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라진 대건축물 (18)- 공성전에 쓰이던 거대한 성랑(城廊, 성곽의 곳곳에 있는 다락집) 한국의 사라진 거대건축

우리에게 가장 많이 남아있는 성의 형태는 '산성'입니다. 산성성벽이 보존이 잘 되어 있고, 복원도 활발한 편이지요. 다음은 북한산성의 일부입니다- 남한산성을 비롯, 보통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현재 북한산성

보통 문루가 있고, 그 외에는 성벽만 좍 늘어선 모습입니다. 성벽옆에는 어떤 건축구조물도 찾을 수 없지요. 남한산성도 마찬가지.
현재 남한산성

그런데 우리의 많은 문헌기록을 보면 아직까지 현존하는 어떤 성곽에서도 보지 못한 구조물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채씩 등장합니다. 뭘까요?

바로 이 녀석입니다. 城廊 (성랑)

우선 이제현(李齊賢, 1288~1367년)이 쓴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시지요.

동사강목 제10하 
신묘년 고종 18년(송 이종 소정 4, 금 애종 정대 8, 몽고 태종 3, 1231년)
○ 몽고가 다시 귀주(龜州)를 공격하니, 박서(朴犀) 등이 힘껏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

몽고군이 다시 귀주를 공격하여 성랑(城廊 성곽의 곳곳에 있는 다락집) 2백여 간을 파괴하니, 박서 등이 즉시 고쳐 쌓았다. 이튿날 몽고군이 여러 성의 항졸(降卒)들을 거느리고 성을 포위하여 신서문(新西門) 밖 28개 소에 포(砲)를 세워 성랑 50간을 쳐서 무너뜨리고 넘어들어와서 교전하였는데, 서는 무너지는 대로 곧장 고쳐서 쇠줄로 얽어매었고, 사람들은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몽고군이 귀주성에 있는 성랑 200칸을 파괴했는데, 박서 장군이 바로 수리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튿날 다시 대포(砲)를 쏘아서 성랑 50칸을 무너뜨리고 넘어와서 교전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귀주성은 현주의 평안북도 구성시에 있는 성으로 잔존한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의 귀주성 유적

그럼 '성랑'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일단 고전번역원의 주석으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성곽의 곳곳에 있는 다락집"

그래도 잘 와닿지 않습니다. 일단 중국쪽의 '성랑'이란 검색어로 찾아보는 이미지를 소개해보지요.
위 사진은 중국 장주시에 2017년 건립된 낭교(廊桥)입니다. 성랑의 랑자로 이는 행랑 랑자로 행랑이란 보통 긴건물이 주욱 줄지어 (붙어있거나 간격이 촘촘하게) 있는 형태를 뜻합니다. 위의 긴 행랑이 다리위에 늘어서 있으므로 낭교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중국쪽 사진입니다. 보시다시피 건물이 주욱 붙어서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즉, 성랑이란 것은 성곽위에 있던 이런 식의 건축물들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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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중기 주요방어무기이자 거대시설물

성랑 기록은 사실 매우 많습니다. [고려사절요]에 앞서 소개한 [동사강목]의 짧은 기록이 다시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제16권 /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신묘 18년(1231), 송 소정 4년. 금 정대 8년. 몽고 태종 3년

몽고 군사가 귀주(龜州)를 공격하여 성랑(城廊) 2백여 간을 무너뜨렸다. 고을 사람들이 즉시 수축하여 지키었다. 몽고 군사가 여러 성의 항복한 군사를 거느리어 성을 에워싸고 신서문(新西門) 요지에 무려 28개소에다 포(砲)를 대놓고 공격하여 성랑 50간을 또 무너뜨리었다. 고을 사람이 죽기로 싸워 크게 이기고 삼군이 안북성(安北城)에 둔을 쳤다. 몽고 군사가 성 아래 이르러 도전하였으나 삼군이 출전하려 하지 않았다. 후군진주(後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강요하여 성 밖으로 출전하였는데, 진주와 지병마사는 다 나오지 않고 성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집성도 역시 성으로 돌아왔다. 삼군이 몽고 군사와 싸우는데, 몽고 군사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대(隊)로 나누어 줄을 지어 서고 기병(騎兵)이 우리 우군을 공격하니 화살이 비오듯 떨어졌다. 중략.

200칸도 엄청 긴 것인데, [치평요람]을 보면 고려시대의 또다른 성곽에 무려 1000칸에 이르는 성랑 축조기록이 보입니다.

치평요람 제120권 / 송(宋)
[휘종(徽宗)]

윤관이 또 제장(諸將)을 나누어 보내 지계(地界)를 확정하고 또 일관 최자호(崔自顥)를 보내어 지세를 살펴보도록 한 다음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랑(城廊) 9백 50칸을 건축하여 영주(英州)로 호칭하고 - 지금 길주(吉州)에 합병되었다. - 화곶산(火串山) 아래에다 성랑 9백 92칸을 건축하여 웅주(雄州)로 호칭하고 - 지금 길주에 합병되었다. - 오림금촌(吳林金村)에다 성랑 7백 74칸을 건축하여 복주(福州)로 호칭하고 - 지금의 단천(端川)이다. - 궁한이촌(弓漢伊村)에 성랑 6백 70칸을 건축하여 길주(吉州)로 호칭하였다.

9성을 쌓은 윤관이 새로운 영토경계인 몽라골령(현재의 함경북도 길주)에 성랑 950칸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보이지요. 또 다시 화곶산아래에 성랑 992칸을 건축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 이외에도 오림금촌에 774칸, 궁한이촌에 670칸을 건축합니다.

말이 700칸이고 900칸이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역사인지 한번 살펴볼까요? 

윗 사진은 현재 북한산성에서 볼 수 있는 성랑터의 정보입니다. 오른쪽 아래를 보시면 성랑복원도가 나오는데, 3칸짜리 집으로 보입니다. 1칸은 보통 1.8미터정도이므로 3칸이면 약 4.5미터정도로 추정해보지요. 

990*1.8= 1,782미터.

무려 1.8킬로에 이르는 길이입니다. 그러니까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윤관은 새로 성곽을 쌓으면서 무려 2킬로미터가량의 위와 같은 방어용 건축을 쌓았던 것이지요. 성랑은 그럼 중세까지만 있던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지요. 

선조 39년 병오(1606) 5월 20일(정해)
육진을 순심한 후 함경도 점군 어사 성균관 사예 이홍주가 서계하다

함경도 점군 어사(咸鏡道點軍御史)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이홍주(李弘胄)가 서계하였다.
“신은 엄명을 삼가 받들어 육진(六鎭)을 두루 다니며 방비의 형편과 기계(機械)의 조치를 사목에 의거해 하나하나 순심(巡審)하였습니다. 부령부(富寧府)는 육진의 첫머리에 있는데 방어가 허술하고 분방(分防)이 가장 적으며 물력(物力) 역시 매우 잔박(殘薄)한데도 부사 유지신(柳止信)이 형편에 따라 조치하여 포루(炮樓)와 성랑(城廊)을 새로 만든 곳이 많으며, 성호(城壕)를 수축하고 목책(木柵)을 둘렀으며 궁전(弓箭)과 화약(火藥)을 준비한 것 역시 많습니다. 회령(會寧)의 성자(城子)는 유형(柳珩)이 도임하면서부터 비로소 수리하였는데, 새로 만든 성랑이 1백 50이나 되고 안에는 격대(擊臺)를 설치하고, 밖에는 토장(土墻)을 쌓으면서 자신이 앞장서 독려하여 공사를 이미 마쳤습니다. 항상 조련을 실시하여 기율이 정제되어 온 진의 군정(軍情)이 믿고 근심하지 않으며 설험(設險)이 웅장하고 견고하여 육진 중에 제일입니다. 
......
안원 권관(安原權管) 김좌룡(金佐龍)은 목책을 주밀하게 세우고 성랑을 견고하게 설치하였으며 완전하지 못한 곳은 지금 바야흐로 쌓고 있어,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여느 보보다 앞섭니다. 훈융(訓戎)은 물력이 빈약한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첨사 원수신(元守身)이 도임한 후에 수선한 것은 성첩뿐이며, 새로 토장을 쌓아 성문 근처만 가렸고, 성랑을 대강 설치했는데 재목이 매우 가는 등 모든 설치가 착실하지 못하며 군기(軍器) 등 제구(諸具)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황척파(黃拓坡)ㆍ서소라(西小羅) 등처에 이르러서는 여러 보 중에서도 더욱 빈약하여 방비하는 형태가 매우 허술하며, 토병(土兵)이 아주 적고 물력이 형편 없어 비록 조치하려고 하나 형편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밖에 각 고을과 각 진보는 대동 소이한데 모두 전혀 수치하지 않은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임란 직후인 1606년, 조선시대 육진을 정비하는 대목인데, 성랑을 새로 만들고 견고하게 설치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또 중요한 기록이 '성랑을 대강 설치했는데...재목이 가늘고, 군기(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오죠. 즉, 성랑은 주로 '목재'로 지은 집이며, 또한 그 안에 무기류를 배치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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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로 급히 지은 그러나 높이가 있던 행랑을 닮은 건축물

목재집이었음은 1627년 인조조 기록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인조 5년 정묘(1627) 7월 7일(신미)
변방의 방수ㆍ군량ㆍ곡식을 바치고 관직에 제수되는 일 등에 대한 논의 

상이 또 이르기를,
황주성(黃州城)의 성랑(城廊)은 제도가 좋은 듯한데 만약 착실히 조성하지 않으면 필시 비용만 들이고 이익이 없는 염려가 있을 것이다. 황주성은 본래 높지 않은데 비록 둘레의 성랑을 만든다 하더라도 어찌 높이를 두 길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성은 낮은데 성랑만 높으면 적이 화공을 할 경우 반드시 큰 환란이 될 것이다.”

황주성은 부산에 있던 성으로 이 성곽에 성랑이 있다는 기록입니다. 성랑이 꽤 높은 건물이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기록인데, 여기보면 황주성 성곽자체의 높이가 그다지 높이 않은데 그 위에 성랑으로 둘러싼다해도 그 높이를 두길 (6미터이상)으로 하기는 힘들다라는 것입니다. 성벽이 낮은데 성랑만 높으면이라는 구절자체가 성랑이란 건축의 높이가 성벽과 비교할 만큼 꽤 높았음을 보여준다 사료됩니다. 그리고 성벽(돌)이 낮은데 성랑(목재)가 높으면 적이 화공으로 불태워 버릴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일제시대 황주성 유구 사진 (이미 성랑으로 보이는 건축은 보이지 않습니다)

같은 해 기록을 보면 성랑이라는 제도가 화공에 무익하다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려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으로 보이는 이 건축물이 이미 화약이 발달한 임란 이후에는 무익해지고 있음도 유추할 수 있겠지요.

인조 5년 정묘(1627) 8월 7일(경자)
주강하다. 호패제와 진관제의 복구, 축성 등을 둘러싸고 이귀와 논의하다

이귀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무사를 뽑아 어영군(御營軍)에 소속시켜 집에서 변란을 기다리게 하였다가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장수를 명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을 이루고 적을 깨뜨리는 데 있어 어찌 성의 유무에 힘입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성을 쌓아야 한다면 안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가야 하니, 금년에 행주(幸州), 명년에 평산(平山), 또 명년에 서흥(瑞興)에다 산성을 쌓고 점차로 황주(黃州)ㆍ평양(平壤)ㆍ안주(安州) 등의 성을 쌓아,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땅이 한 치 늘어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땅이 한 자 늘어나게 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또 신은 황주의 성랑(城廊)은 더욱 무익하다고 여깁니다. 적이 사닥다리를 이용해 성에 올라와 섶을 묶어 화공(火攻)할 경우,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됩니다.”

그런데 성랑이라는 제도를 굳이 성벽외에 만들었던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 인조 5년기록에 나옵니다.

인조 5년 정묘(1627) 8월 10일(계묘)
김류가 황주에 축성하는 일을 계속하자고 건의하다

김류가 아뢰기를,
“황주(黃州)에 성랑(城廊)을 만드는 역사는 대개 적의 오고 감과 빠르고 느림을 헤아릴 수 없어서 이러한 목전의 계획이라도 하자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이 곳의 물력(物力)이 돌로 높이 쌓아도 넉넉할 정도라면 일을 담당한 신하가 무엇 때문에 애써 민력을 허비하면서 오래가기 어려운 이 역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의 말은, 한편에서는 지친 백성을 부리는 것은 무익한 일이 될 뿐이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흙으로 쌓은 성가퀴 위에 성랑을 세우면 반드시 붕괴될 염려가 있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적이 만약 화공(火攻)할 경우 불이 날 걱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세 말도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오늘의 사세를 헤아리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본도의 감사와 병사가 마음을 졸이고 생각을 깊이 하여 힘을 다해 경영해서 흙을 다 채우고 재목도 이미 운반했다 하는데, 지금 만약 중지시킨다면 전공(前功)이 아깝습니다. 완성하도록 독려하여 기어이 역사를 마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성랑은 바로 이런 성가퀴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벽위에 작은 돌로 쌓은 부분 (구멍있는 부분)이 보이시죠. 저게 성가퀴입니다. 그런데 저 위에 목재집들을 주욱 둘러 세운것이 성랑이지요.
즉, 돌로 성벽을 높게 쌓기에는 공력이 너무 들 경우, 일종의 목책으로 저런 건축물을 좌악 세운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목책대신 굳이 '건축물'로 쌓은 것은 아직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군사들이 비도 피하고 무기도 보관하는 용도), 일종의 가건물들이었음을 다음의 구절로 알 수 있습니다.

인조 5년 정묘(1627) 10월 6일(기해)
김류가 황주성의 역사를 속히 완성하라고 건의하다

김류가 아뢰기를,
황주성(黃州城)의 역사를 이미 10월에 시작하였는데 순찰사 장신(張紳)이 말하기를 ‘증축(增築)하는 것이 성랑(城廊)만 못하다. 성랑이 비록 속히 썩지만 5~6년은 지탱할 수 있고, 만약 잘 보수만 하면 족히 10여 년도 보장된다.’고 하였습니다. 일을 담당한 신하가 원망을 들어가며 전담하였고 일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계책을 저지하고 억제하며 사수(死守)하라고 책임지우는 것은 전권을 위임하는 본뜻이 아닙니다. 얼어붙기 전에 속히 그 역사를 완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보시다시피 목재로 된 성랑은 평균 5-6년만에 썩으며, 보수를 잘하면 10년정도는 버틴다는 정보가 나옵니다. 즉, 싼 목재로 만든 방어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럼 성랑은 정말 길게 좌악 늘어선 행랑형태 혹은 바짝붙어있는 건물들이었을까요? 아니면 900칸이라도 띄엄띄엄 떨어져있는 구조물이었을까요? 

일단, 적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목책역할이라면 상식적으로 촘촘히 붙어있어야 하겠죠.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이 1628년 인조실록에 나옵니다.

인조 6년 무진(1628) 8월 16일(갑진)
황해 병사 전삼달에게 성의 수비에 관한 하교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鄭忠信)의 말을 듣건대, 성랑(城廊)이 섬돌 위의 행랑과 같아서 적이 쳐들어와 화공(火攻)을 할 경우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모쪼록 미리 알아서 잘 수선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부터 곤수(閫帥)의 책임을 맡은 자가 제대로 인화를 이루지 못해 사졸들을 무너져 흩어지게 하였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모름지기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하라. 안주(安州)가 나라의 문호라면 그 다음은 황주(黃州)이니 실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곳이다.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에 지금 그대를 발탁해 임명한 것은 다 목적이 있어서이니, 모쪼록 마음과 힘을 다하라." 하고, 표피(豹皮)·궁전(弓箭)·납약(臘藥)·호초(胡椒) 등 물건을 하사하였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聞鄭忠信之言, 則城廊有同階上行廊, 若賊來而火攻, 則禦之甚難云

則城廊有同階上行廊 (성랑은 바로 섬돌위에 있는 행랑(行廊)같아서)

네, '행랑과 같다'는 묘사가 분명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목조 가건물이 성벽위에 수백칸(...) 존재했던 것입니다.
경복궁 행랑

보통은 성랑안쪽으로 지었겠지만, 이를 변형 '성가퀴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지은 형태도 고려합니다. 

인조 6년 무진(1628) 9월 15일(임신)
공청 병사 황해 감사 등이 군사 훈련과 한재의 피해에 대해 차대하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의지하고 있는 곳은 오직 안악(安岳)과 황주(黃州) 양 진(鎭)이다. 수비 대책은 어떠한가?”
하니, 장신이 아뢰기를,
이번에 간신히 성랑(城廊)을 만들었습니다만 두 면이 매우 낮아 개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은 힘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정충신(鄭忠信)의 말을 듣건대 성랑(城廊)을 성가퀴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으면 적을 막는 데 불편하다고 하였다. 모르겠다만 이 말이 어떠한가?”

안악과 황주성에 성랑을 만들었는데 낮아서 고민이라는 신하의 말에 인조가 성랑을 성가퀴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즉, 아래의 이런 구조물 바깥으로 돌출되는 건물을 지어 아예 초반부터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자는 내용이지요.
병자호란 직전에도 계속해서 성랑을 중요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은 자세한 기록으로 유명한 '승정원일기'의 구절.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4월 5일(임신) 맑음
자정전에서 주강을 행할 때 지사 김시양 등이 입시하여 진강한 뒤 해서의 산성을 순행한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병사의 생각은 오활해 보인다. 성 밖에 다시 토성을 어디에 쌓는다는 것인가? 이번 신경인이 쌓은 곳도 성랑(城廊)을 만들었는가?”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만들었습니다. 황주 동쪽에 성 쌓을 만한 곳이 있어 병사가 거기에 쌓으려고 했는데, 국가에서 쌓은 성이 이미 많고 물력도 고갈되어서 새 성을 또 쌓기는 어려울 듯하기에 신들이 가서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성랑이라는 것은 초막(草幕)인가?”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초막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서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성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성랑이 높고 크지 않은 것이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성랑은 긴 행랑인데 그 - 2자 원문 빠짐 - 설 수도 없으니 쓸 수 없습니다. 지금 성랑을 허물고 개축 - 2자 원문 빠짐 - 되겠지만, 들어갈 공력이 적지 않기에 쉽게 할 수 없습니다. 평산산성(平山山城) - 3자 원문 빠짐 - 형기(形基)만 있고, 문루(門樓)가 모두 무너졌으니 성으로서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4자 원문 빠짐 - 좋긴 하지만 백성들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니, - 5자 원문 빠짐 -”
하자, 상이 이르기를...중략.

성랑에 대해 인조가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승정원일기 만세). 성랑이 '초막(초가집)'같은 것인가? 라고 묻자, 아니라고 김시양이 답합니다. 즉, 초가지붕이 아닌 목조건물에 가깝다는 것을 유추해 볼수 있겠죠. '사람이 서지못하면 어찌 성랑이라 부르겠나'라는 구절을 보면, 이 행랑형태의 건물내에 최소 성인남자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랑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으로 또 하나, 철옹성으로 유명한 영변성에도 존재했음을 인조실록에서 확인했습니다.

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11월 17일 乙巳 1633년 명 숭정(崇禎) 6년 
영변에 군사를 옮겨 보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
 
영변 방어사(寧邊防禦使) 유림(柳琳)이 치계하기를,

"본성(本城)이 창성(昌城)·삭주(朔州)·강계(江界)·이산(理山)의 길에 끼어 있어 본디 큰 고을이라고 하였는데, 정묘년 무렵에 군영을 옮긴 후부터 크고 작은 영속(營屬)이 죄다 안주(安州)로 옮겨 가고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인기척이 적적했습니다. 그러나 남군(南軍)이 들어와 성곽의 다락집 짓는 일을 보면서부터는 모두 이르기를 ‘다락집을 다 지은 뒤에 남군을 더 받아들인다면 거의 믿을 만한 형세를 갖출 것이다.’ 하여, 약간 남은 백성들이 조금 굳은 의지를 갖더니, 남군이 이어 나가고 대리 방어병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는 백성들이 다 의혹을 품어 이미 몹시 절망하고 있습니다. 중략.

○寧邊防禦使柳琳馳啓曰: "本城介在昌、朔、江、理之路, 素稱巨邑, 而自丁卯移營之後, 大小營屬, 盡移安州, 十室九空, 人烟冷落。 自見入南軍, 築城廊之擧, 皆曰: ‘完築之後, 添入南軍, 庶有可恃之勢。’ 孑遺之民, 稍有固志, 及見南軍旣出, 代防不入, 民皆疑惑, 已極缺望。 此城所屬江邊六邑土兵, 道旣遙遠, 萬無聞變及來之理。 賊若乘龍、義之路, 直到昌、朔之界, 由龜、泰潛師入來, 則雖無撥傳烽燧, 可以預知。 目今江氷旣合, 防備日急, 南軍多少, 及期分防, 使新設關防, 得爲必守之地。" 備局回啓以爲: "本府軍兵, 果極鮮少。 欲得南軍, 與之協守, 此實備急待變之不容已者。 請安州添戍兵二千四百人中, 除出二百人, 入送寧邊。" 上曰: "數少防軍, 今又除出移送, 則本城守禦, 必至單弱, 更議處置。" 又啓曰: "二百人在安州, 不能爲有無, 而在寧邊實爲關重, 故如是覆啓矣。 聖敎如此, 請勿分送。" 上從之。

築城廊之擧 성랑을 쌓아올리는,
完築之後, 添入南軍, 완전히 쌓아올린후 남군을 받아들이다.

아래 철옹성에도 성랑이 둘러서 있었던 것입니다.

평안북도 영변성

이런 성랑지가 조선시대 성곽인 북한산성에서만 무려 143군데에서 발견됩니다. 다음은 성내 안내문
사실 안내문을 보면 '보초가 자던 막사'정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숱하게 본 공성전의 방어시설자체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설명입니다. 저런 기능보다 성랑의 원래주요기능은 '방어시설'이 맞겠죠. 아직 연구가 일천함을 알 수 있는 부족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고려-조선중기와 조선후기의 성랑의 용도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18세기 기록에도 성랑은 꾸준히 등장합니다. 아래 기록이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북한산성 성랑에 대한 문헌기록.

숙종 38년 임진(1712) 5월 12일(갑오)

“한재(旱災)는 혹은 원옥(冤獄)에서 말미암으며 혹은 토목 공사(土木工事)에서 말미암으니, 《춘추(春秋)》에 ‘여름에 중구(中丘)에 성을 쌓고, 낭(郞)에 성을 쌓았다.’라고 쓴 것은 적절한 때에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큰 역사(役事)는 거의 끝났고 아직 마치지 못한 것은 중성(中城)과 성랑(城廊)인데, 이는 시급하여 그만둘 수 없는 공역(工役)은 아닙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속히 정침(停寢)을 명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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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확인된 성랑(城廊)?

북한산성뿐 아니라 한양성에도 성랑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귀한 기록도 나옵니다. 다음은 1747년, 영조실록 구절.

영조 23년 정묘(1747) 2월 5일(을축)
어영 대장 구성임에게 도성을 수호하는 절목을 올리게 하다

어영 대장 구성임(具聖任)에게 명하여 도성을 수호하는 절목(節目)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당시 병비(兵備)가 허술하여 조정에서 늘 근심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는 강도(江都)가 수호할 만하다고 하고, 더러는 도성이 수호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성임이 전적으로 도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자, 시의(時議)가 모두 이를 좇았으므로, 구성임의 의논이 마침내 시행되어 강상(江上)의 모든 창고를 철거하여 성안으로 옮기되, 금위(禁衛)의 두 창고를 먼저 옮겨서 세웠으며, 성을 돌아가며 성랑(城廊)을 쌓았다. 

여기 나오는 성은 바로 한양성입니다. 
1800년대말 숭례문근처 한양성 구간

[훈련도감]에도 한양성에 성랑이 많았음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도성 분수 자내(都城分守字內)

돈의문(敦義門)에서 숙정문(肅靖門)까지가 1,514타(垜)인데 모두 4,850보이며, 성랑(城廊)이 24개소이다. 인왕산(仁旺山)은 험절(險絶)하여 성을 쌓지 못한 곳이 5개소에 80보이다. 영종 21년 을축(1745년)에 규정을 고쳐 성이 무너진 곳에 군졸 20명으로 장교를 배정하여 거느리고, 개축하는 동안 이를 파수하게 하였다. 

18세기말까지도 성랑기록은 꾸준히 등장하는데 이어져 19세기말 고종대에도 나옵니다. 다른 성벽구조물과 달리 이렇게 완전히 잊혀진 것이 신기할 정도지요. 우선 정조시대의 기록.

정조 9년 을사(1785년) 6월 17일(갑오)
북한 산성의 안찰 어사가 된 신기의 보고 서계
체성(體城)ㆍ여성(女城)ㆍ성랑(城廊)ㆍ문루(門樓)의 무너진 곳 및 성문의 철물(鐵物)이 탈락한 수효도 역시 별단(別單)에 기록하였습니다. 금성 탕지(金城湯池)의 중요한 곳이 장차 쓸모 없이 될 터이니, 전란에 대한 대비를 위하여 마땅히 지금 고쳐 개혁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고종대 기록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1894년의 기록인데 이는 위의 숭례문 사진과 거의 비근한 시대입니다 (연도를 기억해주세요).

고종 31년 갑오(1894년) 10월 13일(병진) 맑음
숭례문 동쪽 체성의 성가퀴 등을 다 쌓았다는 친군장위영의 계

○ 또 친군장위영의 말로 아뢰기를,
“본영의 자내(字內)인 숭례문(崇禮門) 동쪽 제1성랑(城廊) 근처와 제2성랑 근처의 개축된 체성(體城) 위의 성가퀴[女墻], 제3성랑 근처 체성의 외면이 떨어져 나간 부분 및 성가퀴를 모두 다 쌓았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자 여기 보시면 1894년에 숭례문 동쪽 1성랑, 2성랑, 3성랑 근처..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저 사진에 나오는 구간이 숭례문 동쪽 구간입니다.  

다시 볼까요?
과연 성랑은 어디 있을까요? 성벽위에 촘촘히 붙은 죽 늘어선 건물이 보이시지요? 필자는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때부터 성벽에 바짝 붙은 저 집들이 좀 신기했습니다. 민가가 저렇게 성벽에 위험하게 붙어 있구나...싶었었지요.

그런데, 이 구조물이 '가건물 (즉 성랑)'일 수도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사진이 한장 있습니다. 아래는 죠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 Foulk)이 1884년에 찍은 같은 구간의 사진입니다.
1884년 숭례문 동쪽 한양성곽

확대해서 비교하겠습니다.
왼쪽은 연대를 알 수 없는 사진이고, 오른쪽은 같은 구간을 찍은 1884년 사진입니다. 확실히 1884년 사진이 더 허물어지고 수풀도 우거진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왼쪽사진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촘촘한 구조물이 오른쪽사진에서는 사라지고 없다는 점입니다.

왼쪽 사진이 1884년이전이건 이후이건, 확실한 것은 더 정비된 모습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1894년 고종실록에는 분명히 이 구간 (즉 숭례문 동쪽벽)에 성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왼쪽 성곽위에 등장하는 구조물의 일부가 조선후기의 성랑모습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

마무리

오늘은 아직 한국건축사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또 하나의 건축물인 성랑(城廊)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최근에야 북한산성에 집중된 보고서가 나오고 있지만, 다른 기록에 나오는 성랑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시작도 못한 형편같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이니 영화나 드라마 매체에서는 건국이래 단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구조물입니다. 만약, 발굴연구 성과가 쌓여 그 형태가 좀 더 알려진다면, CG로 고려대나 조선시대의 웅장한 수백칸의 성랑이 전투장면에 등장하면 좋겠습니다.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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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팬저 2019/08/03 18:33 #

    흥미로운 글 잘 보았습니다.
  • 역사관심 2019/08/04 05:41 #

    감사합니다 팬저님. 성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못되먹은 얼음집 2019/08/04 15:49 #

    http://luckcrow.egloos.com/m/2437328
    의 나카오카 성벽같이 목조 복도가 있는 일본성곽이 제 머리에서 그려지던건 저 뿐인가 싶네요. 이런 행랑이 설치된 성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는게 신기하네요.
  • 역사관심 2019/08/05 06:57 #

    일본성처럼 장랑 형식의 단일건축물이 들어선 것은 아니겠지만, 목조건물이 촘촘하게 좌악 수백칸 늘어선 광경은 장관이었을 겁니다.
  • 못되먹은 얼음집 2019/08/06 14:21 #

    사족 붙이면
    일본의 경우 1년내내 비,눈이 오는 온난습윤기후여서
    건물 여러곳을 짓는것과 달리 여러 건물이 연결되게끔 큰 건물을 지어서 이동이 용이하게 만드는 경향이 강하지요.물론 일반화시켜서는 안되지만요.
    (울릉도의 우데기 같이?)
  • 역사관심 2019/08/06 21:42 #

    맞습니다. 우리도 조선전기까지는 행랑으로 연결된 집들이 많았습니다만, 조선후기로 가면서 사랑채,안채 뚝뚝 떨어지게 짓는 경향으로 바뀐 것이구요.
  • 제비실 2019/08/04 17:27 #

    성랑은 전투 공학적으로 그 용도에서 운제 사다리 같은 공성장비를 이용하는 적병들의 성내 진입하는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어 성안의 수비병들이 적은 숫자로 효과적으로 진입 적병을 방어하는 이점을 가질뿐만 아니라 진입 적병들의 수를 축소시키고 시간을 지연시키게 만드는 이점이 있습니다

    당시 공성전에 쓰이는 공성장비들은 성벽을 파괴하는 위주이기 보다는
    성안 진입을 위주로 장비들이 많은 터라 성랑은 이런 공성전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여
    존재한 방어시설물이고 화기의 발달로 성랑의 용도들이 감소되어 갔던 것이지요
  • 역사관심 2019/08/05 06:58 #

    말씀하신 효과를 분명 본 것 같습니다. 몽골군도 일단 성랑 50칸 부터 무너뜨리고 공성전을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확실히 17세기초부터 화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말씀하신 맥락과 같은 듯 합니다.

    어쩌면 고려시대의 저 952칸 성랑과 북한산성의 유적으로 남은 143군데에 성랑의 형태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원래는 주욱 이어서 진짜 장랑처럼 만들던 것을, 후기에는 꼭 필요한 (성벽이 낮은 곳위주로) 군데군데 설치한 느낌이 들거든요. 제 1성랑, 2성랑하는 식으로 후기에는 구분한 기록과, 고려조는 그냥 500칸이라고 일괄표기한 것이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책사풍후미나모토 2019/08/06 18:36 #

    성랑이 혹시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그 한양성곽마다 궁가弓家 7천개가 있다는 그거일까요
  • 역사관심 2019/08/07 23:28 #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언제 다시 살펴봐야겠군요. 어쩌면 글자 그대로 (그리고 일부기록으로) 궁가라는 것은 병사들이 숨어서 활을 쏘는 곳이니, 위의 성랑중 특별한 부분을 (활로 공격용) 궁가라고 지칭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수 있겠습니다.

    동성(直洞城) 군 서쪽 40리에 있다. 정덕(正德) 병인년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천 척, 높이 18척 궁가(弓家)가 1백 30이고, 성안에 한 개의 우물이 있다 [신증]
  • 동두철액 2019/08/07 16:27 #

    성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복원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에 대한 이미지가 바뀔 수 있겠군요.
  • 역사관심 2019/08/07 23:27 #

    네, 일단 외양에서도 성가퀴위쪽으로(혹은 뒤쪽으로) 목재건축이 주욱 들어서니, 일단 공성전의 이미지가 굉장히 강해질 듯 합니다. 연구가 좀 더 활발하면 좋겠습니다.
  • 이글루스 알리미 2019/08/30 08:02 #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08월 30일 줌(http://zum.com) 메인의 [컬처]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zum 메인 페이지 > 뉴스 하단의 컬처탭에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역사관심 2019/08/30 10:44 #

    감사합니다~.
  • 한라온 2020/05/27 23:15 #

    해당 숭례문 구간으로 보이는 사진이 하나 더 나오는데 1904년의 사진이라 성랑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해당 부분에 또 다른 모습의 건물이 보이길래 가져왔습니다.

    http://m.blog.daum.net/brave.men/668

    해당 링크 글의 맨 마지막 사진입니다.


    https://www.instiz.net/pt/5325387

    여기 숭례문 사진을 모아둔 곳도 있네요.

    거리상으로 대충 어림해볼 때 지금의 남산 오피스텔 근처가 아닐까...생각이 드네요.
  • 역사관심 2020/06/01 01:44 #

    깨끗한 사진이 인상적입니다. 좋은 정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찬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 한라온 2021/02/05 08:55 #

    성랑은 그럼 종묘 악공청과 같이 전후가 뚫린 모양이었을까요, 아니면 성 내부 혹은 외부를 향하는 한 방향만 뚫린 모양이었을까요? 현재 게임으로 조선 후기 진성을 창작 제작하고 있는데 성랑을 넣을 예정입니다.
  • 역사관심 2021/02/09 05:57 #

    한라온님 안녕하세요,

    사실 성랑 (특히 고려대)의 외형에 대한 연구자체가 아직 일천한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개인적으로 추측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기록으로나마 이 정도로 추측한 글은 있습니다
    http://luckcrow.egloos.com/2662415

    일단, 한라온님의 게임방향에 맞는 쪽으로 제작해보시고, 추후 업데이트가 가능하면 하면 어떨까 합니다. 도움이 못되어 죄송합니다.
  • 한라온 2021/02/09 08:05 #

    아, 제가 현재 만들고 있는 산성은 조선후기 양식입니다 ㅎㅎ
    연구가 아직 부진하다니..아쉽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역사관심 2021/02/09 08:19 #

    그러시군요.
    조선후기양식이면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참고할 건축이 꽤 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작품이 완성되면 보고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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