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3층 거대건물의 존재- 민천사(旻天寺) 기록으로 엿본 고려 수창궁의 규모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우선 '민천사'라는 절로 어떻게 고려의 미스터리한 궁궐 '수창궁'의 건축규모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인지 살펴보지요. [고려사] 1309년의 기록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1309년 갑진(甲辰) 10월 28일(양)

甲辰 王命飯僧一萬於壽寧宮, 遂舍其宮爲寺, 追福母后, 賜額曰旻天. 從臣皆阿旨, 莫有諫者.
수녕궁을 민천사로 바꾸고 모후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다
갑진 왕이 수녕궁(壽寧宮)에서 승려 1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라고[飯僧] 명령하더니 마침내 궁궐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모후(母后)의 복을 빌게 하고 민천사(旻天寺)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시종 신하들이 모두 왕의 뜻에 아부하였으며 간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 민천사는 원래 '수녕궁(壽寧宮)'이었습니다. 수녕궁의 규모는 승려 1만명을 한꺼번에 대접가능할 정도. 이런 궁궐을 충선왕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위해 민천사라는 사찰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럼 수녕궁과 수창궁(壽昌宮)은 무슨 관계? 네 수녕궁이 수창궁입니다. 고려전기부터 존재하던 수창궁은 고려왕의 이궁(離宮)이었는데 수창궁을 잠시 수녕궁이라고 부르던 시기가 있었지요. 

이 수창궁은 위치만 개성 북안동과 동흥동지역으로 대강 파악할 뿐, 발굴도 아직 확실하게 한 적이 없는 한국건축사의 비밀의 건축중 하나입니다.


수창궁의 건립시기와 규모

일단 수창궁을 1380년대에 마지막으로 재건했을 때 [고려사] 기록을 보면 만 다섯해에 걸쳐 매우 큰 규모로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영 崔瑩
최영이 일찍이 이성림(李成林))·이자송(李子松)·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昌宮)을 축조)했다. 수창궁이 완성되어 최영 등이 하례를 올리자, 우왕이 환관 이광(李匡))을 보내어, “이리 큰 궁궐을 다섯 해 걸려 완공했으니, 무엇으로 경들에게 보답할꼬?”라고 고마워했다.

수창궁에는 복잡한 구조로 중층건물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루(누각)과 복전 기록이 그것으로 다음은 [속동문선]에 나오는 유호인의 기록입니다.

속동문선
녹(錄)
유 송도록(遊松都錄)

유호인(兪好仁)
드디어 유수(留守) 성상공(成相公)을 찾아뵙고 나와서 방교수(房敎授) 옥정(玉精)과 더불어 사현(沙峴)을 넘어 수창궁(壽昌宮)을 찾았다. 이는 대개 성종(成宗) 목종(穆宗) 연간에 건립한 것으로, 중루(重樓)와 복전(複殿)이 서로 얽히어 즐비하던 것이 벌써 씻은 듯이 없어지고, 다만 구진(鉤陳 후궁(後宮)) 일면만이 남았을 따름인데, 지금 본부(本府)의 의창(義倉)이 되었다.

원문을 한 번 볼까요.
중루- 무거운 루(누각)
복전- 다층건물이 서로 얽혀서 즐비했다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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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이상의 건축물들

이렇게 수창궁은 복잡하고 큰 건물들이 많았다는 유추만 할 뿐 건물들의 층수나 구조는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꽤 흥미로운 기록을 [고려사]에서 발견했습니다.

바로 수창궁을 사찰로 고쳐만든 민천사의 기록입니다. 1325년의 기록에 다음의 구절이 나옵니다.

고려사 1325년 을해(乙亥) , 
11월 4일(양)
부엉이가 또 민천사 삼층각에서 울다

乙亥 <鵂鶹鳴於旻天寺三層閣.>亦如之.
을해 부엉이가 또 민천사(旻天寺) 3층각(三層閣)에서 울었다.

민천사의 '삼층전각(三層閣)'이란 구절로 최소 3층짜리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복전중루'기록은 1380년대의 공민왕대 재건당시의 것이니, 이런 복층건물들을 기본으로 중수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삼층전각은 1343년 불타버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당대 고려왕이던 충혜왕이 민천사 누각에 올라가 비둘기를 잡다가 불똥이 튀어 전각을 홀랑 태웠다는 기록입니다. 

1343년 갑술(甲戌) , 
4월 3일(양)
왕이 민천사 누각에서 새를 잡다가 불을 내다

甲戌 夜, 王率嬖人, 登旻天寺閣, 捕鳩, 遺火焚閣.
갑술 밤에 왕이 폐행[嬖人]을 거느리고 민천사(旻天寺) 누각에 올라가 비둘기를 잡았는데, 불똥이 튀어 누각을 불태웠다.

이는 같은 개성에 있던 연복사 5층전각을 비둘기 잡다 태운 기록과 쌍둥이같은 기록입니다. 연복사 5층 전각은 이로부터 220년 후대인 1563년 역시 비둘기를 잡다가 홀랑 전소됩니다. [오산설림초고 (五山說林草藁)]에 실린 아래의 기록입니다.

오산설림초고
고려 왕씨는 부처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다. 도성 내에 이름난 절이 3백 개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연복사(演福寺)가 가장 커 5층 불전이 높이 하늘에 치솟아, 영광(靈光)이 우뚝 홀로 있는 것 같았다. 이건(李楗) 공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사위를 맞이하기 위하여 비둘기를 잡게 하였더니, 관인이 횃불을 들고 올라가 잡다가, 불똥이 떨어져 불이 일어나 타버렸다. 계해년에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불꽃이 밤에 하늘로 치솟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기록으로 또 한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민천사(수창궁)의 3층전각은 통구조가 아닌, 연복사 5층전각처럼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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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민천사(즉, 수녕궁-수창궁)의 다른 복전(중층건물)의 기록도 있을까요? 또다른 3층 전각의 기록도 발견됩니다. 사리각이 사라진 후 기록인 1359년 기록에 또 다른 건물이 등장하지요.

1359년 병술(丙戌) , 
5월 21일(양)
어떤 기운이 민천사 삼층전 망새에서 발생하다

八年四月丙戌 有氣如煙, 生于旻天寺三層殿鴟尾.
〈공민왕〉 8년(1359) 4월 병술 연기 같은 기운이 민천사(旻天寺) 3층전각의 망새[鴟尾]에서 발생했다.

사리각외의 삼층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또 하나의 귀한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망새'의 존재입니다. 망새는 흔히 우리가 아는 '치미'로 즉, 대형건축물의 용마루 양끝을 장식하던 중세건축 특유의 구조물입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사라짐). 규모가 있는 건축에만 장식하는 것이었으므로 당대 민천사(수창궁)의 건물들의 규모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정보지요.
그럼 이 두가지 [고려사] 기록외에 수창궁의 규모를 볼 수 있는 기록이 더 있느냐, 있습니다. 이제현(李齊賢, 1288~ 1367년 )의 [익재난고]에 명확히 나옵니다.

익재난고 
세가(世家) 
유원(有元) 증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贈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승상상주국충헌왕(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丞相上柱國忠憲王) 세가(世家)

오직 부도법(浮圖法)을 몹시 즐겨 본국의 옛 궁전을 희사(喜捨)하여 민천사(旻天寺)를 만들어 건축(建築)의 극치를 이루고, 구리[銅]로 본을 떠서 불상 3천여 좌(座)를 만들었으며, 금과 은 가루를 아교에 녹여 경(經) 2장(藏)과 흑본(黑本) 50여 장을 썼고, 번승(蕃僧 외국의 중)을 받아들여 경을 번역하고 계(戒)를 받았다. 해마다 그러지 않는 달이 없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그를 간하였으나 왕은 더욱 독실히 불경을 좋아하였다. 
捨本國舊宮爲旻天寺。極土木之工。範銅作佛三千餘軀。況金銀寫經二藏。黑本五十餘藏。邀蕃僧譯經受戒。歲無虛月。

이제현은 공민왕이전의 사람입니다 (1367년사망). 즉, 공민왕대 5년간의 대대적 중수이전에도 이미 '민천사'는 '건축의 극치를 이루고 구리불상 3천여개가 들어설만큼' 화려하고 대단한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極土木之工。토목(건축공사)의 솜씨가 극에 달하고,
範銅作佛三千餘軀。구리 불상 삼천여개를 주조하다.

이렇듯 대단한 규모의 수창궁(민천사)는 1428년 세종대에 헐리고 맙니다.

세종실록
세종 10년 무신(1428) 윤 4월 6일(정해)
경기 감사가 민천사를 헐고 그 고을의 국고를 건축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다
경기 감사가 음죽현(陰竹縣)의 민천사(旻天寺)를 헐고, 그 고을의 국고(國庫)를 건축할 것을 주청(奏請)하고, 황해도 감사는 해주(海州)의 극락사(極樂寺)를 헐고 청단 역사(靑丹驛舍)를 건축할 것을 주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살펴본 것처럼 수창궁에 이미 1380년대 대대적인 중수전에도 이미 3층규모의 치미를 가진 사람이 올라가는 구조의 대형복층건축물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기록들입니다. 저 유호인의 이 묘사가 결코 과언이나 클리세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귀한 기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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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사족으로 민천사(수창궁) 근방에 있는 또 다른 고려시대의 복층건축, 침루(잠을 자고 기거하는 누각)도 있었음을 우리는 예전에 살핀 바 있습니다. [사라진 건축 (9)-고려.조선전기 이층침실, 침루(寢樓)] 글중 다음의 부분입니다.

목은 이색(李穡 1328~ 1396년)의 기록이 있습니다. 즉, 고려말기입니다.

목은문고 전(傳)
송씨전(宋氏傳)

宋氏出家名性聰。然不居僧房。居旻天東傘橋南。近水樓二間貯書邀客。日嘯詠其中。得錢卽沽酒市殽膳不少吝。

송씨의 출가(出家)한 이름은 성총(性聰)이다. 하지만 승방(僧房)에는 머물지 않고, 민천사(旻天寺) 동쪽 산교(傘橋) 남쪽에 있는 냇물 근처의 두 칸짜리 다락(루)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그러고는 책을 쌓아 두고 손님을 맞이하며 날마다 그 속에 들어앉아 노래하고 시나 읊조리면서 지냈는데, 어쩌다가 돈이 생기기라도 하면 곧장 술과 안주를 사서 먹고 마시는 데에 써 버릴 뿐 조금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여기 보면 성총이라는 승려가 민천사의 남쪽의 냇물 옆에 있는 두칸짜리 작은 루를 거처로 삼고 있습니다.즉, 고려후기 당시 이런 형태의 '루'에서는 침식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경우 앞서 고려시대 루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듯 당연히 벽체와 문이 달리게 되겠지요. 두칸짜리 소규모 루이니 아마도 17세기초에 지어진 방초정과 비슷한 형태일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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