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건축 (25)- 일본그림으로 보는 임진왜란 당대 촉석루모습? (회본태합기 고찰) 한국의 사라진 건축

한국의 현재 3대누각으로 꼽히는 현재의 촉석루는 이런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아래 바위가 논개바위지요). 
그런데 촉석루는 원래부터 이 형태였을까요? 

2008년에 나온 하강진의 [촉석루 제영시의 제재적 성격]을 보면 촉석루의 연혁이 매우 자세히 소개됩니다. 특히 하강진성생은 이 연구를 통해 2개의 기록을 더 찾아냈지요. 다음은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촉석루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는데, 기존의 경우 일곱 번으로 보고 있으나 1786년과 1887년 두 차례 더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추가로 밝혔다. 이로써 18세기 이후 200여 년간의 중수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될 때 촉석루는 전소되지 않았고, 일부가 훼손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제에 부합함을 알았다.

촉석루는 단독 건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서각과 동각을 부속 누각으로 거느린 웅장한 건물 구조였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흔히 이를 간과하고 있지만, 임란 전까지만 해도 촉석루는 쌍청당과 임경헌을 서각으로, 함옥헌과 청심헌을 동각으로 거느렸다. 부속 누각은 임란 때 모두 소실되었는데, 서각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고, 동각은 곧바로 중수되었다. 이중 청심헌은 적어도 1757년 이전에 벌써 훼철되었고, 함옥헌만 유일하게 존속되다가 20세기 초에 사라졌다.

두번째 문단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쌍청당(雙淸堂) 촉석루 서편에 있다. 『신증』 능허당(凌虛堂) 곧 촉석루의 동쪽 누각이다. 조양관(朝陽館)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이 건축한 것이다. 청심헌(淸心軒) 능허당 동쪽에 있다. 임경헌(臨鏡軒) 곧 촉석루의 서쪽 누각이다. 목사 이원간(李元幹)이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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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리스트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촉석루의 속루(屬樓)들:

서각-
쌍청당 (1593년 계사년 제2차 진주성전투때 소실)
임경헌 (1593년 계사년 제2차 진주성전투때 소실)

동각- 
함옥헌 (임란전 명칭은 능허당, 임란후 바로 중건, 20세기초 소실)
청심헌 (임란후 바로 중건, 1757년이전 다시 소실)

위에 보이는 그림은  보시다시피 능허당은 촉석루의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위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이는 것처럼 네 개의 속루중 유일하게 20세기초까지 남아있던 것이 '함옥헌'. 촉석루의 오른쪽에 ㄱ자모양의 커다란 누각입니다. 지금은 물론 없지요. 아래 그림의 오른쪽 부분에도 보입니다.
20세기초까지 존재하던 동각의 함옥헌

촉석루, 9차례의 재건-중수

다음은 하강진선생의 논고에서 촉석루의 주요재건, 중건, 중수역사를 발췌한 부분입니다. 중요연대는 굵은체로 표기했습니다.

촉석루는 1219년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金之岱(1190~1266)가 진주목사로 부임한 시점인 1241년에 최초로 창건하였고, 그 이후 安震(1293~1360)10)이 1322년 진주목사로 재직할 때 자연 상태로 허물어져 있던 촉석루를 중건하였다. 

촉석루는 고려 말 이후 여러 차례 훼손과 중수의 과정을 겪었다. 1379 왜구의 노략질로 촉석루가 소실된 뒤 황폐한 채로 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고을 원로들의 재건 제의로 용두사의 승려 端永이 주간하던 것을 나라의 지원에 힘입어 1413년 9월에 진주 판목사로 부임한 權衷(1349~1423)이 판관 박시결과 함께 중건을 완료하였고, 14) 1491년에는 진주목사 慶 이 판관 오치인과 더불어 다시 중수하였다. 

15) 당시 촉석루는 ‘蘭亭’에 비유되어 선비들이 도의와 풍류로써 교유하는 데 중요한 공간 으로 활용되었다. 16) 그 이후 세월이 100여년 흘러 대들보가 부러지고 기둥이 기울어져 그대로 지탱할 수 없어 접빈하거나 연회를 베풀 때는 객사를 빌려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목사 申點(1530~ ? ) 1583년 2월 관찰사 柳塤과 누각을 새롭게 하되 옛날 규모보다 크게 할 것을 상의한 뒤 판관 김원룡과 협력하여 대대적으로 중수하고는 이해 4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그러다가 5년 정도 경과했을 때 비가 샐 정도로 촉석루에 허물어진곳이 생겨났지만 보수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18) 1593년 6월 전투로 진주성이 함락될 때에는 남장대인 촉석루의 일부가 훼손되는 병화를 입었다.임란 당시 부분적으로 훼손되었던 촉석루가 시간이 지나면서 파손은 가속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병사 南以興(1576~1627)은 대대적으로 복구할 필요성을 느껴 1617년 7월 촉석루의 상량식을 갖고 1618년에 중수를 완료하게 되었다.

22) 그는 당시 김시민 장군의 사적비를 세우고, 북장대와 동장대(일명 대변루)를 중건하는 등 진주성을 전면적으로 정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제법 흐른 뒤 안절사로 진주에 온 경상우병사 李台望은 촉석루가 이미 황폐해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1724년 한가한 틈을 이용해 우후 박황과 함께 기울어지고 썩은 기둥과 난간을 교체하고, 벗겨져 흉하게 된 단청을 새롭게 보수하였다. 23) 또 60여년이 지난1786년 봄에 병사 金廷鉉이 기울고 닳아 보기에 좋지 않던 누각을 비로소 개수한 바 있다.

24) 그 이후 100년이 된 시점에는 촉석루가 무너지고 썩어 비가 새는 등 자연 훼손의 상태가 심각하였는데, 당시의 병사 鄭騏澤이 이를 개탄하여 1887년에 진주성과 함께 중수하였다.25) 촉석루는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1948년에는 국보로 지정되었고, 1950년 9월 1일 북한군의 거점이 되자 아군이 폭격하는 바람에 완전히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1956년 진주고적보존회가 발의하여 관민의 협조와 국가의 후원에 힘입어 1960년 2월에 준공하였고, 낙성식은 이해 10월에 개최했다

이를 정리한 표입니다.
촉석루의 건축역사 (촉석루 제영시의 제재적 성격 중)


하강진선생에 따르면 촉석루자체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이 4개의 속루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밝혀낸 속루에 대한 고문헌정보들입니다.

<가> 쌍청당은 촉석루 서쪽에 있다. [신증]능허당은 촉석루의 東閣이다.---청심헌은 능허당의 동쪽에 있고, 임경헌은 촉석루의 西閣으로 목사 이원간이 건립하였다.(雙淸堂在矗石樓西偏. [新增] 凌虛堂卽矗石樓之東閣.---淸心軒在凌虛堂東, 臨景軒卽矗石樓之西閣, 牧使李元幹建.)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ㆍ 진주목

<나> 동쪽의 것을 청심ㆍ함옥이라 하고, 서쪽의 것을 관수ㆍ쌍청이라 하였다. 이 누각들은 촉석루에 공손히 읍하는 형국인데, 미천한 사람이 존귀한 어른을 뵈옵는 것과 같다.(東爲淸心ㆍ涵玉,西爲觀水ㆍ雙淸, 皆拱揖斯樓, 若賤幼者之朝尊貴也.) - 하수일, 송정집 권4ㆍ 촉석루중수기 (1583)

<다> 함옥헌은 촉석루의 東閣으로 승람 에는 능허당이라 했는데, 언제 지금의 이름[함옥헌]으로 개칭되었는지는 모른다. 누각의 칸 수는 예전에 비해 배를 더했다. 관수헌은 촉석루의 西閣으로 목사 이원간이 건립하였는데, 전란을 겪은 뒤폐하여 복고되지 않았다. 청심헌은 함옥헌의 동쪽에 있고, 병사 이수일이 건립한 것인데, 옛 규모에 비해 조금 웅장하였다.---쌍청당은 관수헌 서쪽ㆍ관아의 남쪽에 있었는데, 전란을 겪은 뒤 지금까지 폐한 상태이다.(涵玉軒卽矗石樓之東閣. 勝覽 稱凌虛堂, 不知何時改今名. 與樓幷間架之數, 倍增舊制. 觀水軒卽矗石樓之西閣, 牧使李元幹建, 經亂後廢而不復. 淸心軒在涵玉軒東, 兵使李守一所建. 比舊制稍壯.---雙淸堂在觀水之西ㆍ公廚之南, 經亂今廢.) - 성여신, 진양지 권1ㆍ 관우 (1632)

<라> 누각의 동쪽에 능허당이 있고, 함옥헌이 있다.---계사의 난 때 왜구가 불태웠다. 뒤에 중건했지만, 쌍청당과 임경헌은 끝내 복고되지 않았다고 한다.(樓東有凌虛堂, 有涵玉軒.---癸巳之亂, 倭寇燒之. 後雖重建, 而雙淸堂ㆍ臨景軒終不能復古云.) - 김도수, 춘주유고 권2ㆍ 남유기 (1727)

<마> 쌍청당은 촉석루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한 상태이다. [新增] 능허당은 촉석루의 東閣으로 중건 때 함옥헌으로 고쳤다.---청심헌은 지금 폐한 상태이고, 임경헌도 지금 폐했다.(雙淸堂在矗石樓西偏, 今廢. [新增] 凌虛堂卽矗石樓之東閣, 重建改爲涵玉軒,---淸心軒, 今廢. 臨景軒, 今廢.) - 여지도서 ⋅ 경상도 진주 (1757~1765)

<바> 누각은 아래로 두른 것이 모두가 촉석이므로 그 이름을 지었다. 동쪽으로 함옥정이 있는데, 누각과 처마가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의기 논개의 사당이 있다.(樓底遶壁皆矗石, 故名焉. 東有涵玉亭, 與樓連簷. 西有義妓論介之廟.) - 송병선, 연재집 권21ㆍ 단진제명승기 (1872)

<사> 능허당은 촉석루 동쪽 누각으로 무오년에 잇달아 건립되었고, 이름을 고쳐 함옥헌이라 했다.(凌虛堂, 卽矗石樓東閣, 戊午連建,改爲涵玉軒.) - 정광현, 진양지속수 (1927)

저자는 위의 문헌기록들을 통해 촉석루가 1593년 계사 전란이 있기 전까지는 서쪽으로 본루의 ‘西閣’인 임경헌과 그 곁의 쌍청당, 동쪽으로는 본루의 ‘東閣’인 능허당과 그 곁의 청심헌을 거느린 거대한 건축물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현재의 촉석루와 논개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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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청당기록과 일본측 회본태합기의 삽화

촉석루의 속루(屬樓)들중 동각을 이루던 함옥헌과 청심헌은 각기 20세기초, 그리고 1757년이전에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래 그림의 붉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서각을 이루던 쌍청당과 임경헌이라는 누각들은 1593년 제 2차진주성전투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는 한번도 재건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위의 문헌기록들에도 잘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어떤 고지도에도 이 누각들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아래 그림의 노란색부분 (서측)에 있었을 건축물들입니다.
과연 이 누각들은 어떻게 생겼었을까요? 물론 명확히 알길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서각중 쌍청당을 다룬 조선전기 시가 한 점 있습니다.

백암집(栢巖集)
晉州雙淸堂遇裵同年晦甫應褧

굽은 성가퀴 긴 들판에 다다랐고 曲堞臨長野
층층 난간 먼 하늘에 튀어 나왔네 層欄出遠空
강은 차가운데 달은 떠 오르고 江寒能得月
산 가까워 절로 바람이 이는도다 山近自生風
꿈결에 삼청 세계 위에 오르니 夢接三淸上
마음은 온 세계에서 노니는 듯 魂遊萬界中
낭랑히 읊으니 가을날 이미 저물고 朗吟秋已夕
내일이면 바닷가 산 동쪽에 있으리라 明日海山東

이 시는 조선전기 문인인 김륵(金玏, 1540~1616년)이 1577년 가을 호송관으로 차출되어 진주의 쌍청당에서 과거 급제 동년인 배응경을 만나 지은 시입니다. 즉, 임진왜란이전  소실전의 쌍청당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강진 선생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청당의 입지 성격과 건물 형태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굽은 성가퀴가 긴 들판을 따라 있고, 층층으로 된 난간이 하늘에 돌출한 모양이다. 강달과 산바람의 경치를 감상하는 행위를 마치 삼청의 신선 세계에서 유람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를 통해 쌍청당이 촉석루 본루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臨景軒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해보지만 이를 제재로 한 시를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하강진선생의 설명처럼 두째 시구에 나오는 層欄 (층란)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여러 층으로 된 난간(欄干)"을 의미합니다. 즉, 직역하면 중층의 난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현재의 촉석루 본건물이나 위에 나오는 임경헌과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늘로 돌출된 느낌도 없고 층층의 난간도 아닙니다.

과연 이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필자는 우연히 일본측 삽화에서 이에 부합하는 회화자료를 만났습니다. 다음은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 에혼다이코키)]의 논개가 일본장수를 끌어안고 뛰어내리는 장면의 묘사입니다. 즉 임진왜란 당시의 촉석루를 묘사한 삽화입니다.
회본태합기의 촉석루

그런데 누각의 모습이 꽤 흥미롭습니다. 한번 확대해 볼까요?

보시다시피 현재의 촉석루나 그림속의 사라진 임경헌과 달리 절벽으로 건물이 약간 돌출되어 있고 (당연히 난간도 하늘로 돌출), 그림상으로는 마치 중층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명확히 중층인지 아니면 앞쪽의 건물이 가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이 정확히 촉석루의 어떤 부분을 그린 것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필자는 1593년 소실이전에 쌍청당을 묘사한 이 싯구와 이 그림이 매우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층층 난간 먼 하늘에 튀어 나왔네 層欄出遠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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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본태합기의 삽화가와 그 스승들

물론 이는 완벽하게 개인적인 그리고 현재로썬 억측에 가까운 대담한 가설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회본태합기]는 일본 에도 막부 시절인 1797년에서 1802년까지 84권 출간된 소설이기 때문이지요. 즉, 이 삽화는 상상화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회본태합기의 삽화가는 오카도 교쿠잔 (岡田玉山, 1737~1812년)이라는 사람입니다. 즉 18세기의 사람으로 그는 임진왜란 당대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분의 스승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그 스승들에게서 임란당시의 그림 (종군화가라든가)을 전수받아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도 작지만 배제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카도 교쿠잔의 스승은 에도중기~후기의 蔀関月 (1747~1787년) 혹은 月岡雪鼎 (1726~1787년)입니다 (月岡雪鼎은 蔀関月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月岡雪鼎도 스승이 있는데 바로 高田敬輔 (1674~1756년)입니다. 이 高田敬輔의 스승이 狩野永敬 (카노 에이케이, 1662~1702년)이란 인물입니다. 점점 연대가 임진왜란으로 가까워지고 있지요. 그런데 이 카노 에이케이(狩野永敬)란 사람이 흥미롭습니다.

카노는 현재 뉴욕공공도서관에 있는 [조선인 행렬도(朝鮮人行列図巻)], 그리고 하버드 사쿠라 미술관의 [선명통신사 병풍]등을 그린 인물입니다.
카노 에이케이의 조선통신사도

이 카노 에이케이의 아버지는 狩野山雪 (1592~1651년). 역시 화가인데 여기서 이 '카노'가문의 '가문파'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카노가문의 많은 화가들은 '카노파(가노파)'라 불립니다. 이들은 일본전근대 회화사상 최대의 파이며 무로마치 중기 (1400년대)부터 400년간 활동하던 집단으로 특히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을 직접적으로 섬기며 매우 밀접하게 지냈습니다.

이 狩野山雪은 스승으로  (드디어 임진왜란 당대인물인) 狩野山楽 (1559~1635년)을 모십니다 (뿐만 아니라 양자가 되지요). 이 사람은 특히나 흥미로운데,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매우 깊은 관계에 있던 인물입니다. 후일 그 깊은 관계때문에 적들에게 암살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요.

사실 이 '가노파(카노파)'와 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 2012년 [繪畵를 통한 疏通- 새로운 맥락으로 보는 韓日 繪畵交流] (박은순)중 일부를 발췌하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나옵니다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뒤에 간략히 말씀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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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 제시하는 세 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에도시대의 일본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다이묘(大名) 家에 소장된 조선 회화이고, 두 번째는 일본의 대표적인 화파의 하나인 가노파의 시조로서 일본 회화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인 가노 탄유(狩野探幽)가 기록한 조선 회화이다. 세 번째로는 조선에 전래된 일본 그림의 문제이다. 각각의 항목은 현재 일본에 소장된 조선그림이나 한국에 소장된 일본그림과 직접 관련이 있으며, 동시에 각 항목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한일 회화교류의 다양한 면모를 구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항목들이다. 

2년차 연구는 "繪畵를 통한 疏通: 가노 탄유(狩野探幽, 1602-1674)가 기록한 조선그림"이란 표제하에 진행하려고 한다. 일본 에도시대 화가 집단 중 관학파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가노파의 시조인 가노 탄유는 회화감정에도 전문가였다. 그가 감정한 작품들을 간단히 스케치, 기록한〈縮圖〉 중에는 조선그림으로 판단되는 작품들이 실려있다. 그간 일본회화사 연구자들이 필요에 따라 거론해 왔던 이러한 작품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17세기 일본인들이 조선그림에 대해서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국적 및 화가의 문제를 비롯하여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하였는지, 또한 이 작품들 가운데 현존하는 작품들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등의 문제를 구명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고찰된 모리가에 전래된 세 폭의 산수화와 두 폭의 영모화, 깃가와가에 전래된 이정의 <용호도> 두 폭, 마에다가에 전래된 최명룡의 <하경산수화>, 조선국왕이 선사한 궁중 화원이 그린 <춘일송록도>와 <추월죽학도> 등은 작품이 규모가 일반적인 경우에 비하여 크고, 제작한 화가가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화격이 높고, 필자미상이더라도 작품의 수준이 높으며 그 제작시기와 전래경위가 분명하다는 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작품들은 회화적 의의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국회화사에서 주요하게 거론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본고를 작성하여 한국회화 연구에 새롭고 의미있는 자료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 작품들을 소장하였던 일본의 다이묘가는 일본의 다이묘가 중에서도 대표적인 가문들이었다. 세 가문 모두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였고, 조선에 대한 관심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조선에서 작품을 직접 가지고 갔거나, 조선 미술품을 수집하는 등 조선과 관련되어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 다룬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일본에 전래된 많은 중요한 작품들을 재고 하고한국회화의 논의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본에 소재한 많은 조선 회화가 17세기 이후 통신사와 관련하여 건너가거나 제작된 작품들이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숫자의 작품들이 그 이전, 즉 임진왜란 즈음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빠른 시기에 무로마치 막부와 조선왕조의 교류 관계 속에서 일본에 건너간 작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조선과 일본의 회화 교류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후의 통신사와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경향이 강하였던 기존의 연구시각을 조정하여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조선왕조와 일본의 교류는 조선 초부터 왕성하게 진행되었고, 특히 조선 초에는 바쿠후 뿐 아니라 지방의 다이묘 등이 적극적으로 조선과 교류 및 교역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배경에서 많은 물질문화의 교류가 있었고, 회화작품 또한 한 종류의 교류품으로서 왕래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교류가 선린외교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회화작품은 상호 합의에 의하여, 또는 일본 측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하여 公私 간의 통로로 교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임진왜란은 이전과 다른 양상의 교류가 일어난 시기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왕조의 미술품, 도자기와 불교미술품, 회화에 관심이 높았던 일본인들은 많은 문화재를 일본에 반출하였다. 본고에서 다룬 작품들은 17세기 이후 일본에 유통 또는 소장되면서 가노 탄유와 가노 야스노부 등 가노파 화가들과 운코쿠파 화가들의 감정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록되어지고, 필사되어 현재까지 전래되었다. 일본에 소재한 조선 회화에 대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소장경위 등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면서 접근하여야 하며, 때로는 대상작품의 국적이 조선이라는 사실을 모른 경우도 있었다는 일본측의 상황도 감안하면서 접근해야지만 재일본 조선 그림의 위상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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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현재까지의 일본그림에서 '조선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은 17세기 통신사와의 관계에서 보는 경향이 강했는데, 실은 15세기 임진왜란때 수많은 조선회화와 종군화가등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란 점을 박은선선생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카노파'와 조선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지요.

아주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현존하는 촉석루는 그 양쪽에 있던 동루들과 서루들을 모두 잃어버린 형태입니다. 그 중 서루중 하나였던 쌍청루를 묘사한 임진왜란 이전의 시는 현존하는 촉석루에는 없는 하늘로 솟은 층층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과 부합하는 삽화가 일본측의 [회본태합기]에 실려 있습니다. 회본태합기 자체는 18세기말의 것이므로 직접자료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살펴볼 점은 있다고 사료되는데 그 이 이유는 이 방대한 자료의 그림을 그린 삽화가때문입니다. 오카도 교쿠잔 (岡田玉山)이라는 이 삽화가에게는 직접적인 스승의 계보가 있었습니다.

蔀関月 (1747~1787년) 月岡雪鼎 (1726~1787년)
高田敬輔 (1674~1756년)
狩野永敬 (1662~1702년)
狩野山楽 (1559~1635년)

그리고 이 계보의 한 가운데 狩野파 (카노파)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던 집단이 존재합니다. 2010년대 이후 이 카노파와 조선 (특히 임진왜란당시)의 관계 (특히 당시 조선에서 넘어간 그림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추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필자가 찾은 이 회본태합기에 등장하는 '논개장면의 촉석루' 역시 한번 고찰대상으로 다뤄질 만하다는 생각을 감히 하게됩니다.

마지막으로 저 계보의 끝은 狩野永徳 (카노 에이토쿠, 1543~1590년)입니다. 그 역시 카노파의 한명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옆에서 섬기던 화가입니다. 이 사람은 아래의 저런 치밀한 관찰화를 남긴 사람입니다 (16세기 당대 교토의 시내와 교외를 그린 그림).
洛中洛外図左 (클릭 확대)


임진왜란 당대의 그림은 몇몇 명군 종군화가가 그린 것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회본태합기의 삽화들에 대한 연구가 좀 더 면밀히 분석적으로 진행되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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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3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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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9/02/13 10:48 #

    치밀한 추적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촉석루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어릴적부터 가 본 곳인데요
    원래 좌우각을 거느린 구조 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네요
    우리나라는 유적이 원형 제대로 남은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 역사관심 2019/02/14 09:05 #

    감사합니다. 곧 사라진 유적들의 시점을 한번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가슴이 아픈 작업일듯 하네요...
  • 천하귀남 2019/02/13 16:08 #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일본에서 그린 1600년대 통신사 행렬도가 있더군요.
    헌데 통신사의 관모가 전통적인 사모가 아닌 일본식 시쓰샤칸이라는 것으로 그려져 있더군요.
    복식이나 무구등을 봐도 조선옷 이라기 보다 명나라쪽 그림에서 베낀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좀 많이들 만큼 어색합니다.

    뭐 르네상스 시대 그림을 봐도 아주 오래된 로마시대나 예수시절을 그린 그림에 그 당시에 없는 르네상스기 풀플레이트 갑주를 입은 사람이 튀어나오니 예전에 그려진 그림만으로는 원형 추정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일본쪽의 통속 군담류의 그림을 보면 아무리 봐도 삼국지의 그림을 베낀것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매우 많더군요.
  • 역사관심 2019/02/14 09:06 #

    그렇습니다. 삼국지연의쪽 그림을 가져다 쓴 흔적도 많이 보이지요. 이에 대한 연구가 어딘가 있었던것 같은데 한번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가노파에 대한 연구는 확실히 흥미롭고 더 많이 진전되면 하는 바램입니다.
  • 동두철액 2019/02/13 16:30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진주성의 동문과 동장대를 복원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데 촉석루도 복원했으면 좋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9/02/14 09:07 #

    감사합니다. 일단 확실히 그림으로 보이는 함옥헌부터 한번 시도해보면 합니다. 어차피 현재 촉석루도 60년대버젼이니.
  • 응가 2019/02/14 00:39 #

    진주사람으로 흥미로운 글이네요! 함옥헌이 있는 촉석루의 모습도 새로운것 같습니다. 마치 연광정이나 동명관, 영남루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회본태합기의 촉석루그림은 튀어나왔다기보다는 울퉁불퉁한 기반을 돌로 다져 평평하게 만든 것을 표현한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중층누각의 모습은 어쩌면 임란전 촉석루의 원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안타까운게 6.25때 전소가 되어서 국보지위를 잃은데다 자연암반을 기본으로 세워졌던 원형을 잃게 되어 더욱 아쉽습니다.
  • 역사관심 2019/02/14 23:54 #

    오랜만입니다 (진주가 고향이시군요!)저 역시 연광정을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의 눈은 비슷한가 봅니다^^.
    회본태합기의 삽화와 가노파에 대한 연구가 국내에서 좀 더 활발히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21세기들어 넷정보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해외에 있는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비교가 안되게 좋아진 덕에 관련연구가 늘고 있어 정말 좋습니다.

    생각해보니 저 암반역시 달랐군요. 수십년이 흐르면 다시 국보에 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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