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많이 본 태도 (적반하장의 긴 역사) 역사

될 수 있으면 정치쪽 이야기는 안하려고 하는데, 요즘은 정치영역을 떠나 국가의 일이라 역사쪽으로 작은 부분이지만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가해자는 반성을 안하고 적반하장식 태도라고들 하는데, 어쩌면 이는 오래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의 글들은 임진왜란후, 일본의 태도를 보여주는 몇가지 에피소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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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효종실록 4년, 1653년, 즉 임란후 약 40여년후의 실록기록입니다.

계사년(1653, 효종4) 7월. 

동래 부사 임의백(任義伯) 때이다. “평성정(橘成正)이 말하기를,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을 평정하고 창업하여 기반을 열었으니, 단지 일본인들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오래도록 사모할 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태평한 것이 덕천가강의 덕이 아님이 없기에, 귀국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6년 전에 덕천가강을 위해 대마도에 권현당(權現堂)을 특별히 지었고, 전 대군(大君)의 재임 때 더욱 장려하여 우두머리 승려 1인을 정해 보내 원당(願堂)에 분향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도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향을 올리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송사(送使) 1선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평성정(橘成正)이라는 인물은 대마도인으로 가쓰다 고로자에몬(勝田五郞左衛門)이란 본명을 가진 인물입니다. 1651년 아리타 모쿠베에(有田杢兵衛)의 후임으로 동래왜관에 부임하여 1653년까지 재판(裁判)을 맡았지요. 

그가 동래부사에게 *소리를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하면 일본사신이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 (일본으로 보자면 국내외 전쟁모두- 이것도 철저히 자신들 입장)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이 평정하고, 그 후 수십년간 '두나라 (조선과 일본)의 태평'시대를 열었으니, 조선에서 마땅히 그에게 고마워하고 사당에 가서 분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뭐라 쓰고 싶은 말도 안나오는 논리(?)군요 (그러니까, 90년대정도에 우리 대통령이 일본천황에게 전쟁없이 우리와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란 이야기와 진배없는 헛소리).

당연히 동래부사는 단칼에 거절합니다.

이에 답하기를, ‘신하가 사사로이 원당을 지어 그 주군(主君)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이 일은 너희 나라 안에서 스스로 행한다면 그래도 혹 괜찮겠지만, 결코 다른 나라에 알려서는 안 된다. 응당 줄여야 할 배를 줄이지 않고 또 요청하여서는 천부당한 배를 요청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며 준엄하게 물리쳤습니다.”라고 장계하였다. - 응당 줄여야 할 배는 언삼선(彥三船)을 말한다. - 회계하기를, “역관들로 하여금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기어이 그들의 생각을 돌리게 함으로써 이후에 상벌의 자료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뭐? 도쿠가와에게 향을 피우기 위해 배 한편을 보내라고? '줄여도 마땅찮은데 어째?"라고 단칼에 거절합니다. 멍멍이 소리에는 이렇게 해야 마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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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기록은 [금계일기(錦溪日記)]의 것입니다. 이 기록은 정유재란 당시 노인(魯認)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 명나라로 도피한 뒤, 귀국할 때까지의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즉, 임란당시 일본의 태도를 잘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지요. 이 기록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금계일기(錦溪日記) 
3월 28일

“그대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만일 조선 사람이라면 어찌 곧바로 본국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수만 리 타국으로 오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해 보이기를,
“우리나라는 비록 초료(鷦鷯 뱁새)와 초목일지라도 모두 왜놈의 피해를 보았고, 더구나 나는 정유년(1597, 선조 30) 가을에 부모ㆍ형제ㆍ자질ㆍ처자 아울러 20여 명이 모두 왜놈의 칼에 죽고 나만이 다행히 모면하였습니다. 한때에 같이 죽지 못하고 포로로 적국에 들어가서 그 정세를 탐정하건대, 수길(秀吉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은 비록 죽었어도, 남은 도적은 분하고 부끄러워하며 잔악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였으니, 짐짓 후퇴한 것을 가지고 깨끗하게 숙청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秦庭)에서 곡(哭)하여 저 오궁(吳宮)에 못을 파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몰래 단아한 군자인 임(林) 선생의 배를 타고 수만 리 거센 파도를 고생하며 건너왔습니다.”
하니, 장관이 말하기를, “과연 이는 조선 사람이다.”

명나라로 탈출한 노선생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부분으로, 자신의 가족 20여명이 일본군에게 몰살당하고 자신만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거기서 일본의 정세를 본 것입니다. 참고로 노인(魯認)은 1599년 3월 17일에 명나라로 탈출, 10일후인 28일에 명국관리와 인터뷰를 한 것이지요. 

정유재란은 1598년 12월에 끝납니다. 그 뒤에 그가 일본에 끌려가서 보고 들은 것을 직접 말한 것입니다. 즉, 저 기록은 임란직후 일본사회, 그중 리더들의 사회적 분위기를 일부라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요.

則秀吉雖死。(풍신)수길이 죽었지만,
餘賊憤恥。남은 적들은 분하고(憤 분할 분) 부끄러워하며 (恥 수치스러울 치)
狼心不悛。이리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단어군요. 도적(가해자)가 '분하고 패퇴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태도. 수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뭐 달라진게 없습니다. 뭐 물론 당시의 국제관계를 20세기로 일대일대응은 하기 힘들겠지만, 인지상정이죠. 어마무시한 가해를 가한 측의 저 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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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또 다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사건 한편. [해사일기]는 1763년 조선후기 문신 조엄이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입니다. 그 중 통신사단의 일행인 '최천종'이 일본인에게 한밤중에 칼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해사일기(海槎日記) 5 / 갑신년 4월 
7일(무자)
날씨가 음산하였다. 괴한[盜]이 도훈도(都訓導) 최천종(崔天宗)(崔天宗)을 살해하였다. 대판성에 머물렀다.

꼭두새벽에 갑자기 들으니, 도훈도 최천종(崔天宗)이 왜인에게 칼을 맞고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벌떡 일어나 즉시 군관(軍官)ㆍ의관 등을 보내어 급히 가보도록 하고, 이어서 사람을 시켜 그 곡절을 물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최천종(崔天宗)이 피가 흘러 흥건하고 숨이 거의 끊어질 듯한데도 오히려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찔렸던 상황을 갖추 말하기를, ‘닭이 운 뒤에 문을 열고 고과(告課 하례(下隷)가 상사에게 신고하는 일)하고 돌아와서 침소에 누워, 새벽잠을 막 곤하게 자는데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서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어떤 사람이 가슴을 걸터앉자 앉아 칼로 목을 찔렀소. 그래서 급히 소리를 지르면서 바삐 칼날을 뽑고 벌떡 일어나 잡으려 하니, 적은 재빨리 달아났지요. 이웃방의 불빛이 비치기에 보니 분명 왜인이었는데, 그때 나는 기진하여 땅에 엎드린 채 연달아 소리만 질렀더니, 이웃방의 사람들이 비로소 알았소.’하였습니다. 또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번 길에 어떤 왜인과도 다투었거나 원망을 맺을 꼬투리가 없는데, 왜인이 나를 찔러 죽이려 하다니,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소. 만약 내가 나랏일로 죽거나 사신의 직무를 위하여 죽는다면 죽어도 한될 것 없겠지만, 이제 공연히 왜인에게 찔려서 죽게 되니, 죽음이 극히 원통하오.……’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들을 시켜 급히 첩약을 부쳐보내어 약을 잇따라 다리게 하였지만, 점점 기진하여져서 해가 뜬 뒤엔 드디어 운명하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놀랍고도 참혹함이 비단 죽은 이를 위함만은 아니었다. 천종이 아직 죽기 전에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말씨도 왜인에게 찔렸음을 분명히 말했으며, 방안에 남아 있는 범행에 쓰인 흉기는 자루 짧은 창과 창포검(菖蒲劍) 같은데 거기에 새겨진 것이나 장식된 것이 다 왜인의 물건이었다. 또 흉악을 행한 범인이 도망해 달아날 때 잘못하여 격군 강우문(姜右文)의 발을 밟아 우문이 ‘도적이 나간다.’고 크게 소리 질렀기 때문에 놀라 깨어서 그를 본 사람들이 10여 명만도 아니고 보면, 범인이 왜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누가봐도 일본인이 범인인 사건.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검사조차 제대로 안합니다. 

해사일기(海槎日記)  갑신년 4월 
9일(경인)
맑다가 음산하였다. 대판성(오사카)에 머물렀다.

이른바 ‘재검’이란 것을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다. 조사의 절차는 아직도 잠잠한 채 이 핑계 저 핑계로 늦추기만 하였다. 세 수역들을 다시 잡아들여서 책유(責喩)를 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쳐서 재촉하였더니, 날이 저문 뒤에 대판성 아관 용인(大坂城衙官用人) 복곡신(福谷新), 대목부(大目付) 빈전칠랑(濱田七郞), 급인(給人) 팔목청(八木淸) 등 3인이, 비장(裨將)ㆍ원역(員役)들과 함께 재검을 하는데, 소위 재검이란 것이 다만 찔린 자리만 볼 뿐 극히 소홀하였다. 아관들은 재검을 한 뒤에 외청(外廳)에 나와 앉아 상처의 칼자국을 그리고 당일 입직했던 왜인의 성명을 기록하고 가 버렸다.

몇년전 일본에서 살해된 유학생사건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머리에 떠오릅니다. 저 조선인은 그냥 보통사람도 아니고 통신사절의 일행입니다. 외교관이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건처리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어디서 많이 본 행태가 다음날 나옵니다.

해사일기(海槎日記) 5 / 갑신년 4월 
10일(신묘)
아침에 맑고 저물게 비가 왔다. 대판성에 머물렀다.

변고가 일어난 처음에 마도인들은 ‘자결한 것이다.’고 떠들어댔으며, 혹은 ‘일본인의 소행이 아니다.’고 지껄였다. 차왜들이 겉으로는 위로하고 민망함을 나타냈지만 속으론 미봉할 속셈을 품었었는데, 수역(首譯)들이 곤장을 맞고 또 판성 아관(坂城衙官)이 재검을 시행한 뒤부터는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그들의 얼굴에 없지 않았으며 특히 판성에서 관중(館中)의 각처에 염탐꾼을 많이 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범인을 찾을 기색을 하더라고 한다. 

네, '조선인이 범인이다'. 관동대지진부터 바로 올해 애니스튜디오 방화사건까지 지겹도록 나오는 *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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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국들 사이에 어느 지역이건 좋지 않은 곳이 더 많고, 국가사이란 것은 부침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관계건 국가관계건 명확한 것은 서로간에 가해-피해관계가 있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같이 잘 해나가자라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유치원생도 아는 기초입니다. 

어찌 보면 '무(힘)의 논리'와 '자국내논리'로만 지배되온, 그래서 전혀 이웃국들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논리로만 수백년을 살아온 이웃국이 21세기에 들어서는 더 가치있는 도덕관를 가지길, 그것이 진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길임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덧글

  • 한일군사정보협정파기 2019/07/27 04:10 #

    근대 뿐만 아니라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일본이 한국에 가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죠. 이걸 국내정치의 대결구도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 한일군사정보협정파기 2019/07/27 14:45 #

    일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것인데...
    문재인은 예전의 약속대로 위안부합의 파기하고 한일군사정보협정을 파기하면 됩니다.
    김대중협정이야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 그건 문제삼기 힘들죠.
  • 역사관심 2019/08/01 00:58 #

    그냥 임란하나면 없었어도 우리 역사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 Nocchi 2019/07/27 06:14 #

    뭐 어느 나라 어느 인간이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똑같다고 생각하는 1인 입니다만
    역사적 실질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옆의 모 나라는 확실히 뭔가 양심이란 건 없고 기본적으로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반에 '강' 하게 나가는 거 저는 찬성이네요
  • 역사관심 2019/08/01 00:59 #

    누구든 그런 경향이 있겠지만, 저 쪽은 정말 이 경향(강약약강)이 거의 정체성이 될 정도 수준같습니다.
  • 2019/07/27 15:4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8/01 00:5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제비실 2019/07/28 20:54 #

    대마도 사신 평성정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참배요구는 막부에 대한 대마도의 과잉 충성에서 비롯된 성격이라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등 조일간 중계 외교에서 일본 중심주의 성격을 내포하는 당시 대마도의 외교체제를 그대로 들어낸 것이고

    당시 조일간의 외교 문제는 중계자인 대마도의 농간으로 빚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평성정의 이에야스 사당 참배 요구도 그런 성격에서 나온 것이지요

    대마도는 조선과의 교역의 의존도가 높아도 정치적으로 지방 영주들의 연합 국가인 일본 연맹체에 소속된 지역이라 그런 성격으로 외교할수밖에 없었죠

    당시 조일 외교는 지금처럼 인도주의와 호혜 상호적인 국제법의 틀안에서 행해지는 외교가 아니고 왕조 국가인 양국 권력층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성격의 외교라 피지배층의 피해 청구문제등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성격의 외교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국제법의 틀안에서 행해지는 현재의 외교체제처럼 같은 성격은 아니었지요
    당시 왕조국가의 외교는 지배층의 정권 이익을 위주로 행해지기 때문에 피지배 민중들의 권리 같은 것을 중시하는 외교가 아니었고 조선왕조나 에도막부나 그런 외교체제에 공통적으로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고 조선은 왜란 후 일본과 전후 수교하는 기유약조에서 사죄 국서와 왕릉 도굴 범인들의 소환 포로들의 송환 같은 국가적인 성격의 배상 요구나 하였지 인도적인 민중들의 권리를 반영하는 요구를 하지 않았지요






  • 역사관심 2019/08/01 01:01 #

    맞습니다. 그래서 글 중간에 살짝 그런 맥락을 적긴 했습니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인지상정이란 게 있어서, 사람으로서 도의란 게 있는데 확실히 반성이란 면에서는 어느 문헌을 살펴봐도 아무리 저 시대라 할지라도 전혀라고 할 정도의 수준인지라...
  • 제비실 2019/07/28 21:04 #

    최천종 살인사건만 보더라도 당시 사무라이 계급의 묻지마 살상이 난무하는 일본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낸 것이지요 막부 말기에 사무라이들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영국 상인을 벤 나마무기 사건만 보더라도 사무라이들의 살인 특권이 그렇게 부작용으로 표출된 것이지요
  • 역사관심 2019/08/01 01:02 #

    자기들끼리 할 짓을 외국사신단에 했다는 거 자체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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