적막한데 / 萬戶千門盡寂然
이따금 저 멀리서 사람소리 들린다 / 時聞人語在深邊
부엌문 틈으로 등불 빛 내비치니 / 燈光斜透厨扉隙
주막엔 새 술 거르고 죽 집엔 죽이 끓네 / 酒肆新篘粥肆煎

이것은 18세기의 한양이 깨어나는 새벽시간을 묘사한 글로 마지막 문장을 보면 주막과 죽집이 등장하지요.
酒肆新篘 주사(주막)에선 새술을 거르고
粥肆煎 죽사(죽집)에선 죽을 졸인다.

여기보면 '사(肆)'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 글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서 설명드린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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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서책과 그림을 파는 서화사의 재현모습. 그러니까 이런 가게나 간이판매대가 줄지어 있고 고기가 잔뜩 쌓여있던 겁니다. 아마도 사포(私庖)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사포란 개인이 운영하는 푸줏간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서화사 (書畵肆 사진출처)

이런 곳이 많아서 도살률이 너무 올라가고 정작 밭을 갈 소가 없을지경이니 이런 곳을 모두 철폐하자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럼 과연 사라졌을까요? 

이로부터 약 70년후인 1850년의 철종대의 [각사등록] 기록을 보면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철종(哲宗) / 철종(哲宗) 9년(1858년)
6월 18일
승정원 개탁
절충 장군 수충청도 병마절도사 신 원세현(元世顯)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우금(牛禁)에 대한 신칙이 그동안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경외(京外)가 전혀 방한(防限)됨이 없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경중(京中)의 경우에는, 23개 현방(懸房) 외에 사가(私家)에서 도살하고 교동(郊垌)과 강포(江浦)에서 푸줏간을 설치하니 하루에 도살하는 것을 통틀어 계산하면 소가 몇백 마리가 되겠습니까? 향외(鄕外)의 경우에는 고을에 푸줏간을 두는 것이 이미 법의(法意)가 아닌데도 시장에서 질펀하게 도살하여 판매하니 팔도(八道)를 통틀어 계산하면 하루에 도살하는 소가 몇천 마리가 되겠습니까? 근래 농공(農功)이 곳곳마다 제때를 놓치는 것은 오로지 논밭을 갈 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는 '충청도'의 이야기이고 '강원도'쪽 기록도 사정은 마찬가지.

강원감영계록(江原監營啓錄)○철종(哲宗) / 철종(哲宗) 11년(1860년)
10월 28일

이번에 도착한 형조(刑曹)의 관문에, “이번에 계하(啓下)한 것임. 이달 10월 20일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했을 때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소 도살의 금지가 근일처럼 해이해진 적이 없습니다. 도성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여항(閭巷)과 반촌(泮村)에서 사사로이 소를 도살하여 현방(懸房)이 태반이나 문을 닫아 위로는 어선(御膳)의 공급이 겨우 끊기는 것만 면하고 아래로는 현관(賢關)에서 선비를 양성할 수 없습니다. 지방의 상황으로 말하자면 큰 도회지(都會地)나 작은 촌락을 막론하고 시장이 있는 곳마다 푸줏간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순영(巡營)의 공문을 가지고 있어서 소를 속임수로 빼앗지 않으면 훔치는 해악이 발생하므로 소 값이 날마다 뛰어서 농부가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 기록은 극히 최근의 새연구인 김동진박사의 연구결과를 뒷받침해주는 문헌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하루당 1천마리 도살이라는 김박사의 수치를 뛰어넘는 숫자가 도살되었음도 가능하다 봅니다.

“18세기 후반 연간 도살되는 소의 수가 38만~39만 마리 됩니다. 소 한 마리가 300kg이고, 도체율이 50%라면 고기 양은 150kg가량 됩니다. 당시 조선 인구를 1500만 명 정도로 잡으면 연간 인당 쇠고기 섭취량이 약 4kg이 나옵니다. 통계청 자료를 찾아보면 한국인의 연간 인당 쇠고기 섭취량이 4kg을 넘어선 게 1995년 이후입니다. 따라서 20세기 내내 한국인은 조선시대 사람보다 쇠고기를 못 먹고 살았단 소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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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의 [일성록]기록을 보면 실생활에서의 불법 사포(私庖, 개인 푸줏간)의 행태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 한 점 등장하는데 다음의 것입니다.

일성록
정조 17년 계축(1793년) 11월 25일(갑인)

정범 주성철은 공초에서, ‘저는 거모장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이달 6일 뒷동네 강 동지(姜同知) 집에서 소를 잡고 가죽 벗기기를 아직 마치지 못했을 무렵에 이번에 죽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꾸짖으며 욕하기를, 「가죽에 고기가 많이 남아 있으니 너는 도적놈이다.」 하기에, 저는 대답하기를, 「경중(京中)에는 소를 잡는 공전(工錢)이 있지만 시골 마을에는 피장(皮張)만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했더니, 이번에 죽은 사람이 분연히 다가와 주먹으로 저의 가슴팍을 치고 이어 옷깃을 잡고 저를 가죽 위에 쓰러뜨리고 손으로 목을 누르고 무릎으로 가슴을 짓이겼습니다. 중략.

목격한 증인 강태위는 공초에서, ‘윤 판서 댁에서 올해 8월에 묘사의 개수(改修)를 시작해서 지금 막 공역을 마쳤는데, 역군들이 소를 잡아 나누어 먹고 싶다고 말하기에 그들 말대로 과연 저의 집에서 소를 잡았습니다. 죽은 사람인 고소득이 벗겨 낸 가죽에 고기가 많은 것을 보고 주성철과 말다툼하며 서로 싸웠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고소득의 「아이고」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가 보니 고소득이 주성철을 부여잡고, 「이놈이 칼로 나를 찔렀다.」 하였습니다. 중략.

이야기의 주인공은 정성철이라는 인물로 거모장이었습니다. 거모장(去毛匠)이란 직업은 소나 돼지등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는 일을 합니다. 이사람이 주로하는 일은 소의 가죽을 벗기는 일만 해야합니다. 그런데 한양등 대도시의 공전, 즉 공식적인 푸줏간은 고기를 도시에만 공급하고 시골에는 '가죽만' 주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가죽외에 고기도 팔아야 한다는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선, 이 기록으로 알수 있는 점은 당시 조선인들이 얼마나 육류소비를 일상화하고 있었으며 수요가 많았는지 (시골구석구석까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도시에만 왜 고기를 파냐, 시골도 먹자!라는 마인드가 일상화되어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지요. 고기를 나누는데 살인까지 일어나는 장면이 후반부에 보입니다.

일성록
정조 19년 을묘(1795년) 5월 24일(갑술)
비국이 호남 암행 어사 이희갑(李羲甲)이 별단(別單)에서 진달한 4개 조항에 대해 회계(回啓)하여, 그냥 두라고 명하였다.

○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호남 암행 어사 이희갑이 올린 별단을 살펴보았습니다.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의 삼금(三禁)에 관한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라에 상헌(常憲)이 있는데 근래 영읍(營邑)에서는 멋대로 하도록 내맡겨 두고 있습니다. 고을에서 소를 잡는데도 금하지 않는 것도 진실로 놀라운 일인데 잡은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기까지 한다니 더더욱 한심합니다. 농가에서 먹여 기르는 소는 점점 희소해지고 궁벽한 시골에서 소를 훔치는 일이 줄을 잇고 있다니 어사의 별단에서 농사를 묵히게 될 염려가 없지 않다고 한 것은 실로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는 호남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각 도(道)가 모두 그럴 것이니, 소를 잡아 저자에서 파는 폐단과 마을에서 소를 몰래 훔치는 우환에 대해 특별히 엄히 신칙하고 앞으로 안렴(按廉)할 때 드러나는 일이 있으면 도신과 수신(守臣) 및 토포(討捕)를 맡은 신하까지 각별히 엄히 감죄(勘罪)한다는 뜻으로 여러 도에 공문을 보내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웃 마을에서 소를 빌려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은 수령이 부지런히 신칙하기에 달린 일인데, 도신들이 모두 마음을 다해 거행하도록 열읍(列邑)에 엄히 신칙했다고 일제히 보고해 왔습니다. 수령의 근무 태도에 대해서는 본래 염탐해 살피는 방법이 있어 굳이 따로 신칙할 필요는 없으니 우선 그냥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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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문헌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1795년)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첫 그림에도 나오지만 이미 오래전부터'석쇠'가 일반화되어 있었지요. 이미 1400년대 기록에 鐵灸 (철구- 석쇠) 기록이 실록에도 나옵니다 (황교익씨는 석쇠가 조선시대에 없었다고...기가 막힌).

청장관전서
무릇 생선이나 고기를 구울 때는 젓가락으로 뒤집고, 맨손으로 뒤집지 말라. 그리고 손에 묻어도 빨아먹어서는 안 된다.
오미(五味)를 맞출 때는 반드시 숟가락으로 떠서 한 번만 맛보아야지, 자주 숟가락을 휘저어 입에서 후룩후룩 마시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또 한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보고 그 손가락을 치마나 벽에 닦지 말라.

고기 굽는 석쇠는 반드시 깊이 간수해야 한다. 티끌이 기름에 묻을 뿐만이 아니라, 만일 버려두고 간수하지 않으면 개나 고양이가 반드시 핥아 불결하기 막심할 것이니, 장차 어떻게 노인을 봉양하고 신명을 흠향하게 하겠는가?


좀 더 후대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년)의 [임하필기]는 19세기 당시 중국의 지방풍습과 조선의 육류소비행태가 다름을 보여줍니다.

임하필기
춘명일사(春明逸史) 
쇠고기를 먹지 않는 일

내가 중국 조정의 인사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간혹 건육(乾肉)을 건네 주면 먹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산동(山東) 사람이오. 산동에서는 농사를 중시하기 때문에 쇠고기를 먹지 않소.” 하였다. 또 다른 사람에게 건네 주니 그 사람은 불에 구워서 먹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날고기는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산동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농사를 중히 여겨 그러한 것이나, 불에 구워 먹는 것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옛말에 “건육은 이로 물어서 끊고 회(膾)는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乾肉齒決 膾不厭細]”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남방 풍속에는 그것이 있고 북방 풍속에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우리나라는 산동과 가까운데도 그 습속이 똑같지 아니하여 하루에 몇백 마리의 소를 먹어 없애는데도 농사가 또 폐지되지 않으니, 그 풍속을 짐작해 알 수 있다.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를 말함)이 쇠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곧 이러한 의도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양(羊)을 키우면 소의 도살을 금하는 일은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해결된다.”고 하였는데, 이 논의가 매우 좋기는 하나 풍토가 양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못하여 향사(享祀)에 쓰이는 제수(祭需)를 책시(柵市)에서 사 오는 실정이니,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는 것을 어떻게 양으로 바꾸겠는가.

중국이라해도 먼 지방도 아닌 산동성 이야기입니다. 건육 즉 육포같은 걸 조선인인 이유원이 건네주면 당시 청나라인이 나는 산동성사람인데 우리지방에선 고기를 안 먹는다라는 대답이 나오고 있지요. 이유원은 이를 보고 신기해하면서 '조선에서는 하루에도 몇백마리씩 도축해서 소를 먹어치워도 농사가 망하지 않고 되는있음'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산동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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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18세기 조선의 일상화되어 있던 소고기 소비행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다보니 이덕무(李德懋, 1741~ 1793년) 선생이 개성을 여행하며 저녁무렵 거리에서 고기굽는 내음이 풍겨오는 일을 그리 놀랍지 않게 일상으로 받아드리고 있었음을 절감하게 되는군요.

仍緩踏大路。그대로 천천히 대로를 걷고 있으니
炙肉之臭。고기 굽는 냄새가
起於家家。집집마다 나는구나
市燈幽幽。시장의 등이 그윽한데
屠者之解牛。백정이 소를 해체하고 있네

Korean BBQ는 그 유래가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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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무명병사 2018/11/15 04:19 #

    세상에,, 쇠고기가 빨간소세지(?)마냥 먹히던 시절이라니....
  • 역사관심 2018/11/16 04:42 #

    빨간 소세지...진짜 오랜만에 듣는 말입니다. 소시지도 아니고 소세지!
  • 쿠사누스 2018/11/15 06:28 #

    중국인들은 고대 은주시절부터 양고기를 가장 많이 먹었다고 하네요. 그 다음은 소고기, 돼지고기순이구요. 아무래도 건조한 황토고원 인근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단백질원은 대충 방목해도 지들이 알아서 풀뜯어먹고 자라는 양이 제격이 아닐까 쉽네요.
    중국인하면 생각나는 돼지고기는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송나라이후부터 양고기를 추월해서 본격적으로 즐겨먹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소고기를 즐겨먹는 것도 역사가 유구하지만, 양꼬치엔 칭따오도 유래가 깊죠^^
  • 역사관심 2018/11/16 04:42 #

    그렇군요. 중국요리 역시 워낙 유래가 깊으니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송대이전은 몽골의 원제국이니 그때까진 특히 또 양고기가 더 발달했을 것 같은 느낌이...
  • 존다리안 2018/11/15 09:33 #

    옛날은 소 오늘날은 닭
  • 역사관심 2018/11/16 04:40 #

    치킨의 나라, 프랑스를 제치고.
  • 까마귀옹 2018/11/15 10:35 #

    출처를 까먹었는데, 당대의 글 중에는 '명절이 되니 도처에 소들이 다리가 부러지는 구나'라고 풍자한 글도 있었다죠. 소 다리가 부러졌다고 둘러대고 소를 도축해서 먹는 사례가 그 정도로 많았다는 뜻이니.

    얼마 전에 황교익 씨가 이 것가지고 해괴한 주장을 했다가 난리난 적이 있는데, 이건 뭐.....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 설명 생략.
  • 역사관심 2018/11/16 04:41 #

    호, 그런 글도... 불쌍한 카우들;

    황교익씨가 티비에 나오면 이젠 그냥 패스합니다. 한때 책까지 사서 보던 양반인데.
  • 남중생 2018/11/15 11:11 #

    이덕무가 석쇠를 잘 간수하지 않으면 개와 고양이가 핥아서 "장차 어떻게 노인을 봉양하고 신명을 흠향하겠느냐"라고 했는데, 나이드신 노인도 석쇠 요리를 먹었고, 심지어 제사음식에서도 쓸 정도였다는 걸 알 수 있군요.
    대체로 제사 풍습 같은건 일반 식습관보다 느리게 변할텐데, 이미 18세기 말경이면 이 풍습이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 역사관심 2018/11/16 04:40 #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당시 노인들도 고기요리를 드셨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군요.
  • 炎帝 2018/11/15 11:26 #

    조선시대 고기 요리법을 보면 저렇게 많이 먹은 만큼 노하우가 축적된게 아닌가 싶어지죠.
    예를 들면 요즘 관점에서 보면 좀 이상하게 보일법하지만 육즙이나 씹는 맛등을 살리는 방법을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요리법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설야적이라는 요리는 고기를 한번 굽고 찬물에 식혀서 다시 구워 먹는 방식이었고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꼬치에 고기를 굽기 전에 양념가루와 밀가루를 섞고 묽게 반죽한 풀을 고기에 발라 구운 다음 먹기 직전에 껍질을 벗겨먹는 요리법도 있었다 합니다.

    굽는 요리는 아니지만 육포도 길게 썬 고기를 말리는 것도 있었지만
    잘게 다져서 육회처럼 만든걸 말리기도 했고, 그것도 겉부분만 말려서 육회와 육포의 맛을 동시에 느끼는 방법도 있었다고 하네요.

    정말 조상님들이 고기 연구를 엄청 한것 같습니다.

    다만 당시 조상님들은 요즘처럼 생고기로 먹기보다는 양념해 먹는걸 더 고급으로 쳤나봐요.

    요즘은 재료가 좋으면 양념은 오히려 제맛을 못느낀다 여기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생고기로 먹는건 방자구이라 해서 하인들이나 먹는 요리 취급을 했었나봅니다.

    신선한 고기를 양념없이 구워 소금에 찍어먹으면 맛은 양념한것보다 좋다고
    당시 요리책에서도 인정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 시대 정서는 그게 아니었나봐요.

    아무래도 요즘처럼 냉장유통이 발달하기 힘들었을테니 그렇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거기다 유럽만큼은 아니어도 향신료가 부의 상징이었으니...
  • 역사관심 2018/11/16 04:39 #

    아래에도 썼지만 각종조리서에 육류보관법부터 여러 모습이 벌써 등장하지요. [한식대첩]이라는 프로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특히 고기전문가이신 서울대표 (남성)분이 설야적등 잊혀져가는 조리법을 실전에서 보여주셔서 너무 좋더군요.

    양념대 생고기부분은 다른 글로 한번 소개하고 싶은 주제네요!
  • 응가 2018/11/16 20:42 #

    다진고기를 건조한것을 편포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육포보다 품이 더 드니 잣이나 대추 등으로 장식한걸 이바지음식으로 썼습니다.
  • 아빠늑대 2018/11/15 13:06 #

    소고기는 사랑입니다!
  • 역사관심 2018/11/16 04:36 #

    고기는 모두 사랑합니다!
  • 진냥 2018/11/15 14:00 #

    연암 박지원이 이덕무 등의 친구들과 함께 고기 궈먹고 술마시다가 한밤중에 종로 거리를 쏘다니던 일을 담은 수필을 읽은 적 있지요. 현대를 살아가는 제가 밤중까지 막창 궈먹다가 술 올라서 헤헤거리며 밤거리를 걸어가는 모습과 정말이지 다를 바가 없어서 웃었더랬습니다. 후훗.. 이 답없는 고기 덕후들....(코쓱)
  • 역사관심 2018/11/16 04:38 #

    오, 그런 부분이 있군요. 조선시대 고기덕후 기록...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씨익)
  • 진주여 2018/11/15 14:48 #

    일본쪽에 육고기 조리법이 발달못한것과 비견될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고기요리가 발전된 전통음식을 보면 조상님들이 어지간히도 맛있게 드셨던것 같습니다.

    귀해서 못먹을 정도로 귀한 소였으면 굳이 잡아먹지말라고 법안을 만들어 둘 필요도 없었겠다. 싶더라구요
  • 역사관심 2018/11/16 04:35 #

    1670년에 씌여진 음식디미방때까지는 아직 소고기보다 개고기나 꿩고기등의 조리법이 더 나오긴 하지만, 이미 소고기의 각부위 조리법이나 보관법도 이미 나오고 있지요. 12세기의 고려도경대 (불교국가)에 비해서 조선시대에는 육류조리는 진짜 엄청 발전했습니다.
  • 無碍子 2018/11/15 20:46 #

    '논이 있어도 모를 내지 못한 경우가 많고 모를 내기는 했으나 너무 늦게 낸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는 기근과 역병으로 인력이 미치지 못한 때문이지만 실은 논밭을 가는 소가 매우 귀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열 집이 사는 마을에서 소 한 마리도 볼 수 없으며 소 한 마리의 값이 거의 100금(金)이나 됩니다. '

    잡아먹을소가없다는 이야기아닙니까?
  • 역사관심 2018/11/16 04:45 #

    도축율이 너무 심해서 잡아먹을 소가 없을 정도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로 사회문제가 되었던 시대지요.
  • 이선생 2018/11/15 22:39 #

    그 비싼 소를 일상식으로 먹었다니 저시대가 마냥 못먹고 살기만 한 것은 또 아닌 모양이군요.
  • 역사관심 2018/11/16 04:32 #

    어찌보면 17세기~19세기중반까지 경제수준에 비해 너무 심하게 육류소비를 한 것이기도... 그 덕에 고기손질이나 조리법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요.
  • 응가 2018/11/16 20:47 #

    국가에서 까지 법으로 금지하던 소 도축을 끝끝내 몰래몰래 해서 엄청난 가짓수의 고기요리를 탄생시키니 소고기에 대한 조상님들의 열정이 대단합니다ㅋㅋㅋ
    북한에서는 아직가지 소도축이 불법인데 그래도 몰래 몰래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다만 고생을 많이 하고 자연사한 소다 보니까 품질이 좋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 역사관심 2018/11/17 09:29 #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1인당 육류소비량 (2017기준)이 세계 14위, 아시아에선 말레이지아 다음인 2위더군요.

    북한도 동포인지라 입맛은 ㅎㅎ
  • TheLightOfDay 2018/11/17 23:07 #

    다만 도축되는 소 숫자만을 근거로 소고기 섭취양이 20세기 대부분 기간보다 높았다고 단정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통과 보관에 있어서의 효율성, 그리고 대체제로 작용할 다른 식품의 공급과 가격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 역사관심 2019/01/19 03:43 #

    앗 좋은 댓글을 지금에서 발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당시 경제상황에 비해 국가경제가 타격이 있을정도로 심한 과소비를 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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