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발견했지만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워 그저 묵혀두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남자거인들- 7~9세기 신라의 거인국 (장인국) 기록과 장길손 거인신화 ]에서 보았듯 거인국에 대한 이야기가 꽤 전하지만, 중국에는 예전부터 '소인국'에 관한 전승이 꽤 많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명대 고기원(顧起元,1565~1628년)의 [객좌췌어(客座贅語)]에 이런 이야기가 전합니다.
객좌췌어
명나라 융경 연간(1567-1572년)에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인 금한천(金漢泉)은 한때 바다에서 떠다니던 소인 두 명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네모난 조롱에서 키웠다. 두 소인들 중 하나는 노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젊은 남자였는데 그들 관계는 모자인 듯 했다. 그들의 키는 한 척이 약간 넘었으며, 이 두 소인이 말하는 음성은 마치 제비 같았다.
나중에 소인 중에 남자가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슬피 울었으며 흰천으로 머리를 둘러 마치 상복 같은 차림을 했다. 나중에 이 노부인 역시 죽었다. 금한천의 딸은 고기원의 처남 왕효렴(王孝廉)의 아내였다. 때문에 나는 여러 차례 이 두 소인을 직접 보았으며 결코 남에게 주워들은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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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고기원은 마테오리치가 북경에 가져온 서양화를 감정하는 등 당대 여러 방면에서 지식인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가 쓴 [객좌췌어]에 소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키가 1척으로 나오지요. 명대에 한 척은 23cm입니다. 글 말미에 보면 고기원은 그냥 이 이야기를 들은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이들을 자주 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을 보면 꽤 자세한 기록이 나와 흥미를 자아냅니다. 청나라 시대의 선정 (宣鼎, 1832~1880년)의 [야우추등록(夜雨秋燈錄)]이란 책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야우추등록
광동 오문도(澳門島)에 성이 구단(仇端)이라는 무역상이 있었는데 늘 각국에 가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하루는 태풍을 만났는데 다행히도 어느 섬으로 대피했다. 바람이 약해진 후 뱃사공은 배를 수리하고 있었으므로 구단은 섬으로 올라가 산보를 했다. 보니 섬 중에 말라버린 나무가 매우 많고 큰 것은 열 아름 정도 됐다. 나무에는 구멍이 많이 나있는데 그 속에서 소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인의 키는 7-8촌 되고 노인, 어린이, 남자, 여자가 있고 피부는 밤색이었는데 허리춤에는 모두 칼을 차고있었고 활, 화살 등 물건 등 역시 매우 작았다. 소인들은 구단을 보더니 모두 ‘커치산이리!’하고 소리쳤다. 이 때 그는 변을 보려고 바지를 풀고 쪼그려 앉아 곰방대를 한 모금 빤 후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시끄러워서 나무 위를 보니 나무꼭대기에 무릎 높이의 작은 성이 있었는데 모두 까만 돌로 쌓았고 성문은 열려있었다.
소인의 수는 천여 명이었고 모두 어깨를 맞대며 깃발을 흔들고 각 나무 구멍에서 호령소리에 맞춰 나왔다. 그 중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얼굴 용모가 단정하고 머리를 묶어 맸으며 보라색 관을 쓰고 소인들을 총지휘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그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들은 ‘히리’하고 대답하더니 모두 모여 구단을 포위했다. 구단은 자기를 몰아내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이 작았으므로 두렵지 않았으며 아까처럼 계속 쪼그려 앉아 변을 보았다. 그 젊은이가 웅얼웅얼 무슨 말을 여러 번 했는데 구단이 대답이 없자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활, 창, 칼 등등으로 공격했는데 양 넓적다리가 찔려 매우 아팠다. 구단이 싫어하며 장난식으로 담뱃대로 젊은이를 한대 쳤더니 넘어져 죽어버렸다. 군중들은 시체를 들고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견고히 닫고 남은 사람은 모두 구멍으로 숨었다. 구단은 배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 해안에 소인들이 몰려와서 진흙을 던지고 큰소리로 ‘러시슬이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이 되자 조용해졌다. 구단은 소인을 한두 명을 고향으로 잡아가면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땔나무를 핑계 삼아 포대와 도끼를 들고 지난번 그곳으로 가서 나무 하나를 찍었다. 그 속에 소인은 매우 많았는데 아직 잠이 깨어나지 않은 한 가족을 포대 속에 넣었다. 배로 돌아와서 먹을 것을 주었는데 특히 잣을 잘 먹었다. 그가 돌아가려고 할 때 해안에 소인들이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입으로는 무슨 중얼중얼하는 것이 욕을 하는 것 같았으며 또한 작은 화살을 비오듯 쏘았다. 사공은 놀라서 밧줄을 풀고 출발했다.
한 달쯤 지나서 구단은 광동으로 돌아왔다.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난쟁이 나라 사람이고 소개했다. 이들은 고기를 먹고 단 것을 잘 먹었다. 다만 이들은 바다새가 물어갈까 두려워 혼자서 감히 다니지 않았다. 구단은 기뻐하며 소인을 수정 상자 속에 넣어 시장에 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이것으로 무척 많은 돈을 벌었다. 이후 다른 사람이 소인을 넘겨받았으며 그는 자단 나무로 작은 집을 지어주었다. 그 소인은 예의가 있었고 염치를 알았으며 머리가 좋고 생활습관이 현대인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단지 작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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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가 꽤나 상세해서 마치 일기처럼 생생합니다. 그중 필자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만 굵은 체로 표시했습니다. 일단 이야기는 광둥 오문도란 곳이 배경인데 이곳은 아마도 현재 마카오가 아닌가 합니다. 소인의 키는 7~8촌으로 역시 위의 이야기와 비슷한 25cm 정도.
이 소인들은 나무구멍에 들어가 사는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번 주목해 주세요.
다음으로 청나라 건륭제 당시 그 유명한 [사고전서]를 편찬한 기효람(紀曉嵐,1724∼1805년)의 저서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에도 소인국에 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다음의 기록입니다.
난양소하록 권3 (灤陽消夏錄三)
몸 길이가 한 척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늘 보았는데 남녀노소가 모두 있었다. 이 소인들은 석류나무 가지를 잘라 머리에 두르고 무리를 이뤄 가무를 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사슴소리 같이 가늘고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어떤 소인은 조정의 주둔한 군대 장막에서 곡식을 훔쳐가기도 했다. 잡히면 땅에 무릎 꿇고 곡을 했다. 만약 그들을 줄로 묶으면 단식하여 죽었다. 만일 놓아주면 즉시 도망가지 않고 천천히 수 척을 걸어가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 사람이 쫒아가 욕을 하면 즉시 땅에 무릎 꿇고 울었다. 천천히 걷다가 멀리 가서 쫒아가지 못할 거리가 되면 신속히 산속 깊이 숨어버렸다.
청나라 군사들은 이 소인들의 거처를 결국 찾지 못했는데 그들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붉은 석류모자를 즐겨 썼기 때문에 편의상 ‘홍류왜(紅榴娃)’라고 불렀다. 당시 구현(丘縣-현재 하남성 휘현)의 승천금(丞天錦)이 목장을 순시하러 사람을 파견했는데 그가 한 소인을 붙잡아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우리와 같았고 전설상의 괴물이나 요괴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금적화현(今迪化縣)으로 현재의 신장 우루무치입니다. 30센티가량 되는 소인들을 보았는데 이들은 산속깊이 살며 거처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에게도 소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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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조선의 소인이야기
다음은 [해동역사]에 전하는 고구려의 소인에 대한 이야기.
해동역사 물산지(物産志)
담비[貂 초]
○ 담비는 고구려국(高句麗國)에서 나는데, 항상 어떤 괴물과 함께 같은 굴속에서 산다. 그 괴물은 가끔씩 나타나는데, 그 모습은 사람과 비슷하고, 길이는 3척가량 되며, 능히 담비를 제압할 수 있고, 칼[刀]을 몹시 좋아한다.
사람이 초피(담비 가죽)를 얻고 싶으면 칼을 굴 입구에 던져 놓는다. 그러면 이 괴물이 밤중에 굴에서 나와 칼 옆에 초피를 놓아두는데, 사람이 초피를 가지고 간 다음에 그 칼을 가지고 간다. 《이원(異苑)》

붉은 색부분이 원문으로 이 이야기의 원전은 [이원]으로 적혀 있지요. 이원(異苑)은 남송(南宋 1127년-1279년)의 유경숙(劉敬叔)이 편찬한 13세기의 지괴류저서입니다. 13세기의 남송서적에 고구려의 소인괴물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원]의 기록은 이 소인괴물 (1척을 조선초 주척으로 하면 20.6센티이므로 3척짜리 괴물은 62센티 정도)이 담비를 데리고 굴에 살면서 담비가죽을 '칼'과 교환하면서 사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기록이 사실 너무나 '생뚱'맞아서 그동안 소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중국측 기록들을 발견하고 꽤나 흥미로운 접점이 나옴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고구려시대의 소인은 '괴물'로 불리며 담비와 함께 굴속에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담비는 현재 남한의 최상위포식자로 여겨지는 (생김새에 속지 마시길) 포악한 녀석으로 원래부터 고대한반도에서 유명했던 놈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담비의 실제 생태입니다. 김영근 선생의 [서울대공원의 야생동물]이란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담비는 죽은 나무 뿌리에 자연적인 굴을 이용하여 자기의 보금자리로 활용하고, 짝짓기 때만 암수가 만나..."
낯익은 단어들이 나오지요. '나무뿌리의 굴'. 그럼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를 다시 볼까요?
"나무에는 구멍이 많이 나있는데 그 속에서 소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인의 키는 7-8촌 되고 허리춤에는 모두 칼을 차고있었고..."
우리측 기록인 [해동역사]를 다시 보면,
"담비는 고구려국(高句麗國)에서 나는데, 항상 어떤 괴물과 함께 같은 굴속에서 산다. 그 괴물은... 칼[刀]을 몹시 좋아한다."
즉, 몇몇 소인들의 생태의 기록이 담비의 생태와 묘하게 겹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고구려에 살던 소인은 무리에서 떨어져서 원래 자신의 생태처럼 '나무둥지아래의 굴'을 찾아다니다가 한반도북부에 살던 고대 담비의 굴에 멋대로 들어앉아 담비를 부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칼'을 수집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런 추측을 한층 더 흥미롭게 해주는 기록이 한 점 더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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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순일편(旬一編)
기러기에 박힌 탄환
두만강(豆滿江)가에서 주살을 쏘는 자가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털을 벗겨 보니 작은 탄환이 가죽과 살 사이에 박혀 있었다. 반짝거림과 굵기가 마치 게 눈과 같았고, 던져보니 쟁그랑하고 소리가 나는 쇠붙이였다. 유식한 고로(故老)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것은 소인국(小人國)의 물건이다. 기러기가 그 지역을 지날 때 사람을 보고 쉽게 가까이 갔다가 탄환을 맞고도 죽지 않아 탄환을 지닌 채 날아온 것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종종 그런 것을 발견하는데, 이 탄환을 보면 그 사람들을 알 수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황당했다.
위의 기록은 이유원(李裕元,1814~1888년)의 [임하필기]에 나오는데 '두만강'이 그 배경입니다. 즉 옛 고구려영토가 배경이지요. 이유원이 한반도 북부인 이 곳에서 사냥된 기러기 한마리를 보게 되는데 이 기러기에 아주 작은 탄환이 박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늙은이에게 물어보자 대뜸 "이건 소인국의 물건이다. 워낙 작아 맞아도 죽지 않는데,우리는 이 소인국이 쏜 탄환을 종종 발견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 북부의 소인! 완벽히 상상과 흥미로 추측해 볼 뿐입니다.

산해경의 소인국
덧글
성을 볼 때 중국인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http://inuitshut.egloos.com/1933398
두만강 이야기는 다루셨던걸 몰랐네요.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연휴보내시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