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신라엔 "과연"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2008년 기사글) 역사

십년전 박노자씨의 [거꾸로 본 고대사] 시리즈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라엔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그 중 신라에 금속화폐가 없었다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우리로선 얼핏 보면 풀기 어려운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한편으로는, 고대 일본에서 ‘금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금은 제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쳤던 신라는 적어도 6세기 이후로는 금은 수출국이었다. 특히 통일신라 시기에 당나라에 보내곤 했던 ‘방물’(方物)들의 목록을 보면 우황, 인삼, 작은 키의 말 등과 함께 꼭 금과 은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철과 구리 등도 신라에서 상고시대부터 채광되고 가공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변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금속의 제작·수출을 잘해왔던 신라가 금속화폐만큼은 역사상 만든 적이 아예 없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996년에 금속화폐 제작이 처음으로 명령되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금속화폐 만들기의 시도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략.

개설서의 저자들이 상세한 설명을 왜 꺼리는지는 신라가 화폐 제작을 독자적으로 하지 않았던 이유를 밝히기만 하면 쉽게 알게 될 것이다.

첫째, 한반도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 중국 중심의 화폐 사용권에 있었다. 서북 지방 같으면, 고조선 시기를 거쳐 고구려 초기까지 칼 모양의 명도전(明刀錢)과 같은 중국 금속화폐가 지배계층에서 이용됐다. 물론 유통수단이라기보다는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하는 ‘위신재’로 더 많이 기능했겠지만, 일단 중국 돈을 이용하는 것은 관습화됐던 듯하다.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낙랑이라는 한나라의 군현이 성립되고 낙랑 중심의 무역 네트워크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함께 아우르자 한나라의 동전들은 한반도 최남단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낙랑과 가야, 왜 사이의 중계무역 기지였을 듯한 전남 여수군의 거문도에서 980여 점의 한나라 오수전이 출토됐다.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 초반에 낙랑과의 무역에서 얻었던 오수전들은 가야 지역(마산·창원·김해)에서는 물론 제주도나 강릉, 서울의 풍납토성, 경주에 가까운 경북 경산시 임당 등에서도 출토된다. 경주 지역에서는 그 시기의 오수전이 아직 나온 바 없지만 조양동 고분군에서 한나라에서 만들어진 듯한 유리구슬 등 중국제 위신재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초기 신라도 마찬가지로 낙랑 교역권에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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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랬을까요? (두번째 부분이 아닌 '신라는 역사상 화폐제작을 한 적이 없다'라는 부분).

그런데 이런 기록이 버젓히 존재합니다.

신라국(新羅國)의 돈에는 문양이 없다. 《전등록(傳燈錄)》에 이르기를,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성을 쌓으면서 신라의 승(僧) 김대비(金大悲)에게 돈 2천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海東)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하였다. 《천지(泉志)

위에서 말한 문양이 없는 쇠로 만든 돈은, 살펴보건대, 파저(巴氐), 담지(倓氏), 빈지(賓氏), 소월지(小月氏),대진국(大秦國), 동옥저(東沃沮), 아구강(阿鉤羌),파사국(波斯國),고창(高昌),여국(女國),우전(于闐), 두박(杜薄), 신라(新羅), 불니(佛尼), 아기니(阿耆尼), 굴지(屈支), 가필시(迦畢試),도화라(睹貨邏),범연(梵衍),삼불제(三佛齊),층단(層檀),남비(南毗) 등 여러 나라는 모두 금과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모두 문양이 없어서 구분할 수가 없다. 이에 지금 각각 한 가지 종류에다 기록하고, -살펴보건대, 대(大)와 소(小) 두 가지 모양이 있다.- 감히 홍씨(洪氏)와 같이 억지로 분류해 놓지 않았다. 《서청고감(西淸古鑑)》

원문을 보아도 분명 '신라국전'이라고 되어 있어 의역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윗부분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구절로 이 책은 송나라 북송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년)에 황제의 명으로 고승 도언(道彦)이 출판한 불교서적입니다. 그리고 이 인용부분을 실은 '천지'라는 책은 송나라 홍준(1120-1174)이란 자가 총 15권으로 펴낸 전문서적인데, 이 책이 재미있습니다.

이 책은 12세기중반인 송나라의 남부인 송종에서 1149년에 발간되었는데, '세상의 모든 동전'을 조사하겠다는 취지로 12세기로부터 위로 5세대정도를 거슬러 올라가 그때까지 조사할 수 있던 중화와 외국왕조들의 동전을 조사한 실질적인 저서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려 300가지가 넘는 동전이 실립니다 (그 뿐 아니라 일반 품목, 가짜 제품, 별 볼일 없는 상품, 최고 제품, 칼 종류, 헝겊으로 만든 제품, 외국 제품, 이상한 물건, 신제품, 거기에 역겨운 물건 등 9 가지 범주로 나누어 다른 상품들도 조사했습니다). 이 책은 한마디로 고대 중국의 동전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보존하고 있는 귀한 서적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이보다 더 앞선 시기의 책인 [경덕전등록]에 나오는 신라의 동전기록을 실은 것이지요. 여기 보면 신라국의 동전은 문양이 없으며, 신라고승 김대비에게 2천냥이나 되는 거금을 받은 기록이 나옵니다 (이 기록은 정확히 722년의 것으로 김대비(金大悲)가 장정만이라는 당나라 사람에게 돌아가신 고승 혜능대사의 머리부분을 넘기라고 뒷돈을 준 것).  

금전 2천냥이니 뭐니 하니 과장으로 생각하실 수 있는데 사실 금은 특정 신라대에 굉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은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의 보희선사 비문입니다.

宣帝十四年 仲春, 副守金彦卿, 夙陳弟子之禮, 嘗爲入室之賓, 減淸俸出私財, 市鐵二千五百斤, 鑄廬舍那佛一軀, 以莊禪師所居梵宇. 敎下望水里南等宅 其出 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飾功德, 寺隷宣敎省

번역을 볼까요?

唐 宣帝 14년 2월 副守 김언경은 일찍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문하의 빈객이 되어 녹봉을 덜고 사재를 내어 철 2500斤을 사서 로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敎를 내려 望水, 里南宅 등도 金 160分, 租 2000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 가지산사는 宣敎省에 속하게 하였다

신라 헌안왕(憲安王) 4년, 즉 860년에 왕이 금입택 35채중 하나인 수망택(水望宅)과 이남택(里南宅)  택주에게 하교해 금 160근과 조 2,000곡(斛)을 보림사에 시주할 것을 명했다는 기록이 이 비문에 적혀 있습니다. 무려 금 160근이지요. 이런 기록은 과장보다는 사실에 가깝게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료됩니다.

다시 원문기록으로 돌아가, 글의 후반부 (두번째 문단)은 이 [천지]의 기록을 분석한 글로 이 부분은 [서청고감(西淸古鑑)]에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중국 청나라 때에 양시정(梁詩正) 등이 황제의 명에 따라 편찬한 책으로 청조 1749년에 간행된 후대의 것입니다. 따라서 첫번째 문단의 12세기 기록보다는 신라당대와 훨씬 먼 것이지요. 여기서 "우전(于闐), 두박(杜薄), 신라(新羅)...,남비(南毗) 등 여러 나라는 모두 금과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모두 문양이 없어서 구분할 수가 없다." 라고 여러 주변국들의 무늬없는 화폐를 묶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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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비교적 최근(2009)에는 이런 주장도 나왔습니다. 백제의 금화에 대한 주장인데, "미륵사 금제 소형판은 백제 금화…화폐 구실"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미륵사 금제 소형판은 백제 금화…화폐 구실"
미륵사 서탑 심초석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봉안기와 함께 발견된 작은 판 모양 금제품은 백제인들이 화폐처럼 사용한 금화(金貨)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서예사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21일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가 국민대 경상관 B동 학술회의장에서 '익산 미륵사지 출토 유물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주제로 개최하는 춘계학술대회를 통해 이런 파격적인 견해를 담은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금화가 통용되었다는 주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

손 박사는 "이들 금 덩어리 시주품 중 하나에 그 단위를 '금 1량'(金壹兩)으로 표시한 자체가 이것이 금화임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이 기사는 공교롭게도 박노자 교수의 2008년 주장 바로 1년 후인 2009년의 것입니다.

고대사회에 금화가 활발히 쓰였다는 것까지는 여러 사료를 볼때 확실히 무리입니다. 다만, 이런 기록 역시 존재하고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고 논리를 전개해야 옳다 생각합니다.


덧글

  • 포스21 2019/04/14 14:30 #

    일단 통일 신라와 고려는 어느 정도 대외무역이 성했던 걸로 보이는 만큼 화폐자체는 있었을 거 같은데 말이죠.
  • 역사관심 2019/04/15 08:47 #

    그런데 비해서는 나오는 유물이 너무 없어서 답답하긴 합니다. 화폐나 기록이나 뭔가 좀 확 나와주면 좋겠어요...
  •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9/04/14 16:42 #

    어떻게 생각해도 신라라는 큰 니라가 화폐라는 개념없이 경제체제사 성립이 안될텐데.... 참... 어려운 문제군요
  • 역사관심 2019/04/15 08:48 #

    고려말까지도 화폐대신 포목등으로 더 활발히 교환했으니... 고대에는 더 없긴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렇게 단정지어 말하기 전에 기록은 꼼꼼히 살펴야 하겠지요.
  • 응가 2019/04/14 22:56 #

    일부 상류계층에 통용되었을 가능성은 있어보입니다만 인구가 훨씬 많고 경제규모도 컸던 조선의 경우를 보면 지금같이 모두가 쓰지는 못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 역사관심 2019/04/15 08:49 #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기록이 실제로 맞더라도 일부계층에서만 썼겠지요.뭔가 실물이 나와주면 정말 좋을 텐데...
  • 파파라치 2019/04/15 10:50 #

    동아시아에서 금화는 상당히 후대(ex. 명, 청대)에도 유통화폐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다시피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 역사관심 2019/04/16 03:05 #

    맞습니다. 다만 일부계층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다는 것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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